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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울 속에 가려져 있는 성도들 (아4:1-15)

본문

본문을 통해서 함께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너울 속에 가려져 있는 성도들'이라 하는 말씀입니다. 아가서의 말씀에 특별히 4장에서 이 신부를 극도로 예찬하고 있는 요소는 다른 것이 아니고 그가 너울 속에 가려져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남자든지 여자든지, 잘 생겼든지 못 생겼든지, 많이 배웠든지 못 배웠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신부와 신랑 사이에 그 동안에 아무리 주고 받은 말이 많고 오고 가는 인정이 많았어도 정상적인 부부의 생활은 너울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너울을 알고 그 너울 속에 가려져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귀 한 것인지 모릅니다. 이 말과 같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요한복음 3:29) 신부 를 취하는 신랑의 만족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 만무 중에 옷을 벗고 매를 맞으신 주님이 만일 신령한 신부를 취하는 일이 없 다고 하면 주님의 죽으심이나 사심이 귀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를 취하는 신랑의 만족을 말씀합니다. 다음은 신랑에게 취함을 받는 신부의 만족입니다. 즉 성도들의 만족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됩니다. 교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든지 적게 모이 든지 하나이든지 둘이든지 셋이든지 그 안에 주님이 취하는 신부들이 있 어야 됩니다. 또 주님의 취하심을 받는 신부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또 하나는 신랑의 친구, 신랑은 신부를 취하고 신부는 신랑에게 취함을 받을 때에 그것을 목격해 보는 친구들의 만족입니다. 성경에는 신랑의 친 구가 있습니다. 신랑의 친구가 되었든지 신부의 친구가 되었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 기쁨이 나에게 만족하다'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 에는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바로 이것이 너울 속에 있는 신자들입니다. 너울 속에 있는 교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너울 속을 압니다. 너울 속에 있는 신부에게서는 죄 와 허물을 찾지 못합니다. (예레미야 50:20) 이들에게 죄가 없어서 죄를 발 견치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물이 없어서 허물을 못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도 여러분이 내 허물을 찾으려고 하면 못 찾을 리가 없습니다. 전부가 허물입니다. 전부가 죄입니다. 그 많은 허물과 죄를 신부의 허 물과 죄를 신랑이 용서하시고 받아들여서 너울을 씌운 신부, 너울 안에 있는 신부의 죄와 허물을 찾을 수 없다 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울 속에 가려져 있는 사람은 도피성에 들어간 살인자와 같습니다. 도피성 밖에서는 자기 자신도 살인자라 하는 오명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보복자도 그를 살인자로 당연히 처치해야 할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가 도피성 안에 있을 때에 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찾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부르짖습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누누이 이런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여자는 일생에 결혼식 하는 날 하루, 그것도 30분이나 1시간 정도 너울 을 씁니다. 알아야 될 것은 30분이나 1시간 정도 쓰는 그 너울이 그 사람 의 일생을 좌우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너울은 30분이나 1시간만 쓰는 것 이 아닙니다. 항상입니다. 항상 너울 안에, 주 안에 거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일평생 동안 너울 속에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주님이 주시는 '너울' '면사포' '흰 옷' '아름다운 옷' '제일 좋은 옷'을 참으로 귀 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됩니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다. (1절)
신자들에게 있어서 제일 급선무는 너울을 아는 일입니다. 너울을 아는 사람은 비둘기 눈이 됩니다. 비둘기는 하나의 사물 외에는 안본답니다. 다 시 말하면 다른 사물을 보지 않습니다. 사물 중에는 산도 있고 들도 있고 개도 있고 소도 있고 여러 가지가 많습니다. 이런 것을 안본다는 말이 아 닙니다. 이런 것을 안보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비둘기의 눈과 같이 하나의 사물 외에는 보지 않는다는 사실 가운데 가 장 귀중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죄나 허물이나 자기의 의를 돌아보 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의 가장 귀한 것이 자기의 의와 자기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는 위치인데 그것이 곧 너울 속에 있는 위치입니다. 그러나 너울 속은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의 허물이나 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바울은 아주 심하게 자기 자신을 보았습니다. 심 한 도전을 했습니다. 생명을 다해서 싸웠습니다. 언제 너울을 알기 전에, 주님 안을 알기 전에 그랬습니다. 살인을 하고 도주하는 도망자라고 하면, 더구나 그 뒤에서 보복자가 따 라온다고 하면 다른 사물을 보지 못합니다. 어떤 선생에게 가야 내가 살 까, 무엇을 의지해야 살까,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살인 죄인이냐 죄를 범했느냐 네 뒤에 보복자가 따라 오느냐 그러면 언약대로 이 도피성에 들어가거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 살 길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도피성 에 들어가는 일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대해서 주님의 사랑과 긍휼에 대해서 우리를 향해서 약속하신 약속에 대해서 수없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도피성이 있다. 도피성에 들어가기만 하면 바로 의인이 된다. 아 무도 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심령을 끌어안고 자기의 짐을 지고 도피성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적습니다. 들어가는 것 같은데 없습니다. 만일 도피성에 들어가면 들어가는 그 시간부터 모든 짐과 모든 불안과 불신과 공포와 공 허는 끝납니다. 확실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눈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눈도 비둘기의 눈 같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의 신앙을 다 망쳐 놓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이런 말씀에 여러분이 성숙해야 됩니다.
사실상 우리는 한 사물만 보는 비둘기의 눈같이 되질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 보는 것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아까 말씀한 대로 저 세상의 사물을 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의 것도 볼 것이 있고 보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만) 내 안에 있는 죄와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둘기의 눈은 하나의 사물 밖에는 못 본다 하는 말씀을 우리가 많이 했는데
그렇다면 이 한 사물은 무엇입니까 누구를 말합니까 주님만 보 십니까 정말로 주님만 보십니까 다른 것을 너무 많이 봅니다. 먼저 누구를 봅니까 주님을 보기 전에 누구를 봅니까 자기 자신을 봅니다. 자기 자신을 보면 살인 죄인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보는 일에 서 털고 일어서질 못합니다. 자기 의, 자기 허물, 자기 죄를 보느라고 주님 을 못 봅니다. 그러나 신자가 너울 속을 알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가르치지 않아도 비 둘기 눈같이 됩니다. 저절로 됩니다. 그것은 보지 말아라, 이것만 보아라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비둘기의 눈이 됩니다. 절대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 속에서 비둘기의 눈 같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보지 말 라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봅니다. '세상이 이렇게 된다, 저렇 게 된다, 누구의 허물이 이렇다 저렇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안됩니다. 왜 자기 자신이 너울 속에 있는 줄 모릅니다. 똑같은 내용입니다만 우리는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입니까, 아닙니 까 탕감 받았습니까
그런데 탕감 받은 사람이 왜 갇히지요 자기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보고 있습니다. 보기는 봅니다. 듣기는 듣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생활과는 너무 거리가 멀잖아요 그 생활이 나와 너무 멀다 하는 것을 통탄히 여기지 않으면 그 생활을 못 봅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으면 100데나리온 정도는 탕감해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걸 뭐 시비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도피성 안에서는 도 피성 밖의 것을 이러고 저러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100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기어이 잡아 가둡니다. 생각하면 그렇게 못쓸 사람 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 못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남의 신앙 의 높고 낮은 것을 앉아서 다 판단하고 남의 선하고 악한 것을 다 심판하는 자의 눈은 결코 비둘기의 눈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 사물이란 주님을 가리킨다고 했는데 주님이 어디 있 습니까 뭘 보시렵니까 주님만 봐야 된다고 하는데 그 말이 옳기는 옳은 데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만 보는 것입니까 주님만 보는 방법이 무엇입 니까 목사는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까 목사를 봐라 하면 볼 수 있습니다. 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육체가 없습니다. 주님은 육체가 없기 때문에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님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주님이 여러분 앞에 있다고 하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볼 수 있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따라서 하십시오. "말씀이 곧 주님이시다. 주님이 곧 말씀이시다." 육신으로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주님의 얼굴을 뵙지는 못해도 내가 한 사물, 즉 주님을 볼 수 있는 것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중에도 나를 향한 약속입니다. 언약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으로 나를 향하신 약속과 언약을 듣고 보고 바로 받아들 이면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 일 이 우리에게 안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제쳐 놓고 언약은 덮어 놓고 다른 것을 구하거나 다른 것을 찾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세상 없어도 헛수고입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눈과 같다' 하는 말씀 가운데 비둘기는 한 사물만을 본다고 했습니다. 한 사물은 곧 주님입니다. 또 주님이지만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약속, 언약, 말씀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세월도 변하고 갑니다. 사람도 갑니다. 모 든 규칙과 제도와 모양이 다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습니다. 초대 교회 때나 창세 전이나 창세 후나 내가 알기에는 이 말씀을 변 경하지 않으시고 이 말씀대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씻기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등한히 여기면 안됩니다. 참 귀한 것이 많 습니다. 만일 우리 마음 속에서 한 사물, 한 사건만 바라 본다면 그 안에 이루어진 모든 것이 그와 함께 동반할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면 길르앗산 기슭에 누워 있는 무리 염소 같다고 했습니다. 무리 염소는 단수가 아니고 복수입니다. 길르앗산 기슭 에 누워 있는 양들, 또 그의 휘장 속에 있는 너울 속에 있는 양들입니다. 거기서는 하나도 다른 살림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동일한 무리 염소입니다. 너울과 쉼과 안식과 무리, 이것이 교회입니다. 너울을 모르는 교회, 쉼 이 없는 신앙, 안식이 없는 신앙은 안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너울 속에 서 쉬고 안식하는 무리입니다. 거기는 다 무리를 이루고 삽니다. 많은 무 리가 하나에 속합니다. 이 너울이라고 하는 것을 제하면 예찬 받을 일도 없고 예찬할 일도 없 습니다. 신자가 산을 떠다 옮기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산다 해도 예수 안 에 있다고 하는 것이 귀하지 예수 안이라고 하는 말을 빗겨 서면 칭찬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울 속'이라고 하는 말, '예수 안'이라고 하는 말과 그 사랑 안에 있다고 하는 말을 순간적으로만 느끼지 말고 항상 그 안에 있는 자 신을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 알고 계시는 말씀 듣고 계시는 말씀을 들고 걸어 가십시오. 그 말씀을 누구 앞에 가지고 나가는 계약서와 같이 들고 나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계약서가 말합니다. 계약서가, 약속의 말씀이 말씀합니다. 실질 적으로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들고 나아가야 됩니다.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아가 4:2) 여기 말씀대로 털 깎인 양입니다.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양이 수만 마 리가 된다 해도 셀 수 없는 무리라 해도 다 털 깎인 양들입니다. 자기 털 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인의 털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늘 교회에게 자기 의와 주님의 의를 말씀합니다. 바울은 참으로 털 깎인 양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으로 책망할 것이 없고 부족함이 없지만 주님의 의를 알면서 자기 의를 다 버렸습니다. 버리되 진 토 같이 배설물 같이 버렸습니다. 오늘 신자 중에 자기 의를 배설물 같이 버릴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가 곧 바울입니다. 참 귀한 것을 우리가 알아 야 되겠습니다.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쌍태를 낳은 양이라 하는 것은 영적 건강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 주 장부다운 믿음, 장부다운 신앙을 말씀합니다. 다 목욕장에서 나오는데 털이 다 깎인 양으로 나타난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또 새끼 없는 양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새끼가 있되 쌍태를 낳은 아주 강건한 양 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같구나. '이'는 음식물을 씹어서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씹어서 먹어서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신자, 능력이 있는 신 부들을 말씀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씹어서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면, 말씀이 자기 자신의 신앙이 되지 못했다면 이런 예찬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까지 말씀을 듣는 일, 아는 일, 보는 일을 어떤 교회에 뒤지지 않을 만큼 많이 가졌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그 말씀을 흡수하는 일, (음식물로 말하면) 씹어 먹는 일을 못하고 있습니다. 고기는 씹을수록 맛이 납니다. 자꾸 씹어야 맛도 날 뿐 아니라 영양분 을 다 섭취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먹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씹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씀이 내게 주는 영양분을 모르고 있습니다.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강건 하지 못합니다. 아까도 말씀했지만 지금까지 들은 말씀, 아는 말씀, 또 기도 중에서 많 이 사용하는 그 말씀들을 직접적으로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이 있 어야 합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자신도 그렇고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 또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말씀을 그대로 가지 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고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를 죄와 사망에서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부족합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 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터이니 젖이 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히브리서 5:12) 아무리 오래 되어도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고 젖이나 먹는 사람은 고린도전서 3장 1절에서 말씀한 대로 주 안에서 어린아이에 비할 수밖에 없 습니다. 강건한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의 근본적인 말씀을 생각하지 못하 고 무엇을 먹어야 되느니, 무엇을 먹지 말아야 되느니, 이렇게 해야 되느 니 저렇게 해야 되느니 하는 것을 근본같이 삼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먹는 자에게 가서는 먹는 자처럼, 먹지 않는 자에게 가서는 먹지 않는 자처럼, 율법의 사람에게는 율법으로, 복음을 누 리는 사람과는 복음을 함께 누리면서 이것 저것을 다 소화할 수 있는 장 부다운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요 (히브리서 5:13) 주 안에서 어린 아이와 장성한 사람을 무엇으로 분별합니까 교회에 나 온 연조로 어린 아이니 장성한 사람이니 하는 것을 구별합니까 아니면 헌금하는 것으로, 출석하는 것으로, 자기 생활을 어느 만큼 다져 나가느냐 하는 것으로 장성한 자와 어린아이를 구별합니까 이 말씀은 그런 구별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무엇을 기준으로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를 구별하는지 알아 야 할 것입니다. 말씀대로 의의 말씀을 경험했느냐, 하지 못했느냐 하는 것으로 분별합니다. 의의 말씀! 율법적으로는 의로운 것을 모르거나 맛보지 못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율법의 의는 다 압니다.
그러므로 '의의 말씀'이라고 할 때 그 의는 율 법의 의가 아니고 '주님의 의'를 말씀합니다. 주의 의를 아는 사람, 자기의 의를 버리고 주의 의를 힘입는 사람은 성경대로 장성한 사람이고 아직도 주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어린 아이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됩니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치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서 3:14)
주님이 오시면 성령님이 오시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알게 하신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의라고 하는 이의는 윤리와 도 덕적인 의가 아닙니다. 주님의 의를 말합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치 못했다' 라고 하는 이 말씀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 을지 모르겠습니다. 표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치 못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한다.'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고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 들은, 체험한 사람들은 그 심령이 장성한 사람들입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 치 못한 사람들은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이 겉으로는 크게 다를 게 없지만 심령은 큰 차 이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는 신앙 은 그만큼 성경 안에 있는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합니다. 이 말씀을 잘 기 억하시기 바랍니다. 네 입술은 홍색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아가 4:3) 신부의 입술, 신자의 입술을 말씀합니다. 그 입술은 무엇과 같은고 하니 홍색실과 같다고 했습니다. 홍색실! 네 입술은 홍색 실과 같다 하는 말을 어떻게 표현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혼례식을 할 때에 초례상을 차리고 양쪽에 대나무를 세웁니다. 다른 나 무도 많은데 왜 하필 대나무를 세웁니까 대나무는 무엇을 뜻합니까 절 개를 뜻합니다. 양쪽에 대나무를 세우는 것은 피차에 절개를 지키자 하는 뜻입니다. 거기에 무슨 실을 겁니까 홍색 실, 청색 실을 겁니다. 그 실은 왜 겁니까 무슨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뜻이 아니고 언약, 약속입니다. 일평생 동안 이 언약을 지키자, 이 약속 가운데서 살자고 하는 의미에서 겁니다. 이 신부에게 네 입술은 네 입은 홍색 실과 같다고 하는 것은 이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홍색 실과 같은 언약, 약속을 말합니다. 그 신부의 입은 언 약과 약속을 중히 여기는 입입니다. 참 귀한 말입니다. 신자가 자기의 생활이 남보다 더 나은 것은 자랑할 줄 알아도 자기에게 주시는 주님의 언 약과 약속을 귀하게 여길 줄을 모르는 것은 신앙 생활의 큰 결함입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20여년 전에 대전에서 집회를 했 습니다. 그때 양로원 원장 내외분의 초청을 받고 아침 식사를 하러 여러 사람이 함께 갔는데 양로원에 들어서니까 위령탑이 있었습니다. 양로원의 모든 시설을 원장이 자랑합니다. 아침을 다 먹을 때까지 실컷 자랑하고 또 자랑을 들었습니다. 그때 같이 간 사람들 중에 한 분이 물었습니다. '원장님, 이렇게 초청해 주시고 대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원장님께 하 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해도 되겠습니까' '예, 하십시오, 어떤 말씀이라도 하십시오.' '우리가 원장님의 초청을 받고 이 집에 들어서는 시간부터 원장님의 하 시는 사업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원장님을 구원해서 오늘의 원장님이 있게 하신 주님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못 들었습니다.' 원장은 그 말에 기분이 나빠졌는지 서로 좋지 않게 끝을 맺었습니다. 신자는 그 입술이, 그 입이 아름답고 귀한 칭찬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언약의 말씀, 약속의 말씀을 귀히 여겨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도 하고 노래도 하고 감사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므비보셋은 왕의 상에서 함께 먹는 일과 왕 자와 함께 지내는 일 중에서 자기의 어떤 것을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왕 이 자기를 사랑하는 그 사랑, 긍휼히 여기시는 그 긍휼 외에는 할 말이 없 습니다. 라합이 붉은 줄을 내걸고 n 있습니다. 라합에게는 가장 귀한 것이 붉은 줄입니다. 나가면서 들어가면서 하나를 만나도 둘을 만나도 그가 하는 말 은 이 홍색 실입니다. 신실한 언약을 노래합니다. 만일 신자들에게 이런 것이 없다고 하면 여전히 부족합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 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10:9) 무슨 말입니까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겠다.-나가도 꼴을 얻고 들어 가도 꼴을 얻으리라. 꼴을 얻는 길이 하나만이 아닙니다. 나가면서도 꼴을 얻고 들어가면서도 꼴을 얻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꼴을 얻고 또 돌아가 면서 꼴을 얻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가면서 꼴을 얻고 들어가면서 꼴을 얻는다.
-먼저는 구원을 얻고. 잘 알아야 됩니다 구약에서 복을 말할 때에 나가면서 들어가면서 복을 받고 누립니다. 신 자가 나가면서 들어가면서 얻는 꼴이 무엇이겠습니까 잘 생각해야 되겠 습니다. 여러분이 잘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의 생활의 실수보다, 그 실수를 하기 전에 주신 언약을 귀하게 여기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됩니다. 생활의 실수라고 하는 것은 여지 없습니다. 그러나 생활의 실수보다는 언약, 약속, 주의 진실하심을 크게 노래할 수 있는, 간증할 수 있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흡수입니다 흡수. 먹는 대로 흡수하는 대로 표현하는 입술입니다. 주 안에서 말씀을 흡수하는 대로 먹는 대로 그 내용을 노래하는 입술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입술이 아니면 안됩니다. 앉아도 서도, 강단 위에서도 강단 밑에서도 신자의 입술은 여기서 예찬한 이 홍색 실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종교인들 입에서는 이 홍색 실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앉아도 서도 주님 자신, 하나님 자신, 성경 말씀이 나를 이렇게 한다 이렇게 해 준다 하는 것을 종교인들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같이 앉아 있을 때에 신앙의 할 말이 없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 니까 내게 이렇게 이렇게 해 주시겠다는 그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언약 에 대해서 약속에 대해서 신실함에 대해서 말씀할 수 없다고 하면 그만큼 그 심령이 말씀 밖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잘 생각해야 됩니다. 분명히 라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은 왕의 옆에 앉아 있는 므비 보셋과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자는 왕의 옆에 앉아서 왕의 권위를 자기의 권위로 사용하는 므비보셋과 같아야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앉아서 우리에 대한 약속과 우리에 대한 영광을 말하려 해도 이 입을 주관하시는 분이 따로 있습니다. 이 입을 돈이 주장하면 돈 밖에 안나옵니다. 세상이 주관하면 세상 일밖에 안나옵니다. 바울의 입을 누가 주장했습니까 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홍색 실을 신랑 이 지금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앉으나 서나 자기를 대해서나 남 을 대해서나 주님의 의와 주님의 긍휼과 주님의 영광스러운 것 외에는 말 하지 않았습니다. 잘 알아야 됩니다.
발람의 입을 누가 주장했습니까 사람은 발람이든지 바울이든지 가룟 유다든지 그가 입을 주께 맡기고 주께서 그 입을 쓰시는 데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입에 있지 않고 입을 쓰는 분에게 있습니다. 입을 주장하는 분에게 있습니다. 참 귀할 것입니다. 늘 말씀하지만 시므온의 입을 누가 주장했으며 안나의 입을 누가 주장 했습니까 오늘 신자의 입을 누가 주장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보이는 종교 생활을 하면서 살다 가는 일에 만족하겠다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나를 구원하신 분, 나를 깨끗케 하신 분을 내 가 어떻게 말하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나를 구원하시 고 깨끗케 하신 그 분을 내가 모르기 때문에 내 입에서는 홍색 실이 흐르 지 않고 있습니다. 잘 기억해야 됩니다. 교회의 흐름이 무엇입니까 신자 의 흐름이 무엇입니까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쪽 같구나. 너울 속에 있는 여인의 뺨 곧 성도의 뺨을 표현한 것입니다. 과일은 익 으면 향기가 납니다. 향취가 납니다.
그런데 다 익은 석류가 조각이 났습니다. 조각이 났으니 석류 안에 있는 향기, 향취는 마음껏 흐릅니다. 이걸 먹지 않아도 냄새를 맡지 않아도 향취가 나는 법입니다. '석류 한 조각 같 다' 라는 말은 신자의 기쁨을 말합니다. 너울 속에 있는 최대의 기쁨을 말 합니다. 그 기쁨은 저절로 흘러 넘칩니다.
여러분, 내가 이름은 신자이지만 경제나 가정이나 다른 것으로 기뻐한 다고 하면 그 기쁨에 주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예찬하지 않습니다. 예찬 할 리가 없습니다. 주님으로 인해서 만족하는 향기, 향취를 석류 한 조각 처럼 토하는 신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일생을 살면서 내게 제일 기쁜 날이 어느 날인가, 잊을 수 없는 날들이 어떤 날들인가를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일평생 동안 내가 잊을 수 없는 날, 나만 못 잊는 것이 아니고 주님도 잊을 수 없는 날 이 주님 앞에서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돌아와서 입맞추는 날이요, 불한당 만난 사람들은 사마리아인으로 인해서 완전히 치료받는 날입니다. 므비보셋은 므비보셋 대로 다 있습니다. 신자의 기쁨과 불신자의 기쁨이 다릅니다. 신자의 기쁨과 종교인들의 기쁨이 다릅니다. 종교인들의 기쁨은 외적이라고 하면 신자들의 기쁨은 내적입니다. 종교인들의 기쁨은 세상이 기뻐하고 흠모할 수 있는 것이지 만 신앙의 사람들의 기쁨은 주님이 흠모합니다. 주님이 그 향취를 맡고 계 십니다. 참 귀한 것입니다. 주님으로 만족한 신자의 얼굴의 표현입니다. 너울 속에 있는 신부를 주 님만이 보시고 그 향취를 맡는 일입니다. 이 일이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 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네 목은 망대 같구나.' 군기를 두는 다윗의 망대입니다. 일천 용사들이 쓰는 방패를 죽 걸어 놓은 아주 위엄찬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방패 없는 용사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지 않 은 신자가 어디에 필요하겠습니까 잘 생각해야 될 줄로 압니다.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참 귀한 말씀입니다. 신부의 두 유방은 균형을 이룬 신앙 생활을 말씀 합니다.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비정상입니다. 신앙과 생활입니다. 신앙과 생활이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됩니다. 신앙과 생활-곧 열매와 잎입니다. 여기에는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만 문제는 잎이 아니고 열매입니다. 잎과 열매는 다릅니다. 잎이 없는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심판의 대상은 잎이 없는 나무가 아니고 열매 없는 나무입니다. 잎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잎이 없는 나무를 찍는 법이 없고 열매 없는 나무를 찍습니다. 또 기름과 등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핵심은 등이 아니고 기름이며, 잎 이 아니고 열매입니다. 이런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이제 이 말씀을 여러분이 생각하시면서 다 아는 말씀, 들은 말씀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시 고 들은 말씀, 아는 말씀이 내게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느냐, 하나님의 약속 의 말씀이 내게 어떻게 성취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때는 자꾸 갈 뿐, 오지 않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 중에 다시 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갑니다. 우리도 가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시 이런 강단을 만들거나 교회를 만들어서 이런 교회 생활을 다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지나가 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지나가는 동안에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너울 속에 있는 신부처럼 주님이 흠향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뿐입니다. 다른 것은 없 습니다. 먼저는 생활이 아니고 신앙입니다.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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