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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원하는 것 (고후12:1-21)

본문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나의 구하는 것은 오직 너희니라….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라면서 그의 궁극적인 관심 은 환상과 계시나 재물이 아니라 인간 구원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고후12:14)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 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고후12: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 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한 거지가 어느 착한 여인이 살고 있는 집에 구걸을 위해 찾아 왔습니다. 무엇인가 줄 것이 없는가고 그녀는 집안을 찾아 보았지만 마침 잔돈 이 집에 한 잎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잔돈이 없는데, 마침 빵이 좀 필요해요. 여기 1파운드 짜리 돈이 있으니까, 가서 빵을 좀 사다 주시면 잔돈 가운데서 얼마를 드리겠 어요." 그 사람은 심부름을 갔다 왔으며, 그녀는 작은 동전을 다시 그에 게 건네 주었습니다. 그것을 받을 때 그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돈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남자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믿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아무도 나를 믿어 주는 것을 보 지 못했습니다. 이 이상 더 고마울 데가 없습니다." 그녀가 너무 어리석은 마음씨를 가졌기에 그런 위험한 일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남자에게 돈 이상의 것을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남자를 신용해 줌으로써 그녀 자신의 일부를 그 남자에게 주었던 것 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굶주린 자에 대한 교회의 의무는 그들에게 돈만 내주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참다운 이 웃에 대한 사랑은 재물만이 아니라 그에게 따뜻한 마음, 자신의 가장 중 요한 부분인 마음을 베푸는 것입니다. 교회의 진실성은 그 건물의 웅장함 이나 예배 의식의 화려함이나 헌금 액수의 양이나 더욱이 많은 교인 숫 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변화된 삶에 있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 가 없다면 교회의 참 모습을 보여 주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나의 구하는 것은 오직 너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삶의 변화가 자신의 복음 전도의 초점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 19절 이하에서 이렇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고후12:19)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고후 12:20)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2. 사도 바울이 14년 만에 자신이 본 환상과 계시는 자신의 중요한 신 앙체험일 뿐만 아니라 사도로써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환상과 계시의 체험을 내세워 자랑하면서 그것으로 자신이 사도 임을 증거하거나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자신의 사도로써 내세울 만한 것이 있다면, 그리고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연약한 가운데 참는 것이며, 연약한 중에 힘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 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신령한 체험을 자신의 사도됨 을 입증하는데 이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계시의 위대성을 나 타내며, 그것을 통해 교회의 덕을 세우며 교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왜 14년 전의 신앙 체험을 언급했는가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 이 바울에게 사도로서의 징표를 보이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후12: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고후12:12)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환상과 계시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일 로 인해 자신의 육체에 가시를 받은 사실을 자랑했습니다.
다시말해 그 환상과 계시로 말미암아 너무 교만하지 않도록 깨우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육체의 가시 속에 머무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자랑하고 감사했 습니다.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 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만약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없었다면, 삼층천에서의 신령한 체 험들로 인해 바울은 자고(自高)하여 우쭐한 가운데 여러 가지 범죄와 교회를 문란하게 하는데 일조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환상과 계시를 본 이후의 14년간은 성공 대신에 실패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환상과 계시의 체험을 제삼자적인 '객관적인 형식', 다시 말해 3인칭으로 표현하고 있음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체험을 타인의 체험인 것처럼 객관화하여 말한 것은 자랑하는 것은 아무 유익함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표현함으로 고린 도 교인들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는 일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입니다. 환상이나 계시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많은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다메석 도상에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음성을 빛 가운데서 들었습니다. "(행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구원을 부르짖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행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 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고린도 지역에서 복음 전도하는데 난관에 부딪쳐 있을 때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바울을 위로하셨습니다. "(행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행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 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 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또 다시 환상으로 위로하셨습니다. "(행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로마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비록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호 송되어가는 바울이 탄배가 큰 광풍을 만나 모두 죽게 되었을 때 그에게 나타나 그와 더불어 배에 탄 사람들의 생명이 무사할 것을 알려 주시므 로 위로했습니다. "(행27: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행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 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 으니 (행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 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이 모든 환상들은 바울이 복음 사역을 행할 때 곤경에 처해있을 때마 다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시어 위로하시고 사명 감당케 하신 것 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환상들을 통해 감옥이든 깊은이든 위험이든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 을 나타내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큰 체험들 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부 여하신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다시말해 크나큰 신앙 체험에 육체의 가시 라는 고통이 뒤따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겪는 육체적 고통의 신비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함부로 그 당하는 고통을 해석해서도 안됩니다. 육체적 고통은 경건한 성품을 세워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 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5:4) 인내는 연단 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사도 바울은 육체적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해 신의 성품을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바닷가를 거닐다보면 파도가 닿 지 않은 만(灣)쪽의 바위는 날카로운 모양들을 하고 있지만 파도가 쉴새 없이 밀려오는 곳에 있는 바위돌들은 둥글게 다듬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파도들과 큰 물결들'을 사용하셔서 모난 우리의 삶의 모습들을 다듬어 가십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환상과 계시의 신령한 체험과 육체적 가시의 체험은 바울로 하여금 복음 사역을 바로 감당하게 하기 위한 불가분의 체험들이 었습니다. 그는 삼층천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하늘의 체험과 땅에서는 말 할 수 없는 고통이 따르는 육체의 가시 체험을 항상 병행해서 지니고 생활했습니다. 그는 황홀경을 맛보았고 죽음에 이르는 고뇌와 고통도 체험 했으나 이는 그에게 주어진 복음 사역에 필연적인 견인차였습니다.
3. 사도 바울의 신비 체험의 특이한 점은 육체대로 셋째 하늘까지 휴 거되었는지, 아니면 탈혼(脫魂) 상태로 된 것인지 자기 자신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신비 체험은 대부분 불가해(不可解)하고 순간적이고 일상 생활과 직접 관계가 없습니다. 다시말해 신비 체험이 참 구원의 복음일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나 철학, 선(禪)은 그 극치를 신비적 체험에 두며 그것을 최상의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신비적이고 절묘한 체험을 얻었지만 결코 자랑하지 않고, 제삼자에 관한 이야기처럼 말했습니다. 이같은 사도 바울의 태도는 기독교가 신비 체험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의 기초를 이런 체험에 두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에게 만 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신비주의는 신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 니고 신을 체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증명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은혜 로 자신의 삶의 변화된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비주의 의 대표적인 표현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는 구절은 바울 신 앙의 극치요, 소위 바울의 신비주의입니다. 또한 바울의 위대한 신비적 발언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 었다는 철저한 사상이 바로 그의 신비주의 사상입니다. 바울과 그리스도 와의 일치는 완전하였으므로 바울의 독립적인 인격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합치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스스로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요한 복음 15:1-6에 기록된 포도나무와 가지가 하나됨의 신비적 관계입니다. "(요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요15:2) 무릇 내 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요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 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 러하리라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 라.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표현은 다른 종교에있어서의 신비 적 경험에서 하는 말이라기 보다 바울의 절대 신앙입니다.
바울에게 신비 체험이 있으나 신앙은 신비주의와 하등 관계가 없습니다. 바울 서신 중에 서 그리스도에 신앙을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이 164회나 사용되었 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과 영이신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결합 관계를 보 여준다고 보이지만 신비주의적 표현은 아닙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처 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를 채우시고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으면서 이것을 호흡합니다. 그리스도는 과거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재하는 힘, 매일 역사하는 생명력이십니다. 그것은 비인격적인 생명력이 아니라 인격적 영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 현존하시는 영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신앙 중심은 영적 그리스도와의 영 적 결합에 있습니다. 이 영적 결합으로 나타나는 것이 변화된 삶의 모습 인 신의 성품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무당이나 신접한 자나 신 들린 사람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 들려서 나의 인격은 신에게 흡수되고, 빼앗겨버리고, 딴 짓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비주의에 있어서 신은 영원히 신 이시오, 인간은 영원히 인간입니다. 신이 인간이 되는 경우는 있어도 인간이 신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이 쉽게 빠져들고 있는 초자연적인 신비주의 경계해 야 합니다. 초자연적인 신비주의 체험이 끼치는 폐해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1) 참 성령님인지 악령인지 혼동되어 속기 쉽다. 2) 자부심, 허영심에 빠지기 쉽다. 3) 이런 지각 때문에 악마는 우리를 속일 좋은 기회를 얻는다.
4) 신자가 소망의 덕으로 하나님과 일치되는 데 방해가 된다. 5) 그 대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을 비천하게 판단한다.
4. 요사이 소위 은혜파 운동이 쓰고 있는 선동적 열광, 박수, 춤, 북, 고함, 방언, 신유, 예언 등의 현상에는 무속적인 요소가 다분이 이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잘못 나가는 이러한 운동을 비판하기 보다는 건실 방향으로 지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율이 없는 음악이 있을 수 없듯이 신비적 요소가 없는 종교는 우상 숭배이거나 세속적 종교입니다. 마틴 루터나 종교 개혁자들의 말대로 "믿기만"하면 되는 기독교도 있고 성자들의 체험처럼 신비주의적인 기독교도 있습니다. 어느 쪽도 잘못은 아닙니다. 제아무리 많은 신비적 체험을 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신비적 체험은 어떤 방법이나 노력을 통해서 경험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깊이 진실되고 경건한 신앙생활하는 중에 얻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그런 신비 체험을 자랑하지도않고 그런 것으로 자기가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믿지도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다른 특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신비적 체험을 바르게 경 험한 사람이 성도의 생활에 있어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아니라 바로 성경 자체의 가르침입니다. 사랑은 믿음을 저 버지리 않습니다. 건전한 신비 체험은 개인이나 교회 신앙에 활기를 주는 것입니다. 페넬론(Fenelon)은 "하나님의 바람은 항상 불고 있다. 그러나 돛은 우리가 달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오로지 사랑의 계시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사랑하고, 짐승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사업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사랑을 사랑하는 자 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현대에 대하여 할 말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을 위하여 죽는 일이 얼마나 용감한 일인가 그보다 사랑을 위하여 사는 일 은 더 큰 용감이요, 모험이다. 그것은 매일의 생활에서 날마다 사랑의 불 꽃을 화려하게 피우는 일이다."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28세에 세운 "작은 형제단"은 절대 청빈과 절대 사랑, 절대 정결과 절대 순종을 슬로건으로 하여 복음 전도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을 목표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을 몸으로 태워갔습니다. 이들 의 이같은 생활은 많은 열매를 맺어갔습니다. "작은 형제단"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와도 회개하는 자가 속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사랑이 순화되어 남녀간에 건전한 사랑으로 변화 되었고, 진실로 이웃을 사랑했고, 나아가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 시민으로 변화시켰으며, 나중에는 예수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결국 사랑 을 사랑하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교회 역사 이천 년 중 그 누구보다 귀한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12세기 교회가 요구하는 것은 한 개 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상징은 곧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처가 십자가입니다. 우리도 손과 발, 옆구리에 다섯 개의 상처를 받아야 합니다. 이 상처가 없이는 우리가 아 무리 세상을 향해 사랑을 부르짖어도 그들은 우리의 메시지를 귀담아 들 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에, 하나님의 일만 보는 학교가 있고 인간의 일만 보는 학교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자의 특징은 예배, 희생물을 바치는 노 력에 집중하여 인간이야 어찌되든 하나님의 기분만 어루만져 주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이방 종교와 바리새교 등이 그렇습니다. 사람의 일만 보는 종교란 예수님의 말씀 중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 일을 위해 있지 않다."는 말씀이나 선지자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 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는 것"이라는 것 등을 말합니다.(사 1:3-17) 프란치스코의 "작은 형제단"운동은 바로 회심, 성결, 사랑에 주력하여 살 아 계신 그리스도를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1224년 8월 초 어느 날 해가 넘어가는 저녁 때, 바위 위에 엎드려 얼음같이 싸늘한 달 빛을 받으며 밤새 기도했습니다. 새벽이 되어 동녘 하늘이 밝아올 무렵, 세라핌(스랍 천사)이 먼 지평선에서 날아와 프란치스코가 엎드린 주위를 불꽃으로 둘어쌌습니다. 세라핌의 날개는 하늘을 덮고, 그 중간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주님이 계셨습니다. 그때 형언할 수 없는 환희와 경애가 그의 마음을 적셨습니다. 얼마 후 이 환상은 사라 졌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여전히 그 바위 위에 엎드린 채 있었습니다. 태양이 떠올라 주위를 비출 때, 프란치스코가 몸을 일으켜 일어나려 고 하니 뼈를 끊는 것 같은 통증이 손, 발, 옆구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가 자기 몸을 살펴보니 그의 몸에는 주 예수님의 것과 같은 상흔(傷痕)이 생겨 있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프란치스코는 보행이 곤란했습니다. 얼마 후에 프란치스코의 시력은 점점 쇠약해지더니 소경이 되고 말았 습니다. 그러나 불편 몸으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할 무렵 홀연히 황홀해 진 그는 환희에 차서 "주를 찬송할지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는 유명한 "태양 찬송"을 즉흥적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찬송가 33장" 이 "태양 찬송가"는 중세기의 가장 위대한 찬송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온 천하 만물 우러러" [33장1절] 온 천하 만민 우러러 다 주를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저 금빛나는 밝은해 저 은빛나는 밝은 달 하나님을 찬양하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33장2절] 힘차게 부는 바람아 떠나는 묘한 구름아 할렐루야 할렐루야 저 돋는 장한 아침해 저 지는 고운 저녁 놀 [33장3절] 저 흘러가는 맑은 물 다 주를 노래하여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저 조화 많은 밝은 불 그 빛과 열을 내어서 [33장4절] 저 귀한 땅은 날마다 한없는 복을 펼치어 할렐루야 할렐루야 땅 위의 꽃과 열매들 주 영광 나타내어서 [33장5절] 너 선한 마음을 가진 자 남 용서하며 살아라 할렐루야 할렐 루야 고통과 슬픔 지닌 자 네 근심 주께 맡겨라 그리스도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사랑의 삶을 살고자 할 때, 때로 많은 고통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태양 찬송가>를 부를 수 있는 신령한 여러분 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의 구하는 바는 환상과 계시나 재물이 아니라 오직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었으며, 구원받은 성도들의 변화된 사랑의 삶, 곧 신의 성 품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구할 바를 바로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1천번제를 드렸을 때, 그의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네게 무 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저에게 큰 은 혜를 주셨고 왕이 되게 하셨나이다. 그러나 종은 작은 아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제게 주신 주의 큰 백성은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아서 바르게 재판할 수가 없으니 저에게 이들을 바르게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 옵소서."라고 구했습니다.
솔로몬의 구하는 바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지 라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그가 구한 총명한 마음 뿐만 아니라 구하지 아 니한, 전무후무한 부와 영광까지도 베풀어주셨습니다. "(왕상3:4).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 꼬 너는 구하라 (왕상3:6)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 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 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 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왕상3: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왕상3:8)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왕상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 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 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왕상3: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왕상3:11)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 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왕상3: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 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왕상3:13)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 여러분, 오직 민족 복음화, 세계 복음화 를 통한 인류 구원을 삶의 목표로 삼으시고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의 흔적 을 몸에 지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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