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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5:1-12)

본문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 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낫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합니다." 거절당하고 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에서 이 집에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낫을 빌려주라." 그랬습니다. 아들은 이때에 항의를 했습니다. "며칠 전에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는데요." 그 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지혜를 베풀었습니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 이것은 복수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려준다라고 말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건 증오다. 거절당했다고 하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그저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준다하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이 긍휼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 대답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살고 있습니까 범사에 복수하는 마음으로 삽니까, 증오하는 마음으로 삽니까 참으로 사랑하는 발상,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세 차원에서 설명이 됩니다.
내 위치에서 나보다 더 높이 우러러 위로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존경이라고 하고 때로는 공경, 경외라고 말합니다. 높이는, 높이는 그런 사랑이 있고 그 다음에는 수평적으로 친구를 대하듯이 일대일로 주고받는 그런 의미의 사랑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내가 높은 위치에 있으며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겁니다. 긍휼히 여기는 겁니다 불쌍히 여기는 하향적 그런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구원의 절대 조건이예요. 물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만은 그러나 그의 말씀 중에 윤리적인 말씀도 다분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아주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말씀이면서 그 속에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아주 중요한 겁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쳐다보듯이 아버지의 그 긍휼 속에 사는 거예요. 어린아이들이 부모님 앞에 교만하지 않아요. 잘난 체 하지 않아요. 심정으로 말하면 무조건 나는 아버지 은혜로 어머니 사랑으로 산다 하는 그런 마음이요. 그 어린아이와 같은 그런 마음이 아니고는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 그랬어요. 또한 용서하지 아니하면 용서받지 못한다 그랬어요.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면 긍휼을 입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또한 중요한 겁니다. 왜요 회개하는 마음은 바로 긍휼하는 마음이거든요. 회개하는 사람은 자기 의를 다 포기한 거예요. 잘난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고 나는 그저 부족하기 그지없습니다. 무조건 백기를 들고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마음이요. 그 마음으로 또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겨요. 이런 긍휼을 알고 긍휼을 믿고 긍휼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그런 회개하는 마음 아니면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야고보서 2장 13절에 보면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면 긍휼 없는 심판을 받으리라"그랬고요, 마태복음 18장 35절에 보면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이와 같이 하시리라" 대단히 중요한 그러한 교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에 보면요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긍휼을 배우라 그랬어요. 제사를 원치 않고 그 백성들이 제사 드린다고 제사 드려 복 받겠다고 아우성 치는 거 고맙지 않다. 그 제사가 뭐 자기 겁니까 하나님의 것 하나님께 드린다고 야단해 봐야 그 별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 말씀이 "나는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 긍휼을 배우라!" 주님의 말씀이에요. 원래 영어로 Sympathy라고 이렇게 번역을 하는데 Sympathy라고 하는 말은 Sym이라고 하는 말은 Together 라는 말이고요 Pathy 라는 말은 Pathein 이라고 하는 다시 말하면 경험,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Sympathy이라는 말은 '고통을 함께 한다' '고통을 함께 경험한다' 그런 말이에요. 여기에 '에에몬'이라고 하는 헬라어의 원 뜻은 히브리말 이것은 '쎄데크'에서 나옵니다. 이 '쎄데크'라는 히브리말은 아주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높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백성을 아버지가 그 자녀를 사랑하는 그런 사랑, 그런 하향적인 수직적인 넓고 큰 사랑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며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내게 전달이 되어서 내 가슴이 저며요. 마치 뭐와 같은고 하니, 애들이 아파서 숨을 몰아쉴 때 어머니나 아버지는 그 옆에서 그 아이들을 보면서 차라리 내가 아파야 났지 내 가슴이 막 졸여 들고 말야 이렇게 아픈 것을 느껴요. 바로 그것이 긍휼이에요. 상대방의 고통, 상대방의 고독, 상대방의 아픔이 내게 그대로 전달이 되요. 그러니까 상대방의 처지에 들어가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고통을 그대로 같이 느끼는 것 이것이 긍휼이올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어려운 말씀입니다만은 마태복음 5장 48절에 보면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주님이 말씀하실 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처럼 온전할 수 있나 그 온전하라는 말의 뜻이 뭔가' 많이 생각하게 합니다. 바로 그 전에 설명이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악한 자의 밭에도 비를 내리고 선한 자의 밭에도 비를 내리고 악한 자에게도 햇빛을 주시고 선한 자에게도 햇빛을 주세요. 그 하늘 아버지의 성품 그걸 닮으라 그말이예요. 그러니까 높은 위치에서 크고 넓은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는 거요. 바로 그것을 배우라고 그것을 닮으라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서 긍휼을 베푸는 그러한 속성이 되어야 되요. 그러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하는 말씀이올시다. 예수님 이 긍휼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특별히 여러분 탕자 비유를 잘 알지 않습니까 탕자가 집을 나갑니다. 천하의 못된 사람입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유산을 달라고 청구해서 가지고 이방 땅으로 가서 방탕했답니다. 정말 탕자올시다. 그러나 잊지마세요. 아버지는 그 아들을 계속 사랑하고 아버지의 마음은 탕자 거기에 있었어요. 오늘이나 내일이나 기다리다가 아직도 상거가 먼데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달려나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그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사랑하고 있었어요. 너무 좋아서 잔치를 베풉니다. 자
그런데 그 형이라는 사람은 아버지의 마음과 같지 않았어요. 이 동생이라는 사람 똑똑한 말 하지요. 그가 비판하는 말 보면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놈을 왜 사랑하는 겁니까 똑바른 말입니다. 똑똑한 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게 아니에요. 내 아들 네 동생이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네게는 기쁨이 없더냐 이것이 긍휼이에요.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저 동생을 사랑하는 것, 네가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당연하죠. 아버지 마음으로서는. 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긍휼의 속성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또한 이래서 하는 말입니다. 오직 긍휼로 산다. 오직 용서받은 마음으로 오직 그 넓은 사랑 안에 내가 있다. 이것이 긍휼을 아는 사람의 믿음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 또 말씀하십니다. 어떤 부자가 있는데 그 사람에게 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있더라,
그런데 갚을 길이 없어요. 아무리 보아도 갚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인은 불쌍히 여기고 만 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해 주었더라. 이 사람이 고맙다 그러고 문을 나갔는데 나가다가 자기에게 빚진 사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어요. 그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주 그 가혹하게 감옥에 쳐 넣었다 이겁니다. 이 소식을 주인이 듣고 다시 불러 가지고 "내가 네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는 왜 긍휼을 베풀 줄을 모르느냐, 내가 너 만 달란트 탕감해 주었으면 너도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치 않느냐" 이 마땅하다는 말이 기독교 윤리의 근본입니다.
여기에 무슨 보상이 필요합니까 여기에 무슨 이론이 필요합니까 긍휼을 입은 사람의 성품은 긍휼로 가득해서 긍휼을 베푸는 것으로 나타나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만 달란트는 얼마냐 이걸 잘 계산해 보면은 천만 불에 해당한답니다. 그런가 하면 백 데나리온은 이십 불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은 약 오십만 분의 일이요, 그러면 천만 불을 탕감 받고 이십 불을 탕감해 줄 수 없어요 이래서야 이게 어떻게 인간이냐 말이에요. 그것이 죄요. 긍휼없는 것이 죄요. 내게 긍휼이 없다는 말은 내가 얼마나 큰 긍휼을 힘입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을 부정하는 것이거든. 그런고로 죄가 되는 것이에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꼭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부모 앞에서 자식을 나무라든가 매질하는 것은 죄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 부모가 내게 많은 용서와 사랑을 베풀었는데 내가 내 자식에게 그것도 부모 앞에서 저를 나무라면 이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됩니까 이걸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으로부터 받고자하는 대접의 기준이 있고 또 그런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상대방이 나를 믿어주길 바라고, 또 내 처지를 잘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또 참아주고 기다려 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 있다고 그럽니다. 이건 기본적인 욕구요. 이걸 합치면 긍휼을 구하는 마음이요. 내가 다 완전할 수 없거든요, 내가 다 옳을 수 없어요 그런고로 '내게 긍휼을 구해주기를' 그런 마음이 있어요.
그렇다면 긍휼을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나 또한 긍휼을 베풀어야죠. 이것이 구원의 절대 조건이요. 긍휼이라는 것은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이건 수직적입니다. 값을 지불해야 한다면 내 편에서 지불하는 겁니다. 그것이 긍휼이라는 의미의 사랑입니다. 여기에는 아무 공로도 보상도 없고 바라는 마음도 없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뿐입니다. 이것이 긍휼을 베푸는 마음의 기본적 자세올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율법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러한 율법적 이론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죄의 개념은 이렇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말씀하십니다. 여기 불한당 맞은 사람이 있는데 제사장이 그냥 지나가고 레위 사람이 그냥 지나갔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도와주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불쌍히 여기지 않은 것이 죄란 말이요. 살인을 했습니까, 도둑질을 했습니까 나는 죄가 없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죽어 가는 사람보고 도와주지 아니한 그것이 죄요. 그것이 살인이요. 이것이 예수님이 생각하는 죄의 개념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긍휼에 화신으로 긍휼의 계시로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의 처지에 오신 거요. 하나님의 긍휼, 넓은 사랑의 계시로 본인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긍휼, 그 자체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에 말씀하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긍휼한 마음도 있고, 선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그러나 이것을 다음으로 미룹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긍휼은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내일로 미뤄도 안되고, 내년으로 미뤄도 안되고, 다음 기회로 미뤄도 그건 아닙니다. 긍휼은 그대로 그 시간 나타나야하는 것이올시다. 세상에는 총명이라는 것이 있고, 지혜라는 것이 있습니다. 총명이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고 내 잘못도 알고 옳고 그름을 똑똑히 아는 것이 총명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걸 알고도 덮어주면 그것이 지혜입니다. 똑똑한 사람은 말이 많아. 결국은 자기도 심판을 받아요. 그러나 긍휼을 베푸는 자는 긍휼의 은혜를 힘입게 마련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 저는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힘입습니다. 내가 용서할 때 용서받고,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고……. 이 긍휼을 통한 관계를 이룰 때에 내 마음이 긍휼을 힘입는 긍휼하심을 입는 축복을 받아요.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긍휼하심을 얻습니다. 보세요. 남을 정죄한 사람, 정죄 받아요. 비판한 사람, 비판받아요. 너그러운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너그러움을 받게 마련이에요. 그런고로 남의 흉보고 다니는 사람은 사람 만나는 걸 꺼려해요. '내가 흉본 사람들이 나도 흉보겠지.' 벌써 자기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언제나 좋은 말만 하고 좋은 넓게 이렇게 사랑하는 마음, 긍휼을 베풀며 사는 사람은 세상에 반갑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다른 사람도 내게 이렇게 대할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편안한 인간관계를 가질 수가 있어요. 또 이보다 더 심리학적인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어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율법적 관계에서 자유해 집니다. 긍휼히 없는 사람, 강팍한 사람은 자기 마음이 자기를 정죄해요. 자기 양심이 자기를 정죄해요. 내가 남을 비판하면 너는 나으냐 자기도 알죠. 자기를 가지가 심판하게 되요. 내가 뭐냐 잘 알고 있어요. 별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렇기 때문에 무서운 율법의 비판, 양심의 가책, 저주 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해요. 얼굴이 피질 못해요. 자유하질 못합니다. 그러나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처음부터 나는 긍휼로 살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뿐이다. 내가 언제 의로왔더냐 내가 언제 선했더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오늘도 내일도 나는 하나님의 긍휼 그것뿐입니다."하는 마음이에요. 그런고로 자유로워요. 다른 사람 앞에도 자기가 더 났다는 생각하는 일없어요. 고마운 분들만 많아요. 나는 늘 부족한데 이렇게 모든 사람이 내게 참 좋게좋게 후하게 해 주시는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생각, 그의 마음은 언제나 자유로워요. 아무 보상도 바라는 맘 없어요. 그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긍휼하심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긍휼을 힘입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젊은 사람이 직장을 잃어버리고 몇 달 동안 놀았어요. 그래서 초조하게 지내다가 어느 회사에 입사원서를 내고 지금 인터뷰를 하게 됐어요. 면접 시험을 보게 되는데, 시험 볼 시간이 다가와서 그는 차를 몰고 부지런히 그 회사로 가는 길인데 가다 보니까 바로 길옆에 아주 뜨거운 여름인데 중년부인이 자동차에 타이어가 펑크가 났어요. 그 펑크난 타이어를 갈아치우느라고, 타이어 교체하느라고 땀을 흘리고 있는 걸보고 "아무리 바빠도 이럴 수 없지" 차를 멈추고 그 중년부인에게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그리고 타이어 교체를 해 드렸습니다. 이러느라고 시간이 지체됐습니다. 아 그리고 다시 차를 타고 직장을 향해 가는데 보니까 회사 시간이 벌써 늦었어요. 그러나 그저 들어가서, 인사과에 들어갔더니 "시간 지났어요.아니요, 제가 좀 오다가 지체돼서 그러는데 대단히 죄송하지만 이 면접이 안될까요안됩니다." 거절당하면서 아주 실망하고 낙심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바로 그 시간에 옆에서 어깨를 "탁" 치는 사람이 있어요. 딱 돌아다 보니까 "내일부터 회사에 나와!" 그래 보니깐 바로 아까 아주머니예요. 그 사람이 여기 이 회사의 사장이더라구요. 이렇게 극적으로 이루어지긴 쉽지 않고요. 오늘 긍휼을 베풀고 내일 당장 이루어지는 요래 됐으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은 그러나 그건 틀림없이 이루어집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어느 시간이든지 이루어집니다. 그럴 아셔야 됩니다. 그리고 이 긍휼하심을 베푸는 마음은 하나님께 향한 마음일 뿐더러 이것이 성품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복 받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조건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성품이 되어서 그 마음에 젖어서 그대로 사랑을 베풀고 은혜를 베푸는 그 마음뿐이죠. 이건 성품이 되어야 되고 이건 생활화되어야 되고 익숙해져야 됩니다. 지어먹은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성 프랜시스라는 사람,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그가 어떤 날 겨울에 말을 타고 가는데 벌판에 웬 사람이 서서 오돌 오돌 떨고 있어요. 말에서 내려가지고 "무얼 도와드릴까요" 그랬더니 "제가 추워요." 그래서 자기 옷을 벗어서 입혔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문둥병 환자예요. 벌벌 떨면서 "떨려요." 그래서 "그렇습니까" 문둥병 환자인걸 알면서도 자기는 이제 추워졌습니다. 남을 덥게 하고 자기는 추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아! 이제 따뜻합니다." 하더니 품에 안겼던 분이 없어졌어요. 그리고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오는데 "이제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았다." 주님을 만나 뵌 거예요. 너무 감격했어요. 그는 거기서 많은 유산이 있는 그런 부잣집 아들이지만은 모든 특권을 다 내버리고 수도사가 되고 성 프랜시스가 된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마음이란 지어먹는 마음이 아니에요. 그는 그대로 은혜 앞에 감사하는 그런 감격한 믿음이에요. 그런 사랑이에요. 간혹 우리는 "북한을 왜 돕습니까그렇게 돕는다고 해결이 됩니까" 그러죠. 우리가 적은 것 도와서 뭐 얼마나 돕겠습니까 가난하고 불쌍한 어린이들 여기 많이 도와주고 있는데 저는 누가 묻는다면 대답은 이렇습니다. 언젠가는 주 은혜가운데서 통일이 될 것입니다. 그때에 들어가서 북한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려울 때 도와주지 않았고 굶어 죽을 때에 소식도 없다가 이제 와서 '예수를 믿어라. 하나님을 믿어라.' 무슨 소리냐" 그러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통일될 때 무슨 얼굴로 그들을 대하겠습니까 여러분 긍휼을 베풀고 긍휼을 느끼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속에서 그 사랑과 긍휼을 성품이 되어 가지고 실천하게 될 때, 그에게 자유가 있고 감사가 있고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이올시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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