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춤으로 높아진 ‘그 분’의 뜻 (빌2:5-11)
본문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요,정치가요,군인이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부통령을 하던 존 애덤스였습니다.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듬해인 1798년 미국은 뜻하지 않은 외환(外患)을 만났습니다. 신대륙에 널려있는 막대한 이해관계에 뛰어든 프랑스가 미국에 무력도발을 한 것입니다. 이같은 위기 상황에서 이를 해결할 만한 전략가는 이미 퇴임한 전직 대통령 워싱턴밖에 없다고 생각한 애덤스는 워싱턴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애덤스 대통령은 워싱턴에 대한 예우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참모총장의 계급은 중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워싱턴은 특별대우를 마다한 채 중장계급을 달고 현역으로 복귀,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건졌습니다.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계급을 초월했습니다. 미국 국민은 지금까지도 그를 미국 역사상 위대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겸손과 여호와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겸손은 위대한 사람이 반드시 지녀야 할 품격입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낮아질 대로 낮아진 사도 바울이 예수님이 겸손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참된 겸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이 땅에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그의 가난하심은 성도들에게 부요함을 주셨고(고후 8:9) 그가 받으신 질고와 고난과 굴욕은 성도들에게 사유의 은총과 참된 자유와 평화와 승리를 주셨습니다(사 53:4,5).
예수님 자신의 뜻은 아니었지만(눅 22:42)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9절).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뒤에 오는 그리스도의 승귀(昇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웃과 교회의 덕을 위하여,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포기해야 할 삶의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는 성도의 제1 목적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떠한 모습으로 높이셨습니까. 모든 피조물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이는 그 이름만이 가장 존귀하고 피조물의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며 모든 피조물의 흠모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을 받습니다(요 16:23-2
4).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행 3:6). 표적과 기사가 나타납니다(행 4:30). 귀신이 물러가고(행 16:18), 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롬 6:23). 예수님은 모든 것을 정복하는 승리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의지하는 모든 성도들 역시 모든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행 9:27-29).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시인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찢으신 그 사랑에 감격, 감사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자유로운 복종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롬 1:4) 받았기 때문에 그분의 통치를 시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 왕의 왕이 되신 그 높으신 이름을 널리 세상에 반포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신앙 고백은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하심”(요 5:23)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곧 그를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이 됩니다(마 10:40).
우리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때 예수님처럼 비천함과 굴욕속으로 낮아짐을 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내가 스스로 낮아지고 있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그 귀하신 높아지심은 그분의 낮아지심의 정도가 너무도 깊었기 때문입니다.
새 봄과 함께 맞는 예수 부활의 아침. 예수님의 높아지심이 그 분의 낮아지심의 정도와 비례한다는 엄연한 진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을 살피는 성찰의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듬해인 1798년 미국은 뜻하지 않은 외환(外患)을 만났습니다. 신대륙에 널려있는 막대한 이해관계에 뛰어든 프랑스가 미국에 무력도발을 한 것입니다. 이같은 위기 상황에서 이를 해결할 만한 전략가는 이미 퇴임한 전직 대통령 워싱턴밖에 없다고 생각한 애덤스는 워싱턴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애덤스 대통령은 워싱턴에 대한 예우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참모총장의 계급은 중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워싱턴은 특별대우를 마다한 채 중장계급을 달고 현역으로 복귀,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건졌습니다.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계급을 초월했습니다. 미국 국민은 지금까지도 그를 미국 역사상 위대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겸손과 여호와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겸손은 위대한 사람이 반드시 지녀야 할 품격입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낮아질 대로 낮아진 사도 바울이 예수님이 겸손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참된 겸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이 땅에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그의 가난하심은 성도들에게 부요함을 주셨고(고후 8:9) 그가 받으신 질고와 고난과 굴욕은 성도들에게 사유의 은총과 참된 자유와 평화와 승리를 주셨습니다(사 53:4,5).
예수님 자신의 뜻은 아니었지만(눅 22:42)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9절).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뒤에 오는 그리스도의 승귀(昇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웃과 교회의 덕을 위하여,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포기해야 할 삶의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는 성도의 제1 목적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떠한 모습으로 높이셨습니까. 모든 피조물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이는 그 이름만이 가장 존귀하고 피조물의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며 모든 피조물의 흠모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을 받습니다(요 16:23-2
4).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행 3:6). 표적과 기사가 나타납니다(행 4:30). 귀신이 물러가고(행 16:18), 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롬 6:23). 예수님은 모든 것을 정복하는 승리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의지하는 모든 성도들 역시 모든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행 9:27-29).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시인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찢으신 그 사랑에 감격, 감사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자유로운 복종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롬 1:4) 받았기 때문에 그분의 통치를 시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 왕의 왕이 되신 그 높으신 이름을 널리 세상에 반포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신앙 고백은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하심”(요 5:23)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곧 그를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이 됩니다(마 10:40).
우리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때 예수님처럼 비천함과 굴욕속으로 낮아짐을 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내가 스스로 낮아지고 있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그 귀하신 높아지심은 그분의 낮아지심의 정도가 너무도 깊었기 때문입니다.
새 봄과 함께 맞는 예수 부활의 아침. 예수님의 높아지심이 그 분의 낮아지심의 정도와 비례한다는 엄연한 진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을 살피는 성찰의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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