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이 (마5:7)
본문
어느 종교나 강조하는 것은 사랑이요 자비다. 특별히 불교에서 중심으로 삼는 것은 자비이다. 부처님의 자비심을 본받아서 이웃에게 자비로워야 한다는 말이다. 자비심을 발휘하면서 점점 더 자비하게 된다. 그리고 부처가 되어간다. 다른 모든 종교도 여기서 별로 먼 것이 아니다. 이렇게 스스로 자기를 복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사랑은 가장 중요한 덕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팔 복 중에 사랑과 자비를 말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그는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이것이 오늘의 말씀 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냉정하고 정이 없다면 분명히 무엇인가 잘 못된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둘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둘 다 사랑과 자비를 가 장 훌륭한 덕으로 삼고 있는데 두 종교, 또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단 말인가 여기서 차이를 볼 수 없다 면 다 같은 진리를 말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 달은 사람은 근본적인 차이점을 볼 것이다. 그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모든 종교들은 작은 자비라도 상을 받을 것으로 가르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이해를 가질 수 있다. 구제하고 선행하는대로 그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세상적인 수준의 상급은 분명히 있다. 기독교에서도 이런 것들을 권장한다.
왜냐하면 이런 덕은 사람 들에게 가르쳐서 세상의 질서를 잡는 차원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할 때는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빈약해도 주기만하면 그 나름대로 복이 오는 것이 아니다. 거지에게 파 한 뿌리라도 주면 그 나름대로 복이 있다던지 하는 식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근 본적인 본성의 변화를 요구한다. 완전히 본성이 바뀌는 것이다. 기독교는 절대로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부처처 럼 몇 억겁을 다시 태어나면서 조금씩 나아져 가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노력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 신자가 되어서도 그 렇게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지식과 경험은 점진적으로 성장하지만 본성은 절대로 절대로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고 해 보았자, 인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말고 모르는 사람이나 원수에게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 그 럴 수 있는가 없다. 이 점을 깨달아야 정말로 긍휼을 얻을 수 있다. 여기 진리가 있다. 우리는 스스로 비치는 별이 아니다. 하나님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만 이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아서만 누릴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누리는 방법은 타인에게 그 받은 것으로 하나님처럼 비춰주는 것이다. 우리가 변하는 방법은 점차적인 것이 아니다. 순식간이요 졸지에 된다. 이 변화는 우리가 감지하지 못해도 영적으로 볼 때는 너무도 극 적이요 우주적인 것이다.이 변화는 오로지 믿음이라는 새 의식구조를 통해서만 감지된다.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전혀 새 감각기관이 주어진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생명과 힘이 주어진다. 하나님에 의해서 변화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도 알게 된다. 자기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며 그것이 자기 속에 어떻게 살아서 움직이는지 확실히 알게 된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가지게 된다. 그러려면 자신이 받았고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영적인 깨달음을 개발해야 한다.
래리 매리트라는 이의 간증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타락 하였다. 술과 마약 그리고 도둑질이었다. 경찰의 손을 피해서 친구들 과 조지아에서 캘리포니아로 도망갔다가 이제 돌아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간다. 가는 길에 뉴 멕시코에서 차는 고장나고 돈은 떨어지고 기진맥진해서 이제 강도질하는 길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다. 어느 중고차 가게에 가서 사정해 보려고 들어갔다. 거기 아가씨는 이 험상궂은 사람들을 도무지 무서워하지 않았다. 친절히 음료수를 권 하며 주인인 아버지를 기다린다. 그들은 주인의 집으로 인도되어 집에 서 돈이 도착할 때까지 며칠을 공짜로 묵었다. 이 며칠이 이들을 변화 시켜버린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 술과 마약을 완전히 끊었던 것이다. 무엇이 이렇게 하였던가 주인 가족의 친절함 이들 가족은 지극 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랑자들은 주인집 사람들에게 압도되어 버렸다. 알 수 없는 그 신비한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함, 그러나 너무나 겸손하고 솔직하며 질서가 잡힌 삶. 그들의 눈빛은 왜 그리 맑기만한가 그들은 아무 것도 해로운 짓을 생각할 수 없었다. 중고차를 훔쳐 서 얼마던지 도망갈 수 있었다. 그들은 순한 강아지처럼 주인의 말을 들으며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그들이 들은 복음은 평생을 움직였다. 옆길로 나갈 때마다 그 주인 가족과 그들로부터 들은 구원의 말을 회 상했다. 그 구원의 삶이 바로 그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신비한 힘으로 사는 것이다. 무엇이 이 부랑자 들을 움직이게 했는가 분명히 친절함에 이들이 감동을 했다. 하지만 친절함이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더 근본적인 힘이다. 또한 더 근본적인 그 힘이 이 가족에게 친절함이 저절로 나오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친절은 보통 사람들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사용한 친절이었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킨 힘이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말하는 긍휼이다.
하나님에게만 있는 사랑 그 자체를 받아서 그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받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주위의 사람 들도 변화시킨다. 그래서 모두가 이 사랑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받았다. 우리가 받은 것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이제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 을 비취고 발산함으로 우리는 받은 것을 실제로 맛보게 된다. 사랑을 해 본 사람만이 그 기쁨을 경험한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긍 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긍휼히 여김을 맛보는 것이다. 이성숙이란 재미 성악가가 있다. 그의 부모는 평생 가난했다. 아 버지는 조그만 양복점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때때로 물었다. "우리가 이렇게 돈이 없는데 목사님들 양복은 왜 자꾸 공짜로 해줍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않하고 웃었다. 어머니는 "얘야 주는게 받는 거란다"고 말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말은 무슨 소리인가 "도대체 주는 것이 받는게 무슨 소리인가" 먼 훗날 그녀가 줄리 어드를 나오고 성공한 성악가가 된 다음 그녀는 이 말을 깨달았다. 점 점 유명해지고 돈이 많을수록 그만큼 외롭고 삶은 메말라지는 것이었다. 결국 술과 자포자기에 빠지고 만다. 그러면서 건강은 나빠지고 정신적으로도 불안하고 결국 노래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때를 회상해 보았다. 아버지가 집에 오실 때 그의 얼굴은 가족 전체의 기쁨이었다. 언제나 행복한 표정이 었으니까. 가족이 아무렇게나 앉아서 찬송도 하고 서로 이야기할 때 그때가 천국이었다. 그 외형적인 것을 연출한다고 오는 행복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확실히 소유한 이들이나 누리는 능력이었다. 이성숙씨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 때 묻은 성경책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성경을 넘기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느낀다. 그녀는 무릎을 꿇 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쳤다. 그리고는 방안에 가득차는 평안을 맛본다. 부모님이 물려주고자했던 바로 그 힘이었다. 그녀는 그 성경의 책 장을 넘기면서 부모님이 자신을 품고 있는 느낌 속에 행복을 찾는다. 그리고는 이해하게 된 것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이다." 사랑을 주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받 은 사랑을 나눌 때, 자기가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맛보는 것이다. 마 치 대포를 쏘면서 그 위력을 보는 것과 같다. 큰 종을 울리면서 종소 리에 놀라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은 대포 같고 종 같은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특별히 영혼을 사랑하라.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을 사용하라.
그렇다면 둘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둘 다 사랑과 자비를 가 장 훌륭한 덕으로 삼고 있는데 두 종교, 또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단 말인가 여기서 차이를 볼 수 없다 면 다 같은 진리를 말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 달은 사람은 근본적인 차이점을 볼 것이다. 그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모든 종교들은 작은 자비라도 상을 받을 것으로 가르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이해를 가질 수 있다. 구제하고 선행하는대로 그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세상적인 수준의 상급은 분명히 있다. 기독교에서도 이런 것들을 권장한다.
왜냐하면 이런 덕은 사람 들에게 가르쳐서 세상의 질서를 잡는 차원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할 때는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빈약해도 주기만하면 그 나름대로 복이 오는 것이 아니다. 거지에게 파 한 뿌리라도 주면 그 나름대로 복이 있다던지 하는 식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근 본적인 본성의 변화를 요구한다. 완전히 본성이 바뀌는 것이다. 기독교는 절대로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부처처 럼 몇 억겁을 다시 태어나면서 조금씩 나아져 가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노력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 신자가 되어서도 그 렇게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지식과 경험은 점진적으로 성장하지만 본성은 절대로 절대로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고 해 보았자, 인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말고 모르는 사람이나 원수에게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 그 럴 수 있는가 없다. 이 점을 깨달아야 정말로 긍휼을 얻을 수 있다. 여기 진리가 있다. 우리는 스스로 비치는 별이 아니다. 하나님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만 이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아서만 누릴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누리는 방법은 타인에게 그 받은 것으로 하나님처럼 비춰주는 것이다. 우리가 변하는 방법은 점차적인 것이 아니다. 순식간이요 졸지에 된다. 이 변화는 우리가 감지하지 못해도 영적으로 볼 때는 너무도 극 적이요 우주적인 것이다.이 변화는 오로지 믿음이라는 새 의식구조를 통해서만 감지된다.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전혀 새 감각기관이 주어진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생명과 힘이 주어진다. 하나님에 의해서 변화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도 알게 된다. 자기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며 그것이 자기 속에 어떻게 살아서 움직이는지 확실히 알게 된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가지게 된다. 그러려면 자신이 받았고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영적인 깨달음을 개발해야 한다.
래리 매리트라는 이의 간증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타락 하였다. 술과 마약 그리고 도둑질이었다. 경찰의 손을 피해서 친구들 과 조지아에서 캘리포니아로 도망갔다가 이제 돌아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간다. 가는 길에 뉴 멕시코에서 차는 고장나고 돈은 떨어지고 기진맥진해서 이제 강도질하는 길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다. 어느 중고차 가게에 가서 사정해 보려고 들어갔다. 거기 아가씨는 이 험상궂은 사람들을 도무지 무서워하지 않았다. 친절히 음료수를 권 하며 주인인 아버지를 기다린다. 그들은 주인의 집으로 인도되어 집에 서 돈이 도착할 때까지 며칠을 공짜로 묵었다. 이 며칠이 이들을 변화 시켜버린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 술과 마약을 완전히 끊었던 것이다. 무엇이 이렇게 하였던가 주인 가족의 친절함 이들 가족은 지극 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랑자들은 주인집 사람들에게 압도되어 버렸다. 알 수 없는 그 신비한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함, 그러나 너무나 겸손하고 솔직하며 질서가 잡힌 삶. 그들의 눈빛은 왜 그리 맑기만한가 그들은 아무 것도 해로운 짓을 생각할 수 없었다. 중고차를 훔쳐 서 얼마던지 도망갈 수 있었다. 그들은 순한 강아지처럼 주인의 말을 들으며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그들이 들은 복음은 평생을 움직였다. 옆길로 나갈 때마다 그 주인 가족과 그들로부터 들은 구원의 말을 회 상했다. 그 구원의 삶이 바로 그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신비한 힘으로 사는 것이다. 무엇이 이 부랑자 들을 움직이게 했는가 분명히 친절함에 이들이 감동을 했다. 하지만 친절함이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더 근본적인 힘이다. 또한 더 근본적인 그 힘이 이 가족에게 친절함이 저절로 나오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친절은 보통 사람들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사용한 친절이었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킨 힘이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말하는 긍휼이다.
하나님에게만 있는 사랑 그 자체를 받아서 그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받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주위의 사람 들도 변화시킨다. 그래서 모두가 이 사랑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받았다. 우리가 받은 것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이제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 을 비취고 발산함으로 우리는 받은 것을 실제로 맛보게 된다. 사랑을 해 본 사람만이 그 기쁨을 경험한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긍 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긍휼히 여김을 맛보는 것이다. 이성숙이란 재미 성악가가 있다. 그의 부모는 평생 가난했다. 아 버지는 조그만 양복점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때때로 물었다. "우리가 이렇게 돈이 없는데 목사님들 양복은 왜 자꾸 공짜로 해줍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않하고 웃었다. 어머니는 "얘야 주는게 받는 거란다"고 말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말은 무슨 소리인가 "도대체 주는 것이 받는게 무슨 소리인가" 먼 훗날 그녀가 줄리 어드를 나오고 성공한 성악가가 된 다음 그녀는 이 말을 깨달았다. 점 점 유명해지고 돈이 많을수록 그만큼 외롭고 삶은 메말라지는 것이었다. 결국 술과 자포자기에 빠지고 만다. 그러면서 건강은 나빠지고 정신적으로도 불안하고 결국 노래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때를 회상해 보았다. 아버지가 집에 오실 때 그의 얼굴은 가족 전체의 기쁨이었다. 언제나 행복한 표정이 었으니까. 가족이 아무렇게나 앉아서 찬송도 하고 서로 이야기할 때 그때가 천국이었다. 그 외형적인 것을 연출한다고 오는 행복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확실히 소유한 이들이나 누리는 능력이었다. 이성숙씨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 때 묻은 성경책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성경을 넘기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느낀다. 그녀는 무릎을 꿇 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쳤다. 그리고는 방안에 가득차는 평안을 맛본다. 부모님이 물려주고자했던 바로 그 힘이었다. 그녀는 그 성경의 책 장을 넘기면서 부모님이 자신을 품고 있는 느낌 속에 행복을 찾는다. 그리고는 이해하게 된 것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이다." 사랑을 주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받 은 사랑을 나눌 때, 자기가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맛보는 것이다. 마 치 대포를 쏘면서 그 위력을 보는 것과 같다. 큰 종을 울리면서 종소 리에 놀라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은 대포 같고 종 같은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특별히 영혼을 사랑하라.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을 사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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