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에게 보이는 우리의 모습 (창4:3-15)
본문
소그룹활동을 할 때 어떤 학생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가인은 너무도 인간적인것 같아 친근감이 갑니다. 라고 말하면서 내게 가인이 인간적이라는 것이 그렇게도 큰 죄였느냐고 물었습니다. 가인이 가졌던 아벨에 대한 분노와 살인,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가인의 고백은 우리도 그럴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학생의 말을 다 듣고 묻기를 인간적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 학생은 말하기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잘못한 것에 고통하며 그리고 부족한 것을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으며 때로는 절망할 수 있는 것이 인간적인것 아니겠냐고 대답하면서 신적일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은 용납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가인의 사건을 통해 죄된 인간의 모습을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인에게 동조적이며 친근감을 갖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죄성에 대한 동질감일 것입니다. 그 학생이 인간적이라고 말했던 것은 인간의 죄성에 대한 해석일 수 있으며 그 해석은 결코 틀린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 죄성은 모든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의 본능을 인간적이라고 말한다면 그 학생 말대로 가인은 너무도 인간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인간적인 것에 충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의 가인을 통해 죄에 지배받는 인간의 모습을 조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가인의 불성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상황은 가인의 내적 상황의 반영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수 있었던 양심의 정당성은 어디서부터 가능했을까요 우리는 먼저 가인과 하나님의 관게로부터 이 문제를 살 펴봐야 할 것입니다. 결코 가인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으며 구체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아벨과 함께 하나님앞에 제물을 드린 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을 거절 했다는데서 가인의 분노는 시작된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으로 제물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가인은 자신의 인생속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은 가능하게 합니다. 그에 반해 아벨은 하나님앞에 드리는 제물에 감사와 기쁨이 충만했으며 그는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앞에 드림의 가치를 가장 귀하게 여겼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편애가 아닌 정당한 반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인정하였으며 가인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가인이 하나님앞에 분노를 가진 이유는 자신의 불성실한 신앙의 태도보다 아벨의 행복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인은 자신이 하나님앞에 불성실한 인생을 살은 것에 대한 자책과 회개보다는 아벨이 하나님안에서 누리는 행복에 대한 원망이 생겼던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앞에 신앙의 표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아벨의 다른 결과에 대해 그는 하나님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가인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며 형식적인 섬김이 나타났었다는 것입니다. 카인은 자신의 신앙에 문제를 제기한 하나님의 권면에 순종하는 겸손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교만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불만을 표현하는 어떤 상황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하나님이 사랑을 빋는 자신의 아우 아벨이었던 것입니다.
2. 가인의 분노의 근거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은 도덕적관점이나 신앙적관점 더 나아가 상식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우리는 흥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형제를 죽일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상식적인 입장을 지지합니다. 예수님은 형제에 대한 불결한 욕을 하는 행위도 살인하는 자라고 준엄하게 경고했으며, 더 나가 마음에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는 것 조차 살인하는 것이라고 경고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가인의 행위를 인정하거나 변론해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비상식적인 상황이 우리의 삶속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기심이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시기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관계에 자신이 소외되었다는 감정의 인정은 도덕적 기준을 포기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가인은 아벨의 형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아벨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이 가지고 있는 기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이제 하나님도 원망의 대상이었기에 그는 하나님을 무시할 수 있는 감정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감정에 지배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내적인 스트레스를 풀지 않는다면 견딜 수 없다는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에 눈에 아벨은 형제로 보이기 보다 자신의 감정을 괴롭히는 분노의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감정을 위해 아벨을 죽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비극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3. 가인의 비겁함 이제 가인의 잔인한 분노에 하나님이 간섭하십니다. 가인은 당당하게 하나님앞에 자신의 무죄를 선언합니다. 이에 맞서 하나님은 이제 아벨의 피로 증거를 제시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죄를 부정활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앞에 가인은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그도 하나님의 창조였고 자녀였습니다. 그리고 가인으로 인해 또 다른 형제들의 살인을 막기 위해 가인의 생명에 그 누구도 손을 데지 못하게 합니다. 가인은 부모의 땅을 떠나 자기의 도시를 만듭니다. 이렇게 가인의 후예는 역사속에 남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 가인의 문화와 생각은 우리의 현실에 범람하게 되었으며 우리의 의식은 가인과 동질감을 갖을 수 있는 심성으로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가인은 회개없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 말하는 세속적인 쾌락을 만끽하는 신앙적으로 버려진 인생을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가인의 사건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영적 교훈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할 것은 가인은 아벨과 형제였으며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신앙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외적으로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형제에 대한 시기로 인한 분노가 가득찼으며 그 분노는 살인이라는 구체적인 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누려지지 못한다면 우리도 이기심과 시기심에 지배를 받을 수 있으며 그러한 감정은 어떠한 기준도 포기할 수 있는 무서운 힘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파멸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권면에 긴장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권면합니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의 싸움은 영적전쟁입니다. 우리의 죄성에 사탄이 유혹하지 못하도록 성령님에 지배를 받는 우리의 인격이 필요할 것입니다. 깨어 근신하며 이 마지막 세대에 하나님의 자녀로 풍성한 인생으로 누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1. 가인의 불성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상황은 가인의 내적 상황의 반영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수 있었던 양심의 정당성은 어디서부터 가능했을까요 우리는 먼저 가인과 하나님의 관게로부터 이 문제를 살 펴봐야 할 것입니다. 결코 가인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으며 구체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아벨과 함께 하나님앞에 제물을 드린 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을 거절 했다는데서 가인의 분노는 시작된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으로 제물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가인은 자신의 인생속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은 가능하게 합니다. 그에 반해 아벨은 하나님앞에 드리는 제물에 감사와 기쁨이 충만했으며 그는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앞에 드림의 가치를 가장 귀하게 여겼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편애가 아닌 정당한 반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인정하였으며 가인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가인이 하나님앞에 분노를 가진 이유는 자신의 불성실한 신앙의 태도보다 아벨의 행복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인은 자신이 하나님앞에 불성실한 인생을 살은 것에 대한 자책과 회개보다는 아벨이 하나님안에서 누리는 행복에 대한 원망이 생겼던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앞에 신앙의 표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아벨의 다른 결과에 대해 그는 하나님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가인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며 형식적인 섬김이 나타났었다는 것입니다. 카인은 자신의 신앙에 문제를 제기한 하나님의 권면에 순종하는 겸손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교만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불만을 표현하는 어떤 상황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하나님이 사랑을 빋는 자신의 아우 아벨이었던 것입니다.
2. 가인의 분노의 근거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은 도덕적관점이나 신앙적관점 더 나아가 상식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우리는 흥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형제를 죽일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상식적인 입장을 지지합니다. 예수님은 형제에 대한 불결한 욕을 하는 행위도 살인하는 자라고 준엄하게 경고했으며, 더 나가 마음에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는 것 조차 살인하는 것이라고 경고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가인의 행위를 인정하거나 변론해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비상식적인 상황이 우리의 삶속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기심이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시기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관계에 자신이 소외되었다는 감정의 인정은 도덕적 기준을 포기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가인은 아벨의 형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아벨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이 가지고 있는 기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이제 하나님도 원망의 대상이었기에 그는 하나님을 무시할 수 있는 감정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감정에 지배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내적인 스트레스를 풀지 않는다면 견딜 수 없다는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에 눈에 아벨은 형제로 보이기 보다 자신의 감정을 괴롭히는 분노의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감정을 위해 아벨을 죽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비극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3. 가인의 비겁함 이제 가인의 잔인한 분노에 하나님이 간섭하십니다. 가인은 당당하게 하나님앞에 자신의 무죄를 선언합니다. 이에 맞서 하나님은 이제 아벨의 피로 증거를 제시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죄를 부정활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앞에 가인은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그도 하나님의 창조였고 자녀였습니다. 그리고 가인으로 인해 또 다른 형제들의 살인을 막기 위해 가인의 생명에 그 누구도 손을 데지 못하게 합니다. 가인은 부모의 땅을 떠나 자기의 도시를 만듭니다. 이렇게 가인의 후예는 역사속에 남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 가인의 문화와 생각은 우리의 현실에 범람하게 되었으며 우리의 의식은 가인과 동질감을 갖을 수 있는 심성으로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가인은 회개없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 말하는 세속적인 쾌락을 만끽하는 신앙적으로 버려진 인생을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가인의 사건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영적 교훈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할 것은 가인은 아벨과 형제였으며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신앙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외적으로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형제에 대한 시기로 인한 분노가 가득찼으며 그 분노는 살인이라는 구체적인 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누려지지 못한다면 우리도 이기심과 시기심에 지배를 받을 수 있으며 그러한 감정은 어떠한 기준도 포기할 수 있는 무서운 힘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파멸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권면에 긴장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권면합니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의 싸움은 영적전쟁입니다. 우리의 죄성에 사탄이 유혹하지 못하도록 성령님에 지배를 받는 우리의 인격이 필요할 것입니다. 깨어 근신하며 이 마지막 세대에 하나님의 자녀로 풍성한 인생으로 누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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