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엡2:18)
본문
에베소서 1,2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일들을 시각을 달리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베푸시며 집념을 가지고 간섭하고 계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부터 계획하고 계셨던 그의 자녀들을 영광의 자리로 완성시키는 계획을 어떻게든 이루고야 말 것이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행하셨던 일이 무엇인가 이런 이야기들을 추적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나아가는 사람으로 완성될 것이다. 에베소서 2장 이하의 말씀이 그 사실을 보여준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2-6)”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자리’로부터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셨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즉 전 인류가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였다. 이 부분에 근거해서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를 얼마나 제대로 사용할 줄 알고 누리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신앙수준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기도하는가 한 사건의 마지막에 가서 겨우 기도를 동원하지 않는가 인간적인 힘으로 안되니까 최후 수단으로 기도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건에 부딪쳤을 때 맨 처음 확신 있게 기도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기도에 대한 정당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라는 것은 훈련과 방법적 차원에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근본적인 조건은 관계성이다. 관계가 있고난 다음에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방법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왜 기도와 연결이 되는가 기도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나아간다’는 것은 장소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분과 관계를 맺고, 교제를 하고, 어떤 사건과 행위를 같이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다. 이것이 신자들에게 허락된 특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멀리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 중에 하나인 기도를 놓고 볼 때에 우리는 기도의 특권을 누리지는 못하고 응답을 얻어내는 ‘기술’에만 급급하다. 기도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래서 제자들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기도가 분명히 기독교가 가지는 가장 강력한 신자들에게 허락된 특권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적다. 기도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것으로 인하여 위로받거나 힘을 얻지 못한다면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도 자체가 별 것 아니거나, 기독교 자체에 문제가 있거나, 그것을 허락받은 우리가 문제가 있거나 셋 중에 하나일 것이다.
기도가 가장 오해되는 것 중에 하나는 그것이 방법론으로만 대두되어서 신앙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하게 기술적인 것으로 발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기도를 할 수 있다는 특권과 기도를 하면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했더니 되더라’를 배운다. ‘기도가 무엇인가’를 배우지 않고 ‘어떻게 해서 응답을 얻었는가’로 거꾸로 추적해 들어가면 성경에 기도가 우리에게 허락되고 왜 ‘응답을 받는가’ 하는 것을 추적해서 얻어내야 하는 진리들이 아닌 것을 나열하게 된다. 우리는 체험으로부터 기도를 배운다. 체험으로부터 배우자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이런 나쁜 결론들을 갖기 시작했다.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좋은가 ‘솔직히 하는 것이 좋다’는 이상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솔직히 할 것’과 ‘열심히 할 것’과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할 것’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도란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과 신분 때문에 생긴 하나님과의 교제요 관계에 의한 부산물이다. 모든 부산물은 그 관계가 확인되고, 정당하고, 깨어지지 않으면 부산물은 언제든지 얻어진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 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 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 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 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1-5)” 기도는 마치 이와 같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어 있고 제대로 그분과의 관계가 유지되어 있는 한 열매는 자동적으로 맺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그의 요구들이 들어지게 된다.
그 요구가 이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두 다 응답되게 되어 있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기도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확보된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의 죽으심과 그가 오신 것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저주받은 자리로부터 새 생명을 얻기 하기 위하여, 영원히 형벌을 받을 자리로 부터 하나님의 영광된 자녀가 되는 자리로 이전시키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언제나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이 있다. 소극적인 면은 저주와 진노의 자리로부터 구원받았다는 사실이고, 적극적인 면은 우리가 이제는 영광의 자리, 어떤 축복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 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죽으셨다. 우리가 하는 기도에 있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저는 그리스도께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기도란 방법이기 이전에 특권이다. 그것이 갖는 메시지가 이렇게 되어 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취소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갖고 있고 내가 고한 간구와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 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로구나’라는 점이다. 기도란 이미 기도 자체로서 축복이요, 특권이요, 해답이요, 상급이요, 무기이다. ‘아버지’라는 그 한마디를 부를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확보해 주시고 오늘 이루어 주시는 신분과 특권과 영원한 운명을 누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자리’로부터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셨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즉 전 인류가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였다. 이 부분에 근거해서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를 얼마나 제대로 사용할 줄 알고 누리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신앙수준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기도하는가 한 사건의 마지막에 가서 겨우 기도를 동원하지 않는가 인간적인 힘으로 안되니까 최후 수단으로 기도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건에 부딪쳤을 때 맨 처음 확신 있게 기도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기도에 대한 정당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라는 것은 훈련과 방법적 차원에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근본적인 조건은 관계성이다. 관계가 있고난 다음에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방법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왜 기도와 연결이 되는가 기도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나아간다’는 것은 장소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분과 관계를 맺고, 교제를 하고, 어떤 사건과 행위를 같이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다. 이것이 신자들에게 허락된 특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멀리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 중에 하나인 기도를 놓고 볼 때에 우리는 기도의 특권을 누리지는 못하고 응답을 얻어내는 ‘기술’에만 급급하다. 기도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래서 제자들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기도가 분명히 기독교가 가지는 가장 강력한 신자들에게 허락된 특권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적다. 기도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것으로 인하여 위로받거나 힘을 얻지 못한다면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도 자체가 별 것 아니거나, 기독교 자체에 문제가 있거나, 그것을 허락받은 우리가 문제가 있거나 셋 중에 하나일 것이다.
기도가 가장 오해되는 것 중에 하나는 그것이 방법론으로만 대두되어서 신앙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하게 기술적인 것으로 발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기도를 할 수 있다는 특권과 기도를 하면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했더니 되더라’를 배운다. ‘기도가 무엇인가’를 배우지 않고 ‘어떻게 해서 응답을 얻었는가’로 거꾸로 추적해 들어가면 성경에 기도가 우리에게 허락되고 왜 ‘응답을 받는가’ 하는 것을 추적해서 얻어내야 하는 진리들이 아닌 것을 나열하게 된다. 우리는 체험으로부터 기도를 배운다. 체험으로부터 배우자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이런 나쁜 결론들을 갖기 시작했다.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좋은가 ‘솔직히 하는 것이 좋다’는 이상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솔직히 할 것’과 ‘열심히 할 것’과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할 것’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도란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과 신분 때문에 생긴 하나님과의 교제요 관계에 의한 부산물이다. 모든 부산물은 그 관계가 확인되고, 정당하고, 깨어지지 않으면 부산물은 언제든지 얻어진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 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 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 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 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1-5)” 기도는 마치 이와 같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어 있고 제대로 그분과의 관계가 유지되어 있는 한 열매는 자동적으로 맺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그의 요구들이 들어지게 된다.
그 요구가 이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두 다 응답되게 되어 있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기도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확보된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의 죽으심과 그가 오신 것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저주받은 자리로부터 새 생명을 얻기 하기 위하여, 영원히 형벌을 받을 자리로 부터 하나님의 영광된 자녀가 되는 자리로 이전시키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언제나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이 있다. 소극적인 면은 저주와 진노의 자리로부터 구원받았다는 사실이고, 적극적인 면은 우리가 이제는 영광의 자리, 어떤 축복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 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죽으셨다. 우리가 하는 기도에 있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저는 그리스도께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기도란 방법이기 이전에 특권이다. 그것이 갖는 메시지가 이렇게 되어 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취소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갖고 있고 내가 고한 간구와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 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로구나’라는 점이다. 기도란 이미 기도 자체로서 축복이요, 특권이요, 해답이요, 상급이요, 무기이다. ‘아버지’라는 그 한마디를 부를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확보해 주시고 오늘 이루어 주시는 신분과 특권과 영원한 운명을 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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