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님의 심정을 알게 될 때 (벧전4:12-19)
본문
사람들은 몸이 아프거나 기가 막힌 어떤 일을 당하거나 또는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 “내 심정을 알아 달라”는 말을 합니다. 스펄젼목사님이 자신의 몸에 병이 생겨 누워 있을 때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위로하고 격려하였는데, 몸이 많이 아프시지요 많이 고통스럽겠네요 그 심정을 이해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스펄젼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아프지요. 아주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내가 아는 것보다 주님이 제 심정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위로를 해주십니다. 내가 애매한 고난을 받게 될 때도 주님은 나의 심정을 잘 아시고 이해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주님은 나의 심정을 잘 아시고 이해하십니다. 내가 아프거나 약할 수록 주님은 더가까이 하셔서 나를 바라보시면서 나의 심정을 이해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알고 계시는 주님의 심정은 우리가 느끼는 심정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한 그 심정을 잘 이해할 수 도 있지만 우리는 아무리 그 심정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그 심정을 더 정확히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모든 질고를 다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부족한 이해와 약한 이해력을 가지고서 사람들을 진정으로 도울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당하고 있는 그 상황이 내가 당한 그 상황과 같았을 때에는 그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경험하지 못했을 때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하가 상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자녀가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늘 건강한 사람이 병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성도가 목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을 아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요 주님의 심정은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는 삶입니다. 말씀 중심으로 사는 삶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본향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내가 주님의 심정을 모르고 지낼 때는 말씀과의 삶이 멀어져서 사는 삶이고 말씀과 먼 삶을 산다면 주님은 통탄해 하시며 괴로워하실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심정을 알고 지낼 때는 말씀과의 삶이 함께 동행하는 삶이며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의 심정을 알고 지낸다면 나의 삶의 모습은 말씀을 통하여 반드시 변하게 되며, 또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주님의 심정을 알게 될 때에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본문 베드로전서 4:12-19은 이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주님의 심정을 알 때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게 됩니다.(13,14) 베드로는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앞으로는 이러한 일들이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란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고난은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이라고 하였는데 불 시험이란 시험이 오는데 불같이 뜨겁다는 뜻이 아니고 좋은 금을 만들기 위해서 불로서 단련시키듯이 우리의 신앙을 세상의 박해로 연단 시킨다는 뜻입니다. 불 시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 그 당시 불 시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몰려오고 있는 중대한 시점이었습니다. 주후 64년 무더운 여름, 네로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박해가 시작되고 있는 때입니다. 몽상에 빠진 네로가 시(詩)한 수를 짓기 위해 로마 시를 불바다를 만들었으며, 이성을 차린 그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방화죄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씌우고 대대적인 박해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때였습니다. 무서운 불 시험이 다가오기 직전, 무슨 일이 터질련지 알 수 없는 두려운 밤같은 시대에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성령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하여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현대에도 이같은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시련 하려고 찾아오는 불 시험이 있습니다. 이 시험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찾아오게 됩니다. 불같은 시험은 개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앞으로 우리의 삶의 문턱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시험이 다가오면 마치 내가 이상한 일을 당하고 있는 듯이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은 마치 타오르는 화로와 같이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감옥, 고문, 무력, 화형 등으로 올 수 있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당시 소아시아에서는 기독교가 불법 종교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힘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며 말살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의 열 명의 황제들이 기독교를 박해하려고 수백 년간 말살 운동을 하였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지를 몰라 동요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난받는 형제들을 향해 부드러운 말로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서 고난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할 때 주님은 찾아오셔서 더 부드럽고 온유하신 말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시며 위로하십니다. 시련이란 단어는 고대에 순금과 가짜 금을 감정할 때 쓰여졌던 방법입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련이 올까요 그것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련이라는 불 시험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방법입니다. 시련이 우리에게 올 때 우리가 참신앙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시련이 올 때 가짜는 흩어집니다. 도망을 갑니다. 주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변해 버립니다. 그때부터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관계 있는 사람은 박해가 다가올 때, 고난이 다가올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고난과 시련은 성도를 순화(馴化)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순수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정결케하며 순수하게 만들어진 우리의 모습 그러나 때묻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더럽혀진 우리의 인격을 고난과 시련이라는 풀무불 속에서 더 순수하도록 제련하고 훈련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정해진 훈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육체 가운데서 고난을 받았으며 우리도 육체로 있는 동안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주어진 훈련의 코스입니다. 고난은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해 왔던 죄의 권세로부터 분리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참는 고난은 죄와의 싸움에서 큰 유익을 줍니다. 우리 자신에게 자신의 연약함과 이 세상의 허무함을 보여주며 우리를 더욱더 겸손케 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순복치 않으려는 마음을 없에주고 인생의 무상함을 가르쳐 줍니다. 육신의 비참함을 따르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라 살도록 고난을 통해서 싸우게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노하게 조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온유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시련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섭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은 이 고난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앞으로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 길은 성도의 길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길을 가야 합니다. 편안하고 쉬운 길은 성도의 길이 아닙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길은 험난하고 뜨거운 햇빛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슴에 달고 있는 훈장들을 볼 때 수많은 훈련과 이루어 놓은 업적을 통해서 주어지는 명예스러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도 천국이 우리에게 임할 때 주어지는 면류관을 바라보며 좁고 협착한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의 길은 협착하고 좁은 길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주님도 이 길을 가셨습니다. 골고다의 길, 십자가의 길, 우리를 위해서 이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이 길은 헌신의 길이요. 우리를 단련시키는 연단의 길입니다. 고난의 발소리가 들릴 때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즐거워하십시오. 고난을 즐거워하라는 소리는 이상한 소리로 들리련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본문 13절에 보면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했습니다. 왜 고난에 즐거워해야 할까요 고난 속에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으로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 소망은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시는 영원한 것입니다. 1썩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세상의 것은 변하지만 하늘의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음.(영생 기업 은행)
2더럽혀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불에 타지 않는 것 다른 색깔로 변질되지 않는 것, 불변하는 것을 말함. 3쇠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영원히 그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것. 인간의 자랑과 육체는 변한다. 하늘의 것은 변하지 않음. 또 고난을 즐거워하라는 것은 고난 그 자체를 즐거워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왜요 고난 그 자체가 위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받는 자체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는 것입니다. 고난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고난을 즐거워해야 합니까 우리가 이상한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이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즐거워하며 이 길을 가야 합니까 우리 주님이 이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어떤 잘못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으셔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우리를 위하여 애매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우리도 주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그리스도인이라면 필연적으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들도 이 고난을 통하여 후일에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십자가 없이 부활의 영광이 없듯이 성도들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과정이 없이 천국의 영광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 때문에 당하는 애매한 고난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고생을 같이한 사람들끼리는 서로가 화목합니다. 기쁩니다. 서로의 다른 체질을 고생을 통하여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함께 기쁨을 누린 사람과도 친하게 지내기도 하지만 함께 고생을 한 사람들은 더 친분 있게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에 우리함께 동참하게 될 때에 주님의 심정을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고난을 받지 않는 사람들과 고난의 길을 가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깊은 심정은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함께 따라갈 때에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고난을 받고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 그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돕기도 하고 훌륭한 조력자가 될 수 도 있습니다.
둘째.주님의 심정을 알 때 자신의 삶을 살피게 됩니다.(15-18) 고난이 다가올 때, 왜 고난이 오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왜 고난이 올까요 고난이 오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나의 잘못으로 오는 고난입니다. 의를 위해서 오는 고난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오는 고난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15절을 통해 사회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고난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또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일로 인해 고난을 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하고 개입하여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남의 일에 간섭하다가 고난받은 경우가 있습니까 그러했을 때에 주님 때문에 고난받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일을 제대로 처리 못하면서 남의 일을 간섭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이 일들은 엄밀히 말하면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일로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순전히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인해 고난을 받을 때 그 고난은 의미 있는 고난입니다. 성도는 애매한 이유 때문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다가 받는 고난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살다가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입니다. 고난은 자신에게 영광스러운 것이며 천국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 앞에서 올바른 삶의 모형을 제시할 수 있는 성숙의 단계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일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는 이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나는 이 고난을 통하여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할 기회로 삼고 있는가 나는 이 고난을 통하여 더 열심히 봉사하며 충성하는 기회로 삼고 잇는가 나는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를 더 순수하게 제련하시는 기간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6절-“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셋째.주님의 심정을 알 때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게 됩니다.(19) 본문 19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 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고난을 대비하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선을 행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거룩한 생활의 열매를 맺어야 하며 고난을 받는 가운데서도 계속적으로 선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형제들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곳을 보고 비방하기보다는 자신의 헌신과 사랑을 통하여 사랑을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이는 선한 일입니다.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봉사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단면적인 봉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봉사의 종류보다 보이지 않는, 숨겨진, 아직 찾아내지 못한 봉사의 종류가 많습니다. 봉사는 음악으로 비교해 볼 때 지루하게 연주되는 단음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풍부한 악기를 동원하여 연주되는 오케스트라와 같습니다. 음악을 할 때 단순하게만 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아름다움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과 악기가 동원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악기가 동원될 수록 아름다움과 위력은 대단합니다. 이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봉사는 내 눈에 보이는 조직 속에 나열된 부분만이 아니라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을 찾아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청지기 적인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주어진 일을 봉사하며 관리하며 충성을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과거의 삶을 탈피해야 합니다. 성도는 과거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더 이상 과거의 생활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하던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함을 알고 과거의 생활에서 탈피하여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갈 길을 재촉하자! 너희 생활로부터 탈출하라! 과거 죽은 자는 죽은 자대로 묻어 놓고 살아 있는 현실 속에서 행동하라 가슴속에 주님을 모시고 그가 주장토록 하면서. “내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탁하라는 말은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처럼 절대적으로 믿고 맡겨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숨을 거두실 때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눅23:16)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 전적으로 맡기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배경이 우리 주변에 우주적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는 것과 부름을 받아서 가는 것까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내가 염려한다고 해서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하루더 연장할 수 없습니다. 부모 아래 있는 자녀가 학업에 전념하지 않고 벌써부터 미래를 생각하며 돈을 벌겠다는 고민에 빠져 학업을 등한시하고 있다면 그는 정상적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성숙할 때까지 부모가 책임을 지고 양육을 하는 것입니다. 학생의 신분은 열심히 공부를 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심정을 잘 아는 학생입니다. 이같이 내 영혼을 주님께 맡겨 두고 열심히 주님의 심정을 헤아려 가면서 그 뜻을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생명의 연장은 내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끝)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모든 질고를 다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부족한 이해와 약한 이해력을 가지고서 사람들을 진정으로 도울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당하고 있는 그 상황이 내가 당한 그 상황과 같았을 때에는 그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경험하지 못했을 때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하가 상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자녀가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늘 건강한 사람이 병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성도가 목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을 아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요 주님의 심정은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는 삶입니다. 말씀 중심으로 사는 삶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본향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내가 주님의 심정을 모르고 지낼 때는 말씀과의 삶이 멀어져서 사는 삶이고 말씀과 먼 삶을 산다면 주님은 통탄해 하시며 괴로워하실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심정을 알고 지낼 때는 말씀과의 삶이 함께 동행하는 삶이며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의 심정을 알고 지낸다면 나의 삶의 모습은 말씀을 통하여 반드시 변하게 되며, 또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주님의 심정을 알게 될 때에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본문 베드로전서 4:12-19은 이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주님의 심정을 알 때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게 됩니다.(13,14) 베드로는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앞으로는 이러한 일들이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란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고난은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이라고 하였는데 불 시험이란 시험이 오는데 불같이 뜨겁다는 뜻이 아니고 좋은 금을 만들기 위해서 불로서 단련시키듯이 우리의 신앙을 세상의 박해로 연단 시킨다는 뜻입니다. 불 시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 그 당시 불 시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몰려오고 있는 중대한 시점이었습니다. 주후 64년 무더운 여름, 네로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박해가 시작되고 있는 때입니다. 몽상에 빠진 네로가 시(詩)한 수를 짓기 위해 로마 시를 불바다를 만들었으며, 이성을 차린 그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방화죄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씌우고 대대적인 박해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때였습니다. 무서운 불 시험이 다가오기 직전, 무슨 일이 터질련지 알 수 없는 두려운 밤같은 시대에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성령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하여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현대에도 이같은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시련 하려고 찾아오는 불 시험이 있습니다. 이 시험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찾아오게 됩니다. 불같은 시험은 개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앞으로 우리의 삶의 문턱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시험이 다가오면 마치 내가 이상한 일을 당하고 있는 듯이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은 마치 타오르는 화로와 같이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감옥, 고문, 무력, 화형 등으로 올 수 있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당시 소아시아에서는 기독교가 불법 종교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힘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며 말살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의 열 명의 황제들이 기독교를 박해하려고 수백 년간 말살 운동을 하였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지를 몰라 동요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난받는 형제들을 향해 부드러운 말로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서 고난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할 때 주님은 찾아오셔서 더 부드럽고 온유하신 말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시며 위로하십니다. 시련이란 단어는 고대에 순금과 가짜 금을 감정할 때 쓰여졌던 방법입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련이 올까요 그것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련이라는 불 시험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방법입니다. 시련이 우리에게 올 때 우리가 참신앙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시련이 올 때 가짜는 흩어집니다. 도망을 갑니다. 주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변해 버립니다. 그때부터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관계 있는 사람은 박해가 다가올 때, 고난이 다가올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고난과 시련은 성도를 순화(馴化)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순수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정결케하며 순수하게 만들어진 우리의 모습 그러나 때묻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더럽혀진 우리의 인격을 고난과 시련이라는 풀무불 속에서 더 순수하도록 제련하고 훈련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정해진 훈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육체 가운데서 고난을 받았으며 우리도 육체로 있는 동안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주어진 훈련의 코스입니다. 고난은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해 왔던 죄의 권세로부터 분리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참는 고난은 죄와의 싸움에서 큰 유익을 줍니다. 우리 자신에게 자신의 연약함과 이 세상의 허무함을 보여주며 우리를 더욱더 겸손케 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순복치 않으려는 마음을 없에주고 인생의 무상함을 가르쳐 줍니다. 육신의 비참함을 따르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라 살도록 고난을 통해서 싸우게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노하게 조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온유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시련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섭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은 이 고난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앞으로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 길은 성도의 길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길을 가야 합니다. 편안하고 쉬운 길은 성도의 길이 아닙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길은 험난하고 뜨거운 햇빛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슴에 달고 있는 훈장들을 볼 때 수많은 훈련과 이루어 놓은 업적을 통해서 주어지는 명예스러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도 천국이 우리에게 임할 때 주어지는 면류관을 바라보며 좁고 협착한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의 길은 협착하고 좁은 길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주님도 이 길을 가셨습니다. 골고다의 길, 십자가의 길, 우리를 위해서 이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이 길은 헌신의 길이요. 우리를 단련시키는 연단의 길입니다. 고난의 발소리가 들릴 때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즐거워하십시오. 고난을 즐거워하라는 소리는 이상한 소리로 들리련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본문 13절에 보면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했습니다. 왜 고난에 즐거워해야 할까요 고난 속에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으로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 소망은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시는 영원한 것입니다. 1썩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세상의 것은 변하지만 하늘의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음.(영생 기업 은행)
2더럽혀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불에 타지 않는 것 다른 색깔로 변질되지 않는 것, 불변하는 것을 말함. 3쇠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영원히 그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것. 인간의 자랑과 육체는 변한다. 하늘의 것은 변하지 않음. 또 고난을 즐거워하라는 것은 고난 그 자체를 즐거워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왜요 고난 그 자체가 위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받는 자체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는 것입니다. 고난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고난을 즐거워해야 합니까 우리가 이상한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이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즐거워하며 이 길을 가야 합니까 우리 주님이 이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어떤 잘못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으셔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우리를 위하여 애매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우리도 주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그리스도인이라면 필연적으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들도 이 고난을 통하여 후일에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십자가 없이 부활의 영광이 없듯이 성도들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과정이 없이 천국의 영광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 때문에 당하는 애매한 고난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고생을 같이한 사람들끼리는 서로가 화목합니다. 기쁩니다. 서로의 다른 체질을 고생을 통하여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함께 기쁨을 누린 사람과도 친하게 지내기도 하지만 함께 고생을 한 사람들은 더 친분 있게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에 우리함께 동참하게 될 때에 주님의 심정을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고난을 받지 않는 사람들과 고난의 길을 가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깊은 심정은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함께 따라갈 때에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고난을 받고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 그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돕기도 하고 훌륭한 조력자가 될 수 도 있습니다.
둘째.주님의 심정을 알 때 자신의 삶을 살피게 됩니다.(15-18) 고난이 다가올 때, 왜 고난이 오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왜 고난이 올까요 고난이 오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나의 잘못으로 오는 고난입니다. 의를 위해서 오는 고난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오는 고난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15절을 통해 사회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고난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또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일로 인해 고난을 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하고 개입하여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남의 일에 간섭하다가 고난받은 경우가 있습니까 그러했을 때에 주님 때문에 고난받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일을 제대로 처리 못하면서 남의 일을 간섭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이 일들은 엄밀히 말하면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일로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순전히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인해 고난을 받을 때 그 고난은 의미 있는 고난입니다. 성도는 애매한 이유 때문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다가 받는 고난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살다가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입니다. 고난은 자신에게 영광스러운 것이며 천국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 앞에서 올바른 삶의 모형을 제시할 수 있는 성숙의 단계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일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는 이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나는 이 고난을 통하여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할 기회로 삼고 있는가 나는 이 고난을 통하여 더 열심히 봉사하며 충성하는 기회로 삼고 잇는가 나는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를 더 순수하게 제련하시는 기간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6절-“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셋째.주님의 심정을 알 때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게 됩니다.(19) 본문 19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 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고난을 대비하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선을 행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거룩한 생활의 열매를 맺어야 하며 고난을 받는 가운데서도 계속적으로 선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형제들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곳을 보고 비방하기보다는 자신의 헌신과 사랑을 통하여 사랑을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이는 선한 일입니다.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봉사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단면적인 봉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봉사의 종류보다 보이지 않는, 숨겨진, 아직 찾아내지 못한 봉사의 종류가 많습니다. 봉사는 음악으로 비교해 볼 때 지루하게 연주되는 단음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풍부한 악기를 동원하여 연주되는 오케스트라와 같습니다. 음악을 할 때 단순하게만 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아름다움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과 악기가 동원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악기가 동원될 수록 아름다움과 위력은 대단합니다. 이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봉사는 내 눈에 보이는 조직 속에 나열된 부분만이 아니라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을 찾아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청지기 적인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주어진 일을 봉사하며 관리하며 충성을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과거의 삶을 탈피해야 합니다. 성도는 과거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더 이상 과거의 생활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하던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함을 알고 과거의 생활에서 탈피하여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갈 길을 재촉하자! 너희 생활로부터 탈출하라! 과거 죽은 자는 죽은 자대로 묻어 놓고 살아 있는 현실 속에서 행동하라 가슴속에 주님을 모시고 그가 주장토록 하면서. “내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탁하라는 말은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처럼 절대적으로 믿고 맡겨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숨을 거두실 때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눅23:16)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 전적으로 맡기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배경이 우리 주변에 우주적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는 것과 부름을 받아서 가는 것까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내가 염려한다고 해서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하루더 연장할 수 없습니다. 부모 아래 있는 자녀가 학업에 전념하지 않고 벌써부터 미래를 생각하며 돈을 벌겠다는 고민에 빠져 학업을 등한시하고 있다면 그는 정상적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성숙할 때까지 부모가 책임을 지고 양육을 하는 것입니다. 학생의 신분은 열심히 공부를 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심정을 잘 아는 학생입니다. 이같이 내 영혼을 주님께 맡겨 두고 열심히 주님의 심정을 헤아려 가면서 그 뜻을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생명의 연장은 내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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