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예수님은 왕이신가 (눅19:11-27)
본문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리고에 머무르고 계시지만 이곳은 경유지에 불과합니다. 그분의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입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23km 떨어진 거리에 있기 때문에 거의 다 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의 예루살렘 방문은 그분의 마지막 방문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일 주일 안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기적으로는 유월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때는 일년 중 다른 어느 때보다도 미묘한 기류가 유대인들 사이에 흐르게 됩니다. 유월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억눌린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이 절기를 맞을 때마다 자신들의 현재 상황에 울분을 가지게 되고 흥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폭력으로 유대인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열심당원과 같은 이들은 기회를 봐서 폭동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일반 대중은 심정적으로는 그들의 행동에 동조하지만 행동으로 나타내지는 못하고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의 출현을 학수고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기에 예수님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다고 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야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성경의 예언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다기보다는 메시야로 받들고자 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수 많은 이적들을 생각하며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시며 이상적인 신권정치(神權政治)를 펼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분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과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하고 바로잡아 주어야 할 필요를 느끼셔서 본문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는 40여 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에 유대 나라를 통치했던 헤롯은 주전 4년에 죽었는데, 사마리아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아켈라오에게 자기 뒤를 잇게 하였습니다. 아켈라오는 이 상속을 승인받으려고 로마로 갔습니다. 아켈라오를 통치자로 원치 않았던 유대인들은 대표 50인을 보내어 아구스도 황제에게 그의 임명을 거부하는 탄원을 냈습니다. 황제는 아켈라오에게 “왕”이라는 칭호를 주지 않고 그의 아버지 왕국의 절반을 통치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문제를 처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역사적 사건을 자신과 빗대어서 말씀하신 것이었으며 들은 사람들도 그렇게 이해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비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를 세 가지만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재림시 왕으로 다스리십니다(15절).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는가에 대해서는 앞서도 바리새인들이 질문했었습니다(17:20). 그들이 원하는 나라 역시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가시적인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비가시적인 하나님 나라는 그 당시에도 존재했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삶 가운데 모셔들인 그리스도인 안에 영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시적인 하나님 나라는 장차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마24:36). 그러나 대략적인 때를 예견해 볼 수는 있습니다. 17장 22-25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힌트는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22절).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이전에는 임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25절). 하나님 나라는 그 옛날 예수님과 함께 팔레스타인 땅을 걸었던 제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임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22절). 하나님 나라는 그 나라에 대한 여러 헛소문들이 나돈 후에나 임하게 될 나라입니다(23절). 하나님 나라는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나타나는 나라가 아니라 갑작스럽게 임하는 나라입니다(24절). 본문은 그 시점을 좀더 명확하게 해주는 한 가지 단서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귀인은 당연히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분께서 왕위를 받기 위해서 먼 나라로 갔다 오셔야만 합니다(12절).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이 통치할 하나님 나라는 당장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임하는 것입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그분의 수난 후에 부활 승천이 있을 것이며 그분께서 왕으로서 재림하실 것이나 상당 기간이 경과해야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림 때에도 왕이셨습니다. 그분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마태는 성탄기사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는 동방박사의 말을 빌어 그분이 유대인의 왕임을 나타내었습니다. 빌라도가 재판 중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도 이를 긍정하셨습니다(마27:11). 사도 요한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는 말로 그분께서 왕이심을 증거했습니다(요1:11). 이처럼 그분께서는 왕이셨지만 왕으로서의 영광과 권세를 스스로 포기하셨습니다.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되찾게 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기 전에 기도하신 것이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1,
2,5) 예수 그리스도는 초림 때에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다시 오실 때에는 영광을 입으시고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이십니다.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계17:14) “그 옷과 그 다리에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19:16)
둘째, 예수님은 재림시 그리스도인들과 개별적으로 회계하십니다. 귀인은 먼 나라로 떠나가기 전에 종들을 불러 한 므나씩 나눠주며 장사하라고 했습니다. 1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데 1 므나는 100 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25장 14-30절의 달란트 비유와 흡사하지만 같은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서는 종들에게 각기 다른 달란트를 맡기지만 여기서는 똑같은 므나 하나씩을 맡깁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능력을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충성되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장 적은 능력을 소유한 사람도 그 사람이 충성된 사람일 경우에는 가장 큰 은사를 받은 사람과 똑같은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므나 비유에서는 은사와 능력이 서로 다르지만 직무는 동일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귀인은 종들이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받은 것을 가지고 장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종들이 어떻게 장사했는가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로부터 받습니다. 그 중에서도 차별 없이 똑같이 받는 것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받은 구원이 똑같습니다. 하루 하루가 24시간씩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똑같은 것을 가지고도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 열 배 거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주인이 준 것을 땅에 파묻었다가 돌려준 종처럼 거두는 것이 없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떤 것을 남겼는지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회계하실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주님께서 장사하라고 했는데 하지 않은 것은 불순종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맡기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하루 하루의 삶이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남기는 것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작은 것이라고 해서 소홀히해서는 안됩니다. 그분께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으로도 감동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자들에게 칭찬하시며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되면서 정치 지망생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말단 구의회에서부터 시의회의원들이 되기 위해서 애쓰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치단체장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 것을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을 좇아 충성하면 우리는 좁아 터진 이 나라의 어느 한 귀퉁이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2:27) 지금 정치권은 대선정국입니다. 역대 대선에서 보아왔듯이 대선이 끝나고 나면 논공행상이 있습니다. 그 기간 중 기여한 바에 따라서 상을 주고 대우를 해 주는 것입니다. 지금 민주계가 여권의 실세가 된 것도 그들이 지난 대선때 대통령을 위해서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다시 오시지 않을 것 같이 우리가 행동한다면 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스위스의 한 할머니. 처녀 시절 약혼자의 말을 듣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나이 스물 셋일 때 두 살 많은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2년 뒤 약혼했다. 약혼하던 해 약혼자는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으로 군대에 입대해야 했다. 약혼자는 전쟁터에서 약혼녀인 카티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를 기다려 주오”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편지의 일부이다. 내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더디어도 나를 기다려 주오. 찬란한 태양이 떠 맑은 날에도 나를 기다려 주오. 먹구름 낀 날에도 내가 오도록 나를 기다려 주오. 내가 전쟁에서 못 돌아온다는 소문을 들어도 나를 기다려 주오. 내가 만날 사람은 당신뿐이기 때문이라오. 그녀는 약혼자가 소련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녀는 실의에 빠졌지만 그가 보내 준 편지에 용기를 얻어 80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할머니는 약혼자가 보낸 편지 때문에 평생토록 마음 흔들리지 않고 수절할 수 있었다. 그 편지는 액자에 담겨 지금도 할머니에게 용기와 믿음을 주고 있다.
셋째, 예수님은 재림시 그분을 거부한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이 비유에서 백성들은 귀인이 그들의 왕 됨을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곧 공개적으로 그분을 배척할 것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빌라도가 재판 중에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 석방하려고 했으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하고 말했습니다(요19:12).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대제사장들도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요구했습니다(요19:15). 성경은 권세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손에 칼이 쥐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롬13:4) 왕을 대적하는 것은 반역입니다. 이 비유에도 반역자들에게 어떤 진노가 임하는지 마지막 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27절)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입니다. 당신은 “나는 유대인이 아니므로 예수를 왕으로 모시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계속 그분을 거역한다면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 심판을 받아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19:11,13,15,16)
“그리스도냐 프로메테우스냐” 로호만의 책 이름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물음이다. 또한 프로메테우스를 택한 마르크스의 명제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명제가 된 배경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어느 날, 마르크스는 딸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딸이 마르크스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누가 가장 모범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세요“ 마르크스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프로메테우스라고 대답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이 아니라 희랍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이다. 프로메테우스를 택한 데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이 신이 제우스 편을 들지 않고 끝까지 인간편에 섰다는 점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신이었다. 그는 제우스 신과 타이탄 족 사이의 싸움에서 타이탄 족이 패할 줄 알고 싸움에 가담하지 않아 위기를 모면했다. 그는 인간과 친숙하여 가끔 지상에 놀러와 사람들과 즐기기도 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제우스 신에게 바칠 제물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보았다. 그때도 그는 사람 편에 서서 그들에게 한 가지 묘안을 일러주었다. 살찐 소를 잡아 한 쪽에는 살코기를, 다른 한 쪽에는 뼈다귀와 내장을 갈라놓고 뼈다귀 위에 기름을 바르면 제우스는 뼈다귀 쪽을 택하리라는 내용이었다. 과연 제우스는 기름이 번지르르한 뼈다귀 쪽을 택했다. 그 후 사람들은 뼈다귀에 기름만 발라서 제사를 지내곤 하였다. 나중에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안 제우스 신은 사람들로부터 불을 빼앗아 고통을 주기 시작했다. 이에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신의 부엌에 들어가 향나무 심지에 불을 붙여 인간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줄 뿐 아니라 모든 지혜도 알려 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우스 신은 프로메테우스르 구리 쇠사슬로 묶어 코카사스 산 바위에 꽁꽁 묶어 놓았다. 낮에는 독수리가 그의 간을 쪼아 먹게 하고 밤이면 상처가 아무는 고통을 주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아픔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곤 했다. 힘센 영웅 헤라클레스에 의해 나중에 구원을 받았지만 말이다. 마르크스가 프로메테우스를 택한 것은 모진 고통 속에서도 끝내 인간 편에 섰고, 제우스 신과 끝까지 타협하지 않은 불굴의 정신 때문이었다. 그가 프로메테우스를 택한 것은 그의 사상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제우스 신을 부정하면서도 인간을 위해 고통을 참았다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그토록 감격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간에게 참 소망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며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실 만큼 우리를 철저히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주셨고 영원히 우리 편에 서 계시는 분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너는 내게 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주님께 “저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후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써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영혼의 잘됨을 구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저는 당신 없이 부하기보다 당신과 함께 가난하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 없이 하늘을 소유하기보다 당신과 함께 이 세상을 계속 걷고 싶습니다. 당신이 계시는 곳에 천국이 있고, 당신이 계시지 않는 곳에 죽음과 지옥이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를 인간의 메시아라고 말하는 마르크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오직 그분 외에는 원하는 것이 없다는 아 켐피스. 당신은 지금 프로메테우스를 택하여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택하여 살고 있는가 하늘의 뜻을 사모하는 자의 선택은 분명하리라.
왜냐하면 그 곳에서 일 주일 안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기적으로는 유월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때는 일년 중 다른 어느 때보다도 미묘한 기류가 유대인들 사이에 흐르게 됩니다. 유월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억눌린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이 절기를 맞을 때마다 자신들의 현재 상황에 울분을 가지게 되고 흥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폭력으로 유대인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열심당원과 같은 이들은 기회를 봐서 폭동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일반 대중은 심정적으로는 그들의 행동에 동조하지만 행동으로 나타내지는 못하고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의 출현을 학수고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기에 예수님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다고 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야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성경의 예언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다기보다는 메시야로 받들고자 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수 많은 이적들을 생각하며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시며 이상적인 신권정치(神權政治)를 펼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분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과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하고 바로잡아 주어야 할 필요를 느끼셔서 본문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는 40여 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에 유대 나라를 통치했던 헤롯은 주전 4년에 죽었는데, 사마리아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아켈라오에게 자기 뒤를 잇게 하였습니다. 아켈라오는 이 상속을 승인받으려고 로마로 갔습니다. 아켈라오를 통치자로 원치 않았던 유대인들은 대표 50인을 보내어 아구스도 황제에게 그의 임명을 거부하는 탄원을 냈습니다. 황제는 아켈라오에게 “왕”이라는 칭호를 주지 않고 그의 아버지 왕국의 절반을 통치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문제를 처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역사적 사건을 자신과 빗대어서 말씀하신 것이었으며 들은 사람들도 그렇게 이해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비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를 세 가지만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재림시 왕으로 다스리십니다(15절).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는가에 대해서는 앞서도 바리새인들이 질문했었습니다(17:20). 그들이 원하는 나라 역시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가시적인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비가시적인 하나님 나라는 그 당시에도 존재했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삶 가운데 모셔들인 그리스도인 안에 영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시적인 하나님 나라는 장차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마24:36). 그러나 대략적인 때를 예견해 볼 수는 있습니다. 17장 22-25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힌트는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22절).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이전에는 임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25절). 하나님 나라는 그 옛날 예수님과 함께 팔레스타인 땅을 걸었던 제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임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22절). 하나님 나라는 그 나라에 대한 여러 헛소문들이 나돈 후에나 임하게 될 나라입니다(23절). 하나님 나라는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나타나는 나라가 아니라 갑작스럽게 임하는 나라입니다(24절). 본문은 그 시점을 좀더 명확하게 해주는 한 가지 단서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귀인은 당연히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분께서 왕위를 받기 위해서 먼 나라로 갔다 오셔야만 합니다(12절).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이 통치할 하나님 나라는 당장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임하는 것입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그분의 수난 후에 부활 승천이 있을 것이며 그분께서 왕으로서 재림하실 것이나 상당 기간이 경과해야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림 때에도 왕이셨습니다. 그분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마태는 성탄기사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는 동방박사의 말을 빌어 그분이 유대인의 왕임을 나타내었습니다. 빌라도가 재판 중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도 이를 긍정하셨습니다(마27:11). 사도 요한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는 말로 그분께서 왕이심을 증거했습니다(요1:11). 이처럼 그분께서는 왕이셨지만 왕으로서의 영광과 권세를 스스로 포기하셨습니다.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되찾게 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기 전에 기도하신 것이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1,
2,5) 예수 그리스도는 초림 때에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다시 오실 때에는 영광을 입으시고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이십니다.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계17:14) “그 옷과 그 다리에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19:16)
둘째, 예수님은 재림시 그리스도인들과 개별적으로 회계하십니다. 귀인은 먼 나라로 떠나가기 전에 종들을 불러 한 므나씩 나눠주며 장사하라고 했습니다. 1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데 1 므나는 100 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25장 14-30절의 달란트 비유와 흡사하지만 같은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서는 종들에게 각기 다른 달란트를 맡기지만 여기서는 똑같은 므나 하나씩을 맡깁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능력을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충성되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장 적은 능력을 소유한 사람도 그 사람이 충성된 사람일 경우에는 가장 큰 은사를 받은 사람과 똑같은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므나 비유에서는 은사와 능력이 서로 다르지만 직무는 동일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귀인은 종들이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받은 것을 가지고 장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종들이 어떻게 장사했는가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로부터 받습니다. 그 중에서도 차별 없이 똑같이 받는 것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받은 구원이 똑같습니다. 하루 하루가 24시간씩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똑같은 것을 가지고도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 열 배 거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주인이 준 것을 땅에 파묻었다가 돌려준 종처럼 거두는 것이 없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떤 것을 남겼는지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회계하실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주님께서 장사하라고 했는데 하지 않은 것은 불순종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맡기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하루 하루의 삶이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남기는 것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작은 것이라고 해서 소홀히해서는 안됩니다. 그분께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으로도 감동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자들에게 칭찬하시며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되면서 정치 지망생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말단 구의회에서부터 시의회의원들이 되기 위해서 애쓰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치단체장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 것을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을 좇아 충성하면 우리는 좁아 터진 이 나라의 어느 한 귀퉁이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2:27) 지금 정치권은 대선정국입니다. 역대 대선에서 보아왔듯이 대선이 끝나고 나면 논공행상이 있습니다. 그 기간 중 기여한 바에 따라서 상을 주고 대우를 해 주는 것입니다. 지금 민주계가 여권의 실세가 된 것도 그들이 지난 대선때 대통령을 위해서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다시 오시지 않을 것 같이 우리가 행동한다면 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스위스의 한 할머니. 처녀 시절 약혼자의 말을 듣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나이 스물 셋일 때 두 살 많은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2년 뒤 약혼했다. 약혼하던 해 약혼자는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으로 군대에 입대해야 했다. 약혼자는 전쟁터에서 약혼녀인 카티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를 기다려 주오”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편지의 일부이다. 내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더디어도 나를 기다려 주오. 찬란한 태양이 떠 맑은 날에도 나를 기다려 주오. 먹구름 낀 날에도 내가 오도록 나를 기다려 주오. 내가 전쟁에서 못 돌아온다는 소문을 들어도 나를 기다려 주오. 내가 만날 사람은 당신뿐이기 때문이라오. 그녀는 약혼자가 소련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녀는 실의에 빠졌지만 그가 보내 준 편지에 용기를 얻어 80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할머니는 약혼자가 보낸 편지 때문에 평생토록 마음 흔들리지 않고 수절할 수 있었다. 그 편지는 액자에 담겨 지금도 할머니에게 용기와 믿음을 주고 있다.
셋째, 예수님은 재림시 그분을 거부한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이 비유에서 백성들은 귀인이 그들의 왕 됨을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곧 공개적으로 그분을 배척할 것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빌라도가 재판 중에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 석방하려고 했으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하고 말했습니다(요19:12).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대제사장들도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요구했습니다(요19:15). 성경은 권세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손에 칼이 쥐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롬13:4) 왕을 대적하는 것은 반역입니다. 이 비유에도 반역자들에게 어떤 진노가 임하는지 마지막 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27절)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입니다. 당신은 “나는 유대인이 아니므로 예수를 왕으로 모시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계속 그분을 거역한다면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 심판을 받아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19:11,13,15,16)
“그리스도냐 프로메테우스냐” 로호만의 책 이름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물음이다. 또한 프로메테우스를 택한 마르크스의 명제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명제가 된 배경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어느 날, 마르크스는 딸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딸이 마르크스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누가 가장 모범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세요“ 마르크스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프로메테우스라고 대답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이 아니라 희랍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이다. 프로메테우스를 택한 데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이 신이 제우스 편을 들지 않고 끝까지 인간편에 섰다는 점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신이었다. 그는 제우스 신과 타이탄 족 사이의 싸움에서 타이탄 족이 패할 줄 알고 싸움에 가담하지 않아 위기를 모면했다. 그는 인간과 친숙하여 가끔 지상에 놀러와 사람들과 즐기기도 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제우스 신에게 바칠 제물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보았다. 그때도 그는 사람 편에 서서 그들에게 한 가지 묘안을 일러주었다. 살찐 소를 잡아 한 쪽에는 살코기를, 다른 한 쪽에는 뼈다귀와 내장을 갈라놓고 뼈다귀 위에 기름을 바르면 제우스는 뼈다귀 쪽을 택하리라는 내용이었다. 과연 제우스는 기름이 번지르르한 뼈다귀 쪽을 택했다. 그 후 사람들은 뼈다귀에 기름만 발라서 제사를 지내곤 하였다. 나중에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안 제우스 신은 사람들로부터 불을 빼앗아 고통을 주기 시작했다. 이에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신의 부엌에 들어가 향나무 심지에 불을 붙여 인간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줄 뿐 아니라 모든 지혜도 알려 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우스 신은 프로메테우스르 구리 쇠사슬로 묶어 코카사스 산 바위에 꽁꽁 묶어 놓았다. 낮에는 독수리가 그의 간을 쪼아 먹게 하고 밤이면 상처가 아무는 고통을 주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아픔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곤 했다. 힘센 영웅 헤라클레스에 의해 나중에 구원을 받았지만 말이다. 마르크스가 프로메테우스를 택한 것은 모진 고통 속에서도 끝내 인간 편에 섰고, 제우스 신과 끝까지 타협하지 않은 불굴의 정신 때문이었다. 그가 프로메테우스를 택한 것은 그의 사상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제우스 신을 부정하면서도 인간을 위해 고통을 참았다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그토록 감격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간에게 참 소망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며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실 만큼 우리를 철저히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주셨고 영원히 우리 편에 서 계시는 분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너는 내게 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주님께 “저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후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써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영혼의 잘됨을 구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저는 당신 없이 부하기보다 당신과 함께 가난하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 없이 하늘을 소유하기보다 당신과 함께 이 세상을 계속 걷고 싶습니다. 당신이 계시는 곳에 천국이 있고, 당신이 계시지 않는 곳에 죽음과 지옥이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를 인간의 메시아라고 말하는 마르크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오직 그분 외에는 원하는 것이 없다는 아 켐피스. 당신은 지금 프로메테우스를 택하여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택하여 살고 있는가 하늘의 뜻을 사모하는 자의 선택은 분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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