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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며 사랑하며 맞서며 (눅1:4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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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학교에서 어느 어머니 한분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기다림”이라는 주제였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기다리는 것’의 연속인지도 모릅니다. 한 아이를 낳고 20년 동안 키우면서 언제사람이 되어 자기 구실을 할까를 기다리며 또 기다리며 살아왔듯이 말입니다.”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받을 자신의 선물을 기다리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서 사람사는 일은 온통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기다림”의 마음이 있기때문에 우리가 한 순간이라도 살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날이 올것이다”,“손으로 잡아보고 만지게 될 바로 그날이 올것이다”라는 말을 가슴에 깊게 묻으며 기꺼이 기다리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기다린다는 것은 “희망한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굴절된 순간에도 또 가슴이 참담하고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하는 순간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일” 곧 “희망하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기다림”은 온갖 어려움들을 이겨내는 힘입니다. 그렇지만 기다린다는 것을 우연한 계기를 통하여 전혀 뜻밖의 것을 만나게 될것을 생각하며 “요행수”를 바라는 이를테면 “복권을 사는 마음”과는 다른 마음입니다. 기다림은 정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파라오의 억압 속에서 “해방”을 갈망하며 야훼께 울부짖고 이 참혹한 시절이 끝장나기를 “기다린 일”을 생각해보면 기다린다는 것이 “와도 그만이고 그렇지 않아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결과”를 요행스럽게 마치 도박사가 좋은 패를 기다리듯이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무너져내린 아픈마음의 깊이 많큼이나 아주 절실하고 간절한 “바램”입니다. 그것은 “잿더미 속에서 일어난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희는 지난해 이웃하고 있는 봉천동 나눔의 집이 화재롤 잿더미가 된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매우 절망적이고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그것이 “희망하는 일”을 그만두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형제들의 아픔과 눈물을 우리가 몸소 체험한 것은 아니지만, 함께 희망하는 한 그것은 우리의 아픔이고 눈물이었습니다. 희망이란 이러한 참담한 잿더미에서 조차 일어서야 한다는 어떠한 강고한 다짐같은 것입니다. 이제 겨우 11개월째 이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이가 아프면 밤새 마음을 조리며 걱정하고, 하루 하루 커가는 모습 속에서 “저녀석이 독립된 한 사람. 한 인격체 로구나!”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아이가 몇년후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한 인격체로서 자신을 가꾸어가고 자신의 삶을 추스리는 모습을 조금 성급하게 생각해 봅니다. 소망하는 것에는 그만큼의 아주 무겁고 책임있는 결심이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이 작은 아이가 수십년에 걸쳐 한 사람으로 일어서기까지 만나게될 그 많은 아픔이며 괴로움들 조차도 기꺼이 만나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은 “희망한다”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교회력으로 보면 오늘이 대림절 네번째 주일이고 이 굴절된 시간들을 바로잡으실 “해방자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는 주간입니다. 말그대로 “기다림의 주간”입니다. 갑자기 눈이내려 한시간이 다되도록 오지않는 시내버스를 기다리며 몸이 얼어붙고 마음은 더욱 바빠져도 그래도 몸을 부대끼며 살아갈 함께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워하면서 고개내밀고 털털거리는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에서 소박한 애절함을 읽습니다. 마리아의 노래에서 우리는 그러한 “기다림”을 읽습니다. 그 노래는 어쩌면 그 척박한 시절 모든 어머니들의 노래였는 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고 제자리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보이는 시절에 기다리며 소망한다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새로운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억압과 착취가 상식이 되어버린 이 수치스런 역사가 끝장나고 비로소 시작될 새로운 현실을 갈망하였습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요구이거나 얇팍하고 속된 바램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었습니다. 오랜 아픔의 시절 속에서 사람다운 삶에 갈증을 느끼었고, 의로움에 굶주리었던 모든 이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염원이었습니다. 한심하고 어처구니 없는 불의한 현실 한 복판에서 가슴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고, 펄펄 뛰는 양심을 가두어 두지 못하여 몸서리 치는 이들의 희망이기도 하였습니다. 때가 된 것입니다. 바로 그 때가 이른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님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누가 4:18-19)”라는 복음이 가까이에 이른 것입니다. 이 사실을 “비천한 신세” 속에서 복음의 때를 기다리던 마리아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래는 의로운 야훼 여호와 하나님의 때를 갈망하던 예언자들의 외침 속에 언제나 담겨있던 주제 이기도 하였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 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이집트의 노예들을 자유케 하신 야훼 하나님께서 그 때를 시작하시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올바름)”이 비참한 역사 한 복판에서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교만한자” 즉, 기득권을 누리고 착취자의 마음을 품고있는 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들을 통해서, 겸손한 이들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시작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온갖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미 새로움의 때는 시작되었고, 변화를 앞당기어 경험하고 있다”는 고백을 오늘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때, 수치스런 인간의 역사에 쐐기를 박고, 하나님의 의로운 시절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오심을 깊게 묵상하는 기간 입니다. 마음이 겸손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기다리며 이 땅을 정의의 쟁기로 일구어 내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때가 아닐수 없습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는 어떻게 살것입니까 우리 속에 흐트러진 것들을 묶어내고, 새로움을 위하여 서로의 처진 어깨를 일으켜 세우며, 의롭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함께 시작하겠다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오심을 다시한번 진지하게 묵상하며,우리에게서 시작되는 새로움을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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