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2:1-4)
본문
사도 바울은 빌 1 장 마지막 부분에서 천국시민의 생활태도가 어떤 것인 가를 말했다, 빌 2 장에서는 그 생활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2;1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님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빌립보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가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되 었으니 1 절에 있는 네가지 사실에 유의를 하라는 것이다.
첫째: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둘째: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위로나 세째:성령님으로의 교제나넷째:긍휼과 자비와 2절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라고 우리 말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데 원문 성경에는 2절 초두에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말이 기록되 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엔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말이 4절 마지막에 기록되 있다. 그게 그것같이 느껴지실런지는 몰라도 문맥상 상당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1-4 절의 중심 문제가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의 제목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로 정했다. 나의 기쁨이란 사도 바울이 에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렸던 기쁨 그리고 지금도 누리고 있는 그 기쁨을 빌립보 성도들도 가지라는 것이다.
1,조화를 이루라.
(2) " 바울이 지녔던 그 기쁨을 가질려면 먼저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절을 다시 본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2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말을 네 번이나 반복을 하고 있는 감이 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왜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을까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다. 기쁨을 충만케 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면 철저히 하나가 되는 일이 교회 안에 선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1 절에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권면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나가 되는 일을 권해야 할 것이다. 1 절에 "하나님의 사랑에 무슨 위로나"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을 가지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가 되는 일을 위해 해야 한다. 1 절에 "성령님의 무슨 교제나" 성령님 안에서 교제를 나누고 있는 성령님으로 교제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가 되는 교제가 되어야 한다. 1 절에 "긍휼과 자비가 있거든" 정말 성도들의 심령에 긍휼과 자비가 있거든 우리가 하지 못할 일이 무었이겠나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2절에 "뜻을 같이하여" 라는 말 속에는 조화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기쁨이 충만하려면 우리 모두가 마음을 같이 하여야 한다. 기쁨이 충만하려면 우리 모두의 뜻이 같아야 한다. 기쁨이 충만하려면 우리들의 사랑이 같아야 한다. 같아야 한다는 이 말 즉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 말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마음과 또 그리스도를 중심한 사랑과 그리고 그리스도를 중심한 뜻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지개의 원리 프리즘의 원리 빛의 신비
2,남을 높여라.(3) "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면 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1),아무 일에나 다툼이나 - 다툼이 있어서는 기쁨을 충만케 할 수 없다. 여기에 다툼이라는 말 속에는 "날품팔이"라는 뜻이 함께 있는 단어이다. 이 말은 주의 일을 할 때 즉 교회 일을 할 때 다툼으로 다시 말해서 날 품팔이식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허영이란 말이 있다. 분수에 넘치는 일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자기착각 속에 있는 생각이나 행 동을 허영이라 할 수 있다. 다툼이나 허영심 같은 것은 전혀 남을 생각지 아니하는데서 발생되는 이 기주의적 결과인 것이다. 주님을 위한 헌신이나 봉사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기에 자기 자신의 기쁨만을 위한 일들이기에 자기 자신도 거기에서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고 또 남들에게도 기쁨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일에나 나는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며 살때 왜 다툼이 생기겠는가 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살때 허영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겸손히 섬기려고 이 당에 오셨던 분이시다. 허리에 띠를 두루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던 분이시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때묻은 발을 씻기는 일을 했기 때문에 그의 인격에 또 그의 신분상 손해가 생긴일이 있었는가 오히려 주님은 더 존경의 대상이 되셨던 것이다. 주님의 일을함에 있어서 남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일들 때문에 내가 좀 손해를 보면 어떤가 사도 바울이 가졌던 충만한 기쁨은 다툼이나 허영심으로 사람들과의 경재에서 받을려고 앴던 것이 아니였다. 그져 섬기는 자세로 남들을 위한 숨은 봉사로 주님만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그 일을 하기로 작정을 했던 것이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살았던 그 삶이 결국은 주님을 기쁘게하는 결과를 낳았고 또 자기도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었던 것이다.
3,남의 일을 돌아보라 !(4) 4절에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라" 이 말은 다툼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 결코 자기의 일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돌아볼 뿐더러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아보라는 것이다 어떤분은 속으로 요즘 자기 일도 다하지 못하고 사는 세상에 언제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볼 수 있겠나 하고 반문하실 분도 계실 줄 안다. 그러나 우리들의 믿음의 대 선배이신 사도 바울은 남의 일을 돌아보면서 자기의 기쁨을 충만케 하시었던 분이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시면서 만족 해 하시었던 바로 그 기쁨인 것이다. 이 사실 신앙의 성숙도는 남에 대한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신앙이 어린 아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나"만 생각하는 경향이 아주 강하게 나탄난다. 그러나 점점 신앙의 단계가 성숙해지면 자신의 문제보다는 남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게 된다. 어떻게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되는 삶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성숙하는 과정도 어린아이가 성장하는 과정과 흡사한 것이다. 유아기의 관심이 무었이던가 성숙하지 못한 그때의 관심은 오직 자기뿐이다. 내 입에 당장 무었이 들어 오느냐 들어오지 않는냐가 최대의 관심사이다. 입에 무었이 들어 오면 만족해하고 아무것도 들어 오는 것이 없으면 죽어라고 울어댄다.
그런데 이 아이가 어떻게 자라느냐에 따라서 나중에 사회에 문제아가 되기도 하고 또는 사회가 똑 필료로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사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다. 귀한 꽃은 향기를 눈에 보이지 않게 흘려 보낸다. 그러면서 그 꽃은 활작 웃어 보인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마25;40절에서 "임금이 대답하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첫째: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둘째: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위로나 세째:성령님으로의 교제나넷째:긍휼과 자비와 2절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라고 우리 말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데 원문 성경에는 2절 초두에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말이 기록되 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엔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말이 4절 마지막에 기록되 있다. 그게 그것같이 느껴지실런지는 몰라도 문맥상 상당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1-4 절의 중심 문제가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의 제목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로 정했다. 나의 기쁨이란 사도 바울이 에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렸던 기쁨 그리고 지금도 누리고 있는 그 기쁨을 빌립보 성도들도 가지라는 것이다.
1,조화를 이루라.
(2) " 바울이 지녔던 그 기쁨을 가질려면 먼저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절을 다시 본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2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말을 네 번이나 반복을 하고 있는 감이 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왜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을까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다. 기쁨을 충만케 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면 철저히 하나가 되는 일이 교회 안에 선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1 절에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권면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나가 되는 일을 권해야 할 것이다. 1 절에 "하나님의 사랑에 무슨 위로나"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을 가지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가 되는 일을 위해 해야 한다. 1 절에 "성령님의 무슨 교제나" 성령님 안에서 교제를 나누고 있는 성령님으로 교제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가 되는 교제가 되어야 한다. 1 절에 "긍휼과 자비가 있거든" 정말 성도들의 심령에 긍휼과 자비가 있거든 우리가 하지 못할 일이 무었이겠나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2절에 "뜻을 같이하여" 라는 말 속에는 조화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기쁨이 충만하려면 우리 모두가 마음을 같이 하여야 한다. 기쁨이 충만하려면 우리 모두의 뜻이 같아야 한다. 기쁨이 충만하려면 우리들의 사랑이 같아야 한다. 같아야 한다는 이 말 즉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 말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마음과 또 그리스도를 중심한 사랑과 그리고 그리스도를 중심한 뜻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지개의 원리 프리즘의 원리 빛의 신비
2,남을 높여라.(3) "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면 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1),아무 일에나 다툼이나 - 다툼이 있어서는 기쁨을 충만케 할 수 없다. 여기에 다툼이라는 말 속에는 "날품팔이"라는 뜻이 함께 있는 단어이다. 이 말은 주의 일을 할 때 즉 교회 일을 할 때 다툼으로 다시 말해서 날 품팔이식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허영이란 말이 있다. 분수에 넘치는 일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자기착각 속에 있는 생각이나 행 동을 허영이라 할 수 있다. 다툼이나 허영심 같은 것은 전혀 남을 생각지 아니하는데서 발생되는 이 기주의적 결과인 것이다. 주님을 위한 헌신이나 봉사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기에 자기 자신의 기쁨만을 위한 일들이기에 자기 자신도 거기에서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고 또 남들에게도 기쁨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일에나 나는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며 살때 왜 다툼이 생기겠는가 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살때 허영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겸손히 섬기려고 이 당에 오셨던 분이시다. 허리에 띠를 두루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던 분이시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때묻은 발을 씻기는 일을 했기 때문에 그의 인격에 또 그의 신분상 손해가 생긴일이 있었는가 오히려 주님은 더 존경의 대상이 되셨던 것이다. 주님의 일을함에 있어서 남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일들 때문에 내가 좀 손해를 보면 어떤가 사도 바울이 가졌던 충만한 기쁨은 다툼이나 허영심으로 사람들과의 경재에서 받을려고 앴던 것이 아니였다. 그져 섬기는 자세로 남들을 위한 숨은 봉사로 주님만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그 일을 하기로 작정을 했던 것이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살았던 그 삶이 결국은 주님을 기쁘게하는 결과를 낳았고 또 자기도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었던 것이다.
3,남의 일을 돌아보라 !(4) 4절에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라" 이 말은 다툼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 결코 자기의 일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돌아볼 뿐더러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아보라는 것이다 어떤분은 속으로 요즘 자기 일도 다하지 못하고 사는 세상에 언제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볼 수 있겠나 하고 반문하실 분도 계실 줄 안다. 그러나 우리들의 믿음의 대 선배이신 사도 바울은 남의 일을 돌아보면서 자기의 기쁨을 충만케 하시었던 분이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시면서 만족 해 하시었던 바로 그 기쁨인 것이다. 이 사실 신앙의 성숙도는 남에 대한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신앙이 어린 아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나"만 생각하는 경향이 아주 강하게 나탄난다. 그러나 점점 신앙의 단계가 성숙해지면 자신의 문제보다는 남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게 된다. 어떻게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되는 삶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성숙하는 과정도 어린아이가 성장하는 과정과 흡사한 것이다. 유아기의 관심이 무었이던가 성숙하지 못한 그때의 관심은 오직 자기뿐이다. 내 입에 당장 무었이 들어 오느냐 들어오지 않는냐가 최대의 관심사이다. 입에 무었이 들어 오면 만족해하고 아무것도 들어 오는 것이 없으면 죽어라고 울어댄다.
그런데 이 아이가 어떻게 자라느냐에 따라서 나중에 사회에 문제아가 되기도 하고 또는 사회가 똑 필료로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사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다. 귀한 꽃은 향기를 눈에 보이지 않게 흘려 보낸다. 그러면서 그 꽃은 활작 웃어 보인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마25;40절에서 "임금이 대답하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