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을 듣고 (행27:21-26)
본문
우리 나라의 역사 현실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노도 광풍 설레는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척의 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 그 배를 구경하는 사람들조차도 아슬아슬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민주화,통일 논의,학원 분규,노사 분쟁,폭력,퇴폐 풍조,청소년의 탈선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제들이 파도처럼 설레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주 입원 환자를 심방하기 위해 시내 모병원에 간 일이 있습니다.면회 시간이 12시부터로 이때는 점심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병상마다 도시락이 배달되고 있었습니다.처음엔 누가 보낸 선물이려니 생각하다가 웬 도시락인가 하고 물었더니 식당이 파업이어서 주문한 도시락을 배달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심정이 착잡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 도처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의 한 단면에 불과합니다.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극한 대립과 투쟁으로 우리 역사는 얼룩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극한 상황을 해결할 길이 없겠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중 본문 말씀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276명을 태운 알렉산드리아호가 로마로 가다가 풍랑을 만난 것이 본문의 주된 내용입니다. 지중해 남단 마다라 반도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항구 미항에 배가 정박하고 있을 때,바울은 그곳에서 겨울을 난 후 떠나자고 했고 선주와 선장은 바로 떠나자고 했습니다. 바울이 미항에서 겨울을 지내고 떠나자고 한 것은 영적 통찰 때문이었고,선장과 선주가 바로 떠나자고 한 것은 육적 경험에 의한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의 영적 통찰에 의하면,겨울철임에도 불구하고 항해를 강행할 경우 하물과 배 그리고 선객들의 생명에 막대한 타격이 있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선장이나 선주는 자신들의 경험과 노련한 기술이라면 겨울 항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영적 통찰력과 육적 판단력을 구분해야 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목사는 사회 경험이나 사업 경영에 있어선 문외한 입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영적 통찰력으로 관찰하면 “저것은 안하는게 좋겠다”라는 결론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하면 안되는데”라는 판단이 설 때도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저 개인의 경험에 의하면 그런 경우 그 사업이나 그 일은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일이 자기 경험이나 확신만으로 성취되고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아무리 세상 경험이나 지식이 풍부하고 경륜이 하늘처럼 높다고 해도 영적 통찰력이나 경험 앞에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사람만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실,미항에서 떠나면 손해 본다고 말했던 바울은 가난한 전도자였고 로마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호송되어 가고 있던 죄수였습니다. 만일 바울이 그 당시 총독이었거나 황제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죄수였고 바다에 대해선 문외한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의 말은 묵살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가 바울 가슴 가득히 들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다시 말하면 바울의 통찰과 예언은 한낱 죄수의 실없는 넋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였고 예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미항을 떠나 행선하다가 그레데 항 부근에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7:18을 보면,배에 실었던 짐을 모조리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유는 배의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7:19을 보면,배안에 있던 기구들,예컨대 의자,탁자 등 일상 도구들까지 모조리 버렸습니다. 그리고 20절을 보면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라고 했고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했습니다. 지중해의 거센 풍랑 앞에서는 백부장이 차고 있던 칼도,선장이 가지고 있던 기술도,선주가 가지고 있던 돈도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대통령이 없어서입니까 국회가 없어서입니까 대학이 없어서입니까 군인이 없어서입니까 경찰이 없어서입니까 교회가 없어서입니까 우린 바울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21절에서 바울은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내 말을 듣고”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미항을 떠나지 말고 거기에서 과동하자는 바울의 말을 들었더라면 알렉산드리아호의 꼴이 그토록 처참해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린 지중해 그레데 항 해역에서 풍랑 만난 알렉산드리아호의 모습을 통해 우리 시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경가 람세이(Ramsay)의 말에 의하면,그레데 한가운데에는 우뚝 솟아 있는
2,100미터 높이의 이다(Ida) 산맥이 있는데 그 산맥의 영향으로 두 반대 기류가 충돌하여 태풍을 일으키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중해의 풍랑은 이다(Ida) 산맥을 중심으로 반대 기류가 충돌하는 데서 일어나는 기류의 충돌 현상인 것입니다. 우리 시대 역시 민주화라는 거대한 산맥을 중심으로 여러 종류의 난기류가 서로 충돌하면서 역사의 소용돌이와 격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폭풍과 파도를 바라보는 시각과 소리도 가지가지입니다. 여당의 소리도 들리고 야당의 소리도 들립니다. 소위 이것은 정치권의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솔직하게 말하면 당리 당략과 정권욕이라는 양념을 친 탁한 소리입니다. 재야의 소리,운동권의 소리도 높게 들려 옵니다.노동자의 소리도 들려 오고 학생들의 소리도 들려옵니다. 그리고 심지어 공산주의의 소리도 들려 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소리도 복음은 아닙니다.그 소리들 속엔 욕심과 증오와 투쟁이 섞여 있기 때문에 진정한 해결은 없습니다. 우리는 민주화를 진실로 열망합니다.그러나 민주화가 곧 무질서나 폭력과 동일시 되어서는 안됩니다. 민주주의란 한 마디로 민(民)이 자기의 주권을 찾고 행사하는 주의이며 질서주의이기도 합니다. 진실로 민주주의가 실천되는 나라는 민중 스스로가 질서를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선진국일수록 질서와 대화와 타협으로 난제들을 풀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파괴,폭력,무질서,난동은 진정한 민주화나 민주주의의 산물이 아닙니다.
또한 가지는,우리는 민주화를 갈망하지 공산화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한 마디로 공산주의는 무신론이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땅에서 수많은 순교자의 피를 흘리게 했고 교회를 불태웠습니다.그리고 지금도 그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는 통일이 되더라도 공산화 통일은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동안 정권 수호나 연장을 위해 걸핏하면 공산당으로 몰아 사람을 가두고 유린했던 집권자들의 과오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그런 만행은 철저히 통제되고 추방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서 그 어떤 이유나 정황으로라도 공산화는 방지되어야 합니다. 무신론과 유신론의 구분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구분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유는 주의나 주장은 변할 수 있습니다만 신앙은 천년 만년이 지나도 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다는 문화와 하나님 있다는 문화가 한데 섞여 희석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의 당면 과제는 민주화보다는 신앙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신앙화만 제대로 된다면 민주화는 저절로 따라오도록 되어 있습니다.다시 말하면 예수 정신,예수 교훈대로만 산다면 민주화는 절로 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27:11을 보면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고 했습니다.바로 여기에 알렉산드리아호의 비극이 있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며 최첨단의 장비를 갖추었다던 타이타닉호 역시 빙산을 조심하라는 수차례의 경고 신호를 무시한채 자만심으로 항진하다가 빙신과 충돌,전원이 몰사했고 지금까지도 그 선체를 인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떠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묵살했으며,파선됐습니다. 격동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린 누구의 말을 듣고 따라야 하겠습니까 교회가 듣고 따라가야 할 소리는 정치가들의 능변이 아닙니다. 재야나 운동권의 소리도 아닙니다. 공산주의의 선동도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야 합니다. 제 방엔 라디오가 있습니다.기독교 방송을 듣기 위해 다이얼을 돌리느라면 주파수가 맞을 때까지 시끄러운 잡음이 들립니다.그러나 일단 주파수만 맞으면 은혜로운 찬송도,설교도 들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 당시 백부장이나 선주나 선장이 자신들의 경험이나 판단을 유보하고 바울의 말에 주파수를 맞췄더라면 그런 불행을 겪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나를 믿고 내 경험을 믿고 내 판단을 믿고 살면 죽도록 고생만 하고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소리에 다이얼을 맞추고 거기서 들려 오는 소리대로 순종하면 일도 쉽고 행복하게 됩니다.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어났습니다.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되살려 노를 저어 보았습니다.그러나 그것은 헛수고였습니다.갖은 수를 다 써 보았으나 파도가 너무 크고 높았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주님을 불렀습니다.“주여,주여,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마침내 주님의 소리가 들렸습니다.그 소리는 짧고 간단했습니다.그러나 크고 힘이 있었습니다. “잠잠하라.고요하라.” 그 한 마디에 바다는 잔잔해졌습니다. 여러분,그 어떤 사람이 지상 낙원을 이루어 준다고 속삭여도 그것이 주님의 소리가 아니면 귀기울이지 맙시다. 그 누가 나타나서 신천 신지로 우리를 인도해 준다고 떠벌려도 쫓아가지 맙시다. 민중이 주인이 되고 노동자가 잘사는 천국을 만들어 준다고 웅변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소리가 아니면 따라가지 맙시다. “내 말을 듣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소리,그 계시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다 다이얼을 고정시킵시다.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예수님은 아닙니다.그러니까 거기에 혹하여 따라나서면 안됩니다. 한 번 혼이 났던 백부장과 선장과 선주 그리고 그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은 이제 고분고분 바울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생명을 건졌습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근심,걱정,불안,절망,슬픔,좌절,단절,증오,대립,투쟁 따위들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소리,그 말씀 앞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믿읍시다. 우리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고 세계의 주인이시고 인류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평정하시고 해결하시는 것입니다.믿고 의지하고 순종합시다.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갑시다. “내 말을 듣고!” 아멘.
그런데 이상하게 병상마다 도시락이 배달되고 있었습니다.처음엔 누가 보낸 선물이려니 생각하다가 웬 도시락인가 하고 물었더니 식당이 파업이어서 주문한 도시락을 배달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심정이 착잡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 도처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의 한 단면에 불과합니다.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극한 대립과 투쟁으로 우리 역사는 얼룩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극한 상황을 해결할 길이 없겠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중 본문 말씀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276명을 태운 알렉산드리아호가 로마로 가다가 풍랑을 만난 것이 본문의 주된 내용입니다. 지중해 남단 마다라 반도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항구 미항에 배가 정박하고 있을 때,바울은 그곳에서 겨울을 난 후 떠나자고 했고 선주와 선장은 바로 떠나자고 했습니다. 바울이 미항에서 겨울을 지내고 떠나자고 한 것은 영적 통찰 때문이었고,선장과 선주가 바로 떠나자고 한 것은 육적 경험에 의한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의 영적 통찰에 의하면,겨울철임에도 불구하고 항해를 강행할 경우 하물과 배 그리고 선객들의 생명에 막대한 타격이 있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선장이나 선주는 자신들의 경험과 노련한 기술이라면 겨울 항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영적 통찰력과 육적 판단력을 구분해야 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목사는 사회 경험이나 사업 경영에 있어선 문외한 입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영적 통찰력으로 관찰하면 “저것은 안하는게 좋겠다”라는 결론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하면 안되는데”라는 판단이 설 때도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저 개인의 경험에 의하면 그런 경우 그 사업이나 그 일은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일이 자기 경험이나 확신만으로 성취되고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아무리 세상 경험이나 지식이 풍부하고 경륜이 하늘처럼 높다고 해도 영적 통찰력이나 경험 앞에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사람만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실,미항에서 떠나면 손해 본다고 말했던 바울은 가난한 전도자였고 로마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호송되어 가고 있던 죄수였습니다. 만일 바울이 그 당시 총독이었거나 황제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죄수였고 바다에 대해선 문외한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의 말은 묵살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가 바울 가슴 가득히 들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다시 말하면 바울의 통찰과 예언은 한낱 죄수의 실없는 넋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였고 예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미항을 떠나 행선하다가 그레데 항 부근에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7:18을 보면,배에 실었던 짐을 모조리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유는 배의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7:19을 보면,배안에 있던 기구들,예컨대 의자,탁자 등 일상 도구들까지 모조리 버렸습니다. 그리고 20절을 보면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라고 했고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했습니다. 지중해의 거센 풍랑 앞에서는 백부장이 차고 있던 칼도,선장이 가지고 있던 기술도,선주가 가지고 있던 돈도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대통령이 없어서입니까 국회가 없어서입니까 대학이 없어서입니까 군인이 없어서입니까 경찰이 없어서입니까 교회가 없어서입니까 우린 바울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21절에서 바울은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내 말을 듣고”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미항을 떠나지 말고 거기에서 과동하자는 바울의 말을 들었더라면 알렉산드리아호의 꼴이 그토록 처참해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린 지중해 그레데 항 해역에서 풍랑 만난 알렉산드리아호의 모습을 통해 우리 시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경가 람세이(Ramsay)의 말에 의하면,그레데 한가운데에는 우뚝 솟아 있는
2,100미터 높이의 이다(Ida) 산맥이 있는데 그 산맥의 영향으로 두 반대 기류가 충돌하여 태풍을 일으키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중해의 풍랑은 이다(Ida) 산맥을 중심으로 반대 기류가 충돌하는 데서 일어나는 기류의 충돌 현상인 것입니다. 우리 시대 역시 민주화라는 거대한 산맥을 중심으로 여러 종류의 난기류가 서로 충돌하면서 역사의 소용돌이와 격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폭풍과 파도를 바라보는 시각과 소리도 가지가지입니다. 여당의 소리도 들리고 야당의 소리도 들립니다. 소위 이것은 정치권의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솔직하게 말하면 당리 당략과 정권욕이라는 양념을 친 탁한 소리입니다. 재야의 소리,운동권의 소리도 높게 들려 옵니다.노동자의 소리도 들려 오고 학생들의 소리도 들려옵니다. 그리고 심지어 공산주의의 소리도 들려 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소리도 복음은 아닙니다.그 소리들 속엔 욕심과 증오와 투쟁이 섞여 있기 때문에 진정한 해결은 없습니다. 우리는 민주화를 진실로 열망합니다.그러나 민주화가 곧 무질서나 폭력과 동일시 되어서는 안됩니다. 민주주의란 한 마디로 민(民)이 자기의 주권을 찾고 행사하는 주의이며 질서주의이기도 합니다. 진실로 민주주의가 실천되는 나라는 민중 스스로가 질서를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선진국일수록 질서와 대화와 타협으로 난제들을 풀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파괴,폭력,무질서,난동은 진정한 민주화나 민주주의의 산물이 아닙니다.
또한 가지는,우리는 민주화를 갈망하지 공산화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한 마디로 공산주의는 무신론이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땅에서 수많은 순교자의 피를 흘리게 했고 교회를 불태웠습니다.그리고 지금도 그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는 통일이 되더라도 공산화 통일은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동안 정권 수호나 연장을 위해 걸핏하면 공산당으로 몰아 사람을 가두고 유린했던 집권자들의 과오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그런 만행은 철저히 통제되고 추방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서 그 어떤 이유나 정황으로라도 공산화는 방지되어야 합니다. 무신론과 유신론의 구분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구분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유는 주의나 주장은 변할 수 있습니다만 신앙은 천년 만년이 지나도 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다는 문화와 하나님 있다는 문화가 한데 섞여 희석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의 당면 과제는 민주화보다는 신앙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신앙화만 제대로 된다면 민주화는 저절로 따라오도록 되어 있습니다.다시 말하면 예수 정신,예수 교훈대로만 산다면 민주화는 절로 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27:11을 보면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고 했습니다.바로 여기에 알렉산드리아호의 비극이 있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며 최첨단의 장비를 갖추었다던 타이타닉호 역시 빙산을 조심하라는 수차례의 경고 신호를 무시한채 자만심으로 항진하다가 빙신과 충돌,전원이 몰사했고 지금까지도 그 선체를 인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떠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묵살했으며,파선됐습니다. 격동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린 누구의 말을 듣고 따라야 하겠습니까 교회가 듣고 따라가야 할 소리는 정치가들의 능변이 아닙니다. 재야나 운동권의 소리도 아닙니다. 공산주의의 선동도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야 합니다. 제 방엔 라디오가 있습니다.기독교 방송을 듣기 위해 다이얼을 돌리느라면 주파수가 맞을 때까지 시끄러운 잡음이 들립니다.그러나 일단 주파수만 맞으면 은혜로운 찬송도,설교도 들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 당시 백부장이나 선주나 선장이 자신들의 경험이나 판단을 유보하고 바울의 말에 주파수를 맞췄더라면 그런 불행을 겪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나를 믿고 내 경험을 믿고 내 판단을 믿고 살면 죽도록 고생만 하고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소리에 다이얼을 맞추고 거기서 들려 오는 소리대로 순종하면 일도 쉽고 행복하게 됩니다.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어났습니다.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되살려 노를 저어 보았습니다.그러나 그것은 헛수고였습니다.갖은 수를 다 써 보았으나 파도가 너무 크고 높았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주님을 불렀습니다.“주여,주여,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마침내 주님의 소리가 들렸습니다.그 소리는 짧고 간단했습니다.그러나 크고 힘이 있었습니다. “잠잠하라.고요하라.” 그 한 마디에 바다는 잔잔해졌습니다. 여러분,그 어떤 사람이 지상 낙원을 이루어 준다고 속삭여도 그것이 주님의 소리가 아니면 귀기울이지 맙시다. 그 누가 나타나서 신천 신지로 우리를 인도해 준다고 떠벌려도 쫓아가지 맙시다. 민중이 주인이 되고 노동자가 잘사는 천국을 만들어 준다고 웅변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소리가 아니면 따라가지 맙시다. “내 말을 듣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소리,그 계시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다 다이얼을 고정시킵시다.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예수님은 아닙니다.그러니까 거기에 혹하여 따라나서면 안됩니다. 한 번 혼이 났던 백부장과 선장과 선주 그리고 그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은 이제 고분고분 바울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생명을 건졌습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근심,걱정,불안,절망,슬픔,좌절,단절,증오,대립,투쟁 따위들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소리,그 말씀 앞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믿읍시다. 우리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고 세계의 주인이시고 인류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평정하시고 해결하시는 것입니다.믿고 의지하고 순종합시다.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갑시다. “내 말을 듣고!”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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