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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고라 (욘1:11-16)

본문

사람은 병이 있다고다 병원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원에 못가는 병도 많습니다. 마음의 병, 불행의 병, 죄악의 병, 가정의 병, 파탄의 병, 이런 병은 병원에 가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생활에서 더러워진 병들은 그곳에 가도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좋은 세상이 온 것 같지만 우리에게는 병이 더 많아지는 것 같고 불행이 더 많아지는 것 같고, 어려움이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나라의 경제가 성장하고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면 병이 줄어들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은 의료 시설이 잘되어 있고 의학도 우리보다 엄청나게 앞서 있지만 고치는 병보다는 못 고치는 병이 더 많습니다. 병원에 간다고 다 고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병이 병원에 가면 다 치료되고, 사람의 문제가 사람의 힘으로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육체의 질병이 아닌 여러 가지 병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육적인 질병을 진단하듯이 정확하게 진단해야 합니다. 이 병이 어디에서 왔느냐, 우리 인간의 문제가 어디에서 왔느냐, 이 불행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모든 문제가 죄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고 버림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범죄한 우리 인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죄 사함을 받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의 능력이 얼마나 무섭고, 죄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죄는 우리 인간이 이길 수 없습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 능력이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를 잡아매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함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것으로도 죄의 능력을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죄의 진행을 차단할 수가 없습니다. 죄는 이 세상에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힘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죄가 국가를 패망케 하고 가정을 파괴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이스라엘도 죄를 지으면 남의 나라를 불러들여서라도 이스라엘을 어럽게 했습니다. 우리에게 흉년을 가져다 주고 질병을 가져다 주고 인간 관계를 파괴하는 범인은 바로 죄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특히 죄가 무서운 것임을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값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돌아가시게 함으로써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만물의 창조자요 통치자가 희생을 당할 정도로 죄의 능력이 크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정부 구조를 보면 통치자가 있고 그 밑에 국무총리가 있고, 장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에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책임이 그 부서의 장관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농업에 관한 문제는 농수산부 장관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국가가 배상해야 될 교통 사고가 일어나면 교통부 장관을 바꾸기도 합니다. 네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법무부에 문제가 있으면 법무부 장관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국방부는 국방부 장관에게 내무부는 내무부 장관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는 너무 크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돌릴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직접 책임을 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피의 종교입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저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씻음을 받고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줄 믿습니다. 유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교는 인간의 많은 문제를 오륜이라는 것으로 다룹니다.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봉우유신 이 다섯 가지를 오륜이라고 합니다. 유교는 모든 인간의 문제를 상하와 수평 관계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에 仁과 禮라는 것을 두어서 서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공자의 가르침입니다. 또 불교는 인간의 문제를 너와 내가 함께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너 혼자 해결하라고 합니다. 네가 지은 죄는 너 스스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세를 떠나서 깊은 산으로 들어가서 금욕하면서 부처가 되기까지 도를 닦는 것이 불교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이 스스로 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못이 단단히 박혔기 때문에 누구의 힘으로도 이 죄의 못을 뺄 수가 없고 그 죄의 능력을 막아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엄청난 저주와 형별을 인간의 힘으로 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죄값으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죄를 맡기고 죄짐을 벗어야 된다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방법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죄를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 한 분밖에 없습니다. 죄를 용서할 이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내 모든 죄를 그분에게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찬송가 487장).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의 짐을 져주시는 분입니다.
찬송은 무엇입니까 죄를 구속해 주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찬송입니다. 죄의 구속이 없는 찬송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왜 기쁩니까 왜 주님 앞에 나옵니까 왜 교회에 나옵니까 죄의 짐을 벗고, 또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찬송하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교인이란 무엇입니까 죄에 대한 고민을 갖고 죄의 용서함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올 때 교인의 발걸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고 용서함을 받은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길 때에 바로 성도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될 때에 우리 인간에게 행복이 오고, 축복이 옵니다.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질병과 저주가 떠나가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병원을 많이 짓는다고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병원과 교도소가 큰 것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병원을 하시는 분을 위해서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 심방가서 하나님 아버지, 모두가 병들게 하셔서 이 병원으로 환자가 많이 오게 해주십시오. 라는 기도는 못합니다. 병원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교도소에 가서 기도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이 죄를 지어 교도소가 부흥하도록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두 곳이 발전할수록 오늘의 문제는 점점 늘어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교도소가 만원입니다. 자꾸 지어도 차고 넘쳐서 감당을 못합니다. 특사라 해서 미리 내보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이 또 들어옵니다. 계속 나가고 들어옵니다. 병원도 복잡합니다. 많은 사람이 들어오고 나갑니다. 병원은 육이 병든 사람이 들어가지만 교도소는 마음이 병든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양심이 병든 사람, 의지와 생각이 잘못된 사람이 갑니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가도 병이 완전하게 치료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 앞에 나와야 예수의 보혈로 죄 씻음받고 영육의 모든 문제를 치료받을 줄 믿습니다.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죄의 짐을 벗는 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죄의 용서함을 받는 곳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시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아야 복이 있습니다. 죄가 가려져야 복이 있습니다.
2절에는 “(시32:2)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보시지 않아야 복이 있는 것입니다. 죄를 가진 자는 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를 갖고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백성에게는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래서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내게 오셔서 나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 모릅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ㅎ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찬송가 363장).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설령 내가 부모님 앞에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부모님은 자식의 죄를 잊어버립니다. 용서해 주면 그만인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죄를 지어도 부부간에는 잊어버립니다. 형제가 죄를 지어도 형제간에는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그 죄는 하나님 앞에 가서 용서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죄를 심판하실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앞에 씻음을 받아야 씻겨지는 것이지 나와 너와의 관계에서 씻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심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씻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 니느웨 성으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길을 풍랑으로 가로막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죄를 짓고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은 항상 죄악 속에 빠진 문화를 차단시키셨습니다. 하나의 문화가 계속 발전하는 일이 없습니다. 죄를 지은 가정, 죄를 지은 권력, 죄를 지은 국가는 하나님께서 차단하십니다. 계속 진행할 수 없습니다.
힘쓰고 애써도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는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의 용서함을 받고 죄의 짐을 벗는 길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요나는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고 회개합니다. 풍랑이 심한 것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고백할 때에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져 버립니다. 그러자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를 숨기려고 합니다. 감추려고 합니다. 일단 변명합니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죄를 숨기고 살아가려고 하지만 기독교는 감추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찰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고 용서함을 받는 길만이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요, 풍랑을 잔잔하게 하는 길인 줄 믿습니다. 죄는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것이 바로 이기는 길입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됩니까 “(시32: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대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4절에는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니까 먹은 음식이 체한 것같이 견딜 수 없이 괴롭고, 여름 가물에 타는 곡식과 같이 뼈가 쇠한다고 했습니다. 죄가 우리의 삶을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마귀가 우리로 죄의 유혹을 받아서 죄를 짓게 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에게 침투합니다. 마귀는 죄로 우리와 자기 사이에 다리를 놓기 때문에, 죄가 있으면 고속도로에서 차를 모는 것과 같이 마귀가 내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죄를 지으면 누가 여러분을 추적합니까 형사가 그림자처럼 따릅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을 구속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의 힘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를 모두 가두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함을 받으면 자유함을 얻는 줄 믿습니다. 갇혀 있지 않아도 자유함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도소에 갇혀서도 자유함을 입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찬송합니다. 기뻐합니다. 왕궁에 있는 것보다 더 기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의 짐을 벗을 때 오는 기쁨 때문입니다. 일단 마귀가 우리 안에 들어오면 끊임없이 죄를 짓게 합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죄를 자꾸 낳습니다. 근심을 낳고 불의를 낳고 죄악을 낳고 질병을 낳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에게 들어올 때 빨리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계속하여 뿌리를 내려서 죄를 낳고 낳습니다. 문제를 계속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없거니와 그것을 가르쳐주는 책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죄에 대해서 일러주셨습니다.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가를 열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죄는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됩니다. 제일 무거운 짐이 죄의 짐입니다. 죄는 우리의 삶을 피곤하게 합니다. 삶의 의욕을 빼앗아버립니다. 그래서 귀찮게 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24절에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죄가 우리를 누르는 것입니다.
둘째, 죄는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양심의 눈을 어둡게 하고, 지혜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밝게 살아가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된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조그만 개미도 먹이를 물어오고 자기 집을 찾아가는데 우리 인간은 자기 집을 앞에 놔두고도 방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범죄가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여서 우리를 방황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셋째, 죄는 우리를 녹슬게 합니다. 좋은 것도 금방 녹슬게 합니다. 여려분이 결혼한 지 얼마 안되었어도 죄를 지으면 행복이 녹슬게 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집을 잘 지어서 새집에 들어가도 죄를 지으면 가정의 평안이 녹슬어버리는 것입니다. 기쁨이 녹슬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처음에는 좋았지만 녹스는 삶, 못쓰는 삶, 못쓰는 인격이 되어 버리는 이유는 바로 죄 때문입니다.
넷째, 죄는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죄인의 삶은 항상 긴장하고 초조합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늘 불안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섯째, 죄는 인간 관계를 파괴합니다. 하와가 범죄하므로 부부 관계가, 가인이 범죄하므로 형제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또 부모와 자식, 나와 너의 모든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해야 될 사람을 미워하고 감사해야 될 사람에게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이해해야 할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격언에도 “죄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방하는 줄 안다”라고 했습니다. 오해를 합니다. 설교를 들어도 “저 설교는 틀림없이 우리 마누라가 일러바쳐서 하시는 말씀일 거야” 하고 오해를 합니다. 여러분이 죄를 갖고 있으면 남을 정상적으로 못 보고 사랑하지도 못합니다. 언제나 영광 굴비 엮듯이 오해를 한 묶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저 사람도 한패일 거야 하며 오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는 죄는 모든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여섯째, 죄는 기회를 막아버립니다. 예레미야 5장 25절에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절기를 따라 봄에는 봄바람, 가을에는 가을바람이 불 듯이 항상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부유한 바람이, 축복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엄청난 은혜와 행복의 바람이, 축복이 바람이 불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악이 있으면 여러분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커튼을 내려서 축복이 찾아오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일곱째, 죄는 또 죄를 짓게 합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갑니다. 작은 죄가 끊임없이 발전해서 나중에는 엄청난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죄는 점점 자라서 크게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큰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여덟째, 죄의 뿌리는 깊게 박힙니다. 못처럼 단단히 박혀서 인간의 힘으로는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죄의 뿌리를 뽑아낼 줄 믿습니다. 아홉째, 죄는 우리를 실패하게 합니다. 무엇을 해도 안됩니다. 동서남북이 안됩니다. 이리 가도 안되고, 저리 가도 안되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은 참 지혜롭습니다. “죄(罪)”라는 글자를 “넉 사(四)”자 밑에 “아닐 비(非)”자를 적었습니다. 동서남북 사방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죄를 그렇게 이해한 것입니다. 동쪽으로 가도 안되고, 서쪽으로 가도 안됩니다. 죄를 놔두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 사업 저 사업 아무리 벌여도 되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 용서함을 받고 형통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열째,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합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도, 교회에 나와서도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합니다. 땅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허무주의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헛된 것을 따라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면 언제나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7편 12절을 보면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것을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와 같으리라는 것입니다. 또 에스겔 18장 30절에는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일단 죄를 지으면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요, 내 가정은 내 가정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짓고 후회하지만 일단 죄를 지으면 죄의 심판은 하나님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유혹이 있을지라도 죄는 피해야 되고 이겨야 됩니다. 그리고 이미 지은 죄는 빨리 회개하여 내 생각과 내 마음에서 벗어버리는 지혜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죄의 색깔은 아름답습니다. 죄의 맛은 달콤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서 출세할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고, 돈벌 수도 있고, 사업이 잘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화는 안됩니다. 입 안에서 내려가다가 곧 낚싯줄에 걸리는 것입니다. 잠깐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가 주는 맛은 잠깐이라고 했습니다. “짧은 행복에 돌이킬 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 뉘우치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죄는 맛이 좋습니다. 그러나 잠깐입니다. 짧은 행복입니다. 짧은 성공입니다. 짧은 출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주시는 축복은 영원한 축복입니다. 자자손손에게 이어지는 축복입니다. 의인의 축복은 잎이 마르지 아니하고 시들지 아니하는 축복, 알곡의 축복입니다. 창고가 가득 차는 축복입니다. 모든 축복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반대로 죄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라고 해서 다 사귀어도 안되고 먹으라고 해서 다 먹어도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삶이 죄에 대해서는 책임을 못 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만 손해입니다. 준다고 해서 다 먹어서는 안되고, 좋다고 해서 다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나오는 모든 자녀에게는 죄의 짐을 벗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 주일날 교회에 나옵니까 성경을 보면 한 주일 동안 지은 죄의 발을 씻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주일날 교회에 와서 벗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졌다가 벗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주여, 잘못했습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회개하면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찬송가 202장). 할렐루야. 놀라운 능력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죄를 옮기고, 죄를 태우고, 죄를 씻고, 죄를 도말하고, 죄의 문서를 찢어버리고, 우리를 죄 없는 의인으로 만들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 앞에 복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십자가의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의지하여 우리가 이 축복을 받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죄 없다고 하는 분,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는 분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죄를 짓고 회개하는 분이 오히려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주님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를 제외하고 다섯 교회에 항상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너희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리”고 하셨고, 버가모 교회에는 “(계 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계 2:21-23)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데 교회에는 “(계 3:3)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죄인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나라는 심히 어려운 가운데 있습니다. 해방 후 반세기 가운데 가장 어려운 시련에 직면했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났습니까 성경은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누군가를 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망했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왜 망했습니까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일으키셨습니다. 에돔을 일으키셨습니다. 블레셋을 일으키신 분이 여호와십니다. 성경은 어느 시대에도 죄를 지은 민족이나 개인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자식이 잘못하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를 들어 징계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사랑하는 이 민족을 이대로 두면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되겠습니까 이 민족의 윤리가 이렇게 무너져도 되겠습니까 이 민족의 도덕 질서가 이렇게 어지러워도 되겠습니까 이 민족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우왕좌왕해도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회개하며 뉘우쳐야 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을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돌려도 안됩니다. 1200만 교인이 다 잘못했다고 하기에 앞서 우리 평강교회가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됩니다. 우리 모두 “내 연고라, 내 잘못이다”라고 각자 회개해야 될 줄 믿습니다. 가정의 문제는 “내 잘못이다” 할 때에 속히 수습이 됩니다. 또 질병도 속히 치료됩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지금 이 민족이 사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외국으로 나가려고만 합니다. 어떤 분은 제주도로 피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추적하시는데 우리가 어디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벧엘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네가 회개해야 하는데 어디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길, 이 민족이 사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미국에서도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습니다. 유엔도 나서지만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해결합니까 여호와께서 이 민족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면 내일이라도 길이 열릴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의 연고라” 하면서 회개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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