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홍수로 세상을 멸절하리라 (창6:1-22)
본문
여호와 하나님께서 6일 동안에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다(창1:31) 그렇게 아름답고 기쁨을 주던 피조물인데, 천지와 만물의 통치와 관리를 책임 맡은 인간의 범죄로 그 아름다움은 다 없어져 버렸다. 오히려 죄악이 관영하는 너무나 추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 다시 말해서 꼴도 보기 싫게 되었다. 급기야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게 되었다(본문6절) 마침내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라”는 결단을 내리시게 되었다(본문7절) 내가 홍수로 세상을 멸절하리라 노아 홍수의 심판은 마침내 예고되었고, 120년의 경고 기간을 거친 후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다.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의 여덟 식구만이 구원을 얻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이다. 우리가 잘 아는 노아의 홍수 심판, 내가 홍수로 세상을 멸절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노아의 때를 강조하신 주님의 말씀을 상기한다면(마24:37) 한층 더 무게가 실리는 것 같다 내가 홍수로 세상을 멸절하리라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을 살펴 보고져 한다.
1.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본문 7절에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고 했다. “나의 창조한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멸절하리라”고 하신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기뻐하시던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으신 것이다.
1.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사람의 말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차원을 달리해야 한다. 말은 그 하는 사람에 따라 그 말이 지니는 힘이 달라진다. 어느 회사의 사원이 하는 말과 사장이 하는 말이 같을 수 없다. 어떤 후생복지에 관한 꼭 같은 내용이라도 사원의 말은 “기쁜 소식”으로 소식에 불과하지만 사장의 말은 공인된 약속이다. 바라고 소원하는 꿈이 아니라 희망사항이 아니라 바로 실체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그 어느 누구의 말 보다도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여 흐트러짐이 없다. 이사야 55:11절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여 헛되어 돌아오거나 하나도 땅에 떨어짐이 없이 다 이룬다(삼상3:19) 우리 인간이 이 사실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사이에 주고받는 말로 생각하고 있다. 차원을 달리할 줄을 모른다. 누구의 말인가를 생각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임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2.세상을 멸절시킬 능력 있으신 하나님 창세기 7:11-12절에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고 했다. 창세기 7:24절에 “물이 일백오십일을 땅에 창일하였더라”고 했다. 밤 낮 40일간 비가 쏟아졌다. 땅에 샘이 터졌다고 했다. 엄청난 홍수의 재난이다. 우리는 여름철 몇 시간의 호우에도 수재를 겪는다. 물난리를 치르며 천재지변에 난감해 하며 속수무책으로 수해를 입는다. 밤 낮 주야 40일간 비가 쏟아졌다. 장대비, 아니 그 쏟아지는 빗줄기의 표현이 어려워 “하늘의 창들이 열려 비가 땅에 쏟아졌다”고 했다. 그뿐이 아니다. 땅에서는 큰 샘들이 터져 물이 솟아올랐다고 했다. 우리가 하루 밤 사이에 당하는 호우 피해에도 속수무책인데…. 40 주야 가히 상상도 가지 않는 엄청난 홍수의 재난이다. 물이 150일간 땅에 창일하였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비를 말씀 한 마디로 움직일 수 있으신 하나님이란 사실이다. 하나님이 비를 명하시니 비가 내렸고, 하나님이 비를 명하시니 비가 그쳤다(창8:1-2) 그 하나님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된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 하나님이 인자하심과 긍휼로 멸망으로 향하는 죄악된 길에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나간 자식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눅 15:20)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베푸시는 사랑을 하나님의 무능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2.죄악이 관영한 세상 본문 5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했다. 여기서 “관영하다”는 말은 “우굴우굴 거리다. 차고 넘치다. 남아 돌아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차마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멸망시킨 것이다. 소돔 고모라의 죄악상을 말씀하시면서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셨고 창18:20절에서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라고 하고 있다. 그 또한 더 이상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태이라서 소돔 고모라도 멸망시킨 것이다. 차마 눈뜨고 더 이상 볼 수 없는 죄악 상태란 어떤 것일까
1.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악함 본문 5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 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창1:26) 범죄하고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할 수 없는 육체가 되었다(본문3절)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을 쫓아 악을 행하고 범죄와 타락상이 이 곳 저 곳에 차고 넘침을 보시고 역겨워 하신다. 전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지켜 순종하고져 하는 의로운 싹수는 없는 것이다.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본문 2절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이며 사람의 딸은 누구인가” 말들이 많고난해한 구절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천사는 영으로서 육체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과 육체적인 결혼을 할 수 없다. 마태 22:30절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볼 때 천사의 결혼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인류 타락에 대한 홍수 심판이지 천사 타락사가 아니다.
그리고 본문 3절에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 모든 사람은 예수 이름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가지고(요1:12)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롬8:15)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믿음을 가진 의의 후손인 셋의 계열이고 사람의 딸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의 후손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우리 성도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차마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는 죄악의 상태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의 타락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 택함 받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두신 사람들, 그들이 문제가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인류 역사의 중심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범죄할 때 치신다. 회개하고 돌아설 때 치시던 회초리를 꺾어 버리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하나님은 항상 당신의 자녀가 어떻게 사느냐에 관심을 가지시고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부른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미혹된 것이다. 세속화 되어진다는 것이요 세상 쾌락에 빠지는 것이다(딤후3:4)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는다는 것은 그 부모를 떠나 하나 됨이요(창2:24) 같이 된다는 것이다. 하향 평균화가 된 셈이다.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 언제 나타나는가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라고 했다.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세상적인 즐거움은 인류 역사의 번성기에 온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지고 물질 문명이 발달해질 수록 세상 쾌락을 쫓게 된다. 세상 연락을 즐기고 쾌락에 빠진다는 것은 감성적이요 감각적인 즐거움이다. 감정에 휘말리게 되면 이성적인 판단도 도덕적인 규범도 잃게 된다. 바로 사람다운 모습을 잃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참다운 사람의 모습은 사라지고 차마 더 이상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모습이 되고 만다.
3.방주를 통한 구원 언약 본문 14절에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고 했다. 본문 18절에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라”고 했다. 내가 홍수로 세상을 멸절하리라 차마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는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 대한 심판의 선언이다. 그러나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실 수 없기에(창18:23) 의인이요 당세의 완전한 자인 노아에게 방주를 통한 구원 언약을 주셨다.
1. 땅에 있는 생명(17절) 사람, 육축, 기는 것, 공중의 새(7절)
2.120년의 기간(3절)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연락에 빠져서 육체적인 감각의 쾌락에 얽매인 모습을 보시고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고 선언하셨다. 당장에 치시지 않고 120년간 기다리시며 노아로 하여금 그들 앞에서 방주를 만들게 하신 것은 크신 긍휼이다. 회개하고 방주 언약에 들어오라는 은혜의 기간이다. 120년, 그들에게는 참으로 과분한 축복과 은혜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기다림의 그 큰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비웃고 무능한 하나님으로, 믿지 못할 하나님으로 대적하였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시42:3) 벧후 3:4절에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했다.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아닐까 벧후 3: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다. 다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데 그 오래 참고 기다리심이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긍휼이요 사랑이요 은혜인데 오히려 그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리고 그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무시하고 대적하는 삶을 살고 있지나 않는지 살펴보자
3.구원의 길 내가 홍수로 세상을 멸절하리라 노아 시대의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이 말씀을 무시하고 비웃었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홍수의 심판은 임했고 방주 안에 들어가지 못한 자는 다 멸망당했다. 이제 하늘과 땅은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한바 되었고(벧후3:7)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채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는 불 심판이 예고되어져 있다(벧후3:10) 노아 시대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자들도 많다(벧후3:3) 우리의 가슴 속에는 그러한 요소는 없는가 곰곰히 살펴보자. 누가 뭐래도 분명한 것은 노아의 때에 방주 안의 여덟 식구가 구원 얻은 것처럼 예수 안에 있는 자 만이 구원을 얻게 된다. 나는 과연 예수 안에 있는가
1.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본문 7절에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고 했다. “나의 창조한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멸절하리라”고 하신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기뻐하시던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으신 것이다.
1.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사람의 말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차원을 달리해야 한다. 말은 그 하는 사람에 따라 그 말이 지니는 힘이 달라진다. 어느 회사의 사원이 하는 말과 사장이 하는 말이 같을 수 없다. 어떤 후생복지에 관한 꼭 같은 내용이라도 사원의 말은 “기쁜 소식”으로 소식에 불과하지만 사장의 말은 공인된 약속이다. 바라고 소원하는 꿈이 아니라 희망사항이 아니라 바로 실체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그 어느 누구의 말 보다도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여 흐트러짐이 없다. 이사야 55:11절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여 헛되어 돌아오거나 하나도 땅에 떨어짐이 없이 다 이룬다(삼상3:19) 우리 인간이 이 사실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사이에 주고받는 말로 생각하고 있다. 차원을 달리할 줄을 모른다. 누구의 말인가를 생각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임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2.세상을 멸절시킬 능력 있으신 하나님 창세기 7:11-12절에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고 했다. 창세기 7:24절에 “물이 일백오십일을 땅에 창일하였더라”고 했다. 밤 낮 40일간 비가 쏟아졌다. 땅에 샘이 터졌다고 했다. 엄청난 홍수의 재난이다. 우리는 여름철 몇 시간의 호우에도 수재를 겪는다. 물난리를 치르며 천재지변에 난감해 하며 속수무책으로 수해를 입는다. 밤 낮 주야 40일간 비가 쏟아졌다. 장대비, 아니 그 쏟아지는 빗줄기의 표현이 어려워 “하늘의 창들이 열려 비가 땅에 쏟아졌다”고 했다. 그뿐이 아니다. 땅에서는 큰 샘들이 터져 물이 솟아올랐다고 했다. 우리가 하루 밤 사이에 당하는 호우 피해에도 속수무책인데…. 40 주야 가히 상상도 가지 않는 엄청난 홍수의 재난이다. 물이 150일간 땅에 창일하였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비를 말씀 한 마디로 움직일 수 있으신 하나님이란 사실이다. 하나님이 비를 명하시니 비가 내렸고, 하나님이 비를 명하시니 비가 그쳤다(창8:1-2) 그 하나님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된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 하나님이 인자하심과 긍휼로 멸망으로 향하는 죄악된 길에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나간 자식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눅 15:20)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베푸시는 사랑을 하나님의 무능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2.죄악이 관영한 세상 본문 5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했다. 여기서 “관영하다”는 말은 “우굴우굴 거리다. 차고 넘치다. 남아 돌아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차마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멸망시킨 것이다. 소돔 고모라의 죄악상을 말씀하시면서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셨고 창18:20절에서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라고 하고 있다. 그 또한 더 이상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태이라서 소돔 고모라도 멸망시킨 것이다. 차마 눈뜨고 더 이상 볼 수 없는 죄악 상태란 어떤 것일까
1.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악함 본문 5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 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창1:26) 범죄하고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할 수 없는 육체가 되었다(본문3절)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을 쫓아 악을 행하고 범죄와 타락상이 이 곳 저 곳에 차고 넘침을 보시고 역겨워 하신다. 전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지켜 순종하고져 하는 의로운 싹수는 없는 것이다.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본문 2절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이며 사람의 딸은 누구인가” 말들이 많고난해한 구절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천사는 영으로서 육체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과 육체적인 결혼을 할 수 없다. 마태 22:30절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볼 때 천사의 결혼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인류 타락에 대한 홍수 심판이지 천사 타락사가 아니다.
그리고 본문 3절에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 모든 사람은 예수 이름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가지고(요1:12)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롬8:15)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믿음을 가진 의의 후손인 셋의 계열이고 사람의 딸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의 후손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우리 성도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차마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는 죄악의 상태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의 타락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 택함 받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두신 사람들, 그들이 문제가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인류 역사의 중심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범죄할 때 치신다. 회개하고 돌아설 때 치시던 회초리를 꺾어 버리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하나님은 항상 당신의 자녀가 어떻게 사느냐에 관심을 가지시고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부른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미혹된 것이다. 세속화 되어진다는 것이요 세상 쾌락에 빠지는 것이다(딤후3:4)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는다는 것은 그 부모를 떠나 하나 됨이요(창2:24) 같이 된다는 것이다. 하향 평균화가 된 셈이다.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 언제 나타나는가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라고 했다.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세상적인 즐거움은 인류 역사의 번성기에 온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지고 물질 문명이 발달해질 수록 세상 쾌락을 쫓게 된다. 세상 연락을 즐기고 쾌락에 빠진다는 것은 감성적이요 감각적인 즐거움이다. 감정에 휘말리게 되면 이성적인 판단도 도덕적인 규범도 잃게 된다. 바로 사람다운 모습을 잃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참다운 사람의 모습은 사라지고 차마 더 이상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모습이 되고 만다.
3.방주를 통한 구원 언약 본문 14절에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고 했다. 본문 18절에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라”고 했다. 내가 홍수로 세상을 멸절하리라 차마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는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 대한 심판의 선언이다. 그러나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실 수 없기에(창18:23) 의인이요 당세의 완전한 자인 노아에게 방주를 통한 구원 언약을 주셨다.
1. 땅에 있는 생명(17절) 사람, 육축, 기는 것, 공중의 새(7절)
2.120년의 기간(3절)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연락에 빠져서 육체적인 감각의 쾌락에 얽매인 모습을 보시고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고 선언하셨다. 당장에 치시지 않고 120년간 기다리시며 노아로 하여금 그들 앞에서 방주를 만들게 하신 것은 크신 긍휼이다. 회개하고 방주 언약에 들어오라는 은혜의 기간이다. 120년, 그들에게는 참으로 과분한 축복과 은혜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기다림의 그 큰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비웃고 무능한 하나님으로, 믿지 못할 하나님으로 대적하였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시42:3) 벧후 3:4절에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했다.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아닐까 벧후 3: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다. 다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데 그 오래 참고 기다리심이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긍휼이요 사랑이요 은혜인데 오히려 그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리고 그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무시하고 대적하는 삶을 살고 있지나 않는지 살펴보자
3.구원의 길 내가 홍수로 세상을 멸절하리라 노아 시대의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이 말씀을 무시하고 비웃었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홍수의 심판은 임했고 방주 안에 들어가지 못한 자는 다 멸망당했다. 이제 하늘과 땅은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한바 되었고(벧후3:7)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채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는 불 심판이 예고되어져 있다(벧후3:10) 노아 시대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자들도 많다(벧후3:3) 우리의 가슴 속에는 그러한 요소는 없는가 곰곰히 살펴보자. 누가 뭐래도 분명한 것은 노아의 때에 방주 안의 여덟 식구가 구원 얻은 것처럼 예수 안에 있는 자 만이 구원을 얻게 된다. 나는 과연 예수 안에 있는가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