너희가 믿었느냐? (요6:60-63)
본문
요한복음 6장이 오병이어의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결론은 우리가 상상 하지 못한 방향으로 맺어집니다. 우리는 보통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고 열 두 광주리나 남았다는 이 기록을 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능력의 주님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제나 우선적으로는 영적인 문제에 한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 서 이 영적인 문제와 육적인 문제를 제대로 구별되지 않아서 야기되는 일만큼 심각 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는 영적인 양식을 먹이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육적 양식을 먹이기 위하여 존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분명히 영적 양식을 위하여 믿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육적 양식 쪽으로 자연스럽게 물들어가고 있다는 데에 기독교 신앙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본론> 요6:6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 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물 러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26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기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라왔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과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기에 많은 사람들이 물러가고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않는 결과가 되었는지를 살펴보 시겠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였으며, 사람들은 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문제에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했었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그가 왕이 되면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요구하는 것과 예수님게서 이 제 하려고 하는 것 사이에는 너무나 큰 간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 사건 후 무리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배에 태워 서둘러 바다를 건너가게 하시고 자신은 홀로 산으로 올라 가셨 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아마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주무시 러 갔다고 생각하고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릅니다. 무리들이 다음날 아 침에 와보니까 예수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었습니다. 해변에 있던 배조차 없었 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간 것이 틀림이 없다고 여기며 열심을 다해 예수님의 뒤를 쫓아 왔습니다.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하고 무리들이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 짖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들의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그 이후에 나오는 싸움들이 요한복음 6장에 길게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내가 너희를 살리기 위하여 피와 살을 주려고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양식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이제 그들은 쉽게 그것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아직 모르는구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 능하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그들은 다시, '아니 저희들이 그 생명의 양식을 위하여 왔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니다,너희는 떡 때문에 왔지 생명과 진리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죽으러 왔고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과는 다른 예수님의 말씀에 다 도망을 간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우리가 기억해야 할 몇가지 수군거림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 나는 41절에 나오는 수군거림입니다.
요6:41-42절에 나타난 수군거림입니다.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 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 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이런 수군거림이 52절에도 있습니다.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하여 능히 제 살을 주어 먹게 하겠느냐"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60절에서;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여기서 등장하는 제자들은 열 두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제자들 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부르신 열 두 제자가 있었고, 쫓아와서 자신들이 제자가 되기를 자청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청해서 제자가 되고자 했던 사람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다 도망을 갔습니다. 바로 여기가 문제입니다. 어 찌하여 그렇게 많이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을 까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의도하셨을까요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왜 제자들이 수군거리며, 사람들이 수순거리는가 하는 문제부터 살펴보겠 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의 사건을 던져 놓고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있 어서, 사도 요한이 왜 이 수군거린다는 기록을 여러 번 삽입시켰는가 하는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와 타종교의 가장 큰 차이는 이것입니다. 타종교는 인간이 자기로부터 어떤 도를 깨우 치며 어떤 진리를 얻고 승화시켜 나가는 것으로 종교를 정의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 스스로는 무었을 하든지 희망이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종교라는 것이 그 차이점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 중에서 '내가 바로 너희 죄를 씻기 위하여 내 피와 살을 주려고 온 자라'는 설명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인간 스스로로 부터는 도무지 그 어떤 것도 출발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대목에서 사람들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요구는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하도록 가르쳐 주어서 그것으로 부터 우리가 어떤 도나, 법칙이나, 진리를 갖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언하기 를 너희들에게 그런 것을 해 주어 봤자 너희는 전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부터 우리 인간이란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빛이 세상에 왔으되 모든 사람들이 영적 장님들이라 보 지 못하는고로 어두움을 더 좋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 게 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는 내용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 3장은 무었입니까 니고데모 이야기입니다. 종교적 차원으로나 지식적인 차원에서 인생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대표적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선언하기를 " 신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님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니고데모에게 어떤 도를 깨우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 으로는 어떤 것도 희망이 없으니 너는 거듭나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갖고 있는 종교, 힘, 도덕성, 그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한 길 거듭나는 길 밖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5장은 무슨 기록입니까 38년된 병자의 사건입니다. 베데스다 못에는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물이 동할 때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는 고침 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병자는 꼼짝 달삭하기 어려운 중풍병자입니다. 눈 앞에 물 이 동하여도 제일 먼저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여기서 38년 된 병자라는 것은 오 랜 병자라기 보다는 38년동안이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도를 했지만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의 지적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기독교의 도를 준다고 해도 그것을 성취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볼 눈도 없다느 말입니다. 이 부분 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밤낮으로 싸워야 하셨던 부분입니다. '너희는 희망이 없다, 내가 대신 죽어 주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 니, 사람들은 매일 반발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결국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십니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그 싸움으로 인해 잡히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를 구원하는 데에는 그 방법 밖에는 없으므로 예수님 께서 친히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 와서는 사람들이 '그 말이 어렵다!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하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시원한 해 답을 주시기보다 오히려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6:65절을 보시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성도 여러분, 이제 기독교가 무었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도를 깨닫는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생활에 필요한 떡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 아 닙니다. 물론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유명하다는 곳을 다 다녀 보았지만 효험이 없었다가 우연히 한 신자의 말을 듣고 '어차피 죽은 목숨, 기도원에나 가 보자!'하여 기도원에 갔다 가 안수받고 그 불치병이 나았습니다. 그 나음을 입은 자가 그것을 계기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신령한 일에 입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6장 이야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한 생명을 부르시는 방법이 얼마나 여러 가지가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대목이 아닙니다. 여기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신 것은 생명의 떡을 줄 자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구별하라는 뜻으로 나타내신 것이지, 떡 먹는 재미로 주님께 나오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즉, 우리가 교회에 나아오는 것은 생명의 떡 때문입니다. 육신의 떡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혼동하는 이유는 우리는 분명히 생명의 떡 때문에 모였는데 어떤 교회는 육신의 떡도 풍성히 주고 모든 병도 순식간에 낫는다고 하니,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불치병이 낫는데 나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무슨 왕으로 삼고 있는지를 살펴보 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63절을 보십시오. "살리는 것은 영이니 뉵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은 왕으로 삼으려고 할 때에 도망을 가신 분이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것 입니다. '내가 너희를 가르치려 하고, 너희에게 깨우치게 하려고 하고, 주려고 하는 것은 영에 관한 싸움이요 생명에 관한 싸움, 즉 영원에 관한 싸움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짧은 인생에 있어서 짓밟히고 찢기는 한이 있어도 영원을 준비하겠다는 그 결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의 자세는 뒤집혀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것 이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차라리 안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유혹이며 시험입니다. 어떤 교회에 나가면 경제적인 보장을 해주는 곳도 있습니다. 십일조를 내면 꼭 채 워 주신다고 말하고 사실 그렇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해 서 나가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출발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그러나, 떡을 찾아 왔던 수 많은 무리들은 다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는 12 제자들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떠나간 무리들과 남은 제자들과 의 차이가 무었입이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다 도망간 후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6:67-68절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 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바로 이렇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밀물 같이 몰려왔다가 도망간 자들은 떡을 찾아 서 왔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생명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남아 있 었던 것입니다. 결코 기적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으로 인해 시작이 되었습니 까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신앙이 지속괴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서도 무척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축복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 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눅4:16-24절을 찾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님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 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 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 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 였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귀 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가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참으로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6장 뒷부분은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나사렛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나사엣에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펴시 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인류 를 위하여 구속자를 보내주실 것을 예언하신 부분을 읽으시고는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그라'하시고 이렇게 반문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틀림없이 나에게 '메시 야인 것을 확인하라'고 요구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의 표현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의원아 너를 고치라'는 속담을 인용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점장이가 다른 사람의 길흉화복을 보아 주면서도 자기의 앞날을 모른 다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런 의미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정말 메시야라면, 하늘나라의 축복을 전하러 온 자라면 왜 당신은 그 꼴을 하고 다니며, 왜 우리나라가 이렇습니까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하여 무슨 반론을 제기하시느냐 하면 이것은 영에 관한 문제이 기 때문에 육에 관한 것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는 '정말 당신이 메시야라면 로마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오 '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란 예수를 믿는 즉시 집안이 평안해지고, 하는 사업마다 잘되고, 병들지도 않는 그런 문제가 걸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영에 속한 싸움입니다. 거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을 받 은 적이 있느냐'
눅4:25-27절을 보십시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 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그러면, 왜 이 예를 들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종 종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것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스 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선민이라는 것은 그 백성에게 어떤 특권이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말씀도 하시고 선지자도 보내시 고 율법도 주시는 등 다른 민족과는 달리 많은 특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백성들이 도를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 왔느냐 하면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지금 부터 살펴 보려고 하는 이 주 예를 보면 그것이 확인됩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가문이 들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 었으나 엘리야기 가 있던 집에는 먹을 것이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가 있던 집에는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았고,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기 있었던 사렙다 과부의 집에는 엘리야 덕분에 식량이 떨어지지 아 니하므로 그 과부도 굶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도 과부는 많은데 왜 하필이면 이방 땅인 시돈 땅의 과부가 선택을 받았습니까 이왕이면 선민 중의 한 사람인 이스라엘 백성이 혜택을 받는 것이 더 나을 텐데 왜 이방인 과부가 받 았는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무었을 지적하고 싶으시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줬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과연 항복하고 따라오느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엘리사는 문둥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있는 문등병자를 고쳤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누가 고침을 받았습니까 이스라엘의 최대의 적국인 아람 사람의 군대 장관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살려 주는 것보다 죽 게 내버려 두는 편이 애국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을 따로 떼어 놓고서 이러한 사건들을 제시함으로써 우리에게 무었을 나타내려는 것입니까 그것은 구원이 은혜 에 속한 문제이지 인간 스스로의 갈망이나 노력으로 깨우치는 자가 전혀 없다는 것 것을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징을 강력하게 돗보이게 하기 위하여 엑스트라로 선택받은 백성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란 끊임없이 깨우칠 수 있는 도를 달라고 요구할뿐이지, '내가 마 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오니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구하지를 않는 족속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확인시키고자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쓴 말입니까 '너희도 내가 몸을 찢고 피흘려 죄 값을 치러 주어야 할 죄인들이다!'라는 이야기 이지 너희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여 예외적인 특별한 족속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이까
눅4:28-30절을 이어서 보시겠습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 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이 정도면 그 반응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같은 반대와 미움을 무릎쓰고서라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자 한 말씀이 무었이었는 지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스데반이 왜 죽었습니까 사도행전 7장을 보면 2절에서 스데반이 설교를 합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 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렇게 이야기 하다가 어디까지 오느냐 하면 51-53절을 보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하지 아 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 였도다"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 조상 중에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도를 즐은 적이 있으며, 그것을 지키라고 보낸 하나님의 종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영접한 적이 있느냐 언제나 잡아 죽이지 않았느냐 죽이다 죽이다 선지자 뿐만 아니라 나중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까지 죽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무었을 증명하려는 것입니까 선지자들과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란 도대체 어떠한 족속이냐 하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에 그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도를 주면 받아서 깨우쳐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는 망상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그 망상을 버리고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것을 확인하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촉하고 외쳤을 때에 무리들의 반응들이 어떠했습니까
행 54-56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 반이 성령님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스데반의 말을 듣고 회개한 것이 아니라, 돌로 스데반을 쳐 죽였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이닐수 없습니다. 스데반의 말을 들은 청중은 스데반의 말이 틀렸다고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는데,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자기 편에서서 하늘을 열어 주시 므로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자 무리들은 스데반이 한 질문과 지적에 대하여서는 이를 갈면서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편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선 택한 방법이 스데반을 스스로 속이는 자로 간주하고 하나님은 자기네들 편이라는 것을 고집하고 옳다는 것을 우기기 위하여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짓을 했다고 돌로 쳐 죽인 스데 반을 하나님께서 도리어 옳다고 영접하였다면, 도대체 하나님이 누구의 편입니까 누가 과연 옳습니까 목소리 큰 자가 옳고 힘과 세력이 있다고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6장의 지적이 바로 이러한 지적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주님께 왔습니다. 65절을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올 수 없다 하였노라"
<결론>
우리가 왜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목하사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사람을 위하여 네 피를 흘려다오!'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감격할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붙잡은 바 되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렐루야! 이 축복보다 더 큰 축복이 없으며, 이 특권보다 더 큰 특권이 없 음을 결코 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잠시 동안 사는 인생 속에서 강건하면 80인데 그것도 이미 지나가 버린 세월이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어떤 속에서 지나가든지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지 나가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나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 며 그 나라에서 누릴 복을 생각한다면, 이 짧은 인생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는 셈입니다. 복음이 무었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런 이유없이 나를 붙잡으사 이 자리에 앉아 있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으며 담대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빼앗길 것이 무었이 있으며, 안타까울 게 무었이며, 부러울 것 이 무었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좀 찢기고 밟히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자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내게 준 자 들이니라' 그 선언을 확인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이 기쁨과 감격 속에서 참된 삶을 누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요구하는 것과 예수님게서 이 제 하려고 하는 것 사이에는 너무나 큰 간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 사건 후 무리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배에 태워 서둘러 바다를 건너가게 하시고 자신은 홀로 산으로 올라 가셨 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아마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주무시 러 갔다고 생각하고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릅니다. 무리들이 다음날 아 침에 와보니까 예수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었습니다. 해변에 있던 배조차 없었 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간 것이 틀림이 없다고 여기며 열심을 다해 예수님의 뒤를 쫓아 왔습니다.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하고 무리들이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 짖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들의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그 이후에 나오는 싸움들이 요한복음 6장에 길게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내가 너희를 살리기 위하여 피와 살을 주려고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양식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이제 그들은 쉽게 그것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아직 모르는구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 능하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그들은 다시, '아니 저희들이 그 생명의 양식을 위하여 왔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니다,너희는 떡 때문에 왔지 생명과 진리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죽으러 왔고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과는 다른 예수님의 말씀에 다 도망을 간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우리가 기억해야 할 몇가지 수군거림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 나는 41절에 나오는 수군거림입니다.
요6:41-42절에 나타난 수군거림입니다.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 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 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이런 수군거림이 52절에도 있습니다.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하여 능히 제 살을 주어 먹게 하겠느냐"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60절에서;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여기서 등장하는 제자들은 열 두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제자들 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부르신 열 두 제자가 있었고, 쫓아와서 자신들이 제자가 되기를 자청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청해서 제자가 되고자 했던 사람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다 도망을 갔습니다. 바로 여기가 문제입니다. 어 찌하여 그렇게 많이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을 까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의도하셨을까요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왜 제자들이 수군거리며, 사람들이 수순거리는가 하는 문제부터 살펴보겠 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의 사건을 던져 놓고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있 어서, 사도 요한이 왜 이 수군거린다는 기록을 여러 번 삽입시켰는가 하는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와 타종교의 가장 큰 차이는 이것입니다. 타종교는 인간이 자기로부터 어떤 도를 깨우 치며 어떤 진리를 얻고 승화시켜 나가는 것으로 종교를 정의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 스스로는 무었을 하든지 희망이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종교라는 것이 그 차이점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 중에서 '내가 바로 너희 죄를 씻기 위하여 내 피와 살을 주려고 온 자라'는 설명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인간 스스로로 부터는 도무지 그 어떤 것도 출발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대목에서 사람들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요구는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하도록 가르쳐 주어서 그것으로 부터 우리가 어떤 도나, 법칙이나, 진리를 갖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언하기 를 너희들에게 그런 것을 해 주어 봤자 너희는 전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부터 우리 인간이란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빛이 세상에 왔으되 모든 사람들이 영적 장님들이라 보 지 못하는고로 어두움을 더 좋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 게 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는 내용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 3장은 무었입니까 니고데모 이야기입니다. 종교적 차원으로나 지식적인 차원에서 인생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대표적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선언하기를 " 신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님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니고데모에게 어떤 도를 깨우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 으로는 어떤 것도 희망이 없으니 너는 거듭나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갖고 있는 종교, 힘, 도덕성, 그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한 길 거듭나는 길 밖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5장은 무슨 기록입니까 38년된 병자의 사건입니다. 베데스다 못에는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물이 동할 때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는 고침 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병자는 꼼짝 달삭하기 어려운 중풍병자입니다. 눈 앞에 물 이 동하여도 제일 먼저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여기서 38년 된 병자라는 것은 오 랜 병자라기 보다는 38년동안이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도를 했지만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의 지적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기독교의 도를 준다고 해도 그것을 성취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볼 눈도 없다느 말입니다. 이 부분 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밤낮으로 싸워야 하셨던 부분입니다. '너희는 희망이 없다, 내가 대신 죽어 주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 니, 사람들은 매일 반발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결국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십니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그 싸움으로 인해 잡히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를 구원하는 데에는 그 방법 밖에는 없으므로 예수님 께서 친히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 와서는 사람들이 '그 말이 어렵다!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하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시원한 해 답을 주시기보다 오히려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6:65절을 보시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성도 여러분, 이제 기독교가 무었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도를 깨닫는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생활에 필요한 떡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 아 닙니다. 물론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유명하다는 곳을 다 다녀 보았지만 효험이 없었다가 우연히 한 신자의 말을 듣고 '어차피 죽은 목숨, 기도원에나 가 보자!'하여 기도원에 갔다 가 안수받고 그 불치병이 나았습니다. 그 나음을 입은 자가 그것을 계기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신령한 일에 입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6장 이야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한 생명을 부르시는 방법이 얼마나 여러 가지가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대목이 아닙니다. 여기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신 것은 생명의 떡을 줄 자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구별하라는 뜻으로 나타내신 것이지, 떡 먹는 재미로 주님께 나오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즉, 우리가 교회에 나아오는 것은 생명의 떡 때문입니다. 육신의 떡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혼동하는 이유는 우리는 분명히 생명의 떡 때문에 모였는데 어떤 교회는 육신의 떡도 풍성히 주고 모든 병도 순식간에 낫는다고 하니,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불치병이 낫는데 나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무슨 왕으로 삼고 있는지를 살펴보 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63절을 보십시오. "살리는 것은 영이니 뉵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은 왕으로 삼으려고 할 때에 도망을 가신 분이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것 입니다. '내가 너희를 가르치려 하고, 너희에게 깨우치게 하려고 하고, 주려고 하는 것은 영에 관한 싸움이요 생명에 관한 싸움, 즉 영원에 관한 싸움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짧은 인생에 있어서 짓밟히고 찢기는 한이 있어도 영원을 준비하겠다는 그 결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의 자세는 뒤집혀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것 이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차라리 안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유혹이며 시험입니다. 어떤 교회에 나가면 경제적인 보장을 해주는 곳도 있습니다. 십일조를 내면 꼭 채 워 주신다고 말하고 사실 그렇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해 서 나가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출발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그러나, 떡을 찾아 왔던 수 많은 무리들은 다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는 12 제자들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떠나간 무리들과 남은 제자들과 의 차이가 무었입이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다 도망간 후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6:67-68절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 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바로 이렇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밀물 같이 몰려왔다가 도망간 자들은 떡을 찾아 서 왔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생명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남아 있 었던 것입니다. 결코 기적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으로 인해 시작이 되었습니 까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신앙이 지속괴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서도 무척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축복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 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눅4:16-24절을 찾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님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 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 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 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 였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귀 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가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참으로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6장 뒷부분은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나사렛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나사엣에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펴시 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인류 를 위하여 구속자를 보내주실 것을 예언하신 부분을 읽으시고는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그라'하시고 이렇게 반문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틀림없이 나에게 '메시 야인 것을 확인하라'고 요구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의 표현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의원아 너를 고치라'는 속담을 인용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점장이가 다른 사람의 길흉화복을 보아 주면서도 자기의 앞날을 모른 다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런 의미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정말 메시야라면, 하늘나라의 축복을 전하러 온 자라면 왜 당신은 그 꼴을 하고 다니며, 왜 우리나라가 이렇습니까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하여 무슨 반론을 제기하시느냐 하면 이것은 영에 관한 문제이 기 때문에 육에 관한 것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는 '정말 당신이 메시야라면 로마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오 '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란 예수를 믿는 즉시 집안이 평안해지고, 하는 사업마다 잘되고, 병들지도 않는 그런 문제가 걸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영에 속한 싸움입니다. 거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을 받 은 적이 있느냐'
눅4:25-27절을 보십시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 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그러면, 왜 이 예를 들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종 종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것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스 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선민이라는 것은 그 백성에게 어떤 특권이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말씀도 하시고 선지자도 보내시 고 율법도 주시는 등 다른 민족과는 달리 많은 특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백성들이 도를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 왔느냐 하면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지금 부터 살펴 보려고 하는 이 주 예를 보면 그것이 확인됩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가문이 들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 었으나 엘리야기 가 있던 집에는 먹을 것이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가 있던 집에는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았고,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기 있었던 사렙다 과부의 집에는 엘리야 덕분에 식량이 떨어지지 아 니하므로 그 과부도 굶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도 과부는 많은데 왜 하필이면 이방 땅인 시돈 땅의 과부가 선택을 받았습니까 이왕이면 선민 중의 한 사람인 이스라엘 백성이 혜택을 받는 것이 더 나을 텐데 왜 이방인 과부가 받 았는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무었을 지적하고 싶으시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줬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과연 항복하고 따라오느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엘리사는 문둥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있는 문등병자를 고쳤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누가 고침을 받았습니까 이스라엘의 최대의 적국인 아람 사람의 군대 장관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살려 주는 것보다 죽 게 내버려 두는 편이 애국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을 따로 떼어 놓고서 이러한 사건들을 제시함으로써 우리에게 무었을 나타내려는 것입니까 그것은 구원이 은혜 에 속한 문제이지 인간 스스로의 갈망이나 노력으로 깨우치는 자가 전혀 없다는 것 것을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징을 강력하게 돗보이게 하기 위하여 엑스트라로 선택받은 백성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란 끊임없이 깨우칠 수 있는 도를 달라고 요구할뿐이지, '내가 마 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오니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구하지를 않는 족속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확인시키고자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쓴 말입니까 '너희도 내가 몸을 찢고 피흘려 죄 값을 치러 주어야 할 죄인들이다!'라는 이야기 이지 너희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여 예외적인 특별한 족속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이까
눅4:28-30절을 이어서 보시겠습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 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이 정도면 그 반응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같은 반대와 미움을 무릎쓰고서라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자 한 말씀이 무었이었는 지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스데반이 왜 죽었습니까 사도행전 7장을 보면 2절에서 스데반이 설교를 합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 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렇게 이야기 하다가 어디까지 오느냐 하면 51-53절을 보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하지 아 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 였도다"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 조상 중에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도를 즐은 적이 있으며, 그것을 지키라고 보낸 하나님의 종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영접한 적이 있느냐 언제나 잡아 죽이지 않았느냐 죽이다 죽이다 선지자 뿐만 아니라 나중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까지 죽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무었을 증명하려는 것입니까 선지자들과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란 도대체 어떠한 족속이냐 하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에 그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도를 주면 받아서 깨우쳐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는 망상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그 망상을 버리고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것을 확인하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촉하고 외쳤을 때에 무리들의 반응들이 어떠했습니까
행 54-56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 반이 성령님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스데반의 말을 듣고 회개한 것이 아니라, 돌로 스데반을 쳐 죽였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이닐수 없습니다. 스데반의 말을 들은 청중은 스데반의 말이 틀렸다고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는데,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자기 편에서서 하늘을 열어 주시 므로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자 무리들은 스데반이 한 질문과 지적에 대하여서는 이를 갈면서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편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선 택한 방법이 스데반을 스스로 속이는 자로 간주하고 하나님은 자기네들 편이라는 것을 고집하고 옳다는 것을 우기기 위하여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짓을 했다고 돌로 쳐 죽인 스데 반을 하나님께서 도리어 옳다고 영접하였다면, 도대체 하나님이 누구의 편입니까 누가 과연 옳습니까 목소리 큰 자가 옳고 힘과 세력이 있다고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6장의 지적이 바로 이러한 지적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주님께 왔습니다. 65절을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올 수 없다 하였노라"
<결론>
우리가 왜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목하사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사람을 위하여 네 피를 흘려다오!'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감격할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붙잡은 바 되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렐루야! 이 축복보다 더 큰 축복이 없으며, 이 특권보다 더 큰 특권이 없 음을 결코 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잠시 동안 사는 인생 속에서 강건하면 80인데 그것도 이미 지나가 버린 세월이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어떤 속에서 지나가든지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지 나가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나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 며 그 나라에서 누릴 복을 생각한다면, 이 짧은 인생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는 셈입니다. 복음이 무었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런 이유없이 나를 붙잡으사 이 자리에 앉아 있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으며 담대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빼앗길 것이 무었이 있으며, 안타까울 게 무었이며, 부러울 것 이 무었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좀 찢기고 밟히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자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내게 준 자 들이니라' 그 선언을 확인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이 기쁨과 감격 속에서 참된 삶을 누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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