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인정받자 (눅14:7-11)
본문
간혹 북한 관련기사 중에 북한의 권력 서열의 변동을 소개하는 것이 있습니다. 변동이 있을 때마다 귀순자가 생겨서 새로운 정보를 접하는 것도 아니고 첩보원들을 즉각 침투시켜 정보를 얻는 것도 아닌데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평양방송을 통해서 중요국가행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좌석 배치나 등장하는 순서, 언급되는 이름 순서 등을 보면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상하의 위계질서를 가진 조직이나 계급사회에서는 공식석상에서의 자리 위치가 그 지위를 반영해왔습니다. 대체로 중앙에 왕이나 무리 중 제일 높은 자가 위치하고 우측, 좌측으로 중앙과 가까운 정도에 따라서열이 매겨졌습니다. 이것은 식사 중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대받은 바리새인의 두목 집에는 그 지역의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여럿 초대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자리의 위치에 따라서 높고 낮음이 구별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리를 놓고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아마도 서기관들이 그 일에 앞장섰을지도 모릅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눅20:46) 예수님은 그 모습을 씁쓸한 심정으로 바라보시며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가르치고자 하셨던 교훈이 11절에 있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할까요
첫째로,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은 추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기 때 문입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십시오. 한 사람만 나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여러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강이도 벌어졌을 것이고, 용케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우쭐대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분을 삭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추한 모습입니까 오죽 했으면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하시면서 자기를 낮추라는 교훈을 가르치셨겠습니까 그분께서는 이런 모습을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요즘 서울시교육감 선거비리가 발단이 되어서 전북교육감이 이미 구속되고 충북교육감에 대해서는 혐의를 잡고 수사하는 중에 있습니다. 교육감은 차관급 자리로서 자치단체의 교육행정을 총괄하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덕망이나 인품이 높고 교육자로서의 풍부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금품으로 표를 사고 했으니 있을 법한 일입니까 결국 구속이라는 상황을 맞았으니 오히려 교육위원으로 남아 있으니만 못하게 되었고, 교육위원이 되지 않고 각 분야에서 하던 일에 몰두하느니만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집니다.”
둘째로,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반감을 사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과시의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모를 과시합니다. 외모에 자신 없는 사람은 외모 대신 값비싼 옷이나 악세사리로 과시합니다. 학식을 과시하는 사람도 있고 재능을 과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람한 근육을 과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도저도 안 되면 사고를 쳐서라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자기의 존재를 과시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과시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이 과시하려는 것은 눈꼴사납게 여기고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신한국당의 차기 대선후보들 간의 알력이 요즘 심심 찮게 메스콤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서로 자기가 가장 큰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한국당의 상임고문은 모두 13명이나 이 가운데 김윤환, 이한동, 이회창, 최형우, 박찬종 고문 등 5명이 대권 예비후보들이다. 최근 이들간의 대권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고문단의 서열을 놓고 이런 저런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박찬종 고문은 지난 6일과 7일 밀양 및 강릉을 지구당 개편대회에서 잇따라 이회창 고문을 집중 공격하면서 “선수로 보나 키로 보나 내가 왜 (이고문보다) 밑이냐”며 불만을 드러냈다. 키를 거론한 것은 이고문에 대한 의도적인 인신 공격성 발언이지만 선수를 언급한 것은 비록 현역은 아니더라도 5선을 역임한 자신이 당 고문 서열에서 맨 꼴지로 돼 있는데 대한 불만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발언 순서가 고문 서열순으로 돼 있어 지구당개편대회 때마다 매번 자신이 가장 나중에 발언하게 됐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발언 파문으로 도피성 해외나들이에 나서게 되었다.
셋째로, 사람의 위대함은 자리나 지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지위가 아닙니다. 바보 천치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보좌에 앉혔다고 해서 그가 훌륭한 임금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어린이에게 최고급 바이올린을 쥐어주었다고 해서 그가 바이올린의 신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신동이라면 아무 바이올린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멋진 연주를 할 수 있습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타고난 바탕이 못생겼다면 아무리 비싼 옷을 사 입어도 그 얼굴 모습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반대로 타고난 미인이라면 허스름한 옷을 입어도 돋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지위도 아니고 재물도 아니고 옷도 아니고 인격이나 덕망, 재능과 같은 그의 바탕입니다. 따라서 위대한 사람이 낮은 자리에 앉는다고 해서 그의 위대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굳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높은 자리를 고집하다가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견제를 받을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홀가분하게 낮은 자리를 선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넷째로,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기 쉽지만 자기를 낮추는 사람에 대해서는 호감을 갖게 됩니다. 신한국당의 이홍구 씨가 대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대권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진작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여기에서 가르치시는 것은 결코 거짓된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이란 마음의 고요함이다.그것은 탐욕이 없는 상태이며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것이다.또한 해로운 일에 과민 반응하지 않는 것이며 칭찬을 받거나 멸시를 받아도 동요하지 않는 것이다.그것은 세상 살아가는 일이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울때 조용히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써 침묵의 바다와도 같은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마음이다.사람이 겸손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은총의 보금자리에 있다는 뜻이다<앤드루 머레이> 예수님께서는 상석(上席)에 대한 미련을 버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상석은 자기 자랑으로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배려와 인정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이 친히 자랑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것이 훨씬 좋은 것입니다. 또한 일시적인 평가보다 영원한 평가가 훨씬 좋은 것입니다. 당대에만 인정받고 그치기보다는 역사에 길이 남아 대대로 인정받는 것이 훨씬 좋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으로 그치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훨씬 좋은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1:9-10)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4:6)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사무엘이 잔치를 준비하고 30여 명의 사람들을 초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대부분 성읍의 장로들이었을 것입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낯선 사람 한 명을 데리고 와서 그 자리의 상석에 앉게 했습니다. 그가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울이었습니다(삼상9:22-2
4). 하만은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자가 자기일 것이라고 속단하고 왕과 같은 대우를 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가 모르드게에게 굴욕을 당했습니다(에6:1-13).
몇 달 전에 미해군참모총장이 훈장 비리로 자살했습니다. 그까짓 훈장 하나가 무엇이 대단하다고 부착하고 다니다가 비극을 맞이한 것입니다. 우리 전통 학교사회나 관직사회서 남다른 천재적 재능을 가진 이가 있으면 이를 보다 큰 그릇으로 키우기 위한 방편으로 불이익을 주는 관습이 있었다.이 불이익을 받은 자를 낙상매(낙상응)라 했다.성균관이나 사학에서 학생의 성적을 매길 때 학술고사는 대통 통 약통조통으로 평가하고 논술은 상상상중상하중상중중중하하상하중하하 아홉 등급으로 평가했다. 한데,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학술이 대통이요 논술도 상상의 신동이 나왔을 때 월반 같은 특혜를 주지 않고 오히려 두어 등급을 내려 평가하는 불문율이 있었다 한다. 사나움을 생명으로 하는 매(응)는 새끼를 기를 때 먹이를 높이 띄운채 떨어뜨린다.그러면 깃속의 새끼들은 이를 받아먹고자 위험한 모험을 하고 그 중에는 깃 아래로 떨어져 낙상을 입는다. 어미가 노린 것이 바로 이 낙상이요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 낙상매는 순탄하게 자란 매보다 사나워지기 때문이다.기르고 가르치는 정이란 짐승이나 사람이 다를 것이 없는데,그 정을 억누르고 새끼를 다치게 하여 장한 매로 길러낸 그 지혜를 우리 조상들은 학교교육에 도입한 것이다. 열여섯살에 대과에 급제한 김종서는 신동이라 하여 출세가 빨라 형조판서까지 올랐다.한데,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황희 정승은 김판서의 아주 미미한 실수에도 민감하여 불러세워 호되게 꾸짖고 그의 종을 불러 대리로 볼기를 치고 옥에 가두곤 했다. 정승 맹사성이 관용하기 이를 데 없는 대감께서 그리 심하게 허물을 잡으시오하고 민망해 하자,큰 그릇으로 키우기 위한 방편이요했다.이에 맹정승은낙상매로구먼하고 감탄을 했다. 신동 이덕형(한음)이 겨우 나이 30에 최고 학직인 대리학(대제학) 물망에 올랐는데,점수 한 점이 모자라서 떨어졌다.의외의 일인지라 좌중이 모두 놀라자,노정승 김귀영이 내가 한 짓이오.어린 나이에 노숙한 사람보다 앞서 가다 재기가 손상될까봐 그러했소 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자리의 위치에 따라서 높고 낮음이 구별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리를 놓고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아마도 서기관들이 그 일에 앞장섰을지도 모릅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눅20:46) 예수님은 그 모습을 씁쓸한 심정으로 바라보시며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가르치고자 하셨던 교훈이 11절에 있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할까요
첫째로,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은 추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기 때 문입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십시오. 한 사람만 나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여러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강이도 벌어졌을 것이고, 용케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우쭐대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분을 삭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추한 모습입니까 오죽 했으면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하시면서 자기를 낮추라는 교훈을 가르치셨겠습니까 그분께서는 이런 모습을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요즘 서울시교육감 선거비리가 발단이 되어서 전북교육감이 이미 구속되고 충북교육감에 대해서는 혐의를 잡고 수사하는 중에 있습니다. 교육감은 차관급 자리로서 자치단체의 교육행정을 총괄하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덕망이나 인품이 높고 교육자로서의 풍부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금품으로 표를 사고 했으니 있을 법한 일입니까 결국 구속이라는 상황을 맞았으니 오히려 교육위원으로 남아 있으니만 못하게 되었고, 교육위원이 되지 않고 각 분야에서 하던 일에 몰두하느니만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집니다.”
둘째로,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반감을 사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과시의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모를 과시합니다. 외모에 자신 없는 사람은 외모 대신 값비싼 옷이나 악세사리로 과시합니다. 학식을 과시하는 사람도 있고 재능을 과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람한 근육을 과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도저도 안 되면 사고를 쳐서라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자기의 존재를 과시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과시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이 과시하려는 것은 눈꼴사납게 여기고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신한국당의 차기 대선후보들 간의 알력이 요즘 심심 찮게 메스콤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서로 자기가 가장 큰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한국당의 상임고문은 모두 13명이나 이 가운데 김윤환, 이한동, 이회창, 최형우, 박찬종 고문 등 5명이 대권 예비후보들이다. 최근 이들간의 대권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고문단의 서열을 놓고 이런 저런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박찬종 고문은 지난 6일과 7일 밀양 및 강릉을 지구당 개편대회에서 잇따라 이회창 고문을 집중 공격하면서 “선수로 보나 키로 보나 내가 왜 (이고문보다) 밑이냐”며 불만을 드러냈다. 키를 거론한 것은 이고문에 대한 의도적인 인신 공격성 발언이지만 선수를 언급한 것은 비록 현역은 아니더라도 5선을 역임한 자신이 당 고문 서열에서 맨 꼴지로 돼 있는데 대한 불만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발언 순서가 고문 서열순으로 돼 있어 지구당개편대회 때마다 매번 자신이 가장 나중에 발언하게 됐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발언 파문으로 도피성 해외나들이에 나서게 되었다.
셋째로, 사람의 위대함은 자리나 지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지위가 아닙니다. 바보 천치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보좌에 앉혔다고 해서 그가 훌륭한 임금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어린이에게 최고급 바이올린을 쥐어주었다고 해서 그가 바이올린의 신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신동이라면 아무 바이올린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멋진 연주를 할 수 있습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타고난 바탕이 못생겼다면 아무리 비싼 옷을 사 입어도 그 얼굴 모습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반대로 타고난 미인이라면 허스름한 옷을 입어도 돋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지위도 아니고 재물도 아니고 옷도 아니고 인격이나 덕망, 재능과 같은 그의 바탕입니다. 따라서 위대한 사람이 낮은 자리에 앉는다고 해서 그의 위대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굳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높은 자리를 고집하다가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견제를 받을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홀가분하게 낮은 자리를 선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넷째로,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기 쉽지만 자기를 낮추는 사람에 대해서는 호감을 갖게 됩니다. 신한국당의 이홍구 씨가 대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대권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진작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여기에서 가르치시는 것은 결코 거짓된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이란 마음의 고요함이다.그것은 탐욕이 없는 상태이며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것이다.또한 해로운 일에 과민 반응하지 않는 것이며 칭찬을 받거나 멸시를 받아도 동요하지 않는 것이다.그것은 세상 살아가는 일이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울때 조용히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써 침묵의 바다와도 같은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마음이다.사람이 겸손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은총의 보금자리에 있다는 뜻이다<앤드루 머레이> 예수님께서는 상석(上席)에 대한 미련을 버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상석은 자기 자랑으로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배려와 인정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이 친히 자랑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것이 훨씬 좋은 것입니다. 또한 일시적인 평가보다 영원한 평가가 훨씬 좋은 것입니다. 당대에만 인정받고 그치기보다는 역사에 길이 남아 대대로 인정받는 것이 훨씬 좋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으로 그치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훨씬 좋은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1:9-10)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4:6)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사무엘이 잔치를 준비하고 30여 명의 사람들을 초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대부분 성읍의 장로들이었을 것입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낯선 사람 한 명을 데리고 와서 그 자리의 상석에 앉게 했습니다. 그가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울이었습니다(삼상9:22-2
4). 하만은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자가 자기일 것이라고 속단하고 왕과 같은 대우를 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가 모르드게에게 굴욕을 당했습니다(에6:1-13).
몇 달 전에 미해군참모총장이 훈장 비리로 자살했습니다. 그까짓 훈장 하나가 무엇이 대단하다고 부착하고 다니다가 비극을 맞이한 것입니다. 우리 전통 학교사회나 관직사회서 남다른 천재적 재능을 가진 이가 있으면 이를 보다 큰 그릇으로 키우기 위한 방편으로 불이익을 주는 관습이 있었다.이 불이익을 받은 자를 낙상매(낙상응)라 했다.성균관이나 사학에서 학생의 성적을 매길 때 학술고사는 대통 통 약통조통으로 평가하고 논술은 상상상중상하중상중중중하하상하중하하 아홉 등급으로 평가했다. 한데,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학술이 대통이요 논술도 상상의 신동이 나왔을 때 월반 같은 특혜를 주지 않고 오히려 두어 등급을 내려 평가하는 불문율이 있었다 한다. 사나움을 생명으로 하는 매(응)는 새끼를 기를 때 먹이를 높이 띄운채 떨어뜨린다.그러면 깃속의 새끼들은 이를 받아먹고자 위험한 모험을 하고 그 중에는 깃 아래로 떨어져 낙상을 입는다. 어미가 노린 것이 바로 이 낙상이요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 낙상매는 순탄하게 자란 매보다 사나워지기 때문이다.기르고 가르치는 정이란 짐승이나 사람이 다를 것이 없는데,그 정을 억누르고 새끼를 다치게 하여 장한 매로 길러낸 그 지혜를 우리 조상들은 학교교육에 도입한 것이다. 열여섯살에 대과에 급제한 김종서는 신동이라 하여 출세가 빨라 형조판서까지 올랐다.한데,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황희 정승은 김판서의 아주 미미한 실수에도 민감하여 불러세워 호되게 꾸짖고 그의 종을 불러 대리로 볼기를 치고 옥에 가두곤 했다. 정승 맹사성이 관용하기 이를 데 없는 대감께서 그리 심하게 허물을 잡으시오하고 민망해 하자,큰 그릇으로 키우기 위한 방편이요했다.이에 맹정승은낙상매로구먼하고 감탄을 했다. 신동 이덕형(한음)이 겨우 나이 30에 최고 학직인 대리학(대제학) 물망에 올랐는데,점수 한 점이 모자라서 떨어졌다.의외의 일인지라 좌중이 모두 놀라자,노정승 김귀영이 내가 한 짓이오.어린 나이에 노숙한 사람보다 앞서 가다 재기가 손상될까봐 그러했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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