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의 은총(1) (창45:7)
본문
요셉은 17세의 어린 소년이었을 때 형들의 시기로 애굽으로 팔려 갔습니다(창37:2). 그로부터 13년후인 30세에 일약, 당시 세계 제국이었던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창41:46). 그가 총리가 된 지 7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풍년 5년을 겪고, 이제 2년째의 흉년을 맞고 있을 때였습니다(창45:6). 요셉의 나이 37세될 때였습니다. 고향을 떠난 지 꼭 20년만에 두 번째 애굽에 국물 사러 왔던 형 들을 만나 자기의 실체를 알리던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 때 요셉이 형들에게 쏟아 놓은 축복의 메시지는 요셉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그 엄청난 말씀들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이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45:7)는 말을 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했다는 말을 봅니다. 여기 보존 이란 말은 남 겨 놓음 이란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 가문에 남겨 놓기 위하여 자기를 애굽으로 먼저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남은 자 의 은총을 알려 주는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남은 자 (= remnant)란 에덴 동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전 기간 가운데, 그 시대 시대마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하는 가운데도, 하나님이 남겨 두신 소수의 의인들을 가리킵니다. 우리 함께 남은 자의 은총 이란 메시지를 몇 주간 계속하기를 원합니다.
I. 남은 자와 관련된 대표적 용어들을 봅니다 첫 번째 경우, 솨알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경우는 성경에 약 260여번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가치하고(신3:11), 수적(數的)으로 적다(신4:27, 렘8:3)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력 적으로 힘이 없고, 수적으로 적어 보잘 것 없는데도, 힘이 강하고 수적으로 많은 자들 중에서 죽 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남긴바 되어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입 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두 번째 경우 파랏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80여회 사용되었습니다. 그 뜻은 극적인 도피와 구출을 가리킵니다(사4:2, 욜2:32).
저들은 막다른 죽음의 위경에서 극적으로 구출을 받아, 도피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의 경우 말랏이란 말입니다. 이 단어는 89회 정도로 사용되고 있는데, 팔랏 과 같이 도피, 구출의 뜻이 있습니다. 한 집단(민족) 전체가 떼죽음을 당하는 전멸의 위기에서 안전하게 도피하여 생명을 건지게 되는 남은 자의 변모를 암시하는 말입니다(삿3:29, 렘32:3-4, 렘51:4
5).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 앞에서 진멸되던 위 기 중에서도 하나님이 남겨 두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번째의 경우, 야탈이란 단어입니다. 이 말은 약 110여회 이상이나 사용되었는데 그 본 래 뜻은 남기다 잔류하다 처지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멸망의 위기 가운데 생존자(남은 자) 를 가리키는 말과 대조적으로, 이미 주어진 축복의 약속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를 뜻합니다(창 44:20, 삿9:5). 다섯 번째 경우 사리드란 단어입니다. 이 말은 구약에 28회 이상이나, 사용되었는데 전 쟁의 재난에서 생존자를 가리킵니다(신3:3, 수10:20). 여섯 번 째 경우, 이할리트란 말이 있습니다. 역시 저항할 수 없는 막다를 위기로부터 살아 남은 생존을 의미하였습니다(암4:2, 9:1, 겔23:25). 이렇게 여러 가지 경우로 사용된 남은 자들 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을 이어가는 거룩한 그 루터기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어가는 역사의 계승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렇 다면 그들이야말로 그 시대에 나타낸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들이 아닌가
Ⅱ. 남은 자의 역사
1. 첫사람 아담은 남은 자의 대표였습니다. 인류의 조상이었던,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과 세운 행위 계약을 파괴한 자 였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 하와는 사탄의 침노를 받아,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정녕 죽음의 저주 아 래 들어가고 말았습니다(창2:17).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메시야의 약속을 받고, 가죽옷을 얻어 입어 하나님의 구속 역사 에 처음으로 참예함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과 인간이 원수가 되게 하고 여자의 후속으로 오실(메시야)자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므로 그들을 구원하기로 하였습니다(창3:15). 그 입증으로 아담과 하와를 위 하여 희생된 동물(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혀 주었습니다(창3:21). 그래서 아담은 처음 범죄 자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구속 은총에 처음으로 참예한 자가 되었습니다.
2. 족장 전후 시대에 남은 자들을 봅니다.
(1) 셋이 있습니다. 우리는 첫 살인자 가인에서 죽임을 당한 아벨을 대신하여 태어난 셋(Seth)은 남은 자의 반열에 참여하였습니다(창4:25-26). 그는 아벨 대신에 하나님이 남겨 두신 다른 씨였습니다.
(2) 노아와 그 가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의 사상이 가정 결정적으로 드러난 사건은 세계적인 대 홍수 심판 가운데 남은 자가 된 노아와 그 가족들이었습니다. 노아와 홍수 사건을 계시하는 성경 여러 곳에서 생명 보 존 이란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창6:19, 20) 물이 온 세상을 덮었을 때 땅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습니다. 새와 육축과 들짐승,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 말하자면 코로 생물의 기식 을 호흡하는 모든 것이 완전히 버림을 당하는 중에,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창7:23)고 하였습니다. 노아가 그의 가족이 대 홍수 가운데 살아 남은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 를 입었기 때문이라 고 하였습니다(창6:8). 그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 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훗사가 되었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이 노아와 그 가족을 남겨 두었을까 방주 사역을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와 그 가족의 구원을 위함이었습니다. 그와 그 가족을 구원한 것은 의의 후사를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노아 생존의 의미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와 그 가족은 120여년 동안에 충분하고, 넉넉하게 저들 생존의 의미를 다하였습니다.
(3) 아브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구속사의 무대는 열국 중에 아브람의 선택으로부터 노골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은 그를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에서 불러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축복의 땅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창11:31, 12:1). 마침내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하나님의 새로운 은총 의 날개 아래로 옮겨가는 생의 대 이동을 단행했습니다(창12;
4). 하나님이 아브람을 선택했고,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세계에로(가나안 영역) 옮 겼습니다. 그 목적은 그로 하여금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하고,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기(복의 근원)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창12:2-3). 이것이 그가 열국의 백성 중에 남은 자로 선택받은 하나님의 이유였습니다. 이 이유에서 아브 람은 자기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4) 롯이 있습니다. 그 다음 불과 유황불이 쏟아져 멸망을 당하던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롯과 그의 가족은 남은 자 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롯이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 아브람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었더라고 하였습니다(창19:29). 그는 소돔과 고모라 백성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롯의 고통을 보고 의로운 롯, 의로운 심령이라고 하였습니다(벧후2:6-8). 그는 저주의 성, 멸망의 성, 소돔 고모라성에서 살아 남은 생존자의 명부에 올랐습니다.
3. 출애굽 시대에 남은 자들을 봅니다. 요셉은 자기 아비의 가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살아 남아야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은 저들 을 향한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큰 구원이 생존의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창45:7). 세계적인 죽음의 흉년이 계속되던 재앙의 날들 중에 야곱의 자손들은 애굽의 기름진 땅 고센에 서 살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던 애굽의 새 왕 바로는 고센 땅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을 멸종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애굽왕 바로는 히브리 여인들이 아들을 낳으면, 모조리 나일강 에 던지라고 하는 무서운 선민 멸종의 법령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모세를 살아 남겨, 오히려 바로 왕의 궁실에서 출애굽 역사의 새 장을 위하여 자라나게 하였습니다(출2:9-10). 마침내 저들은 사백 수십 년의 종된 애굽을 떠나는 거대한 민족의 대 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이 아닌 가나안 땅에서 저들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들 광야 교회 40년은 실로 하나님을 노엽게 한 불신앙과 반역의 역사였습니다(히 3:16). 그럴때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의 심판이 여지없이 임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 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남겼습니다(민14:29-30). 결코 가나안을 향한 선민의 구속 역사는 멈추거나 중단 될 수가 없었습니다. 남은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의 행진은 계속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갈렙과 여호수아가 남겨진 자의 반열 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저들은 광야 교회 운동의 두 번째 주자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은 자의 은총! 그것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류에게 나타낸 구속 역사의 은총을 보여 주기 위 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구원 계획에 기초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무조건적 선택에 새 출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구속사의 진행에서 나타냅니다. 인간 편에서는 불가항력적 은혜 뿐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정말 반시동안 하늘이 고요한 어간에 남겨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일본 식민의 압제 아래 36년이나 고난 당하던 선조들의 비극적 암흑시대를 지난 다음에 이 세상에 왔습니다. 우리는 6.25 참극(慘劇)의 암흑 속에서 살아 남은 자들이고, 그 후손들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6.25 46주년을 맞는 역사적 시점에서 남은 자 의 은총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생존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잠정적인 평화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 사명을 확실히 깨달아야 됩니다. 결코 주객(酒客)으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남은 자로서의 나의 나 된 신분과 위치와 사명을 자각해야 합니다. 죽음의 죄악에서 주님의 용서로 살아 남은 자가 있습니까 죽음의 질병에서 살아 남은 자가 있습니까 죽음의 핍박에서 살아 남은 자가 있습니까 죽음의 전쟁 중에서 살아 남은 자가 있습니까 죽음에 이르는 사업 실패에서 살아 남은 자가 있습니까 죽음에 이르는 절망에서 절망하지 않고 살아 남은 자가 있습니까 왜 하나님이 나를 남겨 주었을까 어쩌자고 나를 남겨 주었을까 남은 자의 은총 앞에 감사해 야 합니다. 그리고 남은 자의 사명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요셉은 자기 생존의 존재 의미를 저 렇게도 분명히 하였습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우리의 생존 의미는 신령한 야곱의 가족을 보존(남겨 놓음)하기 위함이 아닌 가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기 위하여 우리를 남겨 놓지 않았던가 그래서 세계를 받은 교회로서 사명을 받지 않았는가
I. 남은 자와 관련된 대표적 용어들을 봅니다 첫 번째 경우, 솨알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경우는 성경에 약 260여번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가치하고(신3:11), 수적(數的)으로 적다(신4:27, 렘8:3)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력 적으로 힘이 없고, 수적으로 적어 보잘 것 없는데도, 힘이 강하고 수적으로 많은 자들 중에서 죽 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남긴바 되어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입 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두 번째 경우 파랏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80여회 사용되었습니다. 그 뜻은 극적인 도피와 구출을 가리킵니다(사4:2, 욜2:32).
저들은 막다른 죽음의 위경에서 극적으로 구출을 받아, 도피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의 경우 말랏이란 말입니다. 이 단어는 89회 정도로 사용되고 있는데, 팔랏 과 같이 도피, 구출의 뜻이 있습니다. 한 집단(민족) 전체가 떼죽음을 당하는 전멸의 위기에서 안전하게 도피하여 생명을 건지게 되는 남은 자의 변모를 암시하는 말입니다(삿3:29, 렘32:3-4, 렘51:4
5).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 앞에서 진멸되던 위 기 중에서도 하나님이 남겨 두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번째의 경우, 야탈이란 단어입니다. 이 말은 약 110여회 이상이나 사용되었는데 그 본 래 뜻은 남기다 잔류하다 처지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멸망의 위기 가운데 생존자(남은 자) 를 가리키는 말과 대조적으로, 이미 주어진 축복의 약속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를 뜻합니다(창 44:20, 삿9:5). 다섯 번째 경우 사리드란 단어입니다. 이 말은 구약에 28회 이상이나, 사용되었는데 전 쟁의 재난에서 생존자를 가리킵니다(신3:3, 수10:20). 여섯 번 째 경우, 이할리트란 말이 있습니다. 역시 저항할 수 없는 막다를 위기로부터 살아 남은 생존을 의미하였습니다(암4:2, 9:1, 겔23:25). 이렇게 여러 가지 경우로 사용된 남은 자들 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을 이어가는 거룩한 그 루터기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어가는 역사의 계승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렇 다면 그들이야말로 그 시대에 나타낸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들이 아닌가
Ⅱ. 남은 자의 역사
1. 첫사람 아담은 남은 자의 대표였습니다. 인류의 조상이었던,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과 세운 행위 계약을 파괴한 자 였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 하와는 사탄의 침노를 받아,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정녕 죽음의 저주 아 래 들어가고 말았습니다(창2:17).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메시야의 약속을 받고, 가죽옷을 얻어 입어 하나님의 구속 역사 에 처음으로 참예함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과 인간이 원수가 되게 하고 여자의 후속으로 오실(메시야)자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므로 그들을 구원하기로 하였습니다(창3:15). 그 입증으로 아담과 하와를 위 하여 희생된 동물(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혀 주었습니다(창3:21). 그래서 아담은 처음 범죄 자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구속 은총에 처음으로 참예한 자가 되었습니다.
2. 족장 전후 시대에 남은 자들을 봅니다.
(1) 셋이 있습니다. 우리는 첫 살인자 가인에서 죽임을 당한 아벨을 대신하여 태어난 셋(Seth)은 남은 자의 반열에 참여하였습니다(창4:25-26). 그는 아벨 대신에 하나님이 남겨 두신 다른 씨였습니다.
(2) 노아와 그 가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의 사상이 가정 결정적으로 드러난 사건은 세계적인 대 홍수 심판 가운데 남은 자가 된 노아와 그 가족들이었습니다. 노아와 홍수 사건을 계시하는 성경 여러 곳에서 생명 보 존 이란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창6:19, 20) 물이 온 세상을 덮었을 때 땅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습니다. 새와 육축과 들짐승,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 말하자면 코로 생물의 기식 을 호흡하는 모든 것이 완전히 버림을 당하는 중에,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창7:23)고 하였습니다. 노아가 그의 가족이 대 홍수 가운데 살아 남은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 를 입었기 때문이라 고 하였습니다(창6:8). 그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 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훗사가 되었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이 노아와 그 가족을 남겨 두었을까 방주 사역을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와 그 가족의 구원을 위함이었습니다. 그와 그 가족을 구원한 것은 의의 후사를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노아 생존의 의미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와 그 가족은 120여년 동안에 충분하고, 넉넉하게 저들 생존의 의미를 다하였습니다.
(3) 아브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구속사의 무대는 열국 중에 아브람의 선택으로부터 노골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은 그를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에서 불러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축복의 땅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창11:31, 12:1). 마침내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하나님의 새로운 은총 의 날개 아래로 옮겨가는 생의 대 이동을 단행했습니다(창12;
4). 하나님이 아브람을 선택했고,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세계에로(가나안 영역) 옮 겼습니다. 그 목적은 그로 하여금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하고,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기(복의 근원)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창12:2-3). 이것이 그가 열국의 백성 중에 남은 자로 선택받은 하나님의 이유였습니다. 이 이유에서 아브 람은 자기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4) 롯이 있습니다. 그 다음 불과 유황불이 쏟아져 멸망을 당하던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롯과 그의 가족은 남은 자 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롯이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 아브람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었더라고 하였습니다(창19:29). 그는 소돔과 고모라 백성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롯의 고통을 보고 의로운 롯, 의로운 심령이라고 하였습니다(벧후2:6-8). 그는 저주의 성, 멸망의 성, 소돔 고모라성에서 살아 남은 생존자의 명부에 올랐습니다.
3. 출애굽 시대에 남은 자들을 봅니다. 요셉은 자기 아비의 가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살아 남아야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은 저들 을 향한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큰 구원이 생존의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창45:7). 세계적인 죽음의 흉년이 계속되던 재앙의 날들 중에 야곱의 자손들은 애굽의 기름진 땅 고센에 서 살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던 애굽의 새 왕 바로는 고센 땅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을 멸종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애굽왕 바로는 히브리 여인들이 아들을 낳으면, 모조리 나일강 에 던지라고 하는 무서운 선민 멸종의 법령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모세를 살아 남겨, 오히려 바로 왕의 궁실에서 출애굽 역사의 새 장을 위하여 자라나게 하였습니다(출2:9-10). 마침내 저들은 사백 수십 년의 종된 애굽을 떠나는 거대한 민족의 대 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이 아닌 가나안 땅에서 저들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들 광야 교회 40년은 실로 하나님을 노엽게 한 불신앙과 반역의 역사였습니다(히 3:16). 그럴때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의 심판이 여지없이 임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 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남겼습니다(민14:29-30). 결코 가나안을 향한 선민의 구속 역사는 멈추거나 중단 될 수가 없었습니다. 남은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의 행진은 계속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갈렙과 여호수아가 남겨진 자의 반열 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저들은 광야 교회 운동의 두 번째 주자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은 자의 은총! 그것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류에게 나타낸 구속 역사의 은총을 보여 주기 위 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구원 계획에 기초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무조건적 선택에 새 출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구속사의 진행에서 나타냅니다. 인간 편에서는 불가항력적 은혜 뿐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정말 반시동안 하늘이 고요한 어간에 남겨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일본 식민의 압제 아래 36년이나 고난 당하던 선조들의 비극적 암흑시대를 지난 다음에 이 세상에 왔습니다. 우리는 6.25 참극(慘劇)의 암흑 속에서 살아 남은 자들이고, 그 후손들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6.25 46주년을 맞는 역사적 시점에서 남은 자 의 은총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생존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잠정적인 평화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 사명을 확실히 깨달아야 됩니다. 결코 주객(酒客)으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남은 자로서의 나의 나 된 신분과 위치와 사명을 자각해야 합니다. 죽음의 죄악에서 주님의 용서로 살아 남은 자가 있습니까 죽음의 질병에서 살아 남은 자가 있습니까 죽음의 핍박에서 살아 남은 자가 있습니까 죽음의 전쟁 중에서 살아 남은 자가 있습니까 죽음에 이르는 사업 실패에서 살아 남은 자가 있습니까 죽음에 이르는 절망에서 절망하지 않고 살아 남은 자가 있습니까 왜 하나님이 나를 남겨 주었을까 어쩌자고 나를 남겨 주었을까 남은 자의 은총 앞에 감사해 야 합니다. 그리고 남은 자의 사명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요셉은 자기 생존의 존재 의미를 저 렇게도 분명히 하였습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우리의 생존 의미는 신령한 야곱의 가족을 보존(남겨 놓음)하기 위함이 아닌 가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기 위하여 우리를 남겨 놓지 않았던가 그래서 세계를 받은 교회로서 사명을 받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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