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5:7)
본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하신 말씀은 팔복 가운데 다섯 번 째 복입니다. 이 복은 앞의 네 가지 복을 얻은 사람이 그 다음 단계로서 얻어지는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팔복은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결과입니다. 팔복은 그 강조점을 행위에 두고 있지 않고,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떠한가,다시말하면 참 그리스도인 이라면 어떤 복된 상태로,어떤 자세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참 그리스도인이요,그렇지 못한 사람은 거짓 그리스도인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이 있는 자가 참 그리스도인이요,그렇지 못한 사람은 거짓 그리스도인이요, 온유한 자가 참 그리스도인이요,그렇지 못한 사람은 거짓 그리스도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될 것은 필연한 일입니다. 역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자연인 스스로는 팔복에 속한 어떤 것도 만들어 가질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알아야 합니다. 나의 행위의 어떠함보다도 나의 자세가 먼저 바로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그 열매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열매를 맺으려 애를 쓴다고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성령님을 좇아서 살면 그 나무에서 그 열매는 자연 맺어지는 것입니다. 시내 가에 심기운 나무가 된 그 사실이 복 있는 자가 벌써 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진리를 따라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이제 내가 진리의 지배를 받아 순종하는 것은 내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주님이 나의 중심에서 완전히 나를 지배(통제)하는 주인(머리와 같이)되신다.그저 내 생활 표면을 치장하는 도금(외식,액세서리)이 아니라,이제는 나의 활동 전체를 주장,조종하셔서 생각하는 것도 내 생각 같으나 주님의 뜻이요,행위도 내가 주장하는 행위 같으나 주님이 가르치심을 따라 사는 새로운 생애 법칙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강한 인간의 의지로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자제하는 일이 있을 수 있으나,신앙은 의지가 아닙니다.신앙은 신념(信念)과는 다릅니다.신념은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지만,신앙(信仰)은 나로서는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긍휼을 가진 사람인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복된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불쌍히 여긴다’는 뜻으로,용서의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긍휼히 여긴다고 해서 어떤 잘못이나 허물도"괜찮아,무슨 상관이냐,계속해"라는 현대인의 분별력없는 관용주의,‘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의 화해주의,이것도 저것도 상관없다는 절충주의를 말하는 것 아닙니다. 원래 긍휼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에게만 있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긍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거룩하신 공의를 가지신 분이시다.그러니 하나님의 긍휼은 죄에 대해서 적당히 덮고 가리신 적당주의의 긍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속성을 동시에 만족하는 인간 구속을 위해 내신 법칙입니다. 그래서 이를 ‘하나님의 은혜’라고도 합니다. 은혜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말하고,긍휼은 죄로 인한 비참한 결과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신 것과 그 고통을 없애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가리킵니다. 이 하나님이 가지셨던 긍휼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바로 그 긍휼로 구원함을 입은 그리스도인인데 우리에게 이 긍휼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내게 대하여서 잘못한 것이 있을 때에,내게 권리가 있을 때에 내가 어떻게 그 사람에게 대하여 느끼는가를 보면 압니다.
“자,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 권리를 주장해야겠다,나는 법대로 처리해야하겠다”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마침내 내게 기회가 오지 않았는가”라고 말하렵니까 이것은 긍휼의 반대입니다. 법대로라면,하나님께서 법대로 나를 대우하셨다면 내게도 구원함이라는 은혜는 없었을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같이 다른 사람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측은한 마음은 먹었는지 모르나 아무런 구원의 조처는 안했습니다.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먹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참으로 그 사태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긍휼의 최고 으뜸가는 실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비참하고 가련한 상태를 불쌍히 여기시고,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을 통하여 우리가 구속,곧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아 구원과 영생에 이른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음은 저가 긍휼히 여김을 받기 때문이라’하셨으니 그러면 이 복은 내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만 하나님께서도 나를 긍휼히 여길 것인가,내가 먼저 용서 해야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말씀을 어떻게 풀이를 해야 합니까 마태 18장의 빚진 자의 비유의 해석도 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비유를 내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고 가르쳐야 하는가 이렇게 해석을 한다고 할 때에 우리는 어떤 문제에 부딪칩니까 우리가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자신 조차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요,믿음으로 구원과 죄 사함을 받는다는 은혜론은 전부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으며,다른 사람의 죄를 사할 능력이 있겠는가 이 비유나 본문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우리의 죄의 용서나 긍휼을 입는 것은 참으로 회개하므로 주님께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참 회개란 내겐 죄의 결과인 영멸 외에는 받을 자격이 없으며,내가 용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전적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에 있습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참으로 회개를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긍휼을 입은 자인 것을 느낀다면,새로운 변화가 있을 것이요,나의 태도와 자세가 다를 것입니다. 이 긍휼과 은혜를 인식한 사람이라면 내게 죄를 범한 사람들이나,죄와 사망과 마귀에 노예된 자들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전에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원수와 같은 자라도,어떤 세상의 흉악한 자라도 그 죄는 미워할 것이지만 그 죄인은 불쌍히 여겨, 그를 그 죄에서 구원하려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단순히 그들의 행위 만을 보고 미워할 수 없고,그들이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으로 봐 지기 때문에 긍휼을 가지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으셨고,땅에 오셔서 진리만을 가르치셨고,잃어버린 자들을 찾기위해서,고난과 십자가를 지셨는데,하지만 주님을 못박은 자들을 바라보시면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아버지여,저들을 용서하소서,저들이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입니다." 우리는 이런 긍휼을 가졌습니까 스데반은 그들이 저에게 돌을 던질 때에,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입니다." 주님과 스데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겼고,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이런 상태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헐뜯고,악용하고,죄를 짓는 자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 긍휼의 마음자세를 가져 그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야하고,하나님께서 우리들과 같이 그들에게도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간구하게됩니다. 우리가 용서 받은 것이 어떤 것인가를 체험한 자라면 이런 긍휼의 마음은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과연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빚진 자인 것을 안다면,나에게 교만한 마음이 있을 수 없고,내 것을 나의 것이라 권리 행사를 할 사람이 없다. 오히려 내게 잘못한 사람이나 죄인을 상대할 때에 마음 속에 주님같이 민망히 여기는 것과 큰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에게 단지 긍휼이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매일 매일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고,사함을 받아야 하는데, 회개를 하는 중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하는 중,어떤 사람에 대하여 용서하는 마음없이 궁휼을 품지 않고 있다면,우리의 기도에 확신이 넚을 것이요,기도의 응답이 없을 것입니다. 불의하고 잔인한 종이 자기는 빚 탕감을 받고도 자기 동무의 얼마되지 않은 빚을 인하여 긍휼을 베풀지 않은 것은 그는 용서가 무엇인지,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한 가지 조건은 회개입니다.회개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알고서,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임을 아는 것이요,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도 반드시 긍휼하는 자입니다. 이 긍휼이 없으면 여러분이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것이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버린 사람이든지, 아니면,아직 육신적인 어린 사람으로서 이 은혜를 받았으나,깨닫지 못한 상태일런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긍휼과 함께 우리에게 임할 때에는 우리는 긍휼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인지 못 받은 사람인지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가 아니하는가로 나타납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나는 다른 사람을 용서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함을 얻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하여 긍휼하는 것입니다. 또한 날마다 우리의 범한 죄로 긍휼함을 입어야 하는 우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대해 긍휼을 해야 하고,또한 우리의 마지막 최후의 날에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서서 몸으로 행한 모든 행동을 판단 받을 것인데 우리는 그날에 긍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 날에도 나를 긍휼케 하시는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확신합니다. 여러분! 긍휼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긍휼을 입었음을 복인 줄 알고 감사합시다. 긍휼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아직 자신이 그리스도의 긍휼함을 입지 못한 자이든지,이미 은혜를 받은 자이나 깨닫지 못한 자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긍휼하기를 힘쓸 것이 아닙니다.힘씀으로 긍휼이 있어지는 것 아닙니다. 본문의 말씀에서는 어떤 행위가 있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아직 긍휼의 마음이 없다면 그는 먼저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은혜를 받은 자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이를 깨닫고 감사하는 자라면 억지가 아니라 진실로 형제에 대하여 긍휼한 사람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는 그가 긍휼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형제사랑이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감화 역사로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아질 때면 자동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 요한의 아들 시몬아,네가 이 사람들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내 양을 먹이고,치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주님이 나의 중심에서 완전히 나를 지배(통제)하는 주인(머리와 같이)되신다.그저 내 생활 표면을 치장하는 도금(외식,액세서리)이 아니라,이제는 나의 활동 전체를 주장,조종하셔서 생각하는 것도 내 생각 같으나 주님의 뜻이요,행위도 내가 주장하는 행위 같으나 주님이 가르치심을 따라 사는 새로운 생애 법칙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강한 인간의 의지로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자제하는 일이 있을 수 있으나,신앙은 의지가 아닙니다.신앙은 신념(信念)과는 다릅니다.신념은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지만,신앙(信仰)은 나로서는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긍휼을 가진 사람인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복된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불쌍히 여긴다’는 뜻으로,용서의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긍휼히 여긴다고 해서 어떤 잘못이나 허물도"괜찮아,무슨 상관이냐,계속해"라는 현대인의 분별력없는 관용주의,‘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의 화해주의,이것도 저것도 상관없다는 절충주의를 말하는 것 아닙니다. 원래 긍휼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에게만 있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긍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거룩하신 공의를 가지신 분이시다.그러니 하나님의 긍휼은 죄에 대해서 적당히 덮고 가리신 적당주의의 긍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속성을 동시에 만족하는 인간 구속을 위해 내신 법칙입니다. 그래서 이를 ‘하나님의 은혜’라고도 합니다. 은혜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말하고,긍휼은 죄로 인한 비참한 결과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신 것과 그 고통을 없애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가리킵니다. 이 하나님이 가지셨던 긍휼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바로 그 긍휼로 구원함을 입은 그리스도인인데 우리에게 이 긍휼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내게 대하여서 잘못한 것이 있을 때에,내게 권리가 있을 때에 내가 어떻게 그 사람에게 대하여 느끼는가를 보면 압니다.
“자,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 권리를 주장해야겠다,나는 법대로 처리해야하겠다”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마침내 내게 기회가 오지 않았는가”라고 말하렵니까 이것은 긍휼의 반대입니다. 법대로라면,하나님께서 법대로 나를 대우하셨다면 내게도 구원함이라는 은혜는 없었을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같이 다른 사람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측은한 마음은 먹었는지 모르나 아무런 구원의 조처는 안했습니다.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먹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참으로 그 사태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긍휼의 최고 으뜸가는 실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비참하고 가련한 상태를 불쌍히 여기시고,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을 통하여 우리가 구속,곧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아 구원과 영생에 이른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음은 저가 긍휼히 여김을 받기 때문이라’하셨으니 그러면 이 복은 내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만 하나님께서도 나를 긍휼히 여길 것인가,내가 먼저 용서 해야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말씀을 어떻게 풀이를 해야 합니까 마태 18장의 빚진 자의 비유의 해석도 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비유를 내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고 가르쳐야 하는가 이렇게 해석을 한다고 할 때에 우리는 어떤 문제에 부딪칩니까 우리가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자신 조차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요,믿음으로 구원과 죄 사함을 받는다는 은혜론은 전부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으며,다른 사람의 죄를 사할 능력이 있겠는가 이 비유나 본문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우리의 죄의 용서나 긍휼을 입는 것은 참으로 회개하므로 주님께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참 회개란 내겐 죄의 결과인 영멸 외에는 받을 자격이 없으며,내가 용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전적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에 있습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참으로 회개를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긍휼을 입은 자인 것을 느낀다면,새로운 변화가 있을 것이요,나의 태도와 자세가 다를 것입니다. 이 긍휼과 은혜를 인식한 사람이라면 내게 죄를 범한 사람들이나,죄와 사망과 마귀에 노예된 자들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전에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원수와 같은 자라도,어떤 세상의 흉악한 자라도 그 죄는 미워할 것이지만 그 죄인은 불쌍히 여겨, 그를 그 죄에서 구원하려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단순히 그들의 행위 만을 보고 미워할 수 없고,그들이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으로 봐 지기 때문에 긍휼을 가지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으셨고,땅에 오셔서 진리만을 가르치셨고,잃어버린 자들을 찾기위해서,고난과 십자가를 지셨는데,하지만 주님을 못박은 자들을 바라보시면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아버지여,저들을 용서하소서,저들이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입니다." 우리는 이런 긍휼을 가졌습니까 스데반은 그들이 저에게 돌을 던질 때에,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입니다." 주님과 스데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겼고,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이런 상태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헐뜯고,악용하고,죄를 짓는 자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 긍휼의 마음자세를 가져 그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야하고,하나님께서 우리들과 같이 그들에게도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간구하게됩니다. 우리가 용서 받은 것이 어떤 것인가를 체험한 자라면 이런 긍휼의 마음은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과연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빚진 자인 것을 안다면,나에게 교만한 마음이 있을 수 없고,내 것을 나의 것이라 권리 행사를 할 사람이 없다. 오히려 내게 잘못한 사람이나 죄인을 상대할 때에 마음 속에 주님같이 민망히 여기는 것과 큰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에게 단지 긍휼이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매일 매일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고,사함을 받아야 하는데, 회개를 하는 중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하는 중,어떤 사람에 대하여 용서하는 마음없이 궁휼을 품지 않고 있다면,우리의 기도에 확신이 넚을 것이요,기도의 응답이 없을 것입니다. 불의하고 잔인한 종이 자기는 빚 탕감을 받고도 자기 동무의 얼마되지 않은 빚을 인하여 긍휼을 베풀지 않은 것은 그는 용서가 무엇인지,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한 가지 조건은 회개입니다.회개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알고서,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임을 아는 것이요,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도 반드시 긍휼하는 자입니다. 이 긍휼이 없으면 여러분이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것이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버린 사람이든지, 아니면,아직 육신적인 어린 사람으로서 이 은혜를 받았으나,깨닫지 못한 상태일런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긍휼과 함께 우리에게 임할 때에는 우리는 긍휼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인지 못 받은 사람인지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가 아니하는가로 나타납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나는 다른 사람을 용서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함을 얻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하여 긍휼하는 것입니다. 또한 날마다 우리의 범한 죄로 긍휼함을 입어야 하는 우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대해 긍휼을 해야 하고,또한 우리의 마지막 최후의 날에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서서 몸으로 행한 모든 행동을 판단 받을 것인데 우리는 그날에 긍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 날에도 나를 긍휼케 하시는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확신합니다. 여러분! 긍휼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긍휼을 입었음을 복인 줄 알고 감사합시다. 긍휼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아직 자신이 그리스도의 긍휼함을 입지 못한 자이든지,이미 은혜를 받은 자이나 깨닫지 못한 자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긍휼하기를 힘쓸 것이 아닙니다.힘씀으로 긍휼이 있어지는 것 아닙니다. 본문의 말씀에서는 어떤 행위가 있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아직 긍휼의 마음이 없다면 그는 먼저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은혜를 받은 자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이를 깨닫고 감사하는 자라면 억지가 아니라 진실로 형제에 대하여 긍휼한 사람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는 그가 긍휼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형제사랑이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감화 역사로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아질 때면 자동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 요한의 아들 시몬아,네가 이 사람들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내 양을 먹이고,치라"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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