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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습 이대로! (눅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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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두 목사는 술을 많이 먹던 사람이었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30잔은 거뜬히 마실 수 있는 술꾼이었습니다. 술이 취하면 특히 예수쟁이를 괴롭히는 것이 특기였습니다. 평양의 사람들도 김익 두라하면 머리를 흔들 지경입니다. 1900년 선교사 스왈른 목사 의 설교를 듣고 예수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사실을 다른 사람 에게는 말 못하고 슬금 슬금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두 달 동안 입에 술을 대지 않았습니다. 옛날 친구들과 길가던 중 친구들이 술을 권했습니다. 약을 먹는 중이라 술을 못먹는 다고 했습니다. 천하의 술꾼이 술을 못먹겠다니 중병이 걸린줄 알고 물었습니다. 무슨 병에 무슨 약을 먹고 있느냐고 물었지요. 신약과 구약을 먹는다고 김익두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강요에 못이겨 술을 먹고 베드로 처럼 슬피울고 집을 교인들이 사는 곳으로 옮 긴 이후 입에 술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익두 목사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오늘 본문의 삭개오 생각이 납니다. 극적인 전환이나 변화의 정도가 꼭 삭개오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잊어 버리지 말아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미신에서는 신을 노엽게 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항이고 민감하 게 처신해야할 사항입니다. 액을 만나지 않는 것이 신을 섬기는 최대의 목적이지요. 피할 수 없는 액운은 땜질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액땜을 하는 것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은 그래서 항상 신의 눈치를 살펴야 합니다. 오늘도 노여운 얼굴은 아닌 가 오늘은 화나시지 않았을까 내가 뭐 실수라도 하지 않았나 매사가 이런 식입니다. 대순진리회라는 곳에서는 사람을 만나면 대뜸 큰일이 났다고 말합니다.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몇 일 안에 큰 재앙을 만날 거라고 하면서 접근한다고 합니다.
삭개오(카이오스)는 전통적 유대이름으로서, '청결한 사람', '의 로운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여리고 세관장이었 습니다. 여리고 세관은 일급지 세무소였습니다. 베레아 지방에서 요단강을 건너가는 통상의 길목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요단강 동 편 길르앗 지방으로부터 수입되는 향유 등의 상품에 통관세를 징 수했을 것입니다. 세관장은 로마의 막강한 공권력을 이용해 자율 적으로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부도 축 적했지요. 당시 세리들은 '허가낸 도둑'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 습니다. 부자이고, 관리 였으나 유대 사회에서는 죄인 취급을 받 았습니다. 상종못 할 사람들로 분류 되어 있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가 삭개오 집에 들어가려 하자, 수군거리면 서 말합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 갔도다."라고 말이 지요. 우리 주님은 죄인의 집에도 들어 가십니다. 죄인도 용납하 십니다. 죄인도 받아 주십니다. 예수님이니까 당연하지 뭐 이렇 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혁명적 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버러지 같이 보는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죄인 사랑에 있다고 합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절) 그러기에 우리 주님의 최대의 목적은 용납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차에 걸처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리 마태의 집에서도 똑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죄인 부르고, 병자 고치러 왔 지, 깨끗한 사람 건강한 사람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고(마9장). 그런 까닭에 탕자의 비유에서 처럼, 문밖의 기다림, 아들을 보자 달려 나오는 아버지, 끌어 안고 볼에 입을 맞추는 아버지, 잔치 를 베푸는 아버지, 이것이 주님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심판자로만 생각합니다. 몽둥이나 회초리를 항상 들고 계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근본적 으로 우리를 용납하시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사랑의 종교라고 하면 비기독교인들은, 아 예수가 사랑을 강조 했지 그래 인간들은 서 로 사랑하고 살아야지, 뭐 이렇게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핵심이 빠져 버렸습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사랑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은 사랑한다는 멧세지가 기독교 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요, 복음입니다. 사랑과 용납이 얼마나 인생을 윤기 있게 하는 지 아시지요 정 죄는 사탄의 일입니다. 그러나 용납과 사랑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진정한 자기 긍정은 하나님의 용납에서 발생합니다. 질책 속에 자란 아이는 자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자아긍정이 부족해 요, 자긍심(Self esteem)이 부족해요. 부모의 용납과 사랑이 강 하면 아이는 자아긍정심이 높아집니다. 어거스틴은 방탕한 생활 가운데서도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시대의 탕아가 성자가 되었습니다. 베토벤은 17살 때 청각장애자가 되 었습니다.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벽에 부닥쳤지요,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유서를 썼어요. 죽으려는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을 위해 정성을 쏟으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베토벤은 '어머니'하고 오열을 토하면서 유서를 찢었습니다. 더욱 노력을 했습니다. 위대한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쓴 교 향곡 1번에서 9번 까지는 사랑에서 시작해서 환희로 끝나다고 합니다. 이것이 감싸안는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저는 어릴적 어머니가 가정 예배를 드리자고 하면 죽어라고 싫 어했습니다. 예배시간이 너무 길었고, 특히 어머니의 기도가 너 무 길어 중간에 잠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저도 어릴적 어머님의 잠결기도를 종종 듣곤 했습니다. 때로는 잠든 저의 이마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향한 그 어머니의 기도의 행진은 칠순이 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찬송 중에 하나는 "날마다 주와 버성겨"(333장)입니다. "날마다 주와 버성겨 그 크신 사랑 버리고 방탕한 길로 가다가 어머님 기도 못있어. 새사람 되어 살려고 나집에 돌아 갑니다. 메마른 들과 험한 산, 갈바를 몰라 헤메며 영죽게 된 지경에서 어머님 기도 못잊어 나집에 돌아 갑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자녀의 마음에 각인이 됩니다. 질책과 책망, 신 경질과 야단으로 자녀가 바로 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자녀를 결정적인 순간에서 구한 다는 사실을 기 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이 자녀를 용납하는 겁니다. 이 세상 사람 아무도 몰라 주는 상황에 내 몰릴 때, 세상을 포기 하고 싶을 때 어머니의 사랑이 그를 끌어 안게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세요. 이것도 한계가 있습니요. 내가 심한 죄책감에 시달릴 때, 절망에 빠져 허우적 거릴 때, 나도 나를 용 납할 수 없을 때, 최종적이고 근본적인 용납은 하나님에게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구요 하나님에게는 최종 면제의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경찰이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무혐의 처분 할 테니, 조서 꾸미 지 않고 가라 할 테니 가시오. 그런다고 무죄가 됩니까 안됩니다. 검찰이 기소를 결정 하면 꼼작 없이 당합니다. 검찰이 내사 종결 해 놓고 무죄 추정을 하고 그런다고 무죄입니까 안될 말입니다. 결국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이 감옥에 간 것처럼 나중에 기소할 상황이 되면 또 꼼짝 없이 당합니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무죄가 선포 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그를 처벌 할 수 없습니다. 최종 판단의 권한을 가진 법정이 무죄를 선언한 까닭입니다. 마찬 가지입니다. 친구가 나를 용납할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가 나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이고 근본적인 용납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근 본적인 자유와 해방은 하나님으로부터 만 옵니다. 이것을 기억하 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 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6)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죄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그러기에 내모습 이대로 가야 합니다. '제가 교회 좀 나오세요' 그러면 대개 이렇게 말 합니다. '술 끊으 면 교회 나갈 께요' '돈 좀 험하고 벌고 나서 그 다음에 깨끗한 마음으로 교회 나갈께요' 그럽니다. '아직 저는 마음이 못되서 저 같은 사람 교회 나가면 적응 못해요, 오히려 교회 버려요' 그럽니다. 전부 깨끗하고 전부 거룩하고 전부 완벽해 지면 그 다음에 교회 나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세요, 교회는 깨끗한 옷을 입 고 가는 예식장이 아닙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목욕탕입니다. 때묻은 몸을 씻는 목욕탕입니다. 다 깨끗하고 나서는 목욕탕엘 갈 필요가 없습니다. 전부 깨끗해 지고 나서는 교회 올 필요가 없지요. 교회는 때묻은 사람, 더러운 사람, 부정한 죄인들이 오는 곳입니다.
깡패 김익두 목사도 왔고, 열 일곱명이나 죽인 살인자 김대두도 왔고, 시대의 탕아 어거스틴도 왔습니다. 테러리스트 바울도 왔 고, 세 번이나 예수를 팔아 넘긴 배반자 베드로도 예수 앞에 섰 습니다. 부하 장수의 아내를 범한 부끄러운 얼굴 다윗도 왔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낭패한 여인도 결국 주님께로 왔습니다. 먼 먼 방황에서 돌아와 예수 앞에 선 사람 치고 회개하고 변화의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세요! "보고자 하되"(3절) 삭개오가 예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당 시 여리고 시의 유지인 세관장이 뽕나무 위에 까지 오른 것은 단 순한 호기심을 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많고 키는 작고 이런 와중에 포기하지 않고 뽕나무 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열등감으 로, 내가 손가락질 받는 세리로서 예수께 관심을 끌 수 있을 까 이렇게 생각했다면 나아가지 못했을 겁니다. 교만한 마음으 로, 내가 세관장으로 이렇게 뽕나무 위에 까지 올라가야 하나 이렇게 회의를 했다면 오늘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5절) 주님의 초청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뽕나무에 까지 올라가 예수께로 나아가겠다는 표시에 대한 예수의 용납입니다. 받아 주심입니다. 죄인이요 동포를 등치는 자요, 불의한 재산으로 부를 누리는 자요 로마에 빌 붙은 민족 반역자요, 야훼 하나님의 경건성을 잃어 버린 이방인 같은 삭개 오입니다. "내려 오너라" 그런 삭개오를 받아 주시는 주님의 음성 입니다. 네 집에 유하여야 겠다.(5절) 예수님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단순 히 용납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숫제 집에 들어가 함께 먹고 함께 사귀며 친구가 되겠다는 겁니다. 운명 공동체가 되겠다는 겁니다. 완전한 구원의 선포입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 하며(6절) 삭개오의 기쁜 모습입니다. 송 아지를 잡고 가락지를 끼우고 잔치를 벌이는 분위기입니다. 네배 갚고, 재산의 절반을 나누고(8절) 보세요, 변하고 있습니다. 깨끗해지고 있습니다. 율법은 10/2만 드리면 되었습니다. 잘못 착복한 재산은 네배나 변상해 주고, 재산과 수입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겠다고 합니다. 이제 삭개오는 누구 보다 깨끗해 지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거룩해 지고 있습니다. 이전의 삭개오와 180도 달라지고 있어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께 나올때는 더러운 손, 부정한 몸 그대로 나왔지만, 예수를 만난 이후에 구체적으로 바뀌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믿음의 순서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을 진정 만난 사람 치고 삶의 변화가 진행되지 않은 분은 없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주 심의 그 넓으신 품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죄악되고 연약하며 초 라한 모습들을 거리낌없이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사2:3) 하나님께 용서 받지 못할 죄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용서 받지 않아도 될 사소한 죄도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죄의 크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부정의 정도가 문제가 아닙니다. 때묻 은 상태의 심각도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나아가느냐 머물러 있느냐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자주 강조를 해서 말씀 하십니다. 마음으로 음흉한 생각을 하면 간음한 것이라 했습니다. 마음으로 미워하면 살인이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면 큰 멧돌을 메고 바다에 빠져 죽을 죄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 면, 가장 사소한 우리의 행동도 큰 죄가 됩니다. 아니, 이렇게 우리를 옭아 맬려고 했나 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닙니다.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모두가 우리 주님 앞에서는 의 로울 수 없는 허물 많은 부정한 자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 앞에 나가지 않고도 깨끗할 정도로 의로운 사람은 한 사람 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용서를 먹고 삽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삽니다. '주님과 동행하십니까'의 저자 후안 까를로스가 그의 책에서 이 렇게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느냐 너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너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제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보면 속이 뒤집힙니다. 제 성격은 너무 형편없습니다. 안됩니다. 저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저 때문에 조금 화가 나신 것 같았습니다. "내 아들 예수의 피가 나에게는 충분 히 좋은 것이었는데 그것이 너를 위해서는 충분치 못하다고 주장 하고 있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 하나님께서는 다그쳐 물으셨습니다."네가 나보다 더나은 존재냐" 저는 받아들인다는 것이 행 위와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아무 리 형편없는 인간일지라도 예수님의 피는 충분합니다. 그리고 만 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받아 주 셨다면 우리도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좋습니다.
미래의 나의 완벽한 상태가 아닙니다. 주님 앞에 설 만큼의 정돈 된 이 다음의 내가 아닙니다. 지금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느냐 마느냐의 문제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매순간 초청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것이 의로움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지금의 상태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지금의 의로움도 우리 주님의 관심사항이 아닙니다. 몸부림 치는 한 인간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몸부림 자체를 거룩하게 보아 주십니다. 주님께 나아가려는 이런 몸부림이 있는 한 그리스도인은 패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정 의입니다. 삭개오 사건의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매순간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대가 주님께 나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그대를 향한 변화 의 역사도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주님께 나아가기를 중단하지 않는 여러분의 발걸음에 작자미상의 이 기도문을 드립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셨고 나를 사랑 하십니다. 나는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과 같이 있었었습니다. 그 분은 그때 나를 아셨고 지금 나를 완전하게 아십니다,. 나를 철 두철미하게 아십니다.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사랑하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용납하십니다. 나는 용납받을 만하 며 사랑스러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자녀입니다. 무한 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내가 없이는 완전하 지 않습니다. 나는 개별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독 특합니다, 하나님은 독특한 사람으로 나를 창조하셨고 나를 사랑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그분 자신의 것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 속에 살아계시며 나는 그분 속에 살아있습니다. 그 분은 내 안에 거주하시며 나를 그분의 자녀라고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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