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 (마5:7)
본문
며칠 전에 농아부 청년 한 명을 데리고 모 전자업체에 취업을 부탁하러 갔습니다. 농아이면서도 경도 뇌성마비를 지닌 청년의 일할 수 있는 능력과 적극적인 성격을 설명한 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사장님과 부장은 아주 난처하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병옥 앞이나 복지원 앞에 버리는 엄마가 있는가하면 장애인이 많은 가정이 이사오면 이웃 주민들의 항의로 동사무소에서 조차 전입신고를 받아주지 못 하는 것이 옛 이야기가 아닌 현실입니다. 장애인 옆 좌석은 비어도 잘 앉으 려고들 하지 않습니다. 장애인과 동일시될까봐 두려워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전화통역하는 사람에게 혹시 농아인 누구의 어머니되십니까 혹은 누나입니 까 묻기라도 하면 잘못 삼킨 벌레 뱉아내듯이 '아니요! 그냥 남이예요'하 며 피합니다. 내 가족 중에 내 친척 중에 장애인이 있다는 것은 아직돝 수 치스럽다고 생각하고 짐스러워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주의 자녀들은 어떠합니까 정목사님은 금요철야 때, 외부에 내는 원고에 특별한 모임에서 제 부 모도 말하기 싫어하는 농아인에 대한 자랑과 언어인 수화를 찬양부릅니다.
한 마디로 신선한 충격이고 충격받는 저는 행복을 느낍니다. 여러 성도님 들은 농아부 성도들을 보고 미소짓기도 하고 가볍게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옆자리에 앉아도 개의치 아니합니다. 수화를 사용해도 괴물보듯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따뜻한 시선으로 봅니다. 이것은 누구의 마음으로 하는 것 입니까 정목사님은 금요철야 때, 외부에 내는 원고에 특별한 모임에서 제 부 모도 말하기 싫어하는 농아인에 대한 자랑과 언어인 수화를 찬양부릅니다.
한 마디로 신선한 충격이고 충격받는 저는 행복을 느낍니다. 여러 성도님 들은 농아부 성도들을 보고 미소짓기도 하고 가볍게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옆자리에 앉아도 개의치 아니합니다. 수화를 사용해도 괴물보듯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따뜻한 시선으로 은 성경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며 예수님의 마음이며 성령님의 마음이십니다. 긍휼은 위로 향한 사랑이 아니라 아래로 향하되 그냥 위에서 있지 아니하고 아래로 내려온 사랑과 자 비입니다.
긍휼이란 말의 희랍어 어원 [엘레오스]란 그 사람의 피부속으로 갚숙히 들 어가서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의 생각, 감정, 경 험 속에서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감(empathy)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우리를 위해 내려 보내심입니다. 베드로전서 1:3에는 찬송하리로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있게 하시며 라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감격 하였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계시지 아니하셨으면 구원은 없었을 것이며 긍휼하심이 지금도 계속되어지지 아니하시면곤고하고 연약하고 쓰 러지고 말 것입니다. 긍휼은 자격이 없는 자에게도 베풀어지는 것이며 저 주를 받아 마땅히 죽어야 할 자에게도 그 저주를 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누구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어릴 때 귀신들 려 말 못하고 발작을 일으키고 거품을 내 뿜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한 아이 에게도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딸을 둔 가나안 여인에 게도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보시고 측은히 여기고 울 지마라 위로 하신 후 외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배고픈 자에게도, 소경된 자에게도, 귀먹고 혀가 어눌한 자에게도, 마지막 십자가 상에서 강도에게도 예수님께서 주신 것은 긍휼히 여기시는 뜨거운 마음이었고 여기에 구원의 은총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사람의 원래 성품이 아니라 주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긍휼한 성품을 갖고 태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성경은 로마서 1:29-32절 에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활은 온갖 악과 죄에 빠져 탐욕과 미 움, 질투, 살인, 분쟁, 거짓, 빈정거림, 험담으로 미워하고난폭하고 거만 하고 허풍을 떨고 언제나 새로운 방법으로 죄지을 생각을 하고 부모에게 계 속 반항하고 일부러 사물을 왜곡하고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며 동정 심이라고는 손꼽만치도 없는 냉혹한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이런 죄를 범하는 자들을 주께서 죽음의 형벌로 다스린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길을 그대로 걸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까지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좋개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을 때 이식되어 진 것이 바 로 예수그리스도의 성품 [긍휼]입니다. 예수그리스도 구주로 믿는 우리들 에게는 자연히 이 긍휼히 여기는 성품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여 정에서 계속 되어져야 합니다. 누가복음 6:3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부하십니다.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상당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긍휼이 실체되어 한 부분 존재하는 것이 바로 농아부입니다. 상당 교회 농아부를 세워 주심은 세상의 소리로 부터 차단되고 짐승처럼 학대받 고 슬프고 답답하게 살아도 말 한마디 못하는 농아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 의 긍휼하심이란 사실을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 심에 대한 믿음안에서 정삼수목사님과 여러 성도들을 통하여 실현되는 역사 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세상사람들은 농아인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벙어리 삼룡이는 종으로서 주인에게 개패듯 맞아 피가 터지게 아파도 입도 벙긋 못하고 죽어지내는 신세였고 사랑하는 아씨에 대한 그야말로 벙어리 냉가슴 앓는 인생이었습니다. 농아에다백치인 아다다는 지참금을 갖고 시 집갔지만 정상인 남편에게 버림받고 다시 결혼하여 돈 때문에 사랑을 잃을 까봐 벼랑끝에 서서 돈을 날려 버리다가 뒤쫓아온 남편과 실랑이를 하다 강 물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장애인은 문둥병환자처럼 격리시키고 수용시키고 죽도록 일을 부려 먹은 것이 장애인의 어두운 역사입니다. 장애인이 있는 가정에는 부부싸움 이 그칠 날이 없고 형제들 간에 심한 갈등과 고민을 겪고 손님이 오면 더러 운 배설을 감추듯이 숨겨두고 출생하면 신고조차 않고 밤에 길거리나 시립 병원 앞이나 복지원 앞에 버리는 엄마가 있는가하면 장애인이 많은 가정이 이사오면 이웃 주민들의 항의로 동사무소에서 조차 전입신고를 받아주지 못 하는 것이 옛 이야기가 아닌 현실입니다. 장애인 옆 좌석은 비어도 잘 앉으 려고들 하지 않습니다. 장애인과 동일시될까봐 두려워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전화통역하는 사람에게 혹시 농아인 누구의 어머니되십니까 혹은 누나입니 까 묻기라도 하면 잘못 삼킨 벌레 뱉아내듯이 '아니요! 그냥 남이예요'하 며 피합니다. 내 가족 중에 내 친척 중에 장애인이 있다는 것은 아직돝 수 치스럽다고 생각하고 짐스러워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주의 자녀들은 어떠합니까 정목사님은 금요철야 때, 외부에 내는 원고에 특별한 모임에서 제 부 모도 말하기 싫어하는 농아인에 대한 자랑과 언어인 수화를 찬양부릅니다.
한 마디로 신선한 충격이고 충격받는 저는 행복을 느낍니다. 여러 성도님 들은 농아부 성도들을 보고 미소짓기도 하고 가볍게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옆자리에 앉아도 개의치 아니합니다. 수화를 사용해도 괴물보듯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따뜻한 시선으로 봅니다.
이것은 누구의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까
결코 여러분 개개인의 옛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상당교회는 재정적으로 상당한 교회는 아닙니다. 코앞에 눈부신 공터를 두 고도 매입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하나되어 주만 의지하고 매달리는 차라 리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농아부가 있기에 오히려 재정적인 부담이 가중되 어 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농아부로 인하여 더욱 큰 축복을 받는 교회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교회, 주의 마음에 꼰 합 한 교회의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을 확신합니다.
몇달 전에 성도님들 중에 이름없이 빛도없이 농아부를 위해 필요한 봉고를 구입해 주셨습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전화하지 못하는 것을 위해 FAX를 사 주셨습니다. 봉고를 첫 운행하는 날 이 종에게 베푸시는 긍휼하심 을 깊게 체험했습니다. 몇년 전 온양에서 목회할 때 농한기인 한 여름과 한 겨울에 대심방을 합니다. 성도들이 평택, 송탄, 홍성, 아산에서 오시기 때문에 저 또한 심방을 하루에 한 두 집하면 날이 저뭅니다. 아직 어린 두 딸 을 아내옥고걋 업고 걸리고 하면서 드문드문있는 버스시간에 맞춰 기다리고 타고 내려서 또 보통 30-40분을 걸어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여름 에는 뙤약볕아래서 걷고 겨울에는 찬바람맞으며 하얀 눈길을 두 뺨 부비며 걸어야 했습니다. 굉장히 고생스러운 것 같지만 그때도 지금처럼 얼마나 즐 겁고 신나는지 모릅니다. 두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길을 걸으며 찬양부르고 외양간 송아지 구경하고 겨울엔 언 발 녹여주는 성도님들의 따뜻한 마음이 기억났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물질의 풍요함과 빈곤함을 초옥하 서로 서로 긍 휼히 여김을 주고 받는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행복을 맛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긍휼에 불감증 걸리지 않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 성도님들의 손길, 눈길, 마음을 통해 늘 풍성함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긍휼히 여김이 교회 내 농아인들에게 풍성하게 전하여 짐에 감사 드리며 중요한 말씀을 더 드리고자 합니다. 긍휼은 성도의 생활 중 모든 면 에 실천되어져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대이시며 요구이십니다. 굽류 수 먼저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부부간에도 서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는 무촌이기에 더욱 아끼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에게 권면하는 저역시 제 아내에게 많은 시행착오를 합니다. 건청인인 제 아내는 소리에 민감하기 때문에 열심히 수화로 대화하다가도 무슨 소리자극 이 있으면 금방 그쪽으로 반응합니다. 수화를 하던 저는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고 김빠진 것 같아 화를 내면서 다른 농아인들에게도 그런 행동이 무시당 하는 것으로 오해 될 수도 있고 얼마나 불쾌한지 모른다걍 충고아닌 야단을 칩니다. 농아인 입장에 서서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러 면서 한편 생각하면 전 건청인 아내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자신을 보고 이것이 한계인가보다 하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서로의 입장을 헤아린다면 사소한 일로 언쟁하고 마음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대하기를 주님 을 원하시고 계심을 기억합시다.
이와같은 것은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를 못기다려 제 몫을 챙기고 먼지방으로 떠난 아들, 날마다 술과 여자에 빠져 거지가 되어 돼지 우리의 쥐엄열매로 간신히 허기를 채우다가 아버지 그리워 얼굴 못드는 아들을 보며 호적에서 파버린다는 둥 다시는 얼굴보지 않겠다는 말대신에 달려가 끌어안고 입맞추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생각해 봅시다. 아들의 입장에 서서 그 아들을 이해하고 용납하고 감싸주며 기뻐하는 헤아릴 수 없는 긍휼함의 극치가 가슴뭉클한 감격을 자아낼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살아 숨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형제를 이웃을 굽선소 여겨야 할 것입니다.
눅 10:30-37에는 이웃에 대한 명쾌한 정의가 내려진 부분입니다. 피해 서 다른 길로 내뺀 유대 제사장과 레위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측은히 여기어 다가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선 한 사마리아인을 그려봅시다. 자기 나귀에 태웠습니다. 물론 여관까지 먼 거리를 그는 걸었겠지요. 피곤하였겠지요 그러나 그는 밤을 세워 간호하였 다고 했습니다.다음날도 그를 위해 애쓰는 마음을 충분히 읽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 온좋ㅌ별 힘과 시간과 물질을 보상없이 줄 수 있는 자. 그런것이 이웃에 대한 나의 긍휼함의 표현이 되어야 할 것 입니다. 예수그리스도 마음은 파괴시키거나 분리시키거나 이간시키거나 좌절시키거나 더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주고 낫게하고 소망주며 하 나되게 하고 기쁨주며 참으로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때문에 살아야 하는지 를 깨닫게 해주는 창조적인 것입니다.
예화 한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미국 플로리다주 포트 라우더데일이라는 해변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의 일입니다. 젊은 남녀들이 여행의 흥분으로 떠들고 웃고하는 차내에서 무거운 침 묵을 지키며 먼지로 더러워진 얼굴과 허름한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 남자의 거동이 심상치 않아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사 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빙고이며 지난 4년동안 뉴욕 형무소에서 지내다가 가석방되 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형무소에 있을 때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자기를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되거나 살아가는 것이 괴롭고 너무 고생스럽다면 충근 이해해 줄 테니 재혼해도 좋고 자기를 잊어버려 도 좋다고 했답니다. 그 편지 후 3년 반동안 아내에게서는 편지가 끊어졌답니다. 젊은이들은 그 남자에게 소식이 없는 아내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가느냐고 재차묻자 사실은 지난 주일 가석방 결정이 확실해지자 다시 집으로 편지를 보냈답니다. 만일 당신이 나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줄 수 있다면 마을 어귀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붙들어 매어 두라고. 만일 재 혼을 했거나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노란 손수건을 달지 말라고. 그러면 그냥 타고오던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어디론가 가버리겠냇유차
이 이야기를 들은 버스 내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일인양 조마조마한 마음 이 되었습니다. 그 남자가 살던 부른스위크가 몇 마일 남지 않게 되자 모두 오른쪽 창에 다가 붙어서 그 남자가 말한 참나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 습니다. 설레는 긴장과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얼굴이 굳어져 마치 실망에 대비한 표정도 지었습니다. 20마일, 10마일, 5마일.
별안간 젊은 남녀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참나무에는 20장 30장 아니 온통 노란 손수건의 물결이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셉힝힝 버스 앞쪽 문을 향해 걸어 나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마음 누군가를 위해 힘쓰고 애쓰고 울 수 있는 마음, 뜨거운 마음으로 용서하고 보듬을 수 있는 마음이 노란 손수건의 물결이 주는 감동처럼 예수그리스도 의 모습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늘 있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야고보서 2 장 13절을 마음에 새깁시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 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Amen.
이야기를 들은 사장님과 부장은 아주 난처하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병옥 앞이나 복지원 앞에 버리는 엄마가 있는가하면 장애인이 많은 가정이 이사오면 이웃 주민들의 항의로 동사무소에서 조차 전입신고를 받아주지 못 하는 것이 옛 이야기가 아닌 현실입니다. 장애인 옆 좌석은 비어도 잘 앉으 려고들 하지 않습니다. 장애인과 동일시될까봐 두려워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전화통역하는 사람에게 혹시 농아인 누구의 어머니되십니까 혹은 누나입니 까 묻기라도 하면 잘못 삼킨 벌레 뱉아내듯이 '아니요! 그냥 남이예요'하 며 피합니다. 내 가족 중에 내 친척 중에 장애인이 있다는 것은 아직돝 수 치스럽다고 생각하고 짐스러워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주의 자녀들은 어떠합니까 정목사님은 금요철야 때, 외부에 내는 원고에 특별한 모임에서 제 부 모도 말하기 싫어하는 농아인에 대한 자랑과 언어인 수화를 찬양부릅니다.
한 마디로 신선한 충격이고 충격받는 저는 행복을 느낍니다. 여러 성도님 들은 농아부 성도들을 보고 미소짓기도 하고 가볍게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옆자리에 앉아도 개의치 아니합니다. 수화를 사용해도 괴물보듯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따뜻한 시선으로 봅니다. 이것은 누구의 마음으로 하는 것 입니까 정목사님은 금요철야 때, 외부에 내는 원고에 특별한 모임에서 제 부 모도 말하기 싫어하는 농아인에 대한 자랑과 언어인 수화를 찬양부릅니다.
한 마디로 신선한 충격이고 충격받는 저는 행복을 느낍니다. 여러 성도님 들은 농아부 성도들을 보고 미소짓기도 하고 가볍게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옆자리에 앉아도 개의치 아니합니다. 수화를 사용해도 괴물보듯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따뜻한 시선으로 은 성경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며 예수님의 마음이며 성령님의 마음이십니다. 긍휼은 위로 향한 사랑이 아니라 아래로 향하되 그냥 위에서 있지 아니하고 아래로 내려온 사랑과 자 비입니다.
긍휼이란 말의 희랍어 어원 [엘레오스]란 그 사람의 피부속으로 갚숙히 들 어가서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의 생각, 감정, 경 험 속에서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감(empathy)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우리를 위해 내려 보내심입니다. 베드로전서 1:3에는 찬송하리로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있게 하시며 라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감격 하였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계시지 아니하셨으면 구원은 없었을 것이며 긍휼하심이 지금도 계속되어지지 아니하시면곤고하고 연약하고 쓰 러지고 말 것입니다. 긍휼은 자격이 없는 자에게도 베풀어지는 것이며 저 주를 받아 마땅히 죽어야 할 자에게도 그 저주를 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누구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어릴 때 귀신들 려 말 못하고 발작을 일으키고 거품을 내 뿜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한 아이 에게도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딸을 둔 가나안 여인에 게도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보시고 측은히 여기고 울 지마라 위로 하신 후 외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배고픈 자에게도, 소경된 자에게도, 귀먹고 혀가 어눌한 자에게도, 마지막 십자가 상에서 강도에게도 예수님께서 주신 것은 긍휼히 여기시는 뜨거운 마음이었고 여기에 구원의 은총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사람의 원래 성품이 아니라 주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긍휼한 성품을 갖고 태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성경은 로마서 1:29-32절 에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활은 온갖 악과 죄에 빠져 탐욕과 미 움, 질투, 살인, 분쟁, 거짓, 빈정거림, 험담으로 미워하고난폭하고 거만 하고 허풍을 떨고 언제나 새로운 방법으로 죄지을 생각을 하고 부모에게 계 속 반항하고 일부러 사물을 왜곡하고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며 동정 심이라고는 손꼽만치도 없는 냉혹한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이런 죄를 범하는 자들을 주께서 죽음의 형벌로 다스린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길을 그대로 걸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까지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좋개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을 때 이식되어 진 것이 바 로 예수그리스도의 성품 [긍휼]입니다. 예수그리스도 구주로 믿는 우리들 에게는 자연히 이 긍휼히 여기는 성품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여 정에서 계속 되어져야 합니다. 누가복음 6:3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부하십니다.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상당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긍휼이 실체되어 한 부분 존재하는 것이 바로 농아부입니다. 상당 교회 농아부를 세워 주심은 세상의 소리로 부터 차단되고 짐승처럼 학대받 고 슬프고 답답하게 살아도 말 한마디 못하는 농아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 의 긍휼하심이란 사실을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 심에 대한 믿음안에서 정삼수목사님과 여러 성도들을 통하여 실현되는 역사 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세상사람들은 농아인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벙어리 삼룡이는 종으로서 주인에게 개패듯 맞아 피가 터지게 아파도 입도 벙긋 못하고 죽어지내는 신세였고 사랑하는 아씨에 대한 그야말로 벙어리 냉가슴 앓는 인생이었습니다. 농아에다백치인 아다다는 지참금을 갖고 시 집갔지만 정상인 남편에게 버림받고 다시 결혼하여 돈 때문에 사랑을 잃을 까봐 벼랑끝에 서서 돈을 날려 버리다가 뒤쫓아온 남편과 실랑이를 하다 강 물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장애인은 문둥병환자처럼 격리시키고 수용시키고 죽도록 일을 부려 먹은 것이 장애인의 어두운 역사입니다. 장애인이 있는 가정에는 부부싸움 이 그칠 날이 없고 형제들 간에 심한 갈등과 고민을 겪고 손님이 오면 더러 운 배설을 감추듯이 숨겨두고 출생하면 신고조차 않고 밤에 길거리나 시립 병원 앞이나 복지원 앞에 버리는 엄마가 있는가하면 장애인이 많은 가정이 이사오면 이웃 주민들의 항의로 동사무소에서 조차 전입신고를 받아주지 못 하는 것이 옛 이야기가 아닌 현실입니다. 장애인 옆 좌석은 비어도 잘 앉으 려고들 하지 않습니다. 장애인과 동일시될까봐 두려워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전화통역하는 사람에게 혹시 농아인 누구의 어머니되십니까 혹은 누나입니 까 묻기라도 하면 잘못 삼킨 벌레 뱉아내듯이 '아니요! 그냥 남이예요'하 며 피합니다. 내 가족 중에 내 친척 중에 장애인이 있다는 것은 아직돝 수 치스럽다고 생각하고 짐스러워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주의 자녀들은 어떠합니까 정목사님은 금요철야 때, 외부에 내는 원고에 특별한 모임에서 제 부 모도 말하기 싫어하는 농아인에 대한 자랑과 언어인 수화를 찬양부릅니다.
한 마디로 신선한 충격이고 충격받는 저는 행복을 느낍니다. 여러 성도님 들은 농아부 성도들을 보고 미소짓기도 하고 가볍게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옆자리에 앉아도 개의치 아니합니다. 수화를 사용해도 괴물보듯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따뜻한 시선으로 봅니다.
이것은 누구의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까
결코 여러분 개개인의 옛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상당교회는 재정적으로 상당한 교회는 아닙니다. 코앞에 눈부신 공터를 두 고도 매입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하나되어 주만 의지하고 매달리는 차라 리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농아부가 있기에 오히려 재정적인 부담이 가중되 어 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농아부로 인하여 더욱 큰 축복을 받는 교회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교회, 주의 마음에 꼰 합 한 교회의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을 확신합니다.
몇달 전에 성도님들 중에 이름없이 빛도없이 농아부를 위해 필요한 봉고를 구입해 주셨습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전화하지 못하는 것을 위해 FAX를 사 주셨습니다. 봉고를 첫 운행하는 날 이 종에게 베푸시는 긍휼하심 을 깊게 체험했습니다. 몇년 전 온양에서 목회할 때 농한기인 한 여름과 한 겨울에 대심방을 합니다. 성도들이 평택, 송탄, 홍성, 아산에서 오시기 때문에 저 또한 심방을 하루에 한 두 집하면 날이 저뭅니다. 아직 어린 두 딸 을 아내옥고걋 업고 걸리고 하면서 드문드문있는 버스시간에 맞춰 기다리고 타고 내려서 또 보통 30-40분을 걸어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여름 에는 뙤약볕아래서 걷고 겨울에는 찬바람맞으며 하얀 눈길을 두 뺨 부비며 걸어야 했습니다. 굉장히 고생스러운 것 같지만 그때도 지금처럼 얼마나 즐 겁고 신나는지 모릅니다. 두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길을 걸으며 찬양부르고 외양간 송아지 구경하고 겨울엔 언 발 녹여주는 성도님들의 따뜻한 마음이 기억났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물질의 풍요함과 빈곤함을 초옥하 서로 서로 긍 휼히 여김을 주고 받는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행복을 맛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긍휼에 불감증 걸리지 않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 성도님들의 손길, 눈길, 마음을 통해 늘 풍성함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긍휼히 여김이 교회 내 농아인들에게 풍성하게 전하여 짐에 감사 드리며 중요한 말씀을 더 드리고자 합니다. 긍휼은 성도의 생활 중 모든 면 에 실천되어져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대이시며 요구이십니다. 굽류 수 먼저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부부간에도 서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는 무촌이기에 더욱 아끼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에게 권면하는 저역시 제 아내에게 많은 시행착오를 합니다. 건청인인 제 아내는 소리에 민감하기 때문에 열심히 수화로 대화하다가도 무슨 소리자극 이 있으면 금방 그쪽으로 반응합니다. 수화를 하던 저는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고 김빠진 것 같아 화를 내면서 다른 농아인들에게도 그런 행동이 무시당 하는 것으로 오해 될 수도 있고 얼마나 불쾌한지 모른다걍 충고아닌 야단을 칩니다. 농아인 입장에 서서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러 면서 한편 생각하면 전 건청인 아내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자신을 보고 이것이 한계인가보다 하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서로의 입장을 헤아린다면 사소한 일로 언쟁하고 마음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대하기를 주님 을 원하시고 계심을 기억합시다.
이와같은 것은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를 못기다려 제 몫을 챙기고 먼지방으로 떠난 아들, 날마다 술과 여자에 빠져 거지가 되어 돼지 우리의 쥐엄열매로 간신히 허기를 채우다가 아버지 그리워 얼굴 못드는 아들을 보며 호적에서 파버린다는 둥 다시는 얼굴보지 않겠다는 말대신에 달려가 끌어안고 입맞추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생각해 봅시다. 아들의 입장에 서서 그 아들을 이해하고 용납하고 감싸주며 기뻐하는 헤아릴 수 없는 긍휼함의 극치가 가슴뭉클한 감격을 자아낼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살아 숨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형제를 이웃을 굽선소 여겨야 할 것입니다.
눅 10:30-37에는 이웃에 대한 명쾌한 정의가 내려진 부분입니다. 피해 서 다른 길로 내뺀 유대 제사장과 레위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측은히 여기어 다가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선 한 사마리아인을 그려봅시다. 자기 나귀에 태웠습니다. 물론 여관까지 먼 거리를 그는 걸었겠지요. 피곤하였겠지요 그러나 그는 밤을 세워 간호하였 다고 했습니다.다음날도 그를 위해 애쓰는 마음을 충분히 읽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 온좋ㅌ별 힘과 시간과 물질을 보상없이 줄 수 있는 자. 그런것이 이웃에 대한 나의 긍휼함의 표현이 되어야 할 것 입니다. 예수그리스도 마음은 파괴시키거나 분리시키거나 이간시키거나 좌절시키거나 더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주고 낫게하고 소망주며 하 나되게 하고 기쁨주며 참으로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때문에 살아야 하는지 를 깨닫게 해주는 창조적인 것입니다.
예화 한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미국 플로리다주 포트 라우더데일이라는 해변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의 일입니다. 젊은 남녀들이 여행의 흥분으로 떠들고 웃고하는 차내에서 무거운 침 묵을 지키며 먼지로 더러워진 얼굴과 허름한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 남자의 거동이 심상치 않아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사 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빙고이며 지난 4년동안 뉴욕 형무소에서 지내다가 가석방되 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형무소에 있을 때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자기를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되거나 살아가는 것이 괴롭고 너무 고생스럽다면 충근 이해해 줄 테니 재혼해도 좋고 자기를 잊어버려 도 좋다고 했답니다. 그 편지 후 3년 반동안 아내에게서는 편지가 끊어졌답니다. 젊은이들은 그 남자에게 소식이 없는 아내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가느냐고 재차묻자 사실은 지난 주일 가석방 결정이 확실해지자 다시 집으로 편지를 보냈답니다. 만일 당신이 나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줄 수 있다면 마을 어귀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붙들어 매어 두라고. 만일 재 혼을 했거나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노란 손수건을 달지 말라고. 그러면 그냥 타고오던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어디론가 가버리겠냇유차
이 이야기를 들은 버스 내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일인양 조마조마한 마음 이 되었습니다. 그 남자가 살던 부른스위크가 몇 마일 남지 않게 되자 모두 오른쪽 창에 다가 붙어서 그 남자가 말한 참나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 습니다. 설레는 긴장과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얼굴이 굳어져 마치 실망에 대비한 표정도 지었습니다. 20마일, 10마일, 5마일.
별안간 젊은 남녀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참나무에는 20장 30장 아니 온통 노란 손수건의 물결이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셉힝힝 버스 앞쪽 문을 향해 걸어 나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마음 누군가를 위해 힘쓰고 애쓰고 울 수 있는 마음, 뜨거운 마음으로 용서하고 보듬을 수 있는 마음이 노란 손수건의 물결이 주는 감동처럼 예수그리스도 의 모습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늘 있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야고보서 2 장 13절을 마음에 새깁시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 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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