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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위로하며 살자 (고후1:3-7)

본문

서두에는 인류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선언이 있는데, 이르시기를 “(사40:1)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40:2)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였습니다. 이 위로의 선포가 인류의 구원의 소식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메시아의 출현에 관한 예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위로의 주님이셨습니다. 위대하신 위로자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그러나 위로받을 사람은 정작 누구이며,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께서 복있을 사람들에게 관하여 말씀하실 때에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셨는데, 누구를 두고 “애통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나 위로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멀쩡하게 기분좋아서 히죽거리며 사는 사람을 왜 위로하겠습니까 그를 위로하려고 하면 그는 오히려 위로하려는 사람을 보고 딱한 표정을 지을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지금 모진 수고를 하고, 박해를 받고,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위로 받을 대상들입니다.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에 관하여 생각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위로를 필요로 하고 있는가를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하여 관심이 없으면 고작 우리가 위로받고 싶어하는 내용이라는 것들은, 세월이 갈수록 몸에 기운이 쇠하는 것,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 나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 이런 시시한 것들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위로받겠다고 “주여, 주여, 저를 위로해 주시옵소서.” 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먼저 참 위로르 받을 만한 대상이 되기를 주님 앞에서 다짐하는 오늘의 예배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마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이러한 계약서를 주님께서 남기고 가셨는데, 이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서 오늘도 수고하는 여러분은 반드시 그 위로의 날을 볼 것입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계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 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계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신실히 믿고 오늘도 복음 전파의 사역을 위해 힘쓰는 교우 여러분은 틀림없이 그 위로의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위로의 날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주님께 위로를 받으며 살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어째서 주님은 우리의 위로자이십니까 주님은 무엇으로 우리들을 위로하고 있습니까
1. 주님께서 먼저 당하신 고난이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여럿이 단체로 선생님께 벌을 받으면, 혼자서 벌을 받을 때보다 마음이 놓입니다. 마찬가지로, 나 혼자 이 처참한 핍박을 당하는 것이라면, 내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미 고난의 길을 가셨고, 이미 우리들을 위로하실 준비를 완벽하게 해 두셨습니다. 가장 위협적인 십자가의 형벌로, 아무도 편을 들어주지 않는 고독한 상황에서, 제자의 배신으로 몸이 팔리워, 만인 앞에서 벗기우고, 핌뱉음을 당하고, 채찍을 맞으며, 죄인의 누명을 쓰고, 호흡이 끊어질 때까지 온몸으로 아파하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든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면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더욱 알고 사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격려와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에서 말씀하시기를 “(사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하였습니다. 질고를 안다는 것은 질고를 겪을 만큼 겪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들의 삶을 살아 보셨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를 몸으로 겪을 만큼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수고를 아시며,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을 위로의 근거인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죽음의 위협이 다가오고 있을 때에 이를 피하지 않으시고 맞부닥치셨습니다. 당신의 몸은 십자가 위에서 부숴지고 꺼져 가면서도 끝끝내 당신의 길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으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이 예수님에게 목숨을 내놓는가 아니면 복음 전파를 중단하겠는가고 묻고 있을 때에 의연히 당신의 목숨을 맡겨 주시면서 그와 동시에 죽음의 권세를 무효화시키셨습니다. 죽음이 주님을 삼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의 위협을 삼켜 버리셨습니다.
2.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님께서 우리의 위로이십니다. 요한복음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라고 하셨고,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고 하셨는데, 이 보혜사라는 말은 한 마디로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위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위로한다는 것에는, 상대방의 입장을 전적으로 알아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며, 또한 같은 편에 서 주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갈멜 산에서 대결을 하였습니다. 그는 외톨이였습니다. 다수결로 하자면 그는 참패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편이었고, 하나님은 그의 편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제단에 큰 불을 보내 주셨고, 그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가 쫓김을 당하고 굶주릴 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셨고, 그에게 물과 음식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가 시작될 무렵의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광야에 나아가 사탄을 물리치시던 때에 성령님께서 주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마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님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늘 승리하게 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첫 순교자인 스데반이 돌무더기 속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에 스데반에게 하늘이 열리는 것과 주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곁에 서 계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행7:55) 스데반이 성령님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라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언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면 우리는 아무 두려워할 일이 없습니다.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게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하셨으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 것입니까
3.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주셨으니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사망이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사망이 우리에게 무슨 기운을 쓸 수가 있단 말입니까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먼저 하늘에 오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하셨고, 먼저 오르신 하늘 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살 것이라 하셨으니 그 소망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끊임없이 부활과 영생을 향하여 동반하기를 권고하십니다. “(고후4: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강력한 후견인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분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을 두려워 할 것입니까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인간적으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쓴잔”을 물리쳐 주실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바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의지가 그 나약한 인간성을 내리누른 것입니다. 순교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더 깊이 깨닫게 되는 일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다른 사람을 참된 위로로 위로할 수 있으려면, 복음 진리를 위하여 먼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 진리를 세상에 펴기 위하여 우리가 한 발자국이라도 나서기 시작하면 대뜸 우리에게는 고난이 닥쳐옵니다. 이것은 다만 지금 모슬렘 국가들이나 무신론적 이데올로기를 표방하고 있는 사회에서만이 아니요,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어디라도 의당 전도자에게는 핍박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사도 바나바는 그의 이름 자체가 “위로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예루살렘 교회 창설에 있어서 혁혁한 유공자입니다. 그는 교회를 위해서라면 있는 재산을 다 팔았고, 자신의 여생과 목숨을 다 바쳤습니다. 그는 항상 성령님 안에서 화해의 매개자로 살았고, 복음 전파의 최일선에 서서 모든 믿는 무리들 앞에서 홀로 전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나바처럼 살아가는 성도들을 통하여 오늘날도 우리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계십니다. 위로의 사람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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