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너희 기쁨을 위하여 (고후1:29-2:4)

본문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은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 본 회퍼 목사는,크리스챤의 다른 이름이 있다면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신앙 인으로서의 자기의 심정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였는데, 고린도 교인들 을 향한 그의 삶의 자세는 "너희들의 기쁨을 위하여"라고 술회하는 것 입니다. "너희 기쁨을 돕는 자"라는 1장 24절의 말씀이나, "나의 기쁨 이 너희 무리의 기쁨일 것이라"고 하는 2장 3절의 말씀은 바로 그런 뜻으로 이해돼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바울은 다른이의 기쁨을 위해 울기도 하고 터진 듯한 가슴을 달래어 분을 참기도 하였거니와, 우리 또한 바울처럼 행복을 나누어 주고 기쁨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자가 되면 이 얼마나 멋진 삶이 될 것입니까 그래 기쁨을 위한 바울의 심정이란.
1. 자제하는 행동에서 온 것이다. 바울은 마땅히 고린도에 갈 수 있었고, 가야만 인간적인 감정이 해소 될 듯한 입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를 아끼려고 가지 않았 다"라고 편지합니다.그 내용인즉 고린도 교회에 있는 유댕니과 득세하 고 그들은 거만하여져서 바울을 반대하고 교회를 혼란케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급거 중간 방문을 행하였으나 그 결과는 교회 사정이 더 악화되어 정치적 수완이 있는 디도를 파견하여 수습케 하고 그 소 식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여하간 이때의 고린도 교회 사정은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책망과 출교까지라도 당해야 할 잘못된 사람들 이 있어서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른 여러 곳의 기록을 보면 바울은 가혹한 풍자와 깊은 노여움이 연 발하고 극과 극의 대조적인 감정이 교차적으로 나타난 예민한 감정의 소유자인데, 여기서는 그 끊어오르는 감정을 극히 억제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아끼려는 마음이요 어린 생명, 철부지한 하 나하나의 시령에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는 어쩌면 지극히 자상한 배려 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가 나의 관계있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하는 아름다운 삶 과 그것을 위한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스러운 것이 아닌 것이라고 가르치던 바울의 말대로 우리 생활 에서도 나 개인만을 생각하고 다른이에 대한 배려가 있다면 아무렇게 나 행동해도 괜찮을 때가 더러 있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자유롭게 쓴다고 해서 개인 윤리에 잘못은 없습니다. 주초문제에 대한 이론적 이해가 있는 사람이 경우에 따라서 피하지 않는다고 범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행정적.제도적인 집권자가 모든 일을 소위 행정력으로 처리한다고 해서 직무상 잘못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얼키고 설킨 문제를, 헝클어진실을 칼로 짤라 버리듯 처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최선을 길이 아님을 알아야 하고, 그것 이 유능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고, 더더욱 올바른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나, 상대방의 기쁨을 위하는 행동이 못됨을 알아 야 합니다.
일찌기 바울은 이상국가를 형성하는 기본적인 덕일목 중에 하나는[절 제]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성서에서도 절제는 참 신앙의 열매라고(갈 5:23)하였고, 교회의 감독의 직분을 맡으려면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고 디모데후서 3장2절에 못박고 있습니다. 사도 행전 24장 25절에 보면 노예의 정신으로 왕권을 행한 자 같은 벧릭스 왕이 기독교에 대한 설명을 요구할 때 바울은 종교적인 의와 도덕적인 절제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설교해 주었습니다. 옛날 그리스의 종교가이며 철학자이며 수학적인 피타고라스의 제자 들은 때때로 공복을 움켜쥐고 식탁 앞에 앉아 거기에 맛있는 음식을 가져오게 하여 잠시동안 그것을 바라보다가 숫가락을 들지 않고 자리 를 떴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비웃을지 모 르나 오히려 그들의 지혜에 탄복합니다. 우리는 자제해야 합니다. 보는 [눈]과 말하는 [혀]와 감각 기관들을 자제시켜야 합니다. 자기의 욕망을 희생하여 몸을 다스리는 것은 참으 로 힘 있는,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길이거니와 나의 주위 사람 을 기쁘게 하는 길인 것도 알아야 합니다.
2. 아버지같은 사랑 바울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나 자기가 가르친 사람들에 대하여 아버지 같은 권위와 사랑을 잃지 않았습니다. 디모데를 향하여 "믿음으로 낳 은 아들"이라 불렀고, 자기가 세운 여러 교회의 신자들을 표현은 아니 였으나 심정은 자식을 대하는 아버지의 마음 그대로였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는 그들 때문에 환난도 당하고 애통 한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사나이였기 에 육신의 아버지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울었을 것입니다. 그 눈물은 약자의 상징이 아니라, 마음의 부드러움을 보여주는 영웅적인 것이라 고 칼빈은 말하였습니다. 자식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 그것은 그를 향한 뜨거운 사랑, 그것 이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때는 매를 들고 때리기도 하고 엄격한 훈계를 주기고 하고 어떤 때는 아들의 말에 100% 따르기도 하며 같이 뛰어 놀기도 하고 아들이 잠잘 때 조용히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그것 입니다. 내 주위 사람과 나를 대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기 원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마음씨가 여기 있습니다. 불의를 저지르고 잘못을 인식치 못할 때 책망과 훈계로 그를 돌이켜야 합니다. 자기를 팔려던 가롯 유 다의 오욕된 행실을 지적하여 돌이키려 하던 것이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막 14:17-18).
베에토벤의 음악을 누구나가 사랑하지만 동양인들은 다른 음악가들의 것보다 특별히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의 음악에 깊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깊이란 바로 고통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베에토벤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로서 돈만 생기면 술을 마시기 때문에 베에토벤 은 11세 때부터 극장 오케스트라에서 돈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17세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아직 어린 동생까지 부양해야 만 됐습니다. 30세부터 음악가의 생명인 귀가 이상하기 시작하여 만년에는 완전히 듣지 못하였습니다. 심포니 No.9를 연주했을 때는 박수갈채뿐 아니라 큰 소동이 일어날 정도였는데, 이런 관중의 열광을 옆에 있던 사람의 주의를 받고서야 알 정도였습니다. 그는 눈보라가 내리치는 쓸쓸한 밤 에 혼자 57세를 일기로 죽었고, 그의 눈을 감겨준 이는 지나가던 한 나그네였다고 합니다. 이런 생활을 보면 그는 불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베에토벤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넘치는 행복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의 말대로 "괴로움을 뚫고 나아가 발견한 기쁨"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바울은 "우리들이 이름없는 인간같이 남들이 알아주지 않지만 사실은 살아 있는 승리자입니다. 불행하고 슬픈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기쁨으로 꽉 차 있습니다.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사실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까지 부요하고 만족하게 해 주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베에토벤은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기 위하여 오히려 가장이 된 마음 으로 살았을 것이고, 바울의 마음 또한 그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갈라 디아 교인들의 잘못을 책망하면서 그때도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루어지기까지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 나니(갈4:19)"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이가 기쁨을 위하여 윗사람처럼 관대하고 아량과 여유가 있는 마음, 부모의 심정을 갖지 않고는 어려 운 것입니다.
3. 주관하지 않고 돕는 자가 된다고 하였다. 본문 1장 24절의 말씀은 "우리가 너희 믿음의 주가 되려는 것이 아니 요 도리어 너희 기쁨의 동역자인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2장 4절에 보 면 바울에게는 큰 환난과 애통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경건하고 거 룩한 징계와 권면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경건한 목사는 남을 울리기 전에 자신이 속으로 먼저 울어야 하고, 자신의 분노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전에 자신의 깊은 마음속에서 고 통을 받아야하며,남들에게 슬픔을 끼치기 보다는 더 많은 슬픔을 자신 이 당해야 합니다. 영어에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이 있는데 라틴어의 본래의 뜻은 교 통,통신 등의 말이지만 근래에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표시하는
넓은 뜻으로 교육. 문화.정치면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라틴 Munus에 다가 com이라는 접두사를 붙인 것입니다. munus는 세가 지 뜻이 있는데 선물, 짐, 책임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communus가 되면 '선물을 서로 나눈다''짐을 서로 진다''책임을 함께 진다'라는 뜻입니다. 바울도 여기 아마 그런 마음일 것입니다. 친구사이, 이웃 사이, 가족 사이, 교우 사이, 인종과 민족 사이의 커뮤니케이션도 그 어원처럼 서 로 종노릇하는데 비결이 있을 것입니다. 교육학자 루시스 쉐릴은 "인간관계의 성패는 기술적인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태도의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앞에서 사람들을 "아낀다"라는 표현을 했는데 이것은 그의 어떤 권위를 주장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말 에 대한 해설처럼 '아낀다'는 자기의 마음을 많은 환난과 애통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직 권위란 교회의 질서 유지를 도와 주어 교회의 안녕에 따르는 기쁨을 조장시키는 것이지, 어떤이들처럼 부당한 지배력을 행사하는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인간에 대한 그 어떤 예속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하나님을 말씀 이외에 전혀 다른 주인이 없어야 하고 인간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목사들에게 인간의 양심에 대한 특별한 교섭력이 없는 것은 그들이 사역자요 조력자이지 주인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확정된 원칙입니다. 자제하는 행동, 아버지같은 사랑, 조력자 파트너쉽이 그 것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89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