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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6:1-1)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소명 받은 사실을 기록한 말씀이다. 대개의 선지자들이 1장 서두에서 자신의 소명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사야는 오늘 본문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선지자 이사야의 소명은 우리 신앙인들 모두가 겪는 표본과 같은 부르심과 그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 거룩에 비춰진 자신의 속되고 죄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회개하게 되고, 죄 사함 얻은 새 사람으로 새 삶을 살게 된다. 그 새 삶은 지난날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이며, 하나님을 위해 바쳐진 삶이 된다. 바로 이사야의 고백에 잘 나타나 있다. 본문 8절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했다. 헌신된 삶이다. 모두를 다 내어놓은 삶이다. 모두를 다 드리는 삶이다. 시간도, 재물도, 부귀도, 명예도, 젊음도, 꿈도, 소망도, 모두 다 내어놓고, 내 가진 것에 연연하지 않고, 내게 돌아올 몫에 미련 두지 않고, 자신을 송두리째 바쳐 헌신한다. 바로 우리 신앙인이 걷는 길이다. 말씀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나면,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고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주 앞에 두 손들고 찾아와 회개하며 죄용서를 구하게 된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죄사함을 얻게 되고 거듭난 새 사람으로 새 삶을 살게 된다. 그 새 삶의 최대의 목표가 바로 헌신이다. 그러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주를 위해 살겠노라고 결심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창1:26-27) 곧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 인간도 갖고 있는데, 그 중에 지(知)정(情)의(意)란 속성이 있다. 지성, 감정, 의지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의 신앙활동도 이 새 가지 요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서 지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신을 바로 알게 된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통회, 자복하며 회개하는 감정의 폭발이 있게 된다. 사죄의 은총으로 거듭남의 새 삶을 결단하게 된다. 곧 굳은 의지로 죄악과의 결별을 결단하게 된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걸어간 소명의 길을 살펴 보며 또한 우리가 걷고 있는 신앙의 길을 스스로 점검해 보고져 한다. 이사야 선지자, 그에게서도 바로 지정의(知情意)의 세 요소가 다 나타난다.
1.지(知)-깨달음 본문 3절에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했다.
1.거룩하신 하나님을 깨달음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환상을 통해 하나님을 뵈었다. 그리고 스랍들의 창화하는 소리도 들었다. 그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깨달아 알게 되고, 온 땅에 가득한 그 영광도 알게 된다.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는 능력도 체험하게 된다. 로마서 1:19절에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 인간에게는 본래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인 지적인 요소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으며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 지적 기능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온전치 못하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다”고 했다. 바로 하나님이 계시하셨다는 말이다. 타락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친히 베일(Veil)을 벗겨 보여 주시는(계시) 것만큼은 알 수 있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도 아니 우리도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다.
2.죄인 된 나를 깨달음 본문 5절에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바라보면, 그 거룩에 비춰진 자신의 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고,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 바로 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죄인이다. 우리의 얼굴에 더러운 것이 묻은 것을 바로 알려면 거울을 들여다보듯, 내 마음에 더러운 죄악이 있는지를 알려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어야 한다. 그 거룩에 비쳐진 나의 추하고 더러운 내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오늘의 우리는 그분을 뵙게 된다.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된다(히10:22) 말씀은 바로 우리 심령을 비쳐 볼 수 있는 거울이다(유다 1:7절)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르고 살아간다. 자신도 같은 죄인이면서 남을 정죄하는 사람이 있다(마7:3) 자신의 욕심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바꾸어 치기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빌3:19)
2.정(情)-회개 본문 5절에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했다. 우리 인간의 가슴 속에는 풍부한 감정이 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있고,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 있다. 감사와 찬양이 있는가 하면 원망과 불평의 감정이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회개하는 감정이 있다.
1.입술이 부정한 자 본문 5절에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통하여 자신의 추하고 더러운 모습, 죄인 된 모습을 지켜본 이사야는 곧 바로 하나님 앞에 회개의 부르짖음을 토하게 된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망하게 된 자신의 비통을 고백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더럽고 추한 부분의 첫 번째가 바로 입술이다.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이 무엇일까 입으로 지은 죄 곧 말로서 지은 죄를 말한다. 아마도 입으로 짓는 죄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모양이다. 또 가장 많은 모양이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속마음 생각을 나타내기 때문에 가장 죄 짓기 쉽고, 또 가장 많이 짓는 죄인 모양이다. 거짓말 그래서 10계명에도 들어 있다(출20:16) 그만큼 중대하다는 의미이다. 어디 거짓말 뿐이겠는가 욕도 있고, 저주하는 말도 있고, 원망하는 말도 있고, 미워하는 말도 있고, 속이는 말도 있다. 그래서 요즈음 청문회를 지켜보면 말 말 말 말 잔치가 되고 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마음 속의 생각을 놓고 정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마음 속의 생각이 말로서 입 밖으로 튀어나올 때는 정죄가 된다. 신약에 와서는 그렇지 않다. 생각 그 자체를 죄로 여긴다. 마태복음 5:28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했다. 구약 율법에서는 “간음치 말라” 하였으나 우리 주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했다. 죄악의 근본적 문제, 행동의 근원이 되는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이다.
2.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본문 5절에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라 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이사야 선지자 입술의 부정함이 너무도 추하고 더러워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를 외치는 이사야 선지자 그가 처한 현실에서 주위를 살펴 보니, 자기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입술이 부정한 사람들이었다. 이는 모든 사람이 말에 실수가 많고 진실이 적다는 것이다. 그만큼 믿을 사람도, 믿을 말도 적다는 말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했다(약3:2) 말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온 몸도 절제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을 절제할 수 있으니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자”라고 했다. 온전한 자, 바로 우리 성도가 바라는 바이다.
3.하나님을 뵈옴 본문 5절에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했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우리 성도들이 바라는 최대의 소망이다. 그것이 이루어졌는데도 이사야 선지자는 오히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고 외친다. 우리가 흔히 “돼지 목에 진주”라고 한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요, 제대로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처럼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도 아무나 뵈옵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왕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이 설 수 없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출33:22) “입술이 부정한 자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있는 이사야에게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옵는다는 것은 죽음이다. 그래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외치는 것이다.
4.제단 숯불 본문 6-7절에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였느니라”고 했다. 여기에 크신 은총이 있고 구원의 감사가 있다. 스랍 중의 하나가 제단 숯불을 취하여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했다. 사죄의 은총이다. 참으로 뜨거운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순간이다. 가슴 속 감정이 다 폭발하는 순간이다. 그 감격! 그 놀라운 은혜! 우리 신앙인의 감정이 최고 절정에 이르게 된다.
3.의(意)-결단 본문 8절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속죄의 은총을 경험하고, 거듭난 생명으로 새 삶을 살고자 하는 이사야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거기에 주저함 없이 즉각 응답하는 이사야 선지자이다.
1.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본문 8절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 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다. 우리 인간이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함은 영적으로 귀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죄 문제만 해결이 되면, 죄에서 성결함을 받게 되면 영의 귀가 열린다. 중간에 가로막힌 담이 사라지기 때문이다(엡2:14) 영의 귀가 열리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고, 부르심에 곧 바로 응답하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을 위하여 일할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당신의 일을 해 가시는 분이다. 온 우주 만물,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 그가 하실 일이 얼마나 많겠는지를 우리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다. 그래서 오늘도 찾고 계신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우리 그 부르심에 즉각 응답할 수 있는가 순종할 마음의 자세는 되어 있는가 헌신할 준비는 되어 있는가. 자심을 한 번 살펴 보자.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부르심을 받고 준비를 하려다 보면 늦어진다.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하면(마8:21) 주님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 주님이 우리를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는다.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산 자는 산 자의 길을 가고, 산 자의 일을 하라신다.
2.날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주를 위해 헌신하는 삶 바로 최고의 삶이다. 나를 위해 사는 삶이 있고, 남을 위해 사는 삶도 있고, 나라를 위해 사는 삶도 있지만 주를 위해 사는 삶이 최고로 값진 삶이다. 거듭난 새 생명으로 새 삶을 사는 자가 감당할 수 있는 삶이다. 아무나 못한다. 아무나 부르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아무나 다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다. 아무나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니다. 죄에서 성결함을 받은 영적 귀가 열린 자에게 들려지는 소리이다. 나를 위해서 살았고, 세상을 위해서 살았던 지금까지의 삶을 청산하고, 이제 주만 위해 살겠노라고 용단을 내리는 위대한 결단이다. 내 굳은 의지의 결단이다. 제단 숯불을 통해 얻은 힘이다. 속죄의 은총에서 오는 힘이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얻은 힘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주를 위해 헌신하기로 준비된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나를 버리고 주를 위해 살기로 위대한 결단을 내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나의 꿈도, 나의 욕망도, 나의 영화도, 주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으며 지,정,의(知情意)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에도 지정의가 잘 갖추어져야 한다.
1.지적으로 치우치다 보면 감정이 메말라 버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신앙이 된다.
2.정적으로 너무 치우치다 보면 감정에 도취되어 환상을 쫓는, 현실이 무시되어지는 신앙이 된다.
3.의지력에 너무 치우치면 신앙이 아닌 신념이 되고 만다.
신앙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신념은 인간에게서 출발한다. 지정의(知情意)가 잘 갖추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아니 실상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지정의가 따로 따로가 아닌 하나가 되어야 한다. 지가 정을 부르고, 정이 의를 부르고, 그래서 하나로 연결되어져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끔 기도원이나 부흥집회에서 은혜 받았다는 간증을 듣게 된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 보고, 또 그들의 교회 생활을 살펴 보면 진정한 은혜 체험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들이 말하는 은혜 체험은 감정에 치우쳐 있음을 알게 된다. 기도원이나 집회에서 고조된 감정이 식어지면 받은 은혜는 벌써 옛이야기가 되고 만다. 감정에 호소해서 상대방에게 그 감정을 전달하려면 그 또한 가능하다. 자기 교회의 교역자가 강단에서 눈물을 흘려 통곡을 한다면 염소가 아닌 양떼라면 함께 울게 되어져 있다. 내 눈에 눈물이 흐른다고 해서 은혜 받은 것이냐
그렇다면 강단 위의 목사들은 코미디, 원맨 쇼를 연구해야 한다. 진정한 은혜 체험은 오늘 본문의 이사야 선지자 같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 거룩에 비쳐진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고 자신의 죄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신앙의 지적 요소이다. 지적 작용으로 자신의 죄를 깨달아 안 사람은 죄에 대한 통회와 자복, 회개가 따라 온다. 이 과정이 바로 신앙의 정적인 요소이다. 강단 위의 강사의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는 죄인임에 말없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요 통곡이다. 가슴을 치고 땅바닥을 쳐도 시원함이 없는 통회와 자복이다. 이 감정의 절정은(climax) 주님으로부터 속죄의 은총을 맛보는 순간이다. 바로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는 사죄의 확신이 주어질 때이다. 그 감사! 그 감격! 경험자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이다. 사죄의 확신을 갖고 거듭난 새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 아마 그 누구도 자신의 욕망에 얽매여 있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잘 하든, 못 하든 주를 위해 헌신하려는 굳은 마음일 것이다. 이 때 주님의 음성 들려 오면 주저함 없이 결단을 내리게 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것이 바로 굳은 의지적 요소이다. 이렇게 신앙의 지정의가 하나가 될 때 이사야 선지자가 체험하는 그런 은혜의 체험이 이루어진다. 우리도 이런 지정의가 갖추어진 신앙생활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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