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뻐하는 개혁은 (사58:1-11)
본문
요즈음 유행어하는 말이 있습니다. '21세기를 향해' '변화 된시대에 있어서'라는 말입니다. 어쨋든 개혁과 변화는 지금 시대의 주요한 현안이요, 또 우리가 피부로 접하고 있는 일상 과제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하면 보통 너무 추상적인 개혁에 매달립니다. 신학 적인 관점의 개혁, 그래서 믿음과 성경, 은혜를 강조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을 1500년대의 당시의 상황에 가둬 놓는 경우입니다. 중세 카톨릭이 어떠했고, 당시 독일과 스위 스의 개혁은 어떻고 하며 당시의 상황에 전문적으로 매달리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오늘의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 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야 "개혁교회는 개혁되 야 한다"는 명제가 계속 유효한 것이지요. 여호와 하나님도 계속 살 아있는 계혁을 원하십니다. 기독교적 개념으로서의 개혁은 보다 선명합니다. 히스기야와 요시아의 개혁이 구약 개혁의 정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요시아의 개혁은 신명기 법전으로 나타나 고 있습니다. 바알 신앙에 대한 개혁 작업, 형식적인 예배 에 대한 개혁 작업, 가난한자에 대한 억압을 청산하는 개 혁 작업, 안식일 규정의 본 정신 준수 등을 위한 개혁 작 업 등 그 내용이 광범위합니다. 여호수와의 세겜 재 계약(수24장)도 출애굽 해방자 야훼 신앙에 대한 통합력을 드높이라는 결단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의 개혁 운동은 바리세인 등 종교 지도자 들의 광범한 저항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예 를 들자면, 세리 죄인의 식탁 사건(마9:9),안식일 병자 고 침 사건, 양과 염소의 비유 사건(마25장) 등이 그것입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 뜻을 다시 되 살리자는 것이지 하나님의 정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 합니다.(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고 왔다.-마5:17) 바울의 개혁은 배타적인 유대 그리스도인에 대한 것이었다. 바울은 베드로와의 논쟁을 통해 이방인을 위한 복음전 파의 정당성을 확보했습니다.(행10장) 교회사적으로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은 전통 관습,관성, 기존형식 보다 근원적 기준로서의 말씀을 내세운 것이었습니다. 즉 본질적 말씀에로의 재 정초(Re-Orientation)운동 이었습니다. 이것으로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 되어야 한다 '라는 명제를 탄생 시켰던 것입니다. 말씀의 빛을 따라서 늘 새로와 지는 교회를 개혁 교회는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르자면 교회의 개혁과 갱신은 전 시대에 걸친 것이어야 하고, 중단할 수 없는 걸음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 개인의 참회가 단순반복일지언정 계속되어야 하듯, 교회의 갱신도 단순반복일지라도 계속되 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신앙형태에 대한 반성은 이미 상 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습니다. 이제 구체적인 결단과 실천 만을 남겨 놓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 밖에서 광범위하게 제기 되었습니다. 교회안에서는 청년들과 평신도들 사이에 서 반성이 제기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목회자로부터 중직자 한국 교회 전반에 걸처 교회와 신앙 모습에 대한 반성과, 개혁을 향한 몸부림이 일고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의 본문에도 보니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고 했습니다.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 물을,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1절)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허물과 죄를 하나님 앞에 고해야 합니다. 그 런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신앙형태에 대한 반성을 크게 외 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가난한자를 외면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어떤 분은 쉽게 하는 말로 '돈 없으면 교회 못가'합니다.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는 데, 돈 없으면 교회 못 가게 되었다니 맞지 않는 말입니다. 과부의 옆전 부 푼을 크다 하시고, 가난한 자는 하나님나라가 그들의 것이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이 가기 힘든 것이 교회라니 안 될 말입니다.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은 물질 만능의 사회에서 별시받고 천대 받습니다. 주눅들고 기죽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신 사랑의 교회 안에 와서는 대접을 받고 하나님 나라가 그들 의 것이다라는 것에 걸 맞게 대접 받아 마땅합니다. 특별 히 교회에서 조차 가난한 자가 외면당하는 것은 주님의 뜻 이 아닙니다. 또 집단적으로 교회가 소외된 자에 대한 배려나 관심이 부 족하다는 것입니다. 빈민지역에 있는 교회는 빈민들과 아 픔과 고통을 함께 해야 합니다. 공단 지역에 있는 교회는 일차적으로 근로자들과 아픔을 함께 해야 합니다. 농촌의 있는 교회는 농민들의 고뇌를 나누고 그 목소리를 대변하 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에 참여 해야합니다. 이것이 지역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자들의 아편 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꿈과 희망 위로와 안식의 터가 되야합니다. 부자도 학식 있는 자도 권력 있는 자도 멀리 해서는 안되지만 특히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감싸 안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실천이 그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민족의 고통을 외면하는 모습입니다. 누구나 아는 대로 한민족은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구촌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그 분단으 로 인해 북쪽의 형제들은 아프리카의 르완다나 소말리아 보다 더 어려운 기아의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20세기는 실로 한민족이 고통에 신음하는 시기였습니다. 20세기 전 반은 일본 제국에 나라를 빼앗기고 갖은 고난을 다 겪었습니다. 20세기 후반은 민족의 허리가 분단된 채 반세기나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화해는 빨갱이요, 교류는 국가 보안법이고, 사랑은 반체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끝나가려 하는 20세기의 끝에서 북녘 동포 형제들은 굶주림으로 목 숨이 경각에 달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민족의 고통에 찬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회가 20세기에 얼마나 민족의 고난에 함께 참여했는가 하는 것을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을 이끌어 가는 교회로서의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화시기에 민족의 선각자들은 거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일제 치하에 서도 교회는 민족독립의 산실이었습니다. 가장 많이 읽힌 성경이 출애굽기였고, 설교의 주제도 그러한 경우가 많았 습니다.3.1운동 당시 지방의 만세 운동의 거점은 교회였 습니다. 교회가 불타고 일제에게 박해 받은 것은 우연의 일치 만은 아니었습니다. 만주로 이주한 간도 지방에는 민족 학교, 교회, 독립군이 그들의 활동 근거였습니다. 교회는 민족의 희망이요, 기독교인은 민족의 등불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기독교는 더 이상 민족의 등불이요, 희망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독재의 시기에도, 민주 화의 시기에도, 단군 이래 최대 도적이 탄생하는 부정부패 의 시기에도 교회는 사실 크게 한 일이 없습니다. 또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서도 교회는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지도자나 경제인들이 화해와 사랑의 십자가를지지 못하는 것은 이해 할 수 있지만, 우리 교회 가 민족의 문제를 위해 고난의 가시밭길 십자가의 길을 걸 어가지 못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통회할 일입니다. 사도 바울 처럼 민족의 영적 구원 뿐 아니라, 본훼퍼 처럼 민족 의 고난에도 참여하는 교회의 모습을 게을리한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 하여야 할 때입니다.
셋째는 민주적 교회 운영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교회하면 목사의 교회, 장로와 당회의 교회인 것처럼 인 식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몸의 지체의 아름다움이 아닐 것입니다. 지체 모두의 몸,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입니다. 종교 개혁의 정신은 모두가 사도요, 모든 일이 성스럽다는 것입니다. 함께 꾸려가는 교회는 아름 다운 교회입니다. 청년 과 여성이, 제직과 평신도가, 교직자와 평직자가 함께 꾸 려가는 교회가 멋있는 교회입니다. 각 지체가 다 소중하고 다 함께 움직이는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카리스마는 은사입니다. 이 카리스(은사)는 그리스도인 교인 모두 가 받았습니다. 이 카리스마(은사들)를 한 사람이 행사하는 그것 만 우러러 보는 교회가 아니라, 모두가 다 이 카 리스마(은사들)을 활용하고 서로 카리스마적 지배를 달성 하고, 서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데 이 카리스 마(은사들)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 카리스마(은사들)가 오 케스트라 처럼 울려 퍼지는 것이 그리스도 몸의 아름 다움 입니다. 그 어떤 모습으로도 목사 한 사람의 카리스마적 지배를 정당화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중직 자들의 카리스마(은사들)의 지배적 행사를 정당화 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권위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획일화 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카리스(은사)의 구별은 있 되 모두의 은사를 잘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바라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넷째는 물량적 성장주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물량으로 잽니다. 교인 수, 헌금총액, 교회건 물, 목회성장, 선교의 성과 모두 물량입니다. 물량 만으로 성숙을 측정하지 않고 내용으로 성숙을 측정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알곡을 그렇게 가려 내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큰 물량을 가진 교회 중에서도 알곡이 있을 것이요, 적은 물량 중에서도 죽정이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요. 문제는 물량이 아니라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탈 역사주의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집트 파라오의 제국에 서 탈출의 역사를 시작하라 하시고, 그 탈출을 도우시는 역사에 참여하십니다. 가나안의 일곱 부족 소도시 국가와 의 전투 역사에 참여 하시고, 가나안 땅에서 야훼신앙 종 교 공동체를 이루는 역사에 개입하셨습니다. 통일 왕국과 분열왕국의 아픈 이스라엘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 고, 포로와 귀환의 역사에 참여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마찬 가지입니다. 역사에 매몰되거나 역사 에 코를 밖고 안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의 사건에 교회가 참여해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사랑을 구체적으로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역사의 무풍지대, 역사의 방관자로 지내오지 않았나 반성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여섯째는 고난기피의 기복 신앙의 모습입니다. 복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 하시고 인간 을 창조하여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복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복 주의는 그 하나님의 복을 사유화하고 가둬 놓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나눠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종이 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고난을 실천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그러나 복만 누 리고 나눔이 없다면, 자유는 누리면서 종이 되지 않으려 한다면, 영광만 받고 고난은 기피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 이 아닙니다. 은혜는 값 싼 것이 아니고 복은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영광, 복과 섬김, 자유와 종 이 두 가지 가 동시에 선포 되고 함께 실천 될 때 아름 다운 것이지요. 이런 균형을 우리의 교회가 잃어 버리지 않았나 회개 할 일입니다. 개혁교회의 정의는 "복음의 질서를 따라 늘 새로와 지는 교회" 혹은 "늘 새롭게 복음과 만나려는 노력이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혁되고 있는 교회로 서 무엇이 새로와 져야 할 요소인지를 확정하고 실천하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관성과 전통 보다 하나님의 본뜻(복음) 자체가 기준이 되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것을 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금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금식의 내용과 뜻이 중요하 다는 말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금식의 행위 때문에 만족해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본 뜻이 중요합니다. 금식하는 것도 금식의 본 뜻을 잊어 버리면, 하지 않는 것 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괴롭게 하고 금식을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금식하며 다투 고, 싸우며, 금식하면서 악한 일을 하고, 향락을 즐기면 금식의 행위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도 이것은 금식이나 회개 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5절) 그러나 이제 우리의 현 단계는 개혁의 과제를 붙잡고 그 당위성만 주장하거나 비판에만 열 올릴 것이 아닙니다. 이 와 같은 한국교회의 잘못된 관성과 개혁의 과제를 안고 그 것을 온 몸으로, 십자가로 지고 묵묵히 고난 속에서 실천 하는 일이 더 시급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누 구를 비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손가락질 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자는 것입니다. 루터 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이 그랬습니다. 카톨릭을 무너 뜨 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자는 것이 출발이었고, 목적이었습니다. 보다 복음적이고 성서적인 교회를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요청하고 계십니다. 성서가 가르키는 우리의 하나님은 역 사의 하나님이시며, 성서가 배척하는 것이 교회의 이기주 의. 물질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성서가 주장하는 것이 고난 속의 영광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와 함 께하는 교회, 민족의 고통을 쓸어 안는 교회, 역사안에서 응답하며 실천하는 교회, 지역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 을 다하는 교회, 물량적 성장 보다 선교적 실천으로 성숙 의 잣대를 삼는 교회, 고난과 좁은 길을 기꺼이 선택하는 교회 이런 교회를 하나님은 지금 찾고 계십니다. 부자 청년에게 예수께서는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전 삶과 재산을 건 나눔의 실천이 부족 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자기 스스로 의롭다는 자세로 십 계명을 다 지켜 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청년의 입지는 없어졌습니다. 다만 예수의 도전 만이 남아 있고 자신의 결단 만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청년은 예수의 도전을 뿌리 쳤고, 그 청년의 자신을 향한 개혁에 실패를 했습니다. 마찬 가지입니다. 부패구조는 나에게도 있습니다. 구조적 부패에 대해 언급하는 것 만으로, 자신의 부패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구조적 죄악에 대해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의 죄책이 면책되지 않습니다. 마치 개혁은 개혁을 부 르짓고 주창하는 자 부터 깨끗하지 않으면 허구인 것처럼 말이지요. 개혁을 이야기 하고 실천할 때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도 같은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부패구조는 구조에게도 있고, 개인 실존에게도 있습니다. 죄악성은 지 배자나 권력가에게도 있지만 민중들에게도 있습니다. 구조와 집단의 개혁, 타인을 향한 개혁의 출발을, 자기로 부터의 개혁 나로 부터의 개혁으로 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때까지의 오류는 자신의 개혁에만 머물러 무기력 하거나 구조적 불의를 조장했고, 구조와 집단의 개혁만을 실천 하 면서 개인의 개혁을 게을리 해 근본적인 인간 변화를 놓치는 수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제,경건 절재, 나눔,성실,등의 덕목 실천을 위해 부단히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한편 교회 구조의 개혁을 위해 과감 한 실천을 하지 않으면 사회를 향한 구원의 방주는 난파당 하고 침몰할 것이며, 우리 주님으로 부터도 외면 당할 수 있다는 절박한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당시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느꼈던 심정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참된 개혁 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개혁의 대안을 제시하 십니다. 구체적 실천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특히 가난 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도우는 것이 참된 금식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외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규모가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금식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교회와 신앙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 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6-7)
개혁은 고통스럽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를 무 너뜨리는 행위입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행동입니다. 이런 고통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 니 그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니 그리 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이런 몸부림 끝에는 하나님의 크 나큰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여기 있다 하리니"입니다. 그 총론을 하나님이 함께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각론은 문제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그리하면"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모습으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호위하고, 치료가 급속하고, 부르짖을 때 응 답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앞길이 아침 햇살 처럼 찬란하 게 빛난다고 했습니다. 우리 동녘교회를 개척할 때 구미 도량동 500만원 단칸 전 세방에 이 이사야 58장을 방문에 써 놓고 이름을 동녘교회 라고 지었습니다. 주제 성구가 바로 이사야 58장이었습니다. 동녘교회라고 하니 이 동규 목사의 이름을 따서 동녘 교회라고 했나하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지 모르지만 이사야 58장을 생각한 이름입니다.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아침 햇발이 찬란히 빛나는 싱그러운 아침입니다. 근본적으로 개혁을 지향하는 교회입니다. 근본적으로 아름 답고 찬란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동녘교회라고 좀 독특하게 지었습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 위하리니 0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개혁은 의무감이나 당위성 만이 아닙니다. 개혁은 기쁜 것입니다. 개혁의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근본적인 분위기는 동트는 아침 햇살 처럼 밝은 것입니다. 개혁은 싱그럽고 찬란한 아침 을 향한 행진입니다. 이 행진에 함께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가령 예 를 들자면, 세리 죄인의 식탁 사건(마9:9),안식일 병자 고 침 사건, 양과 염소의 비유 사건(마25장) 등이 그것입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 뜻을 다시 되 살리자는 것이지 하나님의 정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 합니다.(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고 왔다.-마5:17) 바울의 개혁은 배타적인 유대 그리스도인에 대한 것이었다. 바울은 베드로와의 논쟁을 통해 이방인을 위한 복음전 파의 정당성을 확보했습니다.(행10장) 교회사적으로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은 전통 관습,관성, 기존형식 보다 근원적 기준로서의 말씀을 내세운 것이었습니다. 즉 본질적 말씀에로의 재 정초(Re-Orientation)운동 이었습니다. 이것으로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 되어야 한다 '라는 명제를 탄생 시켰던 것입니다. 말씀의 빛을 따라서 늘 새로와 지는 교회를 개혁 교회는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르자면 교회의 개혁과 갱신은 전 시대에 걸친 것이어야 하고, 중단할 수 없는 걸음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 개인의 참회가 단순반복일지언정 계속되어야 하듯, 교회의 갱신도 단순반복일지라도 계속되 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신앙형태에 대한 반성은 이미 상 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습니다. 이제 구체적인 결단과 실천 만을 남겨 놓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 밖에서 광범위하게 제기 되었습니다. 교회안에서는 청년들과 평신도들 사이에 서 반성이 제기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목회자로부터 중직자 한국 교회 전반에 걸처 교회와 신앙 모습에 대한 반성과, 개혁을 향한 몸부림이 일고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의 본문에도 보니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고 했습니다.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 물을,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1절)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허물과 죄를 하나님 앞에 고해야 합니다. 그 런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신앙형태에 대한 반성을 크게 외 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가난한자를 외면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어떤 분은 쉽게 하는 말로 '돈 없으면 교회 못가'합니다.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는 데, 돈 없으면 교회 못 가게 되었다니 맞지 않는 말입니다. 과부의 옆전 부 푼을 크다 하시고, 가난한 자는 하나님나라가 그들의 것이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이 가기 힘든 것이 교회라니 안 될 말입니다.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은 물질 만능의 사회에서 별시받고 천대 받습니다. 주눅들고 기죽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신 사랑의 교회 안에 와서는 대접을 받고 하나님 나라가 그들 의 것이다라는 것에 걸 맞게 대접 받아 마땅합니다. 특별 히 교회에서 조차 가난한 자가 외면당하는 것은 주님의 뜻 이 아닙니다. 또 집단적으로 교회가 소외된 자에 대한 배려나 관심이 부 족하다는 것입니다. 빈민지역에 있는 교회는 빈민들과 아 픔과 고통을 함께 해야 합니다. 공단 지역에 있는 교회는 일차적으로 근로자들과 아픔을 함께 해야 합니다. 농촌의 있는 교회는 농민들의 고뇌를 나누고 그 목소리를 대변하 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에 참여 해야합니다. 이것이 지역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자들의 아편 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꿈과 희망 위로와 안식의 터가 되야합니다. 부자도 학식 있는 자도 권력 있는 자도 멀리 해서는 안되지만 특히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감싸 안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실천이 그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민족의 고통을 외면하는 모습입니다. 누구나 아는 대로 한민족은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구촌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그 분단으 로 인해 북쪽의 형제들은 아프리카의 르완다나 소말리아 보다 더 어려운 기아의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20세기는 실로 한민족이 고통에 신음하는 시기였습니다. 20세기 전 반은 일본 제국에 나라를 빼앗기고 갖은 고난을 다 겪었습니다. 20세기 후반은 민족의 허리가 분단된 채 반세기나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화해는 빨갱이요, 교류는 국가 보안법이고, 사랑은 반체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끝나가려 하는 20세기의 끝에서 북녘 동포 형제들은 굶주림으로 목 숨이 경각에 달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민족의 고통에 찬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회가 20세기에 얼마나 민족의 고난에 함께 참여했는가 하는 것을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을 이끌어 가는 교회로서의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화시기에 민족의 선각자들은 거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일제 치하에 서도 교회는 민족독립의 산실이었습니다. 가장 많이 읽힌 성경이 출애굽기였고, 설교의 주제도 그러한 경우가 많았 습니다.3.1운동 당시 지방의 만세 운동의 거점은 교회였 습니다. 교회가 불타고 일제에게 박해 받은 것은 우연의 일치 만은 아니었습니다. 만주로 이주한 간도 지방에는 민족 학교, 교회, 독립군이 그들의 활동 근거였습니다. 교회는 민족의 희망이요, 기독교인은 민족의 등불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기독교는 더 이상 민족의 등불이요, 희망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독재의 시기에도, 민주 화의 시기에도, 단군 이래 최대 도적이 탄생하는 부정부패 의 시기에도 교회는 사실 크게 한 일이 없습니다. 또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서도 교회는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지도자나 경제인들이 화해와 사랑의 십자가를지지 못하는 것은 이해 할 수 있지만, 우리 교회 가 민족의 문제를 위해 고난의 가시밭길 십자가의 길을 걸 어가지 못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통회할 일입니다. 사도 바울 처럼 민족의 영적 구원 뿐 아니라, 본훼퍼 처럼 민족 의 고난에도 참여하는 교회의 모습을 게을리한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 하여야 할 때입니다.
셋째는 민주적 교회 운영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교회하면 목사의 교회, 장로와 당회의 교회인 것처럼 인 식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몸의 지체의 아름다움이 아닐 것입니다. 지체 모두의 몸,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입니다. 종교 개혁의 정신은 모두가 사도요, 모든 일이 성스럽다는 것입니다. 함께 꾸려가는 교회는 아름 다운 교회입니다. 청년 과 여성이, 제직과 평신도가, 교직자와 평직자가 함께 꾸 려가는 교회가 멋있는 교회입니다. 각 지체가 다 소중하고 다 함께 움직이는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카리스마는 은사입니다. 이 카리스(은사)는 그리스도인 교인 모두 가 받았습니다. 이 카리스마(은사들)를 한 사람이 행사하는 그것 만 우러러 보는 교회가 아니라, 모두가 다 이 카 리스마(은사들)을 활용하고 서로 카리스마적 지배를 달성 하고, 서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데 이 카리스 마(은사들)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 카리스마(은사들)가 오 케스트라 처럼 울려 퍼지는 것이 그리스도 몸의 아름 다움 입니다. 그 어떤 모습으로도 목사 한 사람의 카리스마적 지배를 정당화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중직 자들의 카리스마(은사들)의 지배적 행사를 정당화 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권위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획일화 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카리스(은사)의 구별은 있 되 모두의 은사를 잘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바라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넷째는 물량적 성장주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물량으로 잽니다. 교인 수, 헌금총액, 교회건 물, 목회성장, 선교의 성과 모두 물량입니다. 물량 만으로 성숙을 측정하지 않고 내용으로 성숙을 측정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알곡을 그렇게 가려 내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큰 물량을 가진 교회 중에서도 알곡이 있을 것이요, 적은 물량 중에서도 죽정이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요. 문제는 물량이 아니라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탈 역사주의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집트 파라오의 제국에 서 탈출의 역사를 시작하라 하시고, 그 탈출을 도우시는 역사에 참여하십니다. 가나안의 일곱 부족 소도시 국가와 의 전투 역사에 참여 하시고, 가나안 땅에서 야훼신앙 종 교 공동체를 이루는 역사에 개입하셨습니다. 통일 왕국과 분열왕국의 아픈 이스라엘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 고, 포로와 귀환의 역사에 참여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마찬 가지입니다. 역사에 매몰되거나 역사 에 코를 밖고 안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의 사건에 교회가 참여해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사랑을 구체적으로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역사의 무풍지대, 역사의 방관자로 지내오지 않았나 반성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여섯째는 고난기피의 기복 신앙의 모습입니다. 복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 하시고 인간 을 창조하여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복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복 주의는 그 하나님의 복을 사유화하고 가둬 놓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나눠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종이 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고난을 실천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그러나 복만 누 리고 나눔이 없다면, 자유는 누리면서 종이 되지 않으려 한다면, 영광만 받고 고난은 기피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 이 아닙니다. 은혜는 값 싼 것이 아니고 복은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영광, 복과 섬김, 자유와 종 이 두 가지 가 동시에 선포 되고 함께 실천 될 때 아름 다운 것이지요. 이런 균형을 우리의 교회가 잃어 버리지 않았나 회개 할 일입니다. 개혁교회의 정의는 "복음의 질서를 따라 늘 새로와 지는 교회" 혹은 "늘 새롭게 복음과 만나려는 노력이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혁되고 있는 교회로 서 무엇이 새로와 져야 할 요소인지를 확정하고 실천하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관성과 전통 보다 하나님의 본뜻(복음) 자체가 기준이 되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것을 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금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금식의 내용과 뜻이 중요하 다는 말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금식의 행위 때문에 만족해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본 뜻이 중요합니다. 금식하는 것도 금식의 본 뜻을 잊어 버리면, 하지 않는 것 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괴롭게 하고 금식을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금식하며 다투 고, 싸우며, 금식하면서 악한 일을 하고, 향락을 즐기면 금식의 행위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도 이것은 금식이나 회개 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5절) 그러나 이제 우리의 현 단계는 개혁의 과제를 붙잡고 그 당위성만 주장하거나 비판에만 열 올릴 것이 아닙니다. 이 와 같은 한국교회의 잘못된 관성과 개혁의 과제를 안고 그 것을 온 몸으로, 십자가로 지고 묵묵히 고난 속에서 실천 하는 일이 더 시급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누 구를 비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손가락질 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자는 것입니다. 루터 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이 그랬습니다. 카톨릭을 무너 뜨 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자는 것이 출발이었고, 목적이었습니다. 보다 복음적이고 성서적인 교회를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요청하고 계십니다. 성서가 가르키는 우리의 하나님은 역 사의 하나님이시며, 성서가 배척하는 것이 교회의 이기주 의. 물질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성서가 주장하는 것이 고난 속의 영광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와 함 께하는 교회, 민족의 고통을 쓸어 안는 교회, 역사안에서 응답하며 실천하는 교회, 지역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 을 다하는 교회, 물량적 성장 보다 선교적 실천으로 성숙 의 잣대를 삼는 교회, 고난과 좁은 길을 기꺼이 선택하는 교회 이런 교회를 하나님은 지금 찾고 계십니다. 부자 청년에게 예수께서는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전 삶과 재산을 건 나눔의 실천이 부족 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자기 스스로 의롭다는 자세로 십 계명을 다 지켜 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청년의 입지는 없어졌습니다. 다만 예수의 도전 만이 남아 있고 자신의 결단 만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청년은 예수의 도전을 뿌리 쳤고, 그 청년의 자신을 향한 개혁에 실패를 했습니다. 마찬 가지입니다. 부패구조는 나에게도 있습니다. 구조적 부패에 대해 언급하는 것 만으로, 자신의 부패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구조적 죄악에 대해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의 죄책이 면책되지 않습니다. 마치 개혁은 개혁을 부 르짓고 주창하는 자 부터 깨끗하지 않으면 허구인 것처럼 말이지요. 개혁을 이야기 하고 실천할 때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도 같은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부패구조는 구조에게도 있고, 개인 실존에게도 있습니다. 죄악성은 지 배자나 권력가에게도 있지만 민중들에게도 있습니다. 구조와 집단의 개혁, 타인을 향한 개혁의 출발을, 자기로 부터의 개혁 나로 부터의 개혁으로 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때까지의 오류는 자신의 개혁에만 머물러 무기력 하거나 구조적 불의를 조장했고, 구조와 집단의 개혁만을 실천 하 면서 개인의 개혁을 게을리 해 근본적인 인간 변화를 놓치는 수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제,경건 절재, 나눔,성실,등의 덕목 실천을 위해 부단히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한편 교회 구조의 개혁을 위해 과감 한 실천을 하지 않으면 사회를 향한 구원의 방주는 난파당 하고 침몰할 것이며, 우리 주님으로 부터도 외면 당할 수 있다는 절박한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당시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느꼈던 심정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참된 개혁 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개혁의 대안을 제시하 십니다. 구체적 실천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특히 가난 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도우는 것이 참된 금식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외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규모가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금식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교회와 신앙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 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6-7)
개혁은 고통스럽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를 무 너뜨리는 행위입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행동입니다. 이런 고통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 니 그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니 그리 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이런 몸부림 끝에는 하나님의 크 나큰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여기 있다 하리니"입니다. 그 총론을 하나님이 함께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각론은 문제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그리하면"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모습으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호위하고, 치료가 급속하고, 부르짖을 때 응 답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앞길이 아침 햇살 처럼 찬란하 게 빛난다고 했습니다. 우리 동녘교회를 개척할 때 구미 도량동 500만원 단칸 전 세방에 이 이사야 58장을 방문에 써 놓고 이름을 동녘교회 라고 지었습니다. 주제 성구가 바로 이사야 58장이었습니다. 동녘교회라고 하니 이 동규 목사의 이름을 따서 동녘 교회라고 했나하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지 모르지만 이사야 58장을 생각한 이름입니다.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아침 햇발이 찬란히 빛나는 싱그러운 아침입니다. 근본적으로 개혁을 지향하는 교회입니다. 근본적으로 아름 답고 찬란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동녘교회라고 좀 독특하게 지었습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 위하리니 0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개혁은 의무감이나 당위성 만이 아닙니다. 개혁은 기쁜 것입니다. 개혁의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근본적인 분위기는 동트는 아침 햇살 처럼 밝은 것입니다. 개혁은 싱그럽고 찬란한 아침 을 향한 행진입니다. 이 행진에 함께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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