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자신을 확증하라 (고전13:5)
본문
반갑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입니다. 현대를 정의한다면 사람에 따라서 그것을 정리하고 규정하는 것이 다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해서 현대를 규정한다면, "자기 독립성과 자기 확실성이 없는 시대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고, 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다시 말하면 그 정체를 확증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생각해 보면 회의적입니다. 그 확증과 그 정체의 상대성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불화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헬라어로 믿음이라고 하는 말을 휘스토스라고 하는 말인데, 그 말은 보편적으로 성실함, 근면함, 진실함, 부지런함, 믿을 만함, 그런 단어와 동의어로 적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동시에 누구에게서든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은 그 사람의 인격에 통일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내 자신을 '나는 이렇다'하고 분명하게, '내 색깔은 이런 색깔이다'라고 확실하게, '내 정체는 이런 것이다'라고 확증해 주지 못하고 또 확증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내 스스로 내 자신을 시험해 보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확립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늘 O, X로 시험을 보고나 4개 중에 하나를 고르는 형식으로 시험을 보기 때문에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경험이 적습니다. 그런 영향에서 그런지 자기 자신을 시험하는 일을 진지하게 해본 경험이 많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내 인격 속에 리트머스 실험지를 넣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산서인지, 알카리성인지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철학자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누구의 힘에 의해서 이 지구촌에 던져진 존재, "피투(彼投)된 존재(存在)'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실존을 '피투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자로 던져짐을 받은 존재, 그래서 피투성인 우리 인간은 피투성이가 되도록 서로 싸우고 짓밟으며 살아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어느 학생이 강의 시간에 늦을 새라. 가방을 옆에 끼고 묵직한 워커를 신고, 물들인 작업복을 입고 헐떡이면서 강의실을 향해 뛰어 가고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그에게, "너 어디를 그렇게 달려가니강의에 늦지 않으려고, 강의실로 가는 중이예요.강의실에 간 다음에 어디로 가니어리루요.그 다음에 어디로 가니그 다음에 어디요.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니" . "결국 네가 가고 있는 곳은 어디냐그러다가 죽겠지요.죽은 다음에는 어디로 가니죽어보지 못해서 모르죠.죽으면 알 것 같애" 그것으로 대화는 그쳤습니다.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까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는 대관절 무엇인가 인간학을 연구한 어느 교수님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양파와 같다." 이렇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양파의 껍질을 처음부터 벗기고, 벗기고, 또 벗기고, 벗긴 껍질 내던지고 다시 벗겨봐야 자꾸 양파 껍질만 나오고, 나중에 알맹이도 없고, 핵도 없는, 그런 양파인 것처럼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내가 무엇이냐,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껍데기를 벗기고 표피를 없애 버리고 무엇인가 그 속에 있을 것같아 찾아보지마는 남는 것은 결국 흙으로 돌아 갈 뿐입니다. 그러나 그 양파에도 사람의 눈물을 내게 하는 보이지 아니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양파입니다. 양파가 그렇듯이 사람도 결국 흙으로 돌아갈 뿐이지마는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분명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적어도 우리는 자기 자신을 시험해 보고, 자기 자신을 확증,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존재는 되어야 하지 아니하냐, 그 말씀이올시다. 논리학에서는 자기 확증, 혹은 자기가 이렇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는 논리의 원리를 동일률(同一率)이라고 합니다. 요즈음 바로 어떤 시대인가 하면 `아이덴터티 크라이시스(Identity Crisis)' 자기 정체의 위기, 자기 통전성의 위기, 자기 동일성을 정확하게 진실하게 나타낼 수 없는 그런 위기에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자기 동일성을 `나는 나다.' 하는 형식으로 펴 나가는 논리. `A는 A다', `사범대학생은 사범대학생이다.' 그것이 동일률인데, 동일률의 정의는 모든 사물은 그 자체가 동일하다. 네 자신을 확증하라. 너는 누구냐 나는 나다 라고 사고하는 경향입니다. 그러나 자기 동일성을 표현하는 동일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서 자기 자신을 시험해 보고, 네 자신을 확증해 보라고 하면 적어도 "5는 5다. 3은 3이다." 하는 어떤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서 이렇게 말할 수는 없겠는가 "3은 3이다." 라고 하기보다는 "3은 9 3이다.3은 1+2다." 하는 그런 형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때 3이라고 하는 힘과 3X1이든, 6-3이든, 9 3이든, 그 오른쪽항은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동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동의어적인 자기 동일성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나는 적어도 무엇이다라는 명사가 되었건, 형용사가 되었건, 거기에 보어의 성격을 가질 말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한번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 자신을 확증할 때 어려움이 있는데, 그것은 흑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나를 흙이라고 확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확증하는 것에 대해 거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 내 자신은 흙으로 구성되어 있고 썩어지면 흙으로 돌아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내 자신을 흙이라고만 규정짓고 확증한다면 너무나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나는 흙, 그것 뿐인가 결코 그것 뿐이라고 대답할 사람은 하나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사람을 창조할 때, 흙이라고 하는 육체의 요소와 더불어 거기에 영적인 요소를 더하여 줌으로써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흙의 요소에 대해 그 의미를 말하지만 짐승이나 금수, 조류, 곤충이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먼지나 땅바닥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만 있는 영적인 요소 그것이 사람의 성스러움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신 것 그 생기는 히브리어로 루하흐 헬라어로는 퓨뉴마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냥 입김, 공기, 바람이라고 하는 그런 뜻이 있지만 성령님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흙이라는 요소에다 성령님을 불어 넣어 주심으로 사람을 호흡하게 되고, 생각하고 되고, 느끼게 되고, 움직이게 되고, 동맥과 정맥에 피가 흐르게 되고, 심장은 고동하게 되고, 깊이 생각할 뿐 아니라 지, 정, 의 인격이 형성됐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났습니까 에덴 동산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처럼 똑같이 영적인 존재, 하나님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태어났습니까 아닙니다. 창세기 5장 3절에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낳은 세번째 아들 이름을 셋이라고 합니다. 셋은 분명히 창세기 5장 3절에 아담의 모양,둘째는 아담의 형상을 업고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의 후손, 아담의 후손, 가인의 후예들, 여자의 몸에서 난 모든 인간은 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자 스펜서는 말하기를 "사람은 잘못 태어난, miss-born된 존재다."라고 하였습니다. 잘못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품성이 바르지 못하고 의롭지 못하고 불행을 초래하며 살아 갑니다. 그래서 인생은 잘못 태어난 생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reborn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거듭난다' 하나자로는 '중생한다'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없어지고 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나고, 사람의 인격, 죄된 인격으로 불의한 인격으로 태어난 우리들이 거듭나면 어떻게 되느냐. 세번째는 그리스도의 형상, 예수의 형상, 그것을 본받아 살게끔 하기 위해서 로마서 8장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롭다 인정하시고, 영화롭게 하실려고, 우리를 부르시고 예정하시고 예지중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흑의 요소가 아니라 내속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이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속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것을 알지 못하면 너희들은 버린 자식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인간은 진토, 먼지와 같고 흙과 같은 존재이지마는 그것으로 형성되어진 질그릇과 같은 것이지만 이 질그릇에 우리는 보배를 담고 있습니다. 그 보배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것이지요. 기름을 담으면 기름그릇, 술을 담으면 술그릇, 물을 담으면 물그릇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을 담으면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너희 속에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알지 않느냐" 그것이 너희 정체를 말해 주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리스도의 영을 그 속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중심이 될 때 이 질그릇은 영적인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그리스도가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아니하면 버린 교회다. 너희 단체와 그룹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알지 못하면 그 단체와 그 그룹과 그 팀은 죽은 것이다. 버린 것이다.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핵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기화학에서 유기물질은 다 유기적인 관계를 가집니다. 이 유기성은 생명성입니다. 유기물질은 무기물질과는 달라서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령 CH4가 있는데 C가 2개 될 때 H는 6개로 C2H6,C가 3개 될 때 H는 8개로 C3H8, 이렇게 유기적인 관계를 가집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에 의해서 그 말을 해석하면 CH4나 C2H6, C3H8나 유기화학물의 구조식은 항상 그 중심에 C가 있고 동서남북 상하좌우에 H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바라 볼 때마다 이 유기물질의 유기적인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C(Christ)를 중심으로 한 네 개의 H(Human) 그것이 있으므로 유기적인 존재가 된다. 그래서 메탄이 에탄이 되고, 에탄이 프로판이 되고, 펜탄이 되고 하는 장성과 성장과 번식이 되고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과 우리 학교와 우리 교회에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이 그분 때문에 우리의 동일성이 확증되어 지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화합물입니다. 화합물을 분자들의 모임입니다. 분자는 원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그 화합물을 어떤 분자로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그 화합물의 전체성, 동질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하나의 원자라 할지라도 원자에는 원자의 핵이 있습니다. 그 원자핵이 그 원자다움을 말해줍니다. 원자의 동일성 (정체성)은 그 원자의 핵에 있습니다. 너희 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으므로 네 전체 생명의 핵이 되고 네 질그릇의 핵이 되어 있느냐, 이것이 너를 말해 주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서 너를 확증하라. 여러분들의 마음에 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 인격의 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 삶의 핵이 무엇입니까 핵은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핵은 분열을 일으키는 많은 힘을 그 속에 소유하고 있는데, 그 힘이 폭발하기 전에는 부단한 핵의 운동이 있습니다. 거기에 중성자의 운동이 있습니다. 양자의 운동이 있습니다. 전자의 운동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원자든지 그 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여러분들 속에 무엇이 움직이고 있습니까 무엇이 운동하고 있습니까 그 운동과 그 기능이 보이지 않는 내 정체를 확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중심에 있으므로 나를 확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여러분들의 중심이 되어 있는가 중심이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주변과 원이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원의 둘레가 있습니다. 둘레가 있기 전에 중심이 생기고 중심에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자리 혹은 궤적이 둘러 있습니다.
그러므로써 중심에서의 거리, 중심이 먼저입니다. 중심이 움직이면 원이 움직입니다. 둘레가 움직이게 마련입니다. 중심이 둘이면 보기 싫은 타원형과 같은 모양이 됩니다. 내 중심이 무엇이냐 내 자신을 확증하라. 깊이 생각하고, 시험해 보고, 네 자신을 확증하라. 버트란드 럿셀(Bertrand Russell)은 사색에 있어서만, 깊이 생각함에 있어서만이 인간은 자기 주인이 된다. 사색이 없고 깊이 생각하는 것 없이 행동만 하고, 깊은 사색이 없이 자기 욕망대로만 행하고 살아 가면 그 인간은 환경의 노예일 따름이다. 주변 상황에 의해서만 움직이면 주변 상황의 노예일 따름이다. 주변 환경을 원주, 원둘레라고 한다면 둘레에 따라서 중심이 따라 간다면 노예적이지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됩시다. 어느 누구의 노예도 어떤 환경의 노예도 되지 맙시다. 국가의 노예도 되지 말고, 민주주의의 노예도 되지 말고, 공산주의의 노예도 되지 맙시다. 집권자들의 노예도 되지 말고, 반면에 근로자의 노예도 되지 맙시다. 여당의 노예도 되지 말고, 또 역시 야당의 노예도 되지 맙시다. 무게와 중심이 없는 우리들, 이리 끌고 저리 끌고가는 힘의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나의 나다움, 중심을 향한 나의 확증이 확고히 설 때 누구도 나를 노예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중심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확증하던 물건을 확증하던, 확증에는 반드시 객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윤리학에서는 이 객관성을 그 행위의 판단에 있어서 그 행위를 하게 한 동기가 무엇이냐 motive를 많이 봅니다.둘째는 모티브보다는 결과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그 행위를 판단할 수 있다고 결과론을 주장합니다.셋째는 보이지 않는 동기와 나타나는 행위로서의 경과 그 뿐만 아니라 동기에서부터 결과까지의 전체를, 전 과정을 다 보고 평가를 해야 된다는 종합론입니다. 이것이 객관적인 표준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네 자신을 네가 확증하라 네 자신을 네가 증명하라' 이것은 주관적으로 네 자신을 판단하고 네 자신을 증명하라 그 말씀입니다. 윤리학에서는 사람의 행위와 사람의 품성의 주관적인 판단의 기준은 오직 하나, 그것은 자기 자신의 양심이올시다. 양심만이 나를 확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양심이 객관성 있는 확증을 할 수 있느냐 말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이라고 하는 Consciousness는 Con이라고 하는 일반화, 보편화, 함께, 공히라고 하는 뜻과 더불어서 Sciouse라고 하는 science, 과학성, 학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텔레비젼을 보다가 누구도 말하지 아니하지만 다함께 같은 순간 한숨을 쉴 때가 있습니다. 다함께 울분을 느끼거나 다함께 희열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숨은 양심의 공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을 확증하라. 양심으로 확증하라. 양심은 네 속에 있는 중심이요, 양심은 하나님의 소리요, 양심은 당신의 인격 속에 감추어 둔 블랙박스요, 양심은 하나님이 당신의 인격 속에 감추어 둔 녹음기요, 녹화장치입니다. 그 양심에 들려지고 양심에 비취어진 네 자신으로 너를 확증하라. 이른 아침 예루살렘 성전앞 광장에는 손에 돌을 움켜주고 올라 온 수 많은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눈에 돋보이게 서성대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서기관 부류요, 또 하나는 바리새인의 부류였습니다.
예수님께 한 여자를 끌고 와서 고소를 합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해서 이렇게 돌을 들고 왔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는 모세의 율법에서도 자기 자신의 법에서도 그 여자를 판단할 기준을 찾지 아니했습니다. 허리를 꾸부렸습니다.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습니다. 일어나서 말씀한 마디를 남기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색의 여유를 주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할 시간을 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중심을 향하여서 자기에게로 향할 수 있는 자기 정체를 밝힐 시간을 준 것이었습니다. 자기 정체를 확증할 수 있는 최종 최하의 기준은 '너희들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다 자기 자신을 확증해 보니 그것만은 어길 수가 없어요. 그것을 벗어날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예수님은 재판을 하기 전에 각자가 자기 자신을 확증해 보는 시간을 준 것이올시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다 나갔다."라고 합니다. 양심에 의해서 자기를 확증한 것입니다. 들었던 돌을 놓았고, 힘주었던 어깨, 핏줄이 가득하던 목의 힘이 빠지게 합니다. 내 힘줄에 힘을 싹 빠지게 하는 것은 내 양심의 힘입니다. 내 자신을, 정체성을 발견하였을 때 나는 무가치하고, 나는 제로의 상태에 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수단,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맺을 수 있는 끈이 올시다. 수학에서는 네 자신을 알아라. 네 자신의 자태를 알아라. 네 주제를 알아라. 여러분에게 말한 대로 주제를 좀 알아라. 어디에 있느냐, 수학에서는 X좌표와 Y좌표로 말을 합니다. X좌표는 수평선입니다. Y좌표는 수직선입니다. X좌표를 먼저 쓰고 Y좌표를 쓰는 것이 수학의 좌표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좌표는 Y좌표를 먼저 써야 합니다. 왜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수평을 먼저 봅니까, 수직을 먼저 보지, 건축가가 수평을 먼저 봅니까, 수직을 먼저 보지. 이 대자연의 법칙, 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수직을 먼저 본 다음에 90도 각도를 가진 수평을 보는 것입니다. 네 자신을 확증하라. 네 좌표를 분명히 하라. 하나님과 너의 관계에 있어서 네 좌표가 어디에 있느냐 먼저 그것을 확증하고, 네 친구와 네 부모와 형제와 민족과 교회와의 관계를 확증하라. 깊이 생각하고 양심의 중심을 두고 내 자신을 확증하고 내 좌표를 확증하라. 무나무노 신부는 깊이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친해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친해야 할 친구도 많습니다. 친해야 할 교직원, 교수들도 많습니다.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과 친해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 정체를 진솔하게 나는 이렇다 하고 확증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학생이 강의 시간에 늦을 새라. 가방을 옆에 끼고 묵직한 워커를 신고, 물들인 작업복을 입고 헐떡이면서 강의실을 향해 뛰어 가고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그에게, "너 어디를 그렇게 달려가니강의에 늦지 않으려고, 강의실로 가는 중이예요.강의실에 간 다음에 어디로 가니어리루요.그 다음에 어디로 가니그 다음에 어디요.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니" . "결국 네가 가고 있는 곳은 어디냐그러다가 죽겠지요.죽은 다음에는 어디로 가니죽어보지 못해서 모르죠.죽으면 알 것 같애" 그것으로 대화는 그쳤습니다.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까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는 대관절 무엇인가 인간학을 연구한 어느 교수님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양파와 같다." 이렇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양파의 껍질을 처음부터 벗기고, 벗기고, 또 벗기고, 벗긴 껍질 내던지고 다시 벗겨봐야 자꾸 양파 껍질만 나오고, 나중에 알맹이도 없고, 핵도 없는, 그런 양파인 것처럼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내가 무엇이냐,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껍데기를 벗기고 표피를 없애 버리고 무엇인가 그 속에 있을 것같아 찾아보지마는 남는 것은 결국 흙으로 돌아 갈 뿐입니다. 그러나 그 양파에도 사람의 눈물을 내게 하는 보이지 아니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양파입니다. 양파가 그렇듯이 사람도 결국 흙으로 돌아갈 뿐이지마는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분명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적어도 우리는 자기 자신을 시험해 보고, 자기 자신을 확증,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존재는 되어야 하지 아니하냐, 그 말씀이올시다. 논리학에서는 자기 확증, 혹은 자기가 이렇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는 논리의 원리를 동일률(同一率)이라고 합니다. 요즈음 바로 어떤 시대인가 하면 `아이덴터티 크라이시스(Identity Crisis)' 자기 정체의 위기, 자기 통전성의 위기, 자기 동일성을 정확하게 진실하게 나타낼 수 없는 그런 위기에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자기 동일성을 `나는 나다.' 하는 형식으로 펴 나가는 논리. `A는 A다', `사범대학생은 사범대학생이다.' 그것이 동일률인데, 동일률의 정의는 모든 사물은 그 자체가 동일하다. 네 자신을 확증하라. 너는 누구냐 나는 나다 라고 사고하는 경향입니다. 그러나 자기 동일성을 표현하는 동일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서 자기 자신을 시험해 보고, 네 자신을 확증해 보라고 하면 적어도 "5는 5다. 3은 3이다." 하는 어떤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서 이렇게 말할 수는 없겠는가 "3은 3이다." 라고 하기보다는 "3은 9 3이다.3은 1+2다." 하는 그런 형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때 3이라고 하는 힘과 3X1이든, 6-3이든, 9 3이든, 그 오른쪽항은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동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동의어적인 자기 동일성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나는 적어도 무엇이다라는 명사가 되었건, 형용사가 되었건, 거기에 보어의 성격을 가질 말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한번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 자신을 확증할 때 어려움이 있는데, 그것은 흑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나를 흙이라고 확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확증하는 것에 대해 거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 내 자신은 흙으로 구성되어 있고 썩어지면 흙으로 돌아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내 자신을 흙이라고만 규정짓고 확증한다면 너무나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나는 흙, 그것 뿐인가 결코 그것 뿐이라고 대답할 사람은 하나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사람을 창조할 때, 흙이라고 하는 육체의 요소와 더불어 거기에 영적인 요소를 더하여 줌으로써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흙의 요소에 대해 그 의미를 말하지만 짐승이나 금수, 조류, 곤충이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먼지나 땅바닥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만 있는 영적인 요소 그것이 사람의 성스러움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신 것 그 생기는 히브리어로 루하흐 헬라어로는 퓨뉴마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냥 입김, 공기, 바람이라고 하는 그런 뜻이 있지만 성령님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흙이라는 요소에다 성령님을 불어 넣어 주심으로 사람을 호흡하게 되고, 생각하고 되고, 느끼게 되고, 움직이게 되고, 동맥과 정맥에 피가 흐르게 되고, 심장은 고동하게 되고, 깊이 생각할 뿐 아니라 지, 정, 의 인격이 형성됐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났습니까 에덴 동산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처럼 똑같이 영적인 존재, 하나님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태어났습니까 아닙니다. 창세기 5장 3절에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낳은 세번째 아들 이름을 셋이라고 합니다. 셋은 분명히 창세기 5장 3절에 아담의 모양,둘째는 아담의 형상을 업고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의 후손, 아담의 후손, 가인의 후예들, 여자의 몸에서 난 모든 인간은 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자 스펜서는 말하기를 "사람은 잘못 태어난, miss-born된 존재다."라고 하였습니다. 잘못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품성이 바르지 못하고 의롭지 못하고 불행을 초래하며 살아 갑니다. 그래서 인생은 잘못 태어난 생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reborn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거듭난다' 하나자로는 '중생한다'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없어지고 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나고, 사람의 인격, 죄된 인격으로 불의한 인격으로 태어난 우리들이 거듭나면 어떻게 되느냐. 세번째는 그리스도의 형상, 예수의 형상, 그것을 본받아 살게끔 하기 위해서 로마서 8장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롭다 인정하시고, 영화롭게 하실려고, 우리를 부르시고 예정하시고 예지중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흑의 요소가 아니라 내속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이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속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것을 알지 못하면 너희들은 버린 자식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인간은 진토, 먼지와 같고 흙과 같은 존재이지마는 그것으로 형성되어진 질그릇과 같은 것이지만 이 질그릇에 우리는 보배를 담고 있습니다. 그 보배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것이지요. 기름을 담으면 기름그릇, 술을 담으면 술그릇, 물을 담으면 물그릇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을 담으면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너희 속에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알지 않느냐" 그것이 너희 정체를 말해 주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리스도의 영을 그 속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중심이 될 때 이 질그릇은 영적인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그리스도가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아니하면 버린 교회다. 너희 단체와 그룹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알지 못하면 그 단체와 그 그룹과 그 팀은 죽은 것이다. 버린 것이다.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핵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기화학에서 유기물질은 다 유기적인 관계를 가집니다. 이 유기성은 생명성입니다. 유기물질은 무기물질과는 달라서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령 CH4가 있는데 C가 2개 될 때 H는 6개로 C2H6,C가 3개 될 때 H는 8개로 C3H8, 이렇게 유기적인 관계를 가집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에 의해서 그 말을 해석하면 CH4나 C2H6, C3H8나 유기화학물의 구조식은 항상 그 중심에 C가 있고 동서남북 상하좌우에 H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바라 볼 때마다 이 유기물질의 유기적인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C(Christ)를 중심으로 한 네 개의 H(Human) 그것이 있으므로 유기적인 존재가 된다. 그래서 메탄이 에탄이 되고, 에탄이 프로판이 되고, 펜탄이 되고 하는 장성과 성장과 번식이 되고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과 우리 학교와 우리 교회에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이 그분 때문에 우리의 동일성이 확증되어 지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화합물입니다. 화합물을 분자들의 모임입니다. 분자는 원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그 화합물을 어떤 분자로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그 화합물의 전체성, 동질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하나의 원자라 할지라도 원자에는 원자의 핵이 있습니다. 그 원자핵이 그 원자다움을 말해줍니다. 원자의 동일성 (정체성)은 그 원자의 핵에 있습니다. 너희 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으므로 네 전체 생명의 핵이 되고 네 질그릇의 핵이 되어 있느냐, 이것이 너를 말해 주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서 너를 확증하라. 여러분들의 마음에 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 인격의 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 삶의 핵이 무엇입니까 핵은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핵은 분열을 일으키는 많은 힘을 그 속에 소유하고 있는데, 그 힘이 폭발하기 전에는 부단한 핵의 운동이 있습니다. 거기에 중성자의 운동이 있습니다. 양자의 운동이 있습니다. 전자의 운동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원자든지 그 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여러분들 속에 무엇이 움직이고 있습니까 무엇이 운동하고 있습니까 그 운동과 그 기능이 보이지 않는 내 정체를 확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중심에 있으므로 나를 확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여러분들의 중심이 되어 있는가 중심이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주변과 원이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원의 둘레가 있습니다. 둘레가 있기 전에 중심이 생기고 중심에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자리 혹은 궤적이 둘러 있습니다.
그러므로써 중심에서의 거리, 중심이 먼저입니다. 중심이 움직이면 원이 움직입니다. 둘레가 움직이게 마련입니다. 중심이 둘이면 보기 싫은 타원형과 같은 모양이 됩니다. 내 중심이 무엇이냐 내 자신을 확증하라. 깊이 생각하고, 시험해 보고, 네 자신을 확증하라. 버트란드 럿셀(Bertrand Russell)은 사색에 있어서만, 깊이 생각함에 있어서만이 인간은 자기 주인이 된다. 사색이 없고 깊이 생각하는 것 없이 행동만 하고, 깊은 사색이 없이 자기 욕망대로만 행하고 살아 가면 그 인간은 환경의 노예일 따름이다. 주변 상황에 의해서만 움직이면 주변 상황의 노예일 따름이다. 주변 환경을 원주, 원둘레라고 한다면 둘레에 따라서 중심이 따라 간다면 노예적이지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됩시다. 어느 누구의 노예도 어떤 환경의 노예도 되지 맙시다. 국가의 노예도 되지 말고, 민주주의의 노예도 되지 말고, 공산주의의 노예도 되지 맙시다. 집권자들의 노예도 되지 말고, 반면에 근로자의 노예도 되지 맙시다. 여당의 노예도 되지 말고, 또 역시 야당의 노예도 되지 맙시다. 무게와 중심이 없는 우리들, 이리 끌고 저리 끌고가는 힘의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나의 나다움, 중심을 향한 나의 확증이 확고히 설 때 누구도 나를 노예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중심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확증하던 물건을 확증하던, 확증에는 반드시 객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윤리학에서는 이 객관성을 그 행위의 판단에 있어서 그 행위를 하게 한 동기가 무엇이냐 motive를 많이 봅니다.둘째는 모티브보다는 결과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그 행위를 판단할 수 있다고 결과론을 주장합니다.셋째는 보이지 않는 동기와 나타나는 행위로서의 경과 그 뿐만 아니라 동기에서부터 결과까지의 전체를, 전 과정을 다 보고 평가를 해야 된다는 종합론입니다. 이것이 객관적인 표준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네 자신을 네가 확증하라 네 자신을 네가 증명하라' 이것은 주관적으로 네 자신을 판단하고 네 자신을 증명하라 그 말씀입니다. 윤리학에서는 사람의 행위와 사람의 품성의 주관적인 판단의 기준은 오직 하나, 그것은 자기 자신의 양심이올시다. 양심만이 나를 확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양심이 객관성 있는 확증을 할 수 있느냐 말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이라고 하는 Consciousness는 Con이라고 하는 일반화, 보편화, 함께, 공히라고 하는 뜻과 더불어서 Sciouse라고 하는 science, 과학성, 학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텔레비젼을 보다가 누구도 말하지 아니하지만 다함께 같은 순간 한숨을 쉴 때가 있습니다. 다함께 울분을 느끼거나 다함께 희열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숨은 양심의 공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을 확증하라. 양심으로 확증하라. 양심은 네 속에 있는 중심이요, 양심은 하나님의 소리요, 양심은 당신의 인격 속에 감추어 둔 블랙박스요, 양심은 하나님이 당신의 인격 속에 감추어 둔 녹음기요, 녹화장치입니다. 그 양심에 들려지고 양심에 비취어진 네 자신으로 너를 확증하라. 이른 아침 예루살렘 성전앞 광장에는 손에 돌을 움켜주고 올라 온 수 많은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눈에 돋보이게 서성대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서기관 부류요, 또 하나는 바리새인의 부류였습니다.
예수님께 한 여자를 끌고 와서 고소를 합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해서 이렇게 돌을 들고 왔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는 모세의 율법에서도 자기 자신의 법에서도 그 여자를 판단할 기준을 찾지 아니했습니다. 허리를 꾸부렸습니다.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습니다. 일어나서 말씀한 마디를 남기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색의 여유를 주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할 시간을 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중심을 향하여서 자기에게로 향할 수 있는 자기 정체를 밝힐 시간을 준 것이었습니다. 자기 정체를 확증할 수 있는 최종 최하의 기준은 '너희들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다 자기 자신을 확증해 보니 그것만은 어길 수가 없어요. 그것을 벗어날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예수님은 재판을 하기 전에 각자가 자기 자신을 확증해 보는 시간을 준 것이올시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다 나갔다."라고 합니다. 양심에 의해서 자기를 확증한 것입니다. 들었던 돌을 놓았고, 힘주었던 어깨, 핏줄이 가득하던 목의 힘이 빠지게 합니다. 내 힘줄에 힘을 싹 빠지게 하는 것은 내 양심의 힘입니다. 내 자신을, 정체성을 발견하였을 때 나는 무가치하고, 나는 제로의 상태에 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수단,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맺을 수 있는 끈이 올시다. 수학에서는 네 자신을 알아라. 네 자신의 자태를 알아라. 네 주제를 알아라. 여러분에게 말한 대로 주제를 좀 알아라. 어디에 있느냐, 수학에서는 X좌표와 Y좌표로 말을 합니다. X좌표는 수평선입니다. Y좌표는 수직선입니다. X좌표를 먼저 쓰고 Y좌표를 쓰는 것이 수학의 좌표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좌표는 Y좌표를 먼저 써야 합니다. 왜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수평을 먼저 봅니까, 수직을 먼저 보지, 건축가가 수평을 먼저 봅니까, 수직을 먼저 보지. 이 대자연의 법칙, 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수직을 먼저 본 다음에 90도 각도를 가진 수평을 보는 것입니다. 네 자신을 확증하라. 네 좌표를 분명히 하라. 하나님과 너의 관계에 있어서 네 좌표가 어디에 있느냐 먼저 그것을 확증하고, 네 친구와 네 부모와 형제와 민족과 교회와의 관계를 확증하라. 깊이 생각하고 양심의 중심을 두고 내 자신을 확증하고 내 좌표를 확증하라. 무나무노 신부는 깊이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친해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친해야 할 친구도 많습니다. 친해야 할 교직원, 교수들도 많습니다.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과 친해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 정체를 진솔하게 나는 이렇다 하고 확증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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