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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자의 구원 (롬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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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부모님들은 대부분 자녀를 많이 낳아 키웠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키우시느라 한평생 고생하신 부모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자식은 많고 먹을 것은 없어 고생입니다. 배고파가시며 자식을 키워 놓았는데 왜 자식을 이렇게 많이 낳아 우리를 못 먹이고 못 입히고, 뒷바라지를 못 했느냐며 불평불만 하는 자식이 있는가하면 별로 입히고, 먹이고, 뒷바라지도 못했는데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부모님을 극진히 공경하는 자녀도 있습니다. 즉 부모님의 은혜를 알며 감사감격하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부모님의 은혜를 모르고 불평불만 만 하는 자식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울은 동족 앞에서 고민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만이 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과 상관없이 살며 하나님의 은혜를 모를까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방인은 하나님의 구원의 반열에 서 있을까 그리고 나 바울과 몇 명은 이스라엘인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 바울은 이 문제를 구약에서 풀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은 버림받고, 이삭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삭의 아들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백성으로 부름 받았으면 다 구원을 받는 줄 알았는데 그 중 남은 자만 구원을 얻는 것을 알았습니다. (롬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또한 하나님은 엘리야 시대에도 이스라엘 전체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고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왕상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이 남은 자는 포로 생활도안도 회당에서 하나님을 섬겼고, 고래스왕이 자유를 선언했을 때 고향에 가서 성전을 재건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남은 자만 구원받음을 알았습니다. 이 시대의 남은 자는 우리 성도들입니다. (롬9:27)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스라엘 중 바울이 남은 자가 있는 이유는
첫째 하나님의 작정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도 있고 버리실 수도 있으십니다. 롬9:15절에 보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즉 바로의 적극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은 그들의 기도 때문도, 모세를 따르는 결단 때문도, 이스라엘의 신념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작정 때문입니다. 또한 롬9:21에 보면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을 만드셨습니다.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그릇을 만들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진노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결코 진노를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면 거부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점에 가서 선택하고, 인생의 여러 면에서 자유로이 선택하면서도 하나님의 선택을 인정치 않는 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으로 구원 받기도 버립 받기도 한다면 두가지의 질문이 생깁니다.
1선택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불공평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롬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 은 그렇게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2바로를 강팍케하신 하나님이 마자막때 어찌 바로를 심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의 교리는 부합리하다고 생갓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바울은 여기서 선택의 교리를 변호하지 않고 인간의 죄악을 지적합니다. 선택의 특권도 없으시다면 어찌 하나님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항의 할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든 물건들이 우리에게 항의 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둘째로 남은자가 된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롬9: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호세아의 아내는 음탕한 여인 고멜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도망한 고멜을 다시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호세아야 네가 아내로 인하여 괴롭듯이 나도 이스라엘로 인하여 괴롭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그들로인하여 괴롭지만 내가 그들을 사랑하듯이 너도 그 고통을 안고 아내를 사랑하며 나의 예언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돔성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 모두 분노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보면 그들보다 깨끗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늘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벌써 끝났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 심판하신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용서의 교훈을 베드로에게 하실때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하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원하시는 한가지는 ‘의’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 우려고 율법을 행했으나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은 의를 얻었으니 믿음으로 말미암았습니다. (롬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반석이시오, 믿지 않는 자에게는 거치는 돌이요 부딪히는 돌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남은 자의 반열에 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므로 늘 감사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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