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세월들 (호3:1-5)
본문
높아지려는 사람들 낮아지려는 사람들 우리들에게는 누구나 높아져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학생은 성적이 높아지고 싶고 직장인은 직급이 높아지 고 싶습니다. 가정주부는 통장에 잔고가 높아지기를 바라고 사업가는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기를 기대합니다. 아무도 자신이 예전보다 더 낮아지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 역 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자주 제 속에서 꿈틀거리는 높아지려는 마음들을 봅니다. 모든 면에서 최고가 되고 싶 습니다. 높아져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낮아지기를 기대하고 원했던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입니다. 그 분은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고자 함이 아니요 섬기고자 함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교훈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낮아져 보고자 합니다. 많 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면 낮아질 수 있을 것인가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낮아 지지 못함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다 높아지려는 세상에서 낮아지려고 하다니요. 세상 사람들이 이런 우리들을 본다면 어리석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가치관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번 물어 보십시다. 여러분들은 참으로 낮아지기 위해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진정으로 낮아지는 것이 여러분들이 소원이십니까 예수님께서 본을 보인 것처럼 그렇게 낮은 자 리에 서서 섬기는 자로서의 삶 을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들의 진정한 소원입니까 간혹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낮아지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낮 아지기 위해서 낮아지려는 것 일까 아니면 높아지려는 속마음을 가지고 낮아지려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보다 더 겸손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서, 낮아지는 자가 큰 자라는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일부러 낮아지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베드로 이런 면에 있어서 대표적인 인물을 성경에서 찾는 다면 베드로일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 주변에 누가 진정 큰 자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는 줄 아십니까 예수님은 어 린아이 하나를 세워 놓고 이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논 리는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다른 사람 아래 들어갈 수 있는 자가 큰 자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베드로 의 마음은 자신도 그렇게 큰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어떻 게 하면 자신이 낮아진 큰 자인 가를 증명해 보일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 면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부터 아니 주님으로부터 낮아진 자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드디어 한 가지 아 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얼마나 사람들을 용서하는 사람인가를 증명해 보이면 자신이 큰 자로 여겨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 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이 이야기 를 해 놓고 예수님의 칭찬을 기 대했을 것입니다. 누구나 나 만큼 낮아져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야. 베드로에게 있어서 일곱 번이 라는 숫자는 다른 사람이 도무지 따라오지 못할 최고의 낮아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의 의견을 달랐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 지니라 주님의 대답은 베드로의 모든 기대를 무참히 박살내고야 맙니다.
주님의 이야기는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 니까 그렇습니다. 용서는 끝이 없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 오늘 이 베드로와 주님께서 나눈 이야기를 잘 보십시오. 베드로는 무엇 때문에 용서해 주리라 생각을 했습니 까 그렇습니다. 높아지기 위해서 용서해 주어야 하겠노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7번의 숫자를 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무한정의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 까 그렇습니다. 낮아짐은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향해서 다른 사람보다 네가 더 의롭게 보이기 위해서 용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용서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 을 자랑하기 위해서 용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 까 혹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롭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용서하시 지 않습니까 이런 용서는 성공 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위선자로 들통날 용서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들은 어떻습니까 위선적인 용 서를 하지 마십시다. 들통날 용서를 하지 마십시다. 우리들의 용서는 우리들의 삶의 한 본질입니다. 우리들의 체질이 용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들은 왜 용서를 체질화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이런 면에 있 어서 중요한 교훈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서 함께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세 종류의 사랑 흔히 3종류의 사랑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만약의 사랑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러 저러하게 해 준다면 나는 당신 을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당신이 나를 선대한다면 당신이 나 를 좋아한다면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좋아하겠다는 것입니다. 조건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사랑은 때문에의 사랑입니다. 상 대방이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주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나 를 선대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상대방이 나를 이러저러하게 해 주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를 선대하지 않으면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나도 또한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 것 역시 조건 적인 사랑입니다. 또 하나의 사랑은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내가 잘못했 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 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구하고의 사랑 오늘 본문에도 바로 이런 무조건 적인 불구하고의 사랑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읽습니다. 자 이 본문에 서는 무조건 적인 사랑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사랑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본문은 불구하고의 사랑이 할지라도의 사랑으로 표현 이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했다고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신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십계명 중에 가장 우선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 습니까 [출 20:2,3]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다른 신을 섬기지 말 것을 가장 먼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스라엘 백성들을 구해 주시면 서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간음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신을 섬겼다면 그것은 간음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길지라도 자 그러면 이번엔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긴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건포도 떡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건 포도 떡은 우상들에게 들여지던 최고의 제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즐겼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렇게 이것 을 이해해 봅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추석이 되면 무엇을 하지요 그렇습니다. 제사 를 드립니다. 자 이 제사를 드 리기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그렇습니다. 조상들을 노엽게 하지 않기 위해서 정성을 드려 음식을 장만합니다. 그리고 그 음식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그 다음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그 음식을 먹습니다. 푸짐하게 먹지요. 바로 이것입니다. 건포도 떡을 즐겼다는 것은 이방신을 섬기고 그것으로 인해 얻어지는 것을 즐거워 하며 먹 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사랑하다보 면 세상으로부터 얻는 여러 가 지 즐거움들도 같이 얻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빠져들어갑니다. 마치 건포도 떡과 같이 이것들은 우리들에게 달콤한 재미를 제공해 줍니다. 아마 세상에 빠져 보았던 분들은 그 즐거움이 어떠하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 더라도 어디를 가더라도 그것이 눈에 그려집니다. 그래서 거기에 취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 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이방신을 섬겼고 이로 인해 얻어지는 기쁨들을 누렸습니다. 여기 에 빠져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간음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무엇 이라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저들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들을 버리시지 않 고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이 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또 사랑하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계속해서 1절 을 보십시다. "너는 또 가서 . 사랑하라 하시기로" 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또 가서 사랑하라는 것 입니다. 이 말이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번이 처음이 아 니라는 것입니다. 전에도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라는 말이 붙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음부된 여인을 불러 오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은 호세아가 고멜을 처음 만날 때 부터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호 세아의 세 자녀 중에첫째 자녀를 빼고 다 호세아의 자녀가 아니라고 일컬어 진 것을 본다면 이 일은 제법 계속되었 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2절에 있는 말씀을 미루어 본다면 고멜이 이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지경에 빠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을 보시겠습니다. 고멜을 얼마에 사왔다고요 그렇습니다. 은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사 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계집종을 사 올 때 지불하는 가격이었습니다. 그렇 다면 고멜은 무엇이 되어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종이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고 멜이 종이 되어있었다면 어떤 종이 되어 있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렇지요. 고멜은 자신의 몸을 파는 창녀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어쩌면 흉악한 포주에게 잡혀서 자신의 몸을 팔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어찌하지 못한 체 그저 되는대로 세월을 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이 남자의 품에 안겨서 잠을 자고 내일은 또 다른 남자의 품 에 안겨서 잠을 자야 하는 신세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고멜을 바라보는 호세아의 마음은 어떠했을 까요 만약 여러분들이 호 세아의 입장이 된다면 여러분들 은 어떻게 하시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래 그래도 사랑해야지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마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어쩌면 한 번 정도는 용서하고 받아들일 줄 모르 겠습니다. 아니 한 두 번 쯤은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들이 계속 지속된다면 그래도 이제는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스 스럼 없이 할 것입니다, 나는 내 할 도리를 다했노라 말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호세아 가 고멜을 대하는 마음이 이런 마음이 아니였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내가 내 모든 것들을 다 팽개쳐 버리고 널 사랑했는데 어찌 그럴 수 있는 가 어찌 은혜를 이렇게 갚을 수 있는가 내가 널 어찌 사랑했는데 네가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하였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여인을 사랑하라고 하셨던 하나님을 원망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여 인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제게 이 여인을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 그래도 저는 어떤 가능성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좀 참고 저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면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런 소망을 가지고 저를 사랑했는데 이럴 수 있습니까 하고 하나님을 향해 항변을 했을 법합니다. 바로 이런 여인, 더 이상 쳐다보기도 싫은 그런 여인, 사랑을 저 버린 여인, 무엇 이 귀한 것인지 무엇이 선한 것 인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런 여인, 남편을 저버리고 다른 남정네를 사랑하는 그런 여인 이제는 창기가 되 어버린 그런 여인 그런 여인을 주님은 또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 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 런 여인을 사랑하라 말씀하십니까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이 얼마나 악한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넘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과연 순결한 신 부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언제나 정조를 지키는 신부라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부끄러움 없 이 나갈 수 있는 신부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아마 우리들의 모습을 삿삿히 살필 수 있는 현미경이 있다면 우리들 속 에 수많은 음행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고멜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세상으로부터 떨어 지는 부스러기들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우리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또의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불구하고의 사랑으로 사랑 하십니다. 이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이 우리들을 살 게 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이 하나님의 사랑이 한 없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호세아의 반응 자 그러면 이런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호세아는 어떻게 합니까
2,3절을 읽습니다.
호세아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렇습니다. 다시 저를 사랑합니다. 그냥 버릴 수 있는 여인이었지 만 다시 돈을 지불하고 저를 사 옵니다. 사실 고멜은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있으면 걸리 적 거리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사랑합니다. 욀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 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무 필요도 없는 아니 걸리 적 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니 바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그런 사랑으로 고멜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 정하십니까 이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애정을 갖고 돌보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사셔 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 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도 그런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끊임없는 용서를 베 풀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게 사십니까 진정 그렇게 사십니까 왜 우리들이 자주 이 용서 하는 일을 실패할까요 혹 베 드로처럼 용서하려 하지는 않습니까 용서라는 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영 적인 권위를 확보하려하지 않습 니까 내가 너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려 하지 않습니 까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교 만이며 위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용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용서라는 것 을 통해 영적 우위를 확보하려 하지 마십시오. 용서받은 자로 용서하시는 삶을 사십시오. 용서해야 할 일들이 있을 때 마다 당신도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진정한 용서가 여러분들의 삶에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더 나은 세월을 위해서 호세아는 이렇게 고멜을 용서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저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3 절을 가만히 살펴보면 저의 사랑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자 어떤 점이 예전과 같지 않아 보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현대인 의 성경은 이 부분을 좀 더 명 쾌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녀에게 당신은 당분간 혼자 조용히 지내도록 하시 오. 이제는 다른 남자를 좇아 다니거나 창녀 짓을 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당신을 기다 리겠오 하였다. 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어떤 점이 다릅니까 그렇습니다.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라는 말이 당 분간은 조용히 지내라는 말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제는 스스로 살필 수 있는 기 회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자숙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나만을 기다리고 나만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호세아도 어떻게 하겠다고 말합니까 예, 자신도 고멜을 기다리겠 다고 말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렇게 자숙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호세아가 사랑을 하지 않 겠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 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생각하면서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갖자는 것입니다. 더 나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이 런 기간을 갖자는 것입니다. 서로 기다리는 것이 힘들고 어렵지만 더 나은 사랑을 꿈꾸 며 기다림의 세월들을 갖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다림의 세월들은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장 말 미에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 까 예, 내가 네게 장가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녀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저들을 인도하여 내어서 마치 처음 결혼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혼인 예식을 올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문으로 변하 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풍요함을 회복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저 들이 바로 회복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 떻게 되는 것입니까 여기에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니 회복하신다 더니 왜 우리 들을 포로로 잡아가게 하십니 까 우리들에게 장가드신다 더니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까 하고 말 할 수 있었 을 것입니다. 이게 겨우 당신 이 나의 신랑이 된다는 의미입니까 하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3절에 호세아의 예를 들게 하십니다. 즉, 너희들에게 도 기다림의 세월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좀 자숙하면서 자신들을 살펴야 할 세월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기간이 신 랑의 사랑이 식어진 기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나은 사랑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은 기다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다림 그래서 4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 4절이 이 야기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 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날 동안 여러 가지 것들이 없이 지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없습니까 예, 왕도 없이 지낼 것입니다. 군사도 없을 것입니다.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을 것입니다. 에봇도 없을 것입니다. 드 라빔도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없이 지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이것들의 공통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것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통적으로 의지는 것 들이었습니다. 왕도 그렇지요. 군사도 그렇지요. 제사도 그렇습니다. 주상도 그렇습니다. 여기 주상이란 성전의 기둥 을 말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성시하던 것이었습니다. 또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던 옷으로 거기에 어떤 신비 한 힘이 있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었습니다. 드라빔 역시 자신들을 지켜주는 주술 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모든 것들이 끊어진 체 세월 을 보내야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 듯 보기에는 이 세월이 절망의 세월이 될 수 있습니다. 낙망스러운 세월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월들은 무엇을 준비하는 세월들입니까 그 렇습니다. 사랑을 준비하는 세 월들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세월들을 보내면서 점점 오직 나의 신 랑 되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믿음의 싹이 나게 될 것입니다. 다시금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겠다는 사랑의 싹이 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 다면 이 세월들이 해로운 것입니까 아닙니다. 쓸데없는 세월들입니까 아닙니다. 신랑 과 보다 나은 사랑의 세월들을 보내기 위해서는 이 세월들이 꼭 필요한 것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들의 인생 의 길에도 하나님께서는 종종 이런 기다림의 세월들을 두실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망들이 다 끊어져 더 이상 의지할 것이 없는 그런 나날 들을 보내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왜지요 그렇습니다. 이 세월들이 쓸데없는 것 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세월들입니다. 우리들을 더욱더 온전히 만들기 위한 세월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세월들을 인내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기다림의 세월들 끝에 그러면 이런 기다림의 세월들이 끝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5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저들이 기다림의 세월들에서 돌아와 무 엇을 구하게 된다 하시죠 예, 하나님을 구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구했습니다. 세상을 기대했습니다. 참 신랑 이 아닌 다른 남자들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의 길을 막으시면서 소망을 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기다 림의 세월들을 보내게 하시면 서 나를 만들어 가시더니 드디어는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저들이 구하는 것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또 누구도 구한다고요 예, 다윗도 구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호세아 시대의 사람들이 먼저 되었습니까 아니면 다윗이 먼저 되었 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호 세아 시대의 사람들보다 250여 년이나 앞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 고 다윗을 구하다니요 그렇다 면 여기서 말하는 다윗이라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 윗의 씨에서 메시야가 나신다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그렇 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결국 이렇게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야지 만 메시야를 구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저들은 세상이 자신에게 소망을 줄 줄 알았습니다. 세상이 만족을 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것들을 사랑하고 그것들을 섬겼 습니다. 그러나 모든 소망이 다 끊어지고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게 되면 진정 자신들에 게 소망을 줄 분이 누구인가를 이해하기 됩니다. 누가 우리들에게 참 기쁨을 줄 분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를 찾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메 시야를 찾게 됩니다. 참 구원 주를 찾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사실입니다. 우리들도 소망이 다 끊어진 체 기다림의 세월들을 보낸 분들이라야 비로소 참 메시야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보지 못한 분들은 아직도 세상이 소망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즐겁고 좋습니다. 그러나 기다림의 세월들을 보낸 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허망하 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들이 진정한 인생의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단히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직 여러분들 중에 이런 기다림의 세월들을 보내지 못한 분들은 진정한 메시야를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허 무를 느껴보지 못한 분들은 아직 진정한 위로와 기쁨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 한 메시야를 구한 일이 기다림의 숫한 세월을 보낸 후에야 깨달아진 것처럼 우리들도 기다려 봐야 합니다. 허무함을 느껴봐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참 소망이 무엇인지 무엇이 허무한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느껴보지 않 은 분들은 아직도 제 말이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 세상이 좋다고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런 분 들도 기다림의 세월들을 보내게 될 것이고 세상을 허무하게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소망을 찾게 될 것 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진정한 메시야를 구하고 계시는 분들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세상에서 여러분들의 메시야를 찾고 계시는 분들입니까 다음으로 기다림의 세월들을 보낸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예,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여호와의 은총을 덧입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성경에는 종종 남은 자라는 말이 자주 등장을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남겨 둔 사람들이 우리들 편에서 보 면 기다림의 세월들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이렇게 구약 시대를 기다 림으로 세월을 보낸 몇몇 사람 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등장하는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시므온에 대 해서 2:25절은 이스라엘의 위로 를 기다리는 자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가 기다린 대로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그가 메시야를 만나자 이렇게 말합니다. 주제여 이제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또 37 과부된 84 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메시야를 기다렸던 안나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아기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주심을 감사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다림의 세월들을 보냈던 사람들은 메시 야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기다림의 세월들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자 신의 약속을 이루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누가 이 시대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시므온과 같이 안나와 같이 기다리는 사람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세상에 낮아지기를 기대하고 원했던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입니다. 그 분은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고자 함이 아니요 섬기고자 함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교훈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낮아져 보고자 합니다. 많 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면 낮아질 수 있을 것인가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낮아 지지 못함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다 높아지려는 세상에서 낮아지려고 하다니요. 세상 사람들이 이런 우리들을 본다면 어리석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가치관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번 물어 보십시다. 여러분들은 참으로 낮아지기 위해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진정으로 낮아지는 것이 여러분들이 소원이십니까 예수님께서 본을 보인 것처럼 그렇게 낮은 자 리에 서서 섬기는 자로서의 삶 을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들의 진정한 소원입니까 간혹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낮아지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낮 아지기 위해서 낮아지려는 것 일까 아니면 높아지려는 속마음을 가지고 낮아지려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보다 더 겸손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서, 낮아지는 자가 큰 자라는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일부러 낮아지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베드로 이런 면에 있어서 대표적인 인물을 성경에서 찾는 다면 베드로일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 주변에 누가 진정 큰 자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는 줄 아십니까 예수님은 어 린아이 하나를 세워 놓고 이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논 리는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다른 사람 아래 들어갈 수 있는 자가 큰 자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베드로 의 마음은 자신도 그렇게 큰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어떻 게 하면 자신이 낮아진 큰 자인 가를 증명해 보일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 면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부터 아니 주님으로부터 낮아진 자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드디어 한 가지 아 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얼마나 사람들을 용서하는 사람인가를 증명해 보이면 자신이 큰 자로 여겨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 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이 이야기 를 해 놓고 예수님의 칭찬을 기 대했을 것입니다. 누구나 나 만큼 낮아져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야. 베드로에게 있어서 일곱 번이 라는 숫자는 다른 사람이 도무지 따라오지 못할 최고의 낮아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의 의견을 달랐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 지니라 주님의 대답은 베드로의 모든 기대를 무참히 박살내고야 맙니다.
주님의 이야기는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 니까 그렇습니다. 용서는 끝이 없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 오늘 이 베드로와 주님께서 나눈 이야기를 잘 보십시오. 베드로는 무엇 때문에 용서해 주리라 생각을 했습니 까 그렇습니다. 높아지기 위해서 용서해 주어야 하겠노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7번의 숫자를 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무한정의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 까 그렇습니다. 낮아짐은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향해서 다른 사람보다 네가 더 의롭게 보이기 위해서 용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용서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 을 자랑하기 위해서 용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 까 혹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롭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용서하시 지 않습니까 이런 용서는 성공 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위선자로 들통날 용서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들은 어떻습니까 위선적인 용 서를 하지 마십시다. 들통날 용서를 하지 마십시다. 우리들의 용서는 우리들의 삶의 한 본질입니다. 우리들의 체질이 용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들은 왜 용서를 체질화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이런 면에 있 어서 중요한 교훈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서 함께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세 종류의 사랑 흔히 3종류의 사랑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만약의 사랑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러 저러하게 해 준다면 나는 당신 을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당신이 나를 선대한다면 당신이 나 를 좋아한다면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좋아하겠다는 것입니다. 조건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사랑은 때문에의 사랑입니다. 상 대방이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주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나 를 선대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상대방이 나를 이러저러하게 해 주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를 선대하지 않으면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나도 또한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 것 역시 조건 적인 사랑입니다. 또 하나의 사랑은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내가 잘못했 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 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구하고의 사랑 오늘 본문에도 바로 이런 무조건 적인 불구하고의 사랑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읽습니다. 자 이 본문에 서는 무조건 적인 사랑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사랑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본문은 불구하고의 사랑이 할지라도의 사랑으로 표현 이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했다고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신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십계명 중에 가장 우선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 습니까 [출 20:2,3]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다른 신을 섬기지 말 것을 가장 먼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스라엘 백성들을 구해 주시면 서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간음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신을 섬겼다면 그것은 간음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길지라도 자 그러면 이번엔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긴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건포도 떡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건 포도 떡은 우상들에게 들여지던 최고의 제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즐겼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렇게 이것 을 이해해 봅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추석이 되면 무엇을 하지요 그렇습니다. 제사 를 드립니다. 자 이 제사를 드 리기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그렇습니다. 조상들을 노엽게 하지 않기 위해서 정성을 드려 음식을 장만합니다. 그리고 그 음식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그 다음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그 음식을 먹습니다. 푸짐하게 먹지요. 바로 이것입니다. 건포도 떡을 즐겼다는 것은 이방신을 섬기고 그것으로 인해 얻어지는 것을 즐거워 하며 먹 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사랑하다보 면 세상으로부터 얻는 여러 가 지 즐거움들도 같이 얻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빠져들어갑니다. 마치 건포도 떡과 같이 이것들은 우리들에게 달콤한 재미를 제공해 줍니다. 아마 세상에 빠져 보았던 분들은 그 즐거움이 어떠하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 더라도 어디를 가더라도 그것이 눈에 그려집니다. 그래서 거기에 취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 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이방신을 섬겼고 이로 인해 얻어지는 기쁨들을 누렸습니다. 여기 에 빠져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간음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무엇 이라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저들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들을 버리시지 않 고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이 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또 사랑하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계속해서 1절 을 보십시다. "너는 또 가서 . 사랑하라 하시기로" 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또 가서 사랑하라는 것 입니다. 이 말이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번이 처음이 아 니라는 것입니다. 전에도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라는 말이 붙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음부된 여인을 불러 오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은 호세아가 고멜을 처음 만날 때 부터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호 세아의 세 자녀 중에첫째 자녀를 빼고 다 호세아의 자녀가 아니라고 일컬어 진 것을 본다면 이 일은 제법 계속되었 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2절에 있는 말씀을 미루어 본다면 고멜이 이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지경에 빠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을 보시겠습니다. 고멜을 얼마에 사왔다고요 그렇습니다. 은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사 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계집종을 사 올 때 지불하는 가격이었습니다. 그렇 다면 고멜은 무엇이 되어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종이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고 멜이 종이 되어있었다면 어떤 종이 되어 있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렇지요. 고멜은 자신의 몸을 파는 창녀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어쩌면 흉악한 포주에게 잡혀서 자신의 몸을 팔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어찌하지 못한 체 그저 되는대로 세월을 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이 남자의 품에 안겨서 잠을 자고 내일은 또 다른 남자의 품 에 안겨서 잠을 자야 하는 신세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고멜을 바라보는 호세아의 마음은 어떠했을 까요 만약 여러분들이 호 세아의 입장이 된다면 여러분들 은 어떻게 하시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래 그래도 사랑해야지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마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어쩌면 한 번 정도는 용서하고 받아들일 줄 모르 겠습니다. 아니 한 두 번 쯤은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들이 계속 지속된다면 그래도 이제는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스 스럼 없이 할 것입니다, 나는 내 할 도리를 다했노라 말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호세아 가 고멜을 대하는 마음이 이런 마음이 아니였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내가 내 모든 것들을 다 팽개쳐 버리고 널 사랑했는데 어찌 그럴 수 있는 가 어찌 은혜를 이렇게 갚을 수 있는가 내가 널 어찌 사랑했는데 네가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하였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여인을 사랑하라고 하셨던 하나님을 원망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여 인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제게 이 여인을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 그래도 저는 어떤 가능성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좀 참고 저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면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런 소망을 가지고 저를 사랑했는데 이럴 수 있습니까 하고 하나님을 향해 항변을 했을 법합니다. 바로 이런 여인, 더 이상 쳐다보기도 싫은 그런 여인, 사랑을 저 버린 여인, 무엇 이 귀한 것인지 무엇이 선한 것 인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런 여인, 남편을 저버리고 다른 남정네를 사랑하는 그런 여인 이제는 창기가 되 어버린 그런 여인 그런 여인을 주님은 또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 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 런 여인을 사랑하라 말씀하십니까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이 얼마나 악한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넘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과연 순결한 신 부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언제나 정조를 지키는 신부라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부끄러움 없 이 나갈 수 있는 신부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아마 우리들의 모습을 삿삿히 살필 수 있는 현미경이 있다면 우리들 속 에 수많은 음행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고멜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세상으로부터 떨어 지는 부스러기들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우리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또의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불구하고의 사랑으로 사랑 하십니다. 이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이 우리들을 살 게 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이 하나님의 사랑이 한 없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호세아의 반응 자 그러면 이런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호세아는 어떻게 합니까
2,3절을 읽습니다.
호세아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렇습니다. 다시 저를 사랑합니다. 그냥 버릴 수 있는 여인이었지 만 다시 돈을 지불하고 저를 사 옵니다. 사실 고멜은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있으면 걸리 적 거리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사랑합니다. 욀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 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무 필요도 없는 아니 걸리 적 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니 바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그런 사랑으로 고멜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 정하십니까 이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애정을 갖고 돌보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사셔 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 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도 그런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끊임없는 용서를 베 풀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게 사십니까 진정 그렇게 사십니까 왜 우리들이 자주 이 용서 하는 일을 실패할까요 혹 베 드로처럼 용서하려 하지는 않습니까 용서라는 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영 적인 권위를 확보하려하지 않습 니까 내가 너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려 하지 않습니 까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교 만이며 위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용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용서라는 것 을 통해 영적 우위를 확보하려 하지 마십시오. 용서받은 자로 용서하시는 삶을 사십시오. 용서해야 할 일들이 있을 때 마다 당신도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진정한 용서가 여러분들의 삶에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더 나은 세월을 위해서 호세아는 이렇게 고멜을 용서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저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3 절을 가만히 살펴보면 저의 사랑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자 어떤 점이 예전과 같지 않아 보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현대인 의 성경은 이 부분을 좀 더 명 쾌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녀에게 당신은 당분간 혼자 조용히 지내도록 하시 오. 이제는 다른 남자를 좇아 다니거나 창녀 짓을 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당신을 기다 리겠오 하였다. 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어떤 점이 다릅니까 그렇습니다.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라는 말이 당 분간은 조용히 지내라는 말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제는 스스로 살필 수 있는 기 회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자숙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나만을 기다리고 나만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호세아도 어떻게 하겠다고 말합니까 예, 자신도 고멜을 기다리겠 다고 말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렇게 자숙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호세아가 사랑을 하지 않 겠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 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생각하면서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갖자는 것입니다. 더 나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이 런 기간을 갖자는 것입니다. 서로 기다리는 것이 힘들고 어렵지만 더 나은 사랑을 꿈꾸 며 기다림의 세월들을 갖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다림의 세월들은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장 말 미에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 까 예, 내가 네게 장가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녀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저들을 인도하여 내어서 마치 처음 결혼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혼인 예식을 올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문으로 변하 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풍요함을 회복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저 들이 바로 회복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 떻게 되는 것입니까 여기에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니 회복하신다 더니 왜 우리 들을 포로로 잡아가게 하십니 까 우리들에게 장가드신다 더니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까 하고 말 할 수 있었 을 것입니다. 이게 겨우 당신 이 나의 신랑이 된다는 의미입니까 하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3절에 호세아의 예를 들게 하십니다. 즉, 너희들에게 도 기다림의 세월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좀 자숙하면서 자신들을 살펴야 할 세월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기간이 신 랑의 사랑이 식어진 기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나은 사랑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은 기다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다림 그래서 4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 4절이 이 야기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 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날 동안 여러 가지 것들이 없이 지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없습니까 예, 왕도 없이 지낼 것입니다. 군사도 없을 것입니다.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을 것입니다. 에봇도 없을 것입니다. 드 라빔도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없이 지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이것들의 공통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것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통적으로 의지는 것 들이었습니다. 왕도 그렇지요. 군사도 그렇지요. 제사도 그렇습니다. 주상도 그렇습니다. 여기 주상이란 성전의 기둥 을 말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성시하던 것이었습니다. 또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던 옷으로 거기에 어떤 신비 한 힘이 있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었습니다. 드라빔 역시 자신들을 지켜주는 주술 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모든 것들이 끊어진 체 세월 을 보내야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 듯 보기에는 이 세월이 절망의 세월이 될 수 있습니다. 낙망스러운 세월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월들은 무엇을 준비하는 세월들입니까 그 렇습니다. 사랑을 준비하는 세 월들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세월들을 보내면서 점점 오직 나의 신 랑 되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믿음의 싹이 나게 될 것입니다. 다시금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겠다는 사랑의 싹이 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 다면 이 세월들이 해로운 것입니까 아닙니다. 쓸데없는 세월들입니까 아닙니다. 신랑 과 보다 나은 사랑의 세월들을 보내기 위해서는 이 세월들이 꼭 필요한 것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들의 인생 의 길에도 하나님께서는 종종 이런 기다림의 세월들을 두실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망들이 다 끊어져 더 이상 의지할 것이 없는 그런 나날 들을 보내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왜지요 그렇습니다. 이 세월들이 쓸데없는 것 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세월들입니다. 우리들을 더욱더 온전히 만들기 위한 세월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세월들을 인내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기다림의 세월들 끝에 그러면 이런 기다림의 세월들이 끝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5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저들이 기다림의 세월들에서 돌아와 무 엇을 구하게 된다 하시죠 예, 하나님을 구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구했습니다. 세상을 기대했습니다. 참 신랑 이 아닌 다른 남자들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의 길을 막으시면서 소망을 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기다 림의 세월들을 보내게 하시면 서 나를 만들어 가시더니 드디어는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저들이 구하는 것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또 누구도 구한다고요 예, 다윗도 구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호세아 시대의 사람들이 먼저 되었습니까 아니면 다윗이 먼저 되었 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호 세아 시대의 사람들보다 250여 년이나 앞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 고 다윗을 구하다니요 그렇다 면 여기서 말하는 다윗이라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 윗의 씨에서 메시야가 나신다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그렇 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결국 이렇게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야지 만 메시야를 구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저들은 세상이 자신에게 소망을 줄 줄 알았습니다. 세상이 만족을 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것들을 사랑하고 그것들을 섬겼 습니다. 그러나 모든 소망이 다 끊어지고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게 되면 진정 자신들에 게 소망을 줄 분이 누구인가를 이해하기 됩니다. 누가 우리들에게 참 기쁨을 줄 분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를 찾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메 시야를 찾게 됩니다. 참 구원 주를 찾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사실입니다. 우리들도 소망이 다 끊어진 체 기다림의 세월들을 보낸 분들이라야 비로소 참 메시야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보지 못한 분들은 아직도 세상이 소망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즐겁고 좋습니다. 그러나 기다림의 세월들을 보낸 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허망하 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들이 진정한 인생의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단히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직 여러분들 중에 이런 기다림의 세월들을 보내지 못한 분들은 진정한 메시야를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허 무를 느껴보지 못한 분들은 아직 진정한 위로와 기쁨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 한 메시야를 구한 일이 기다림의 숫한 세월을 보낸 후에야 깨달아진 것처럼 우리들도 기다려 봐야 합니다. 허무함을 느껴봐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참 소망이 무엇인지 무엇이 허무한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느껴보지 않 은 분들은 아직도 제 말이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 세상이 좋다고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런 분 들도 기다림의 세월들을 보내게 될 것이고 세상을 허무하게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소망을 찾게 될 것 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진정한 메시야를 구하고 계시는 분들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세상에서 여러분들의 메시야를 찾고 계시는 분들입니까 다음으로 기다림의 세월들을 보낸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예,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여호와의 은총을 덧입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성경에는 종종 남은 자라는 말이 자주 등장을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남겨 둔 사람들이 우리들 편에서 보 면 기다림의 세월들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이렇게 구약 시대를 기다 림으로 세월을 보낸 몇몇 사람 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등장하는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시므온에 대 해서 2:25절은 이스라엘의 위로 를 기다리는 자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가 기다린 대로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그가 메시야를 만나자 이렇게 말합니다. 주제여 이제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또 37 과부된 84 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메시야를 기다렸던 안나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아기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주심을 감사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다림의 세월들을 보냈던 사람들은 메시 야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기다림의 세월들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자 신의 약속을 이루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누가 이 시대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시므온과 같이 안나와 같이 기다리는 사람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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