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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시73:1-28)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아삽의 시이다. 시편에 나타난 아삽의 시는 모두 12편으로 50편, 73-83편까지이다. 아삽은 다윗 시대의 사람으로 여호와 하나님 의 성전에서 찬송하는 악사들의 대장이었다(대상25:1-6). 오늘날의 찬양 대장 직임이다. 그의 네 아들들도 다윗의 24 악대 중 네 악대의 장들이다. 이들이 모두 아삽의 수하에 있었다. 아삽의 시의 특징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 찬양하 고 있다. 오늘 본문의 시도 하나님 중심 사상과 세상 중심 사상의 중간 에 끼어 고민하다가 세상락을 추구하는 악인의 최후를 성전에 들어갈 때에 깨닫고, 그 비참한 최후를 생각하며 오히려 여호와께 복종하기로 결심하게 되고, "주밖에는 나의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를 부르짖게 된다. 오늘의 본문은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한 고민과 그 해결에 서 나오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신의 확신을 고백하고 있다. 바로 욥이나(욥21:7-15), 하바국의(합1:2-4) 경우와 같다. 곧 하나님 없는 인생 곧 악인이 아무리 형통하더라도 실상은 아무것 도 아니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가 많은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말할 수 없는 큰 복을 가진 자라는 사실을 성전에 들어갈 때에 깨달았 다고 고백한다.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아삽은 악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스스 로 자신을 표현하기를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라 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이런 고민이 있지요. 정말 이 아삽처럼 "거의 실족할 뻔한 고민"이 있었는가. 그 고민이 해결되었는가. 어디에서 그 해결책을 찾았는가. 한번 생각해 보자. 본문 16-17절에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 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 다"라고 했다. "아삽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 해결책을 찾았다고 했다. 아삽이 하나님의 성전을 찾지 않았던 사람일까 하나님을 찬양하는 직임을 맡은 사람인데, 그것도 책임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을 찾지 않 았을까.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오늘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거의 실족할 뻔하였던 아삽의 고민과 그 해결책. 그리고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하는 그의 찬양 을 살펴 보고져 한다.
1.악인의 형통 본문 2절에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 음이로다"라고 했다.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아삽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부러워하였다. 그들이 건강하게 잘 살 고, 그들이 재앙을 당하는 일도 없이 풍족하게 잘 사는 것을 부러워하 고 시샘한 것이다.
⑴.건강하다 본문 4절에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라 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에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의 선한 역사 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악인은 당연히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하고,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오히려 악인은 더 건강하고.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아삽은 지금 진정 내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 은 살아 계신가. 하는 고민 속에 빠져 있다.
⑵.고난이 없다. 본문 5절에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라 고 했다. 보통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나 재앙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 들에게는 징계의 채찍으로 고난을 주신다(히12:6) 이 징계의 채찍이 없 으면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라 "내버려둔 자"이다(롬1:24).
⑶.소득의 풍성 본문 7절에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 보다 지나며"라고 했다. 참으로 부러워할 만한 일이다. 소득이 자신이 소원하는 만큼만 이루 어져도 이 땅 위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느 누가 실패하 기를 소원해서 실패하겠는가. 마음에 소원하는 것만큼만 소득이 이루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있 겠는가.
그런데, 아삽이 지켜보며 "거의 실족할 뻔하였던" 그 악인들 은 마음의 소원보다 더 큰 소득을 취하고 있지 않는가 잠언 16:8절에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다. 사실은 소득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다. "세상 중심"에서는 그것이 통할지 몰라도 "하나님 중심"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소득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의를 겸한 소득이라야 한다. 곧 그 소득이 정당한 소득인가. 하는 것이다. 불의를 겸한 소득이 몇 천억원이 넘어가도 아무 소용없는 것을 우리는 지금도 지켜보고 있다. 오히려 그 소득으로 인하여 정죄를 당하고, 감옥 생활을 하고, 결국은 다 토해 내어야 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지금 이 어려운 "
경제위기 시대"라는 어려운 경제 난국을 맞이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의를 겸하지 못한 소득을 추구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의를 겸한 소득, 정당한 소득을 추구했다면 화려하지는 못할지라도 이 런 어려움은 없었으리라.
⑷.압제하며 산다 본문 8절에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 며"라고 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다. 약하고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함 부로 대하는 것이다. 거침없이 말을 내뱉고 있다. 그들의 말이 곧 법이 된다. 원리나 원칙 같은 것은 없다. 예나 지금이나 가진 자, 힘있는 자, 악한 자의 횡포는 상대방의 형편 과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남을 희생시킬 수도, 해칠 수도, 모함할 수도 있는 것이다. ⑸.사람들이 모이고 본문 10절에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라고 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그곳으로 몰려와 함께 하며, 먹고 마시며,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의인의 길에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 이 적지만 악의 형통함에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⑹.하나님을 무시해도 탈이 없다 본문 11절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 이 있으랴 하도다"라고 했다.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아삽이 가장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른 것은 고사하고서라도 그 악인 이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는 데도 아무 탈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이 내려 쳐야 하는 것인데. 왜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실 까. 본문 12절에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 도다"라고 했다.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 악인들은 항상 편하고 재물은 오히려 늘어만 간 다는 것이다. 아삽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잠언 13:22절에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 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고 했다. 악인의 소득이 많고 재물이 쌓여 간다 해도 그 재물이 그 악인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필 요가 있으면, 의인을 위해 그 쌓은 재물을 들어 사용하신다.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지금 아삽의 눈에는 악인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날로 늘어가고. 악 인의 형통만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거의 실족할 뻔하였던 것" 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눈에는 악인의 형통이 안 보이는가요 아니 남의 형통이 눈에 안 보이는가요 그 형통은 부러워하고 샘낼 것 이 아닙니다. 그 형통의 가치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잠16:9) 잠언 23:17절에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했다. 악인의 형통은 부러워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성도가 불쌍히 여겨야 할 대상이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결국을 알지 못하고 있다 (본문17절). 우리 성도가 해야 할 일은 그들에게 일의 결국을(전12:13) 알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2.의인의 고난 본문 14절에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라 고 했다. 아삽의 삶은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던 것 같다. "종일 재앙"을 당한다.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삶에는 고난이 함 께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고난에 대한 특별한 기록은 없다. 시편 42:3절에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고라 자손의 시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이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조롱에 대답할 말이 없다. 고통당하는 의인의 신앙에 대한 모독이요, 더 나아가 그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다. 물론 의인은 이 땅 위에서나, 아니면 종말론적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끝내는 승리하게 된다. 그러나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는 멸망이다. 이것이 악인의 결국이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당하는 아삽의 마음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삶인데. 그래도 그들보다야 하나님을 향한 삶인데. "종일 재앙"이요, "아침마다 징책"이라니. 본문 13절에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라고 했다. 아삽의 지금의 심정은 "실로 헛되도다" 하는 탄식뿐이다. 이스라엘 중에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찬양을 받으실 성소에 계신 하나님 앞 에서, 신실하고 선하신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노라" 고 했는데. "종일 재앙"이요, "아침마다 징책"이라니.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온 나의 당하는 이 고난이 무엇이란 말인가. "실로 헛되도다", 내 마음을 정히 함이 실로 헛되도다. 내 손을 씻어 무 죄하다는 삶이 실로 헛되도다.
본문 15절에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 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라고 했다. 그래도 아삽은 그 탄식을 입 밖으로 내지를 못했다.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서 공평치 못한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을 정 히 함이 무슨 소용인가. 불평, 원망, 탄식을 말하리라고 생각은 하였 으나 끝내 입으로 말하지는 못한 것이다. 이유는 그래도 자신이 찬양하는 하나님을 알기에 그 하나님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불평, 원망, 탄식을 말하게 되면 "주의 아들들의 시 대"에 대하여 궤휼을 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리는 일이요, 하나님의 백성을 악으로 이끄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본문 16절에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 더니"라고 했다.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그러나 아삽은 지금 당하는 고난의 현실 앞에서 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 이 악인의 형통이 주는 모순을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하고, 알아보려고 궁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알려 하면 알려 할수록,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오히려 고통만 더 심할 뿐. 그 해답은 없었다. 이사야 55:8-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 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을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깨달아 알 수 없는 것이지요. 바로 하늘과 땅 차이라 고 하십니다.
3.인생의 결국 본문 17절에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 았나이다"라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알려 하고, 몰두하고, 고민하고, 심한 고통이 되었던 일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의 결국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아삽의 고민의 문제를 푸는 해답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풀렸다고 한다.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아삽이 "거의 실족할 뻔하였던" 고민의 해답은 "하나님의 성소"에 있었다. 곧 하나님에게 있었다. 그 하나님은 공평치 못했던 하나님이 아니었다. 불평, 원망, 탄식을 목에까지 솟아오르게 한 하나님이 아니었다. 시편 73:18-19절에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 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 였나이다"라고 했다.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아삽이 깨달은 것은 악인의 형통은 "미끄러움"이었다. 그 미끄러움의 넘어짐은 파멸에 던지는 것이요, 졸지 에 황폐케 되는 것이요, 깜짝 놀랄 전멸이었다. 하나님의 심판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는 것이다(히9:27). 악인이든, 선인이든, 피해 갈 수 없는 하나님의 심 판이다. 공의로 심판하는 심판주이시다. 창세기 18:25절에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 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라고 했다. 그렇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실 수 없고, 의인과 악인을 다 살리 실 수도 없다. 이유는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은 공의대로 심판하실 공 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본문 20절에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깨달은 아삽은 악인의 형통이 바로 "일장 춘몽"이로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꿈은 현실이 아니다. 그러기에 사람 들은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한다. 본문 23-24절에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 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 시리니"라고 했다. 주께서 내 오른 손을 붙드시고 인도하사 영광의 집으로 나를 인도하 시리. 오 사랑의 하나님! 나는 주의 앞에 짐승 같이 우매 무지하나이다. 불평, 원망, 탄식이 목에까지 차 올라 "거의 실족할 뻔하였던" 나 를. 그래도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내 손 잡아 주셨나이다. 우매 무지한 나를 인도하셨나이다. 짐승 같은 나를 영접하셨나이다. "거의 실족할 뻔 하였던" 나를, 어리석은 나를 주의 교훈으로 인도하사 영광으로 영접하셨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이 살 곳이 아니다. 저 하늘, 저 천국에 삶의 터전이 있다. 여기는 우리의 머물 곳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이 세상을 통과하는 길가는 나그네이다. 길가는 나그네는 가야 할 곳을 바라보고 쉬지 말고 가야 한다. 뒤돌 아보지 말고, 좌로나 우로 치우쳐 두리번거리지 말고, 지친 몸이라 쉴 곳 찾아 주저앉지 말고, 흥겹고 즐거운 일 있노라며 거기에 휩쓸리지 말고. 가야 할 곳을 바라보며 앞을 보고 쉼 없이 가야 한다. 그것이 나그네의 삶이다.
4.나의 사모할 자 본문 25절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 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했다.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주 앞에 짐승 같고, 우매 무지한 자신을 주께서 사랑의 손길로 붙드시 고 인도하시어 영광으로 영접하신 그 놀라운 은혜. "주밖에는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그 은혜에 감격하여 부르짖는 소리이다. 그 은혜에 감격하여 새롭게 결 단하는 다짐이다. 그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하는 기도이다. 그 은혜에 감 격하여 찬양하는 노래이다. "주밖에는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주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오, 주 하나님은 나의 영원한 분깃이요, 주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오, 주 하나님은 나의 복이시라.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하면 할수록, 알려 하면 할수록, 몰두하면 할수록. 내게 심한 고통이더니.가 됩니다. 이런 "내게 심한 고통이 있는가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아삽처럼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가자. 그곳에서 나의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 나의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해답을 얻자.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아삽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 해결책을 찾았다고 했다. 아삽이 하나님의 성전을 찾지 않았던 사람일까 하나님을 찬양하는 직임을 맡은 사람인데, 그것도 책임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을 찾지 않 았을까. 아니다. 성전을 찾는다고 누구나 다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만난다고 해서 누구나 다 해결책을 얻는 것은 아니다. 달라고 기도하며 호소해야 한다. 누가복음 11:13절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 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님을 주시지 않겠느냐"라 고 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실상은 우리에게 해답을 주실 하나님은 가까이에 계신다. 아니 사랑의 손길로 지금 이 순간도 내 손 잡아 주시고 계신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뿐이다. 욕심에 차 있는 짐승 같은 나이기에 그분을 보지 못한다. 불평, 원망, 탄식으로 가득찬 우매 무지한 나이기에 그분을 보지 못한다. 욕심에 차 잘못 구하기에 구하여도 그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약4:3)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악인의 형통을 생각지 말자. 의인의 고난도 생각지 말자. 공평치 못한 하나님도 생각지 말자. 이 모두는 다 나에게서부터 출발하는 나의 욕심 이다. 이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나는 "주 앞에 짐승"일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나 나는 "주 앞에 우매 무지한 자"일 수밖에 없다.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이스라엘 중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자.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자. 공의의 하나님을 바라보자. 심판 주 하나님을 바라보자. 그 하나님은 내가 불평하고, 원망하고, 탄식할 때도 내 손 잡아 붙드 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짐승 같고 우매 무지한 나를 버리지 않 으시고 당신의 영광의 집으로 영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에게 나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다.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아삽처럼 하나님의 성전에서 문제 의 해결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성전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발걸음이 아니라(사1:12) 문제의 해결을 가지고 돌아가는 생기가 넘치는 발걸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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