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 있노라 (사65:1-5)
본문
세례 증서만 있으면 아무 문제 없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은 그리스도교 의 진지함을 천박한 유희로 뒤바꾸어 놓는 것이다. 위의 말은 그 시대의 기독교 이단자요, 오늘날 우리에게는 실존철학자로 잘 알려진 키에르케고르의 말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어떠한가. 대중들의 잡담과 수다스러움 속에 기독교의 어 떠함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함부로 논의되고 있는 시대 아닌가. 진리는 바로 이러한 무책임한 발언들 속에 매몰되고 질식한다. 도무지 진지함이란 찾아보 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다만 판을 치는 것이라고는 환상이니 신비니 하는 이 상 야릇한 종교적 용어들이 대중적 기독교인들의 인기품목이며 신앙을 지배하 고 있다.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상인들의 삶의 양태요 새삼스러울 게 없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사회가 마찬가지듯이 기독교에도 온통 조직과 무슨 협회니, 연합회니 등 이 유행이다. 도무지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고 기득권이 침해받지 않기 위한 세력형성, 그 속에 함몰되어버린 개인의 삶. 그래서 모든 개인들은 그런 협회 혹은 위원회의 일원이 되지 않으면 불안하고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분주하고 바쁘게 하루하루 시간들을 잡아먹는다. 거기에는 진리가 없다. 말씀은 무슨 협회니 혹은 장로교 무슨 측, 무슨 파 라는 곳에 거 하지 않는다. 진리가 자리할 터전은 그러한 곳에 마련되어 있지 않다.
교회는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 역시 그 의미하는 바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미 하나의 조직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개인들의 모임이요 몸이 아니라 도리어 개인들은 상실된 지 오래고 다만 조직적 움직임만 있고, 효율적인 관리와 운 영을 위한 조직관리에 모든 교회들이 혈안이 되어 있는 듯하다. 물론 모든 교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그것이 현저한 것은 흔히 보게 되는 주보주보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통계란과 각종 모임의 명단들, 그리고 무슨 회회들이 그렇게 많은가. 모임의 일원이 되지 못하면 안식을 누리지 못 하고 소외감과 허전함을 면할 수 없다. 그래서 회원에 가입을 하고 각종 회원 권들이 교회 밖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유행이다. 소속감을 통해서 연대의식과 귀속의식을 갖게되고 위안을 얻게 된다. 모든 불안이 잠시 없어지는 듯하다 . 개인의 불안을 조직속에 살짝 숨겨놓고 안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조직은 개인을 이용하고 박탈하지만 개인은 조직을 이용하고 그 속에 자신을 숨겨 놓는다.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다든가. 그러나 그것이 당신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조직이 비대해지 면 조직은 있고 개인은 이제 말살된다. 개인을 위해서 조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을 위해서 개인이 매몰되고 희생이 되는 것이다. 어느덧 개인의 독특성과 고유성은 도무지 필요없게 된다. 다만 맡은 부분에서 철저히 자기 할 일을 잘 하기만 하면 전체는 잘 돌아가게 되어 있다. 분업화 되어 있는 공장 자동화 시스템의 부속품이 되어버리고 만다. 인간이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도 전체의 조직이 생산해 내는 외부로 나타나 보이는 어떤 것들로 인해서 환호성을 지른다. 마치 내가 해 낸 것과 다름없어 보이기 때문이요. 그것은 동시에 나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흐뭇해 하며 또다시 자기의 분업에 충성하고 게으름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고 있는 동안은 열심히 속고 있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것이 어디 내가 한 일인가. 혹 그러한 일을 해내었다고 해서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
잠시 전체 조직의 힘에 대해서 놀랄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그것과 나와 무 슨 상관이 있는가. 인간은 부속품이 아니다. 유기적 전체성 속에서 완전한 개인일 뿐이다. 개인 이 말살되거나 매몰될 수는 없다. 그러나 조직은 개인을 살지 못하게 한다. 개인의 창의성이라는 것을 살려준다는 것도 조직이 요구하는 창의성이요 조직 을 위한 창의성이기에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자유라는 것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무엇에로의 자유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존재적 자유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존재적 자유란 다른말로 인간의 본래적 자기모습 회복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본래적 자기 모습이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일 게다. 회복이라는 표현은 잃었던 것을 찾는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의도대로, 본래의 목적대로 새롭게 빚어지는 것을 말 한다. 그래서 회복이라는 말 보다도 도리어 구원이라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 속에서 자유의 어떠함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에 의해서 안식을 누릴 수 있거나, 어떤 조직을 통해서만 비로소 발을 뻗을 수 있는 그 러한 죄악적 속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자유에로의 한 발짝 내딛음이요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소속되지 않으면 불안해서 살 수 없는 속성으로부터의 자유, 가족이라는 단위 로부터의 자유. 그러한 자유를 갖고있는 자만이 도리어 진정한 가족의 구성원 이 될 수 있으며 교회의 지체가 되고 몸을 이루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조직의 특성에 자신을 드리워놓고서 안식하고 있다면, 교회라는 사회단체의 회원으로서 회원된 지위와 만족감을 갖게 될런지는 몰라도, 거기에서 진정한 교회의 몸을 이루어 나갈 수는 없다. 그래서 교회는 이제 순서를 뒤바꾸어야 한다.
조직을 위해서, 교회 부흥을 위 해서, 교회의 건축을 위해서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개인됨을 위해서 전체가 있고 조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이론이요 명분 뿐이다. 모든 조직들이 사실은 그러한 것을 표방하고 있다. 조직을 위해 조 직이 존재한다고 하는 조직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조직이 되면 이미 조직은 그 조직의 성격이 그러하기 때문에 어느덧 자신의 속성대로 구성원을 움직여 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어느덧 그래서 개인은 존재치 않게 된다. 개인을 위한 조직이라면 지극히 작은 자의 어떠한 문제를 위해서라도 아무런 미련없 이 조직을 희생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것만이 개인을 위한 진정한 조직이라 고 할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러한 극단적인 경우를 당할 때 보면 그 구성원이 희생되지 조직이 희생되고 있는 것은 별로 본적이 없다 . 스스로 조직의 조직됨이 허술하여 조직이 와해되는 경우는 있어도 소수의 개인 때문에 조직이 희생되는 경우는 별로 없어 보인다. 주기적으로 교회의 구성원은 바뀌어도 교회는 남아 있다. 교회라는 곳이 그런 곳인가. 그것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념과 조직만이 중시되고 있는 까 닭이다. 종교적 이념들에 의해서 개인이 농락 당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는 그러한 다수 속에 있거나 조직 속에 머물지 않는다. 그곳에서 진리는 질식당하고 숨막히며 살인당한다. 거할 터전을 마련하지 못하고 거리를 방황 하고 있는 것이다. 대낮에 등불을 들고 거리를 다니던 한 철인이 있었다더니 이렇게 풍요를 구가 하는 종교천국 시대이지만 암흑속에 있는 오늘날이다. 반딧불이라도 켜 들고 광화문 네거리에 걸어다녀야 할 판이다. 인간은 그저 그렇게 살아간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소도 팔고 밭도 사고 교회 도 가고 헌금도 하고 쇼핑도 하면서 생명과 진리니 하는 것도 일용품의 하나 로 가끔 입에 올려보고 충성이니 봉사니 하는 것에 열을 내기도 하면서 그렇 게 살아간다. 형제나 부모가 죽으면 한 바탕 곡을 해대고, 땅에 묻으면서 한 번쯤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끔찍한 일을 당하면 가슴을 쥐어 뜯어보기도 한다. 자녀들의 좋은 성적을 받아보고 기뻐하기도 한다. 이것이 인간의 일생인가. 이 속에서 참인 어떤 것이 운신할 수 있는 자리가 있겠는가. 온통 무의미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온 정신이 팔려서 살아간다 .
그렇다고 거기서 정작 큰 기쁨을 갖거나 행복해 하지도 않는다. 적당히 즐 겁고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그저 살아가는 것이 일상인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일상인들 속에서는 하나님이 당신을 나타내실 수 없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일상적 일상사에 관심을 갖고 있을 뿐이며 그러한 일상사의 선호도에 따라서 복이라는 것이 결정되고 하나님도 그러한 일상사를 그저 풍요롭게 해주시면 되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혼인잔치를 소개하고 그곳에 초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할 일 없는 짓이다. 이미 장가가는 일이 계획되었는데 언제 그러한 잔치에 갈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내가 장가를 우선 가고나서 생각해 보고 결정해도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일상인들의 일상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기에 관심을 끌거나 주목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래서 이렇 게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무관심, 애매모호함, 잡담과 무성한 대중성 속에서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다. 그래서 "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 버지께 기도하라" 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권고한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 무엇에 터전을 세우고 서서 목청을 돋구고 있는가. 목소리를 높이 기 전에 서 있는 그 터전을 집어치우라, 그리고 던져버리라. 돈인가. 명예인 가. 그런 흔하디 흔한 말들은 이제 식상해 있고 이미 버린지 오래 되었다고 생각하고 계시는가. 가족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목회라는 것에 당신의 터전을 세우고 있는가. 정치, 대선, 결혼, 죽음, 직업선택, 승진, 집 장만, 이런 것들은, 이런 모든 것들은 이제 문 밖에다 내다버리고 이제 골방 으로 들어가 은밀한 홀로가 될 수는 없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사실 기도할 능력 조차도 바로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기껏 기도한다는 것이 엉뚱한 것을 구 하고 있으며 엉뚱한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목이 쉬어있다. 그래서 기도도 또 하나의 종교품목일 뿐이며 참 기도의 삶을 찾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 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 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 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7-12).
이러한 말씀과 동시에 이사야서 65장 1절에서 5절과 같은 말씀은 또 왜 기록 되어 있는가.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 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 일 타는 불이로다. 나를 구하지 않고, 찾지 않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이 것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씀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은 도무지 배치되거나 상충되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이 동 일한 하나로 보일 때, 비로소 마태복음 7장 7절의 말씀도 어느덧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될 터이다. 그래서 이 기도의 길, 기도의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이사야 65장 1절과 같은 말씀과 동일하게 마 7장 7절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은 채 그저 구 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행위는 넓은 길을 가는 것과 도무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열심히 기도해 놓고 신나고 있지만, 그것은 무리들의 관심 사항이요 일상인들의 관심사항에 불과한 것이다.
누가 이 기도생활의 삶에 동참할 것인가. 이 기도생활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 길은 좁고 협착한 노정노정이다. 그 결과는 7장 12절의 문 장을 이끌어주는 접속사 `
그러므로` 가 잘 말해 준다. `
그러므로` 그렇게 찾고 구하고 두드려서 좋은 것을 얻으면 당연히 진행되어질 삶. 그것은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는 말씀과 같은 삶의 결과를 빚어낸다. 이것은 일상적 관심사에 매몰된 삶에서 벗어나 진리와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리들로부터의 질타와 외면과 부정과 채찍을 피할 수 없다. 동시에 자신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일상적 군더더기로 인해 겪게되는 갈등의 과정이 신앙의 길이기도 하다. 좁은 문이기 때문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왜 이러한 말씀이 나올 수 밖에 없는가. 그렇다. 그것은 당연하다. 거짓 선지 자가 자신이 거짓 선지자인 줄을 알고 있으면 그러한 선지자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다. 선지자 노릇하는 이들은 자신만이 참 선지자인 줄 알고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어찌 기도하라는 말씀에 이의를 제기할 능력이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아무리해도 기도는 부족한 터에. 그래서 좋은 것으로 주실 줄 믿고 성령님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야 지당한 말씀이다.
그런데 아무 리 입으로는 성령님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자신의 유익이요, 육신의 생각이요, 죄악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가르치고 독려하고 그것을 충만히 베푸는 선지자야 말로 결국 거짓 선지자 노릇을 열심히 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여론의 향배는 그러한 것에 가편투표를 할 것이다. 그것이 무리들의 기대요, 요구사항이요, 의미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서 그러한 요구와 필요 를 부추기고 하나님 나라가 마치 그와 같은 것이라고 선전하는 선지자, 결국 거짓 선지자인 셈이다. 용어가 성경의 용어를 쓰고 있고 기독교적인 의식과 종교행위를 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세례를 받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 렇게 열심히 기도생활이라는 것을 자기 생각에 이끌려서 하기만 하고 그것을 가르치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이요 선지자인가. 온통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다 가 자신의 유익만을 도모하기 때문에 그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 있는 셈이요, 그것이 열매요, 그들의 삶이다. 때문에 신앙생활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다거나 주의 이름으로 귀 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는 것 등으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그러한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가 아니라는 것도 당 연하다. 사람들은 곧잘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대단한 관심 거리이며 신앙생활의 전부인 양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 그러한 것을 간증한다. 그런 것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한다. 도무지 그러한 것들은 열매도 아닐 뿐더러 그것으로 신앙 생활의 진정성 여부가 판가름나는 것이 아닌 데도 말이다. 그렇게 열심히 선지자 노릇을 하였다 하더라도, 나 타나는 현상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번지르해도 다만 거짓 선지자요, `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책망 밖 에는 들을 것이 없다. 성경대로 살려고 하고, 성경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 려고 몸부림 친 것이 도무지 엉뚱한 결과를 낳고만다. 겉에 나타난 껍데기를 가지고서만 순종한다거나 돌비에 새겨있는 것만을 바라다 본다면, 그것은 아 무리 잘 하였다해도 불법이다. 물론 돌비의 의미로는 불법이 아니다. 그것은 돌비의 기준이요, 돌비의 가치관이다.그러나 그것을 완벽하게 지켰다하더라 도 하나님 앞에서는 불법이다. 심비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도무지 참 형상이 아닌, 없어져야 할 허 상을 붙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마져도 완벽하게 지킬 수 없기 에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를 지도해 주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표면이 깨 어지려면 일상인의 일상적 관심에서 파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도리가 없다. 때문에 십자가의 도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가능에로의 통로이며 창구이다. 그러한 죽음을 통해서만, 그리고 날마다의 죽음의 결단이 진행되는 속에서만 자기 자신의 본질에로 나아간다. 하나님이 본래 계획했던 그 본래적 인간으 로 끊임없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교회는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 역시 그 의미하는 바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미 하나의 조직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개인들의 모임이요 몸이 아니라 도리어 개인들은 상실된 지 오래고 다만 조직적 움직임만 있고, 효율적인 관리와 운 영을 위한 조직관리에 모든 교회들이 혈안이 되어 있는 듯하다. 물론 모든 교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그것이 현저한 것은 흔히 보게 되는 주보주보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통계란과 각종 모임의 명단들, 그리고 무슨 회회들이 그렇게 많은가. 모임의 일원이 되지 못하면 안식을 누리지 못 하고 소외감과 허전함을 면할 수 없다. 그래서 회원에 가입을 하고 각종 회원 권들이 교회 밖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유행이다. 소속감을 통해서 연대의식과 귀속의식을 갖게되고 위안을 얻게 된다. 모든 불안이 잠시 없어지는 듯하다 . 개인의 불안을 조직속에 살짝 숨겨놓고 안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조직은 개인을 이용하고 박탈하지만 개인은 조직을 이용하고 그 속에 자신을 숨겨 놓는다.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다든가. 그러나 그것이 당신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조직이 비대해지 면 조직은 있고 개인은 이제 말살된다. 개인을 위해서 조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을 위해서 개인이 매몰되고 희생이 되는 것이다. 어느덧 개인의 독특성과 고유성은 도무지 필요없게 된다. 다만 맡은 부분에서 철저히 자기 할 일을 잘 하기만 하면 전체는 잘 돌아가게 되어 있다. 분업화 되어 있는 공장 자동화 시스템의 부속품이 되어버리고 만다. 인간이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도 전체의 조직이 생산해 내는 외부로 나타나 보이는 어떤 것들로 인해서 환호성을 지른다. 마치 내가 해 낸 것과 다름없어 보이기 때문이요. 그것은 동시에 나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흐뭇해 하며 또다시 자기의 분업에 충성하고 게으름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고 있는 동안은 열심히 속고 있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것이 어디 내가 한 일인가. 혹 그러한 일을 해내었다고 해서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
잠시 전체 조직의 힘에 대해서 놀랄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그것과 나와 무 슨 상관이 있는가. 인간은 부속품이 아니다. 유기적 전체성 속에서 완전한 개인일 뿐이다. 개인 이 말살되거나 매몰될 수는 없다. 그러나 조직은 개인을 살지 못하게 한다. 개인의 창의성이라는 것을 살려준다는 것도 조직이 요구하는 창의성이요 조직 을 위한 창의성이기에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자유라는 것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무엇에로의 자유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존재적 자유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존재적 자유란 다른말로 인간의 본래적 자기모습 회복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본래적 자기 모습이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일 게다. 회복이라는 표현은 잃었던 것을 찾는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의도대로, 본래의 목적대로 새롭게 빚어지는 것을 말 한다. 그래서 회복이라는 말 보다도 도리어 구원이라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 속에서 자유의 어떠함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에 의해서 안식을 누릴 수 있거나, 어떤 조직을 통해서만 비로소 발을 뻗을 수 있는 그 러한 죄악적 속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자유에로의 한 발짝 내딛음이요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소속되지 않으면 불안해서 살 수 없는 속성으로부터의 자유, 가족이라는 단위 로부터의 자유. 그러한 자유를 갖고있는 자만이 도리어 진정한 가족의 구성원 이 될 수 있으며 교회의 지체가 되고 몸을 이루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조직의 특성에 자신을 드리워놓고서 안식하고 있다면, 교회라는 사회단체의 회원으로서 회원된 지위와 만족감을 갖게 될런지는 몰라도, 거기에서 진정한 교회의 몸을 이루어 나갈 수는 없다. 그래서 교회는 이제 순서를 뒤바꾸어야 한다.
조직을 위해서, 교회 부흥을 위 해서, 교회의 건축을 위해서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개인됨을 위해서 전체가 있고 조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이론이요 명분 뿐이다. 모든 조직들이 사실은 그러한 것을 표방하고 있다. 조직을 위해 조 직이 존재한다고 하는 조직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조직이 되면 이미 조직은 그 조직의 성격이 그러하기 때문에 어느덧 자신의 속성대로 구성원을 움직여 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어느덧 그래서 개인은 존재치 않게 된다. 개인을 위한 조직이라면 지극히 작은 자의 어떠한 문제를 위해서라도 아무런 미련없 이 조직을 희생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것만이 개인을 위한 진정한 조직이라 고 할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러한 극단적인 경우를 당할 때 보면 그 구성원이 희생되지 조직이 희생되고 있는 것은 별로 본적이 없다 . 스스로 조직의 조직됨이 허술하여 조직이 와해되는 경우는 있어도 소수의 개인 때문에 조직이 희생되는 경우는 별로 없어 보인다. 주기적으로 교회의 구성원은 바뀌어도 교회는 남아 있다. 교회라는 곳이 그런 곳인가. 그것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념과 조직만이 중시되고 있는 까 닭이다. 종교적 이념들에 의해서 개인이 농락 당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는 그러한 다수 속에 있거나 조직 속에 머물지 않는다. 그곳에서 진리는 질식당하고 숨막히며 살인당한다. 거할 터전을 마련하지 못하고 거리를 방황 하고 있는 것이다. 대낮에 등불을 들고 거리를 다니던 한 철인이 있었다더니 이렇게 풍요를 구가 하는 종교천국 시대이지만 암흑속에 있는 오늘날이다. 반딧불이라도 켜 들고 광화문 네거리에 걸어다녀야 할 판이다. 인간은 그저 그렇게 살아간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소도 팔고 밭도 사고 교회 도 가고 헌금도 하고 쇼핑도 하면서 생명과 진리니 하는 것도 일용품의 하나 로 가끔 입에 올려보고 충성이니 봉사니 하는 것에 열을 내기도 하면서 그렇 게 살아간다. 형제나 부모가 죽으면 한 바탕 곡을 해대고, 땅에 묻으면서 한 번쯤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끔찍한 일을 당하면 가슴을 쥐어 뜯어보기도 한다. 자녀들의 좋은 성적을 받아보고 기뻐하기도 한다. 이것이 인간의 일생인가. 이 속에서 참인 어떤 것이 운신할 수 있는 자리가 있겠는가. 온통 무의미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온 정신이 팔려서 살아간다 .
그렇다고 거기서 정작 큰 기쁨을 갖거나 행복해 하지도 않는다. 적당히 즐 겁고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그저 살아가는 것이 일상인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일상인들 속에서는 하나님이 당신을 나타내실 수 없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일상적 일상사에 관심을 갖고 있을 뿐이며 그러한 일상사의 선호도에 따라서 복이라는 것이 결정되고 하나님도 그러한 일상사를 그저 풍요롭게 해주시면 되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혼인잔치를 소개하고 그곳에 초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할 일 없는 짓이다. 이미 장가가는 일이 계획되었는데 언제 그러한 잔치에 갈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내가 장가를 우선 가고나서 생각해 보고 결정해도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일상인들의 일상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기에 관심을 끌거나 주목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래서 이렇 게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무관심, 애매모호함, 잡담과 무성한 대중성 속에서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다. 그래서 "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 버지께 기도하라" 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권고한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 무엇에 터전을 세우고 서서 목청을 돋구고 있는가. 목소리를 높이 기 전에 서 있는 그 터전을 집어치우라, 그리고 던져버리라. 돈인가. 명예인 가. 그런 흔하디 흔한 말들은 이제 식상해 있고 이미 버린지 오래 되었다고 생각하고 계시는가. 가족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목회라는 것에 당신의 터전을 세우고 있는가. 정치, 대선, 결혼, 죽음, 직업선택, 승진, 집 장만, 이런 것들은, 이런 모든 것들은 이제 문 밖에다 내다버리고 이제 골방 으로 들어가 은밀한 홀로가 될 수는 없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사실 기도할 능력 조차도 바로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기껏 기도한다는 것이 엉뚱한 것을 구 하고 있으며 엉뚱한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목이 쉬어있다. 그래서 기도도 또 하나의 종교품목일 뿐이며 참 기도의 삶을 찾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 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 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 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7-12).
이러한 말씀과 동시에 이사야서 65장 1절에서 5절과 같은 말씀은 또 왜 기록 되어 있는가.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 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 일 타는 불이로다. 나를 구하지 않고, 찾지 않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이 것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씀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은 도무지 배치되거나 상충되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이 동 일한 하나로 보일 때, 비로소 마태복음 7장 7절의 말씀도 어느덧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될 터이다. 그래서 이 기도의 길, 기도의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이사야 65장 1절과 같은 말씀과 동일하게 마 7장 7절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은 채 그저 구 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행위는 넓은 길을 가는 것과 도무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열심히 기도해 놓고 신나고 있지만, 그것은 무리들의 관심 사항이요 일상인들의 관심사항에 불과한 것이다.
누가 이 기도생활의 삶에 동참할 것인가. 이 기도생활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 길은 좁고 협착한 노정노정이다. 그 결과는 7장 12절의 문 장을 이끌어주는 접속사 `
그러므로` 가 잘 말해 준다. `
그러므로` 그렇게 찾고 구하고 두드려서 좋은 것을 얻으면 당연히 진행되어질 삶. 그것은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는 말씀과 같은 삶의 결과를 빚어낸다. 이것은 일상적 관심사에 매몰된 삶에서 벗어나 진리와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리들로부터의 질타와 외면과 부정과 채찍을 피할 수 없다. 동시에 자신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일상적 군더더기로 인해 겪게되는 갈등의 과정이 신앙의 길이기도 하다. 좁은 문이기 때문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왜 이러한 말씀이 나올 수 밖에 없는가. 그렇다. 그것은 당연하다. 거짓 선지 자가 자신이 거짓 선지자인 줄을 알고 있으면 그러한 선지자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다. 선지자 노릇하는 이들은 자신만이 참 선지자인 줄 알고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어찌 기도하라는 말씀에 이의를 제기할 능력이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아무리해도 기도는 부족한 터에. 그래서 좋은 것으로 주실 줄 믿고 성령님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야 지당한 말씀이다.
그런데 아무 리 입으로는 성령님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자신의 유익이요, 육신의 생각이요, 죄악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가르치고 독려하고 그것을 충만히 베푸는 선지자야 말로 결국 거짓 선지자 노릇을 열심히 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여론의 향배는 그러한 것에 가편투표를 할 것이다. 그것이 무리들의 기대요, 요구사항이요, 의미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서 그러한 요구와 필요 를 부추기고 하나님 나라가 마치 그와 같은 것이라고 선전하는 선지자, 결국 거짓 선지자인 셈이다. 용어가 성경의 용어를 쓰고 있고 기독교적인 의식과 종교행위를 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세례를 받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 렇게 열심히 기도생활이라는 것을 자기 생각에 이끌려서 하기만 하고 그것을 가르치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이요 선지자인가. 온통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다 가 자신의 유익만을 도모하기 때문에 그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 있는 셈이요, 그것이 열매요, 그들의 삶이다. 때문에 신앙생활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다거나 주의 이름으로 귀 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는 것 등으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그러한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가 아니라는 것도 당 연하다. 사람들은 곧잘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대단한 관심 거리이며 신앙생활의 전부인 양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 그러한 것을 간증한다. 그런 것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한다. 도무지 그러한 것들은 열매도 아닐 뿐더러 그것으로 신앙 생활의 진정성 여부가 판가름나는 것이 아닌 데도 말이다. 그렇게 열심히 선지자 노릇을 하였다 하더라도, 나 타나는 현상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번지르해도 다만 거짓 선지자요, `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책망 밖 에는 들을 것이 없다. 성경대로 살려고 하고, 성경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 려고 몸부림 친 것이 도무지 엉뚱한 결과를 낳고만다. 겉에 나타난 껍데기를 가지고서만 순종한다거나 돌비에 새겨있는 것만을 바라다 본다면, 그것은 아 무리 잘 하였다해도 불법이다. 물론 돌비의 의미로는 불법이 아니다. 그것은 돌비의 기준이요, 돌비의 가치관이다.그러나 그것을 완벽하게 지켰다하더라 도 하나님 앞에서는 불법이다. 심비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도무지 참 형상이 아닌, 없어져야 할 허 상을 붙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마져도 완벽하게 지킬 수 없기 에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를 지도해 주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표면이 깨 어지려면 일상인의 일상적 관심에서 파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도리가 없다. 때문에 십자가의 도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가능에로의 통로이며 창구이다. 그러한 죽음을 통해서만, 그리고 날마다의 죽음의 결단이 진행되는 속에서만 자기 자신의 본질에로 나아간다. 하나님이 본래 계획했던 그 본래적 인간으 로 끊임없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