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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눅11:5-13-)

본문

기도에는 방법론이 아닌 자세에 관한 말씀이 더 많이 들어 있다. 마태복음 6장 7절은 기도를 가장 어렵게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성의(誠意) 문제로 들고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 하고 있는 기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주리라(눅 11:8)" 이런 말씀들은 우리를 오해시키기에 충분한 구절들이다. 우리가 하는 기도의 가 장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가 '귀찮을 만큼 조른다'는 것이다. 귀찮을 만큼 조른 다는 기초에 깔려있는 사상은 "열심을 내면 하늘이 감동한다"는 무속신앙이 깔려 있는 것이다. 원래 무속신앙은 대상이 없고 치성을 드리는 사람만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은 그 신앙의 대상에 관한 지식이 그 신앙을 하는 개인의 열심보다 언제나 앞선다는 것이다. 내쪽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부분 이 요구되기 전에 대상이 누구냐가 확인되지 않는 신앙을 갖는 것만큼 경계해야 할 것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전통적으로 대상에 관한 지식보다는 나의 열심에 더 많은 기준을 두는 잘못된 습관이 붙어 있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신들의 제일 큰 무기가 기도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제일 큰 약점이 기도에 있는 경우가 많다. 기도만큼 신자들을 축복받게 하고 시험에 들게 하기도 하는 종교적 행위는 없다.
그런데 잘못된 기도의 부분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자부심만 가진다. 기도만큼은 누구나 자신 있다고 생각한다. 안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누구보 다도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갖는 죄책감은 내가 기도를 안했다는 죄 책감, 즉 여호와 하나님 앞에 충분한만큼 기도생활을 안했다는 것이다. 기도 자체를 정 확히 알고 있는냐에 대해서는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 오늘 본문이다. 늦은 밤에 찾아와 밥을 달라고 강청했다. 강청이란 단어는 "뻔뻔스러운 요구" 라는 뜻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지금 이 친구는 와서 친구라는 이름으로 요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달라고 구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달라고 한다는 뜻이다. 저쪽은 이쪽에서 "네가 내 친구니까 도와줘야 하지 않겠니"하는 태도가 아니라 "안내 놓으면 문부셔"하고 명령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다른 기분이다.
첫번째 입장이 빚을 꾸려고 온 입장이라면 두번째 입장은 채권자가 채무자에 게 당연한 요구를 받으러 오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그것을 기도라고 한다. 기도 에 물론 '도와 주십시오'하는 구걸의 차원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세를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 속에다가 구걸의 차원을 넘어서는 '축복의 자리'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떼를 써도 그것이 그 대상에게의 기도라고 말한다. 기도에서 이 차원을 놓치고 들어가면 기도는 상거래에 지나지 않는다. 기도 하는데 있어서 이 강청함을 알고 들어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것은 이루어지느 냐 안 이루어지느냐, 내가 잘했느냐 못했느냐와 관계없는 결론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누가복음 11장을 근거로 해서 우리에게 하는 약속은 자녀가 부모에게 쓰는 떼이기 때문에 못받으면 본전이고 받으면 이익인 위치이다. 이것이 기도에 있 어서 중요한 원리이다. 기도란 방법과 훈련과 태도 이전에 우리의 신분에 관한 축복이다.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축복이다. 정당한 기도는 철이 난 다음에 하는 것이다. 철나기 전의 말이 안되는 기도가 있다. 그러나 "벗됨을 인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강청함을 인하여 준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하는 기도의 자세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 가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요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자녀이기 때문에 응답을 받는 것이다.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 이 경우에는 요구한대로 결재가 다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일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떼 를 쓸 수 있는 자'라는 것을 깨닫는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못한다. 기도에는 물론 높은 수준의 기도가 있고 철든 기도가 있다. 그러나 기도는 누구나 말도 안되는 기도부터 출발하는 것이 당연하고 또 상 식이다.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과 '기도를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가' 하는 요구를 해 오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이다. 유치한 기도를 시작하지 않을려 고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고차원의 기도에는 더 더욱 이르지 못한다. 유치한 기도를 하라. 그것은 정당한 기도이다. 기도는 어린 아이의 울음같은 기도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뜨거워도 울고, 추워도 울고, 배가 고파도 울고 하는 하나의 표현방법 밖에 갖고 있지 않은 어린 이로부터 기도생활은 출발한다. 그 기도를 하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요청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강청함, 우리의 자녀된 것을 인식하는 그 뻔뻔스러운 기 초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입을 열게 하는 것이다. 입을 연 내용과 방법과 묘사들이 엉망일지라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당연스럽게 입을 열게 되는 이 신앙을 하나님은 기쁘게 보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이 산앙생활을 못하면 안된다. 기도란 자녀가 아버지 앞애서 응석을 부리는 것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관계성 을 확인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방법이 아니다. 신앙의 어떤 표현도 아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내가 누구냐를 기억하고 있는 신앙고백이다. 내용 이전의 문제이고, 요구하는 것 이전의 문제이고, 응답 받는 것 이전의 문제이다. 나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 맨 처음 가장 확실하게 찾아갈 수 있는 이가 하나님이 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이 기도를 최후 의 것으로 사용하는지 모른다. 가장 찾아가기 쉬운 것, 가장 먼저 찾아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즉 기도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는 신앙의 수준으로 생각할 때 그가 그의 생애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 의뢰하는가 하는 문제를 기도라고 한다. 어느 만큼 까지 하나님께 맡기느냐의 싸움은 기도라 고 한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해서 하라고 하는 수동적인 신앙의 고백이 아 니라 적극적인 신앙의 고백으로서 나타나야 된다는데 있어서 우리의 모든 신앙을 판별해 볼 수 있는 귀중한 근거가 된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적극적인 형태로 축복받은 자리인가를 우리는 본 문에서 느껴야 한다. 사실 우리는 거꾸로 산다.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고 기도할 일이 생기는 쪽으로 간다.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위기를 당하고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절망을 당해서 하나님께 찾아온다. 그러나 사실은 기도가 요구하는 것은 그것보다는 적극적인 뜻이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기에 내가 쳐들어갈 수 있는 대상으로서 기도가 허락된 것이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만 찾고 평화로울 때는 찾지 않는 것은 철저한 불신앙이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 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눅 11:9)"
이 세 부분의 내용이 전부 무엇인가 하면 일어난 일에 대한 요구이기 보다는 적 극적으로 추적해 들어가는 요구인 것이다.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간섭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 제목으로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가 아니라 우리 앞에서 우리가 연결해 온 것처럼 이 사람이 구할 이유나 문제가 있지 않은 상태에서 요청이다. 우리에게 있어 기도는 보통 어려울 때 꺼내는 비상카드에 지나지 않는다. 고통 을 없애주고, 난관을 통과하게 하는 것으로 밖에 우리가 기도를 써먹지 못하고 있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님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성령님을 주신다는 것은 적극적 삶을 말한다. 오늘날 신자들에게 가장 불행한 일은 신앙의 모험, 신앙의 전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기도가 전투적이고 모험적이지 않고 현세 유지적인데 원인이 있다. "하나님 제게 인생을 살게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를 살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을 물어보는 기도가 나와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당연한 기도여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외면하거나 도망하지 못하게 붙잡고 물어보아야 할 대목이다. 정당하게 그리고 강청함으로 물어야 한다. 우리는 물어야 할 권리 를 갖고 있는 자들이다. 그 기도를 안하니까 기도할 것이 없다. 30초만 세계평화를 위해서 기도하고도 시간이 남는다.
나의 삶이 부족할 것이 없으면 기도 제목 이 안나오는 이런 하찮은 존재에서 머물지 말기를 성경은 기도를 우리에게 허락 하면서 요구하시는 것이다. 강청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떼를 써서 알아보아야 한다. "왜 나로 살게 하십니까 왜 하필 이 시대입니까 이 교회, 이 가정입니까" 물어 보아야 한다. "내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나서서 할 일이 있고 감춰져서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쪽이든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성도의 기쁨이 있고 자랑이 있다. 끊임없는 기도가 요청되는 일이 있다. 그것은 하는 사람만이 아는 축복이요, 하는 사람만이 누리는 자랑이다. 그것이 없으면 신자의 생활은 참으로 무미건조해 진다. 가장 중요한 특권을 놓치고 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결론이다. '나의 삶이 너무나 고통을 기준으로 해서 편안한 이상 한 걸음도 나가지 않으려는 소극성 속에 있구나'라는 놀라운 지적을 받아야 한다. 골방에 무릎을 꿇으면 그 무릎을 통하여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하신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인생을 바치고 요구하는 참다운 신자의 자세 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밖에 시작할 수 없다. 그 시작이 없으면 되지 않는 일이다. 어영부영 살 수 있다. 그러나 어영부영 살 수 있다는데 신자의 가장 큰 유혹 이 있다. 오늘 나에게 어려움이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많이 잠자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라. 강청하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해야 한다.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내 인생에 하나님 앞에 바칠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무엇을 기도해야 하느냐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들고 갈 기도의 분발, 우리의 위 치를 확인할 신앙의 적극적인 분발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신다.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님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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