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따르라 (요21:17-25)
본문
예수님의 12제자중에서 특히 중요한 세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베드로,야고보,그리고 요한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실때에 데리고 가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때도 따로 이 세 제자를 데리고 가셔서 기도하라고 하셨던 특별한 세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 제자들의 인생의 앞날은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야고보는 얼마안가 박해가 시작되었을때에 바로 순교합니다. 베드로는 야고보가 순교한 후에도 약 30년간을 더 살면서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다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합니다. 그러나 세 제자중에 한 사람 요한은 순교하지 않고 100세 가까이 오래토록 삽니다. 세 제자의 인생 여정이라고 할까요 처음에는 늘 같이 다니던 이 사람들. 나중에 이렇게 갈라질 수가 있습니까 특히 여기 야고보와 요한은 친 형제지간입니다. 똑같이 예수님의 제자요, 같이 주님을 따가갔는데 형 야고보는 젊었을 때 죽고, 동생 요한은 100세까지 삽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인생의 여정을 자기의 운명이라고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좀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뭐 이 제자들이 잘하고 잘못하고 해서 야고보는 일찍 죽고, 요한은 오래토록 산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고난 운명이라고도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다시 제자들을 만나주시고 이제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다시 따르도록 하십니다. 그러신 다음에 베드로에게 앞날의 예언을 해 주십니다.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제 베드로는 더 이상 주님의 부르심에 반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어떠한 순교의 죽음을 죽게 될 것인가를 미리서 들은 베드로는 기분이 좀 언잖았을 것입니다만은 어쩌겠습니까 주님이 따라오라고 하시는데 이제와서 싫다고도 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했더니 바로 옆에 라이벌 제자 요한이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앞에 물어봅니다.
20절입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올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 지라도 네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그러나 베드로는 한편으로 섭섭한데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 나만 순교해야 됩니까 요한은 순교하지 않게 되고 오래 살게 되는데 왜 나는 순교를 해야 합니까 너무 억울합니다.” 말은 안했지만, 여기 대화를 보면 충분히 베드로의 마음을 읽을수가 있습니다. 하여튼 베드로와 요한의 앞날은 정해져 있었으며, 그들의 미래는 사뭇 다르게 될 것은 분명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 인간들에게 굉장한 궁금증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누구는 이땅에서 오래오래 살게되고 누구는 젊어서 죽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누구는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잘살게 되고, 누구는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평생 어렵게 살게됩니다. 누구는 부잣집에서 태어나 어렸을때부터 좋은 여건속에서 자라나고, 누구는 조실 부모해서 어렸을적부터 고생하며 자라납니다. 어쩌면 이 세상은 모순 투성이로 보일 지도 모릅니다. 왜 하필 나는 이런가 물론 나의 책임인 경우는 어쩔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러나 살다보면 나의 책임이라기 보다는 운명적인, 숙명적인, 예정론적인, 이렇게 베드로나 요한처럼 앞길이 정해져 버린 그러한 인생의 여정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사실 이러한 사실을 시인해야 합니다.
성경에 이것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앞길을 정하시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때로는 실망하게 되고 인생을 반항하면서 자기의 운명을 탓하게 되고 때로는 자포자기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도 되고 자기의 삶을 저주하게도 됩니다. 나의 인생도 저 사람처럼 되었으면 얼마나 좋은가 남의 사과가 더 맛있어 보인다고 우리는 살면서 남들과 비교하는 것 때문에 속이 상할때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속시원히 가르쳐 주시기라도 하면 좋겠건만 질문하는 베드로에게도 그 이유는 안 가르쳐 주십니다. “잔말말고 너는 나를 따르기나 해라” 예수님께서 안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니 더 답답할 노릇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요한은 오래 오래 살게 해 주셨고,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에 베드로는 이 시점으로부터 30년동안 복음전하다가 그 다음에 60세정도에 죽게 했고,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야고보는 금방 순교하게 했을 것이다 라는 가정 속에서 성경 말씀을 연구해 보면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이시간 그것을 분석해 보는 것입니다. 요한은 왜 더 오래 살도록 남겨 두신 것인가 사람도 정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또 이성이 강하고, 냉철한 사람이 있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 있고 성격이 곧은 강직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성격과 기질도 가지 가지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으로 가보겠습니다. 21절.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이 요한은 성만찬때 예수의 품에 꼭 안겨 누워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이렇게 말을 할때도 예수님의 품에 그대로 안겨서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밤에 예수님께서 떡조각을 놓고 말씀하십니다. 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이것은 요한을 가슴에 품은채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가슴에 파묻혀서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면서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심장 고동 소리를 느끼면서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사랑한다는 말도 멀리 떨어져서 듣는 것보다 서로 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고서 사랑한다고 할 때에 가슴으로 더욱 실감있게 느껴집니다. 원래 감정이 풍부한 요한이 예수님의 가슴속에서 사랑의 우리 주님의 언어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랑하라는 말씀이 얼마나 가슴속 깊이 새겨졌겠습니까 그래서 요한이라는 이 제자는 요한복음과 요한
1,
2,3서 요한계시록 이 다섯권을 썼는데 이 성경 귀절 귀절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리고 요한일서는 전체가 다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가슴에 안겨서 그 사랑의 체온을 느꼈기 때문에 정이 많은 이 요한은 사랑의 화신이 된 것입니다. 원래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님으로부터 둘다 보아너게라고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성격이 급하고 화끈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러한 별명을 붙여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사마리아지방으로 통과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해 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얼마나 성격이 급한지 참지를 못합니다. 이만큼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는 급하고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요한은 화끈하고 정이 많은 가슴으로 사랑의 말씀을 들은 제자이다.” 이렇게 우선 요약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에게는 또 다른 성품이 있었습니다.그는 끈기가 있었습니다. 쉽사리 배신을 하지 않습니다.
요한복18장 15절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가야바 법정의 뜰에 들어가실때에도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멈칫하고 있는 베드로를 요한이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벌써 나머지 열명의 제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때에 요한과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기서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만은 요한은 한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는 그 현장까지 따라갔습니다. 열두명중 한사람. 그래도 요한이 끝까지 주님을 따릅니다. 이렇게 요한은 끈질기고 끝이 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면서 옆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를 보셨습니다.그리고 “요한아 보라 네 어머니라” 바로 그 곁에 있는 제자 요한에게 “네가 이제 네 어머니로 모셔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화끈한 사람입니다. 한번 이거다 하면 길게 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로 화끈하게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풍부한 사랑으로 이 마리아 어머니를 잘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한두해만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의 어머니로 생각하고 마리아를 잘 모십니다.
그의 성품 세가지가 바로 이 일에 적중했던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다녀 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에베소 지방에 요한이 마리아를 평생 공경했던 집이 거기 있답니다. 누군가 열두제자중에서 한 사람은 좀 오래 살아서 예수의 어머니를 봉양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열 두 제자중에 가장 적합한 제자가 요한이었습니다. 모두다 순교하면 어머니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의 어머니는 요한계시록에 보면 아기를 낳은 여자로 표현이 됩니다. 이 여자는 바로 교회를 상징합니다. “아기를 낳은 여자를 봉양하라” 다 순교해 버리면 누가 이 교회를 목회할 것입니까 곧 요한이 예수의 어머니를 돌본다는 것은 교회를 돌보는 상징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사도들이 다 일찍 순교를 해 버리면 누가 남아서 교회를 계속 돌볼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했던 요한은 그 다음에는 또 교회를 담당하여 목회를 하면서 교회를 사랑으로 잘 돌보았던 최고의 목양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격이 중간쯤 되며 아주 수석되기를 좋아했습니다. 제일 먼저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맡기면 제일 앞장서서 잘할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 충만 받은후에 베드로가 제일 먼저 설교 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는 30년 동안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어, 고넬료의 집에 가서 이방인의 집에서도 성령님 내리게 하는 등 30년동안 사역을 담당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성격은 끈질기거나 오래가거나 사랑이 풍부하거나 하지는 못하지만 화끈했습니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겠느냐”라고 주님이 물으셨을때 야고보가 마시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과연 너희가 마시려니와”라고 답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순교를 제일 먼저 감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제자들중에서 핍박의 처음 순교의 제물이 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또 열심히 복음을 들고 앞장서서 증거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오래동안 순교하지 아니하고 교회를 봉양하는 그런 사람도 있어야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기질을 아시는 주님께서 필요에 따라 야고보는 첫번째 순교의 재물로, 베드로는 복음 다 전한 후에 때가 되어 순교의 재물로, 요한은 오래 남아서 계속 교회를 봉양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뜻이 있어서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주님의 오묘하신 뜻이 계셔서 인생의 앞길을 이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 알려 주지 않으셔서 그렇지 이 세상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섭리가 다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는 우리 인간들이 도저히 다 측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모른다고 답답해하며 짜증스러워하며 왜 나는 순교해야 하고, 요한은 오래사냐고 너무 불공평하다고 이같은 원망과 불평을 우리는 얼마나 해 왔습니까 우리 앞길에 있어서는 뭔가 이런 하나님의 깊으신 지혜와 오묘하신 섭리와 하나님의 뜻이 있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도 나자신을 잘 모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머리털이 몇가닥인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이 몇 올인지도 다 세신바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아는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잘아십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요한과 자신의 앞날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주님께 말씀드렸을때 주님은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계시와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해주시는 경우도 있는 반면에 놀라우신 전 우주의 창조자 하나님의 그 지혜와 섭리를 가르쳐 주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어마어마한데 우리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만 가르쳐 주시고 알지 못할것은 가르쳐 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시기 때문에 작은 나에게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가르쳐 주시지는 않아도 이런 깊은 타당한 뜻이 있어서 요한은 오래살게 해 주셨구나 하는 것을 우리 시대에는 비로소 성경 앞뒤를 통해서 더듬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은 따르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 알고 따를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오묘하신 뜻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그러니 방법은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킴웍스라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설교하실때 늘가서 동역하면서 찬송으로 은혜를 끼치는 귀한 자매입니다. 그러나 그는 앞을 못보는 시각장애자입니다. 수년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가졌었는데 그때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시작장애자인데 이렇게 공연을 다니는데 어려움은 없습니까” 그러자 킴웍스라는 자매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 내게는 항상 길 안내자가 있습니다. 나는 전방에 무엇이 있는 지는 모른답니다. 단지 나의 길 안내자는 내 앞길에 멀리 있는 것은 안 가르쳐주고 내 한걸음 앞에 무엇이 있다 이것만 지시해 줍니다. 그러면 그것에 의지를 해서 나는 한걸음 한 걸음 옮깁니다. 그러면 결국 공연장도 가게되고 집에도 가게 되고 못가는데가 없습니다. 신앙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우리 인생길도 멀리는 잘 모르나 하나님이 예정가운데서 알아서 한걸음 한걸음 나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길 안내자이신 주님만 믿고서 순종하며 하루 하루를 믿고 따라가면 결국은 천국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궁금한 것 다알수가 없습니다. 궁금한 것 때문에 교회 못다니겠다고 하지 마십시요. 궁금한 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마십시요. 용량이 작은 컴퓨터에 하나님의 전체 지혜를 다 집어 넣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2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마찬가지의 원리로 주님께서도 베드로에게 다 가르쳐 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안가르쳐 주실 때도 있습니다. 너는 상관하지 말고 나만 따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선한 하나님께서 우리 앞길을 예정해 주심을 믿고 머리털 하나까지 세신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나의 그릇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이것을 맡기셨을 것이요, 나에게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이 가정에서 태어나게 했고 이런 사명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시고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믿음으로 따르고 전진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세 제자들의 인생의 앞날은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야고보는 얼마안가 박해가 시작되었을때에 바로 순교합니다. 베드로는 야고보가 순교한 후에도 약 30년간을 더 살면서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다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합니다. 그러나 세 제자중에 한 사람 요한은 순교하지 않고 100세 가까이 오래토록 삽니다. 세 제자의 인생 여정이라고 할까요 처음에는 늘 같이 다니던 이 사람들. 나중에 이렇게 갈라질 수가 있습니까 특히 여기 야고보와 요한은 친 형제지간입니다. 똑같이 예수님의 제자요, 같이 주님을 따가갔는데 형 야고보는 젊었을 때 죽고, 동생 요한은 100세까지 삽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인생의 여정을 자기의 운명이라고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좀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뭐 이 제자들이 잘하고 잘못하고 해서 야고보는 일찍 죽고, 요한은 오래토록 산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고난 운명이라고도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다시 제자들을 만나주시고 이제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다시 따르도록 하십니다. 그러신 다음에 베드로에게 앞날의 예언을 해 주십니다.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제 베드로는 더 이상 주님의 부르심에 반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어떠한 순교의 죽음을 죽게 될 것인가를 미리서 들은 베드로는 기분이 좀 언잖았을 것입니다만은 어쩌겠습니까 주님이 따라오라고 하시는데 이제와서 싫다고도 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했더니 바로 옆에 라이벌 제자 요한이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앞에 물어봅니다.
20절입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올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 지라도 네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그러나 베드로는 한편으로 섭섭한데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 나만 순교해야 됩니까 요한은 순교하지 않게 되고 오래 살게 되는데 왜 나는 순교를 해야 합니까 너무 억울합니다.” 말은 안했지만, 여기 대화를 보면 충분히 베드로의 마음을 읽을수가 있습니다. 하여튼 베드로와 요한의 앞날은 정해져 있었으며, 그들의 미래는 사뭇 다르게 될 것은 분명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 인간들에게 굉장한 궁금증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누구는 이땅에서 오래오래 살게되고 누구는 젊어서 죽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누구는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잘살게 되고, 누구는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평생 어렵게 살게됩니다. 누구는 부잣집에서 태어나 어렸을때부터 좋은 여건속에서 자라나고, 누구는 조실 부모해서 어렸을적부터 고생하며 자라납니다. 어쩌면 이 세상은 모순 투성이로 보일 지도 모릅니다. 왜 하필 나는 이런가 물론 나의 책임인 경우는 어쩔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러나 살다보면 나의 책임이라기 보다는 운명적인, 숙명적인, 예정론적인, 이렇게 베드로나 요한처럼 앞길이 정해져 버린 그러한 인생의 여정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사실 이러한 사실을 시인해야 합니다.
성경에 이것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앞길을 정하시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때로는 실망하게 되고 인생을 반항하면서 자기의 운명을 탓하게 되고 때로는 자포자기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도 되고 자기의 삶을 저주하게도 됩니다. 나의 인생도 저 사람처럼 되었으면 얼마나 좋은가 남의 사과가 더 맛있어 보인다고 우리는 살면서 남들과 비교하는 것 때문에 속이 상할때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속시원히 가르쳐 주시기라도 하면 좋겠건만 질문하는 베드로에게도 그 이유는 안 가르쳐 주십니다. “잔말말고 너는 나를 따르기나 해라” 예수님께서 안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니 더 답답할 노릇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요한은 오래 오래 살게 해 주셨고,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에 베드로는 이 시점으로부터 30년동안 복음전하다가 그 다음에 60세정도에 죽게 했고,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야고보는 금방 순교하게 했을 것이다 라는 가정 속에서 성경 말씀을 연구해 보면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이시간 그것을 분석해 보는 것입니다. 요한은 왜 더 오래 살도록 남겨 두신 것인가 사람도 정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또 이성이 강하고, 냉철한 사람이 있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 있고 성격이 곧은 강직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성격과 기질도 가지 가지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으로 가보겠습니다. 21절.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이 요한은 성만찬때 예수의 품에 꼭 안겨 누워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이렇게 말을 할때도 예수님의 품에 그대로 안겨서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밤에 예수님께서 떡조각을 놓고 말씀하십니다. 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이것은 요한을 가슴에 품은채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가슴에 파묻혀서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면서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심장 고동 소리를 느끼면서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사랑한다는 말도 멀리 떨어져서 듣는 것보다 서로 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고서 사랑한다고 할 때에 가슴으로 더욱 실감있게 느껴집니다. 원래 감정이 풍부한 요한이 예수님의 가슴속에서 사랑의 우리 주님의 언어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랑하라는 말씀이 얼마나 가슴속 깊이 새겨졌겠습니까 그래서 요한이라는 이 제자는 요한복음과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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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서 요한계시록 이 다섯권을 썼는데 이 성경 귀절 귀절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리고 요한일서는 전체가 다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가슴에 안겨서 그 사랑의 체온을 느꼈기 때문에 정이 많은 이 요한은 사랑의 화신이 된 것입니다. 원래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님으로부터 둘다 보아너게라고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성격이 급하고 화끈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러한 별명을 붙여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사마리아지방으로 통과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해 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얼마나 성격이 급한지 참지를 못합니다. 이만큼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는 급하고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요한은 화끈하고 정이 많은 가슴으로 사랑의 말씀을 들은 제자이다.” 이렇게 우선 요약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에게는 또 다른 성품이 있었습니다.그는 끈기가 있었습니다. 쉽사리 배신을 하지 않습니다.
요한복18장 15절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가야바 법정의 뜰에 들어가실때에도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멈칫하고 있는 베드로를 요한이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벌써 나머지 열명의 제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때에 요한과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기서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만은 요한은 한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는 그 현장까지 따라갔습니다. 열두명중 한사람. 그래도 요한이 끝까지 주님을 따릅니다. 이렇게 요한은 끈질기고 끝이 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면서 옆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를 보셨습니다.그리고 “요한아 보라 네 어머니라” 바로 그 곁에 있는 제자 요한에게 “네가 이제 네 어머니로 모셔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화끈한 사람입니다. 한번 이거다 하면 길게 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로 화끈하게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풍부한 사랑으로 이 마리아 어머니를 잘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한두해만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의 어머니로 생각하고 마리아를 잘 모십니다.
그의 성품 세가지가 바로 이 일에 적중했던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다녀 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에베소 지방에 요한이 마리아를 평생 공경했던 집이 거기 있답니다. 누군가 열두제자중에서 한 사람은 좀 오래 살아서 예수의 어머니를 봉양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열 두 제자중에 가장 적합한 제자가 요한이었습니다. 모두다 순교하면 어머니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의 어머니는 요한계시록에 보면 아기를 낳은 여자로 표현이 됩니다. 이 여자는 바로 교회를 상징합니다. “아기를 낳은 여자를 봉양하라” 다 순교해 버리면 누가 이 교회를 목회할 것입니까 곧 요한이 예수의 어머니를 돌본다는 것은 교회를 돌보는 상징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사도들이 다 일찍 순교를 해 버리면 누가 남아서 교회를 계속 돌볼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했던 요한은 그 다음에는 또 교회를 담당하여 목회를 하면서 교회를 사랑으로 잘 돌보았던 최고의 목양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격이 중간쯤 되며 아주 수석되기를 좋아했습니다. 제일 먼저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맡기면 제일 앞장서서 잘할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 충만 받은후에 베드로가 제일 먼저 설교 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는 30년 동안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어, 고넬료의 집에 가서 이방인의 집에서도 성령님 내리게 하는 등 30년동안 사역을 담당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성격은 끈질기거나 오래가거나 사랑이 풍부하거나 하지는 못하지만 화끈했습니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겠느냐”라고 주님이 물으셨을때 야고보가 마시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과연 너희가 마시려니와”라고 답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순교를 제일 먼저 감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제자들중에서 핍박의 처음 순교의 제물이 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또 열심히 복음을 들고 앞장서서 증거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오래동안 순교하지 아니하고 교회를 봉양하는 그런 사람도 있어야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기질을 아시는 주님께서 필요에 따라 야고보는 첫번째 순교의 재물로, 베드로는 복음 다 전한 후에 때가 되어 순교의 재물로, 요한은 오래 남아서 계속 교회를 봉양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뜻이 있어서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주님의 오묘하신 뜻이 계셔서 인생의 앞길을 이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 알려 주지 않으셔서 그렇지 이 세상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섭리가 다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는 우리 인간들이 도저히 다 측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모른다고 답답해하며 짜증스러워하며 왜 나는 순교해야 하고, 요한은 오래사냐고 너무 불공평하다고 이같은 원망과 불평을 우리는 얼마나 해 왔습니까 우리 앞길에 있어서는 뭔가 이런 하나님의 깊으신 지혜와 오묘하신 섭리와 하나님의 뜻이 있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도 나자신을 잘 모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머리털이 몇가닥인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이 몇 올인지도 다 세신바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아는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잘아십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요한과 자신의 앞날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주님께 말씀드렸을때 주님은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계시와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해주시는 경우도 있는 반면에 놀라우신 전 우주의 창조자 하나님의 그 지혜와 섭리를 가르쳐 주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어마어마한데 우리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만 가르쳐 주시고 알지 못할것은 가르쳐 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시기 때문에 작은 나에게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가르쳐 주시지는 않아도 이런 깊은 타당한 뜻이 있어서 요한은 오래살게 해 주셨구나 하는 것을 우리 시대에는 비로소 성경 앞뒤를 통해서 더듬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은 따르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 알고 따를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오묘하신 뜻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그러니 방법은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킴웍스라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설교하실때 늘가서 동역하면서 찬송으로 은혜를 끼치는 귀한 자매입니다. 그러나 그는 앞을 못보는 시각장애자입니다. 수년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가졌었는데 그때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시작장애자인데 이렇게 공연을 다니는데 어려움은 없습니까” 그러자 킴웍스라는 자매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 내게는 항상 길 안내자가 있습니다. 나는 전방에 무엇이 있는 지는 모른답니다. 단지 나의 길 안내자는 내 앞길에 멀리 있는 것은 안 가르쳐주고 내 한걸음 앞에 무엇이 있다 이것만 지시해 줍니다. 그러면 그것에 의지를 해서 나는 한걸음 한 걸음 옮깁니다. 그러면 결국 공연장도 가게되고 집에도 가게 되고 못가는데가 없습니다. 신앙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우리 인생길도 멀리는 잘 모르나 하나님이 예정가운데서 알아서 한걸음 한걸음 나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길 안내자이신 주님만 믿고서 순종하며 하루 하루를 믿고 따라가면 결국은 천국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궁금한 것 다알수가 없습니다. 궁금한 것 때문에 교회 못다니겠다고 하지 마십시요. 궁금한 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마십시요. 용량이 작은 컴퓨터에 하나님의 전체 지혜를 다 집어 넣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2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마찬가지의 원리로 주님께서도 베드로에게 다 가르쳐 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안가르쳐 주실 때도 있습니다. 너는 상관하지 말고 나만 따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선한 하나님께서 우리 앞길을 예정해 주심을 믿고 머리털 하나까지 세신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나의 그릇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이것을 맡기셨을 것이요, 나에게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이 가정에서 태어나게 했고 이런 사명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시고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믿음으로 따르고 전진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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