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과 외식 (마6:16-18,마9:14-17)
본문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 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 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 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 6:17)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몇가지 문제 중 오늘 우리가 문제 삼고자 하는 금식은 구제, 기도에 이어서 외식과 관련된 세번째 주제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성경을 일컬어서 생명의 양식이다, 혹은 영의 양식이다 라 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우리는 성경을 대하면서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이 나오면 즉각적인 반응을 육의 문제와 관련시키는 본능적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금식은 육체적인 음식 섭취를 금하는 문제로 이해하고 있고 그 같은 종교 행위와 관련된 외식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있는것이라는 개념으로 본문을 해석한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정당하며 여기에 무슨 다 른 영적의미를 찾는 것은 성경을 영해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고 곧잘 공격의 화살을 퍼붓는 것이 신사적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렇다라 면 그런 이들은 앞에서 언급한 성경은 영의 책, 생명의 양식이라는 기독교인 들의 가장 일반적인 전제들이 이런 부분에서는 해당되지 않는 이율배반에 봉 착하는 게 아닌가. 서두에서부터 왜 이런 말을 언급하느냐 하면 그것이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기에 그렇다.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육의 차원으로 보는 그것이 곧 모세의 수건을 벗지 않음(고후 3:13)이요, 때문에 금식의 문제도 한낱 육신적 음식섭취의 금함 정도로, 그리고 종교적 행 위로 밖에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자들에게는 여전히 오늘 본문의 말씀도 몇 겹으로 덮혀져서 감추어져 있는 비밀의 말씀일 뿐이다. 우선 여기서 금식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위해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금식 과 관련된 대화를 몇 군데 살펴보자.
마 9장 14절 이하의 기사를 보면, 요한의 제자: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 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 되느니라. 누가복음의 표현을 보면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눅 5:33). 예수님의 대답하시는 말씀 중에서 39절을 보면 "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 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위의 대화는 공관복음서 모두가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당시 종교인들의 종교 행위 중에서 금식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어떠한지 능 히 짐작할 수 있고 또한 예수님의 간결한 대답 속에서 무엇이 금식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금식이란 신랑을 빼앗겼을 때 겪는 슬픔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간결하 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다. 신랑을 빼앗겼을 때 당연히 나타나는(되어지는) 고통스러움이요 애통함인 것이다. 신랑을 빼 앗겼을 때 생기는 슬픔은 당연지사요 어떻게 그것을 종교적인, 그야말로 요한 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처럼 자주하는 행위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도 외식이 개입 된다는 것이다. 여전히 신랑이 살아 있으면서 빼앗긴 양 억지로 슬퍼하고 얼굴을 흉하게 하는 그리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러한 거룩한짓을 하는 외식(uJpokrithv",휴포크리테스, 배우) 하는 연기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외식은 육신적인 금식, 소위 바리새인이나 요한의 제자들이 했던 금식을 하면서 하는 외식 정도를(물론 그같은 금식 자체도 외식이지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은 이 글이 진행되면서 밝혀질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 때는 왜 슬픔의 표현이 금식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유로 말씀하신 낡은 부대와 새 부대,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도대체 ` 묵은 포도 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라`는 말씀은 금식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선 금식(nhsteiva,금식)에 대해서 살펴보자. 금식이란 말 그대로 음식을 금 하는 것이다. 음식이란 먹고 섭취하면 신진대사 작용을 통해 각 지체가 활동 케 하는 생명적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음식이요,양식이다. 그런데 우리 육체에 있어서도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있는가 하면 먹지 못할 양식 이 있다. 또 인간이 먹지 못하는 양식이라 해서 반드시 다른 생물도 먹지 못 하란 법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도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있는 반면에 먹을 수 없는 양식이 있다. 먹을 수 없는 양식이란 먹으면 죽는 양식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 먹을 수 없는 양식을 먹고 사는(죽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멸망의 양식, 죽음의 양식이며 그들을 가리켜 죽은 자들 혹은 사망에 속한 자들이라고 한다. 그들의 신진대사의 요소는 바로 멸망의 양식 바로 그 것이다. 곧 어두움을 빛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 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며 이 떡을 먹는 자는 영 원히 살리라" (요 6:55-58)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6장은 바로 두 양식을 잘 대조해서 말씀해 주고 있다. 당신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말씀하심과 동시에 그것은 조상들이 먹고 죽은 그 떡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떡, 양식! 무슨 말인가 전기했듯이 먹고서 신진대사를 일으켜 각 지체로 활 동케 하는 것이다. 광야의 양식! 그것은 곧 모세를 통해서 주는 것이요, 영생의 양식! 그것은 " 모세가 너희에게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 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6:32), "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는 것" (요 6:27)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즉 율법을 양식으로 삼고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가 양식이 되어서 사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법을 양식으로 삼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 삶의 모든 행동요인을 주장하는 것이 법이라는 것이다. 행복도 법에 의 해서, 절망도 법 때문에, 목표도, 꿈도, 이상도, 그리고 천국도, 여호와 하나님도, 예수도, 그리스도도, 모두 법적개념으로 작용하여 그를 통치하며, 그는 그러 한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행동 유발요인이 법 때문이며, 행동할 수 있는 에너지원원은 바로 법이다. 그것이 아니면 그에게 있어서 나 타나는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즐거움이며 더불어 절망이며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컬어 양식이라 한다. 즉 뼛속 깊이까 지 스며들어 신진대사 작용을 하여 죽음으로 살게하는 양식이다. 그래서 이것 이 그들의 세계에서는 철두철미한 질서요 법칙 체계며 이것이 무너지면 그들 에게 있어서는 큰 혼란으로 치닫게 된다. 아담의 후예인 모든 인류의 양식은 이러한 것이었다.
우리 조상 아담 앞에도 그것이 놓여 있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두 가지의 양식, 곧 생명나무와 선악 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였다. 먹고서 죽는 열매(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죽음 으로 산다는 말)를 아담은 먹었으며 오늘날 모든 인간도 동일하게 그 열매 를 양식으로 하여 살고 있다. 금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칸트는 이것을 표현해서 "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내 마음 속에는 도덕률이 반짝인다" 고 말하면서 이 도덕률을 가지 고 신의 존재증명을 시도하고 있으니 칸트가 이 도덕률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갈파했더라면 그러한 아이러니칼한 시도는 아예 그만두었을 것이다. 칸트의 마음속에서 반짝였던 그 별이 바로 멸망의 양식(그들의 세계에서는 체제 수 호를 위한 당위개념이지만)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한 멸망의 양식을 가지 고 신의 존재증명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게 증명된 신은 과연 어떤 신이겠는 가.비록 논리성을 어느 정도 갖추었고 당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어느 정도 수 긍했다 하더라도 그 신은 성경에서 말하는 다른 신에 불과한 것이다. 뿐만 아 니라 칸트 당시 뉴톤 물리학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야기되는 신 존재에 대한 회의론과 무신론의 문제가 그의 존재증명으로 극복되었다 해도 또한 그의 형 이상학이 해결된다해도 참 신과는 거리가 멀다. 모세의 법은 성문화 된 양식이요, 칸트의 도덕률은 불문률의 양식이다. 문제는 이것이 그들을 죽음으로 살게하는 양식인 반면에, 중요한 것은 이것이 그들의 남편이요 신랑이라는 사실이다. 남편 혹은 신랑이라는 말은 성경의 개념으로는 머리를 의미한다. 모든 지체는 머리에 붙어 있고 그 머리의 지시 에 의해서 각기 움직인다. 바로 중앙통제소가 머리이다. 이 남편(머리)과 한 몸을 이루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산다.
바로 양식이며 머리요, 신랑이다.(롬 7:1-참조) 예수는 " 혼인집의 아들들(원문은 손님이 아니라 uiJoi;로 되어 있음)이 그들 과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요한, 그리고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을 구분할 수가 있다 . 요한과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오늘날 금식기도원에서 행해지는 차원의 금식 개념이었고 제자들이 하게 될 금식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 제자로 부름받아 예수를(신랑) 따르 고 있는 제자들도 여전히 자기 스승 예수에 대하여는 모세 차원(법적)에서 떠 나지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베드로의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 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 정도 밖에는 엿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신랑은 여전히 모세적 예수일 따름이다. 이 때의 제자들에게도 역시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은 한꺼풀 덮여서 법의 양식으로 전달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철두철미하게 믿고 따르는 그 예수는 하루속히 죽어야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예수께서는 계속 말씀하시지만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하던 베드로 조차도 예수를 ejpitimavw (에피티마오 ,꾸짖으면서)하면서 `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 리이다(마 16:22)` 고 하고 있으니, 그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그야말로 혈육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알게 된 고백을 하였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개 념 정리가 안 된 신앙의 상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뿐이다. 앞 장에서 이 미 말했듯이 그의 그리스도관은 육신적 그리스도관이었다. 바로 그러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는 것이요, 그 예수 신랑이 죽게되면 그 로부터 받아먹던 양식이 자연히 중단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육체대 로의(고후 5:16) 그리스도 개념이 제자들에게서 죽어버리는 것이니 이는 지금 까지의 모든 의미, 즉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기로 한 최고선(summum bonum)의 가치 체계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기나 잡 으러 디베랴 바다로 다시 향하기도 하지만 이 때가 바로 신랑을 빼앗겨 버리는 때요, 그 허무와 고통과 절망, 그리고 빼앗기는 순간까지의 갈등은 무엇으 로 표현할 것인가
그러므로 이 때는 자기 안에서 자기 남편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양식이 주 어지지 않는 금식의 상태로 자연스럽게 진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죽 었던 그 남편이 다시 살아올 때의 감격을 마태복음 5:4절은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하고 있다. 즉, 예수가 죽고 죽었던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로 다시 부활하여 살아 돌아오는 순간이다 . 이 긴 죽음의 터널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금식(법의 개념, 선악차 원으로부터 벗어나오는 과정)이다. 더이상 선악의 양식을 먹을 수 없게 되고 ,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닌 상태.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6-17).
뿐만 아니라 이런 이 후에도 옛날 그 남편의 목소리가 순간 순간 들려오기도 하고 또한 그리워지기도 하고 있으니 그것을 성경은 시험이라고 말하고 있으 며 그러한 때 여전히 우리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지혜가 바로 금 식이다. 때문에 참된 금식은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시험에 들게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다. 여기에 개입되는 외식을 가리켜 이사야 58장 3절 이하에서는,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어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이것이 어 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사 58:3-). 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도 실제로는 괴롭지 않으면서 괴로운 척하므로 금식하는 외식의 하구성 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보이기 위한, 그래서 " 이르기를 우리가 금 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사 58:3)하고 항의하고 있다 . 그러한 금식 속에는 이미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여 슬픈 기색과 얼굴을 흉하게 하는 외식으로 자기 상을 이미 받고 있다.
그렇다면 외식 금식이 아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을 이사야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보이기 위한 금식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금식이라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것임을 말해 준다. 금식의 결과는 흉악의 결박이 풀리는 것이다. 압제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모든 멍에를 꺾는다. 그리고 마침내는 주 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 줄 수 있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으로 영접할 수 있고 , 벗은 자를 입혀 줄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능력과 권세가 주어지는 것, 그것 이 금식이다.
그러므로 금식이란 안 먹는 것이 금식이 아니라 무엇을 안 먹는 것이 금식이 며, 금식 후에는 새로운 양식을 먹고 먹여 주는 자가 된다. 왜 이렇게 신랑을 빼앗기는 경험과 금식을 겪게 되는가 그것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하 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 에 넣어야 둘 다 보전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율법적 그릇과 사고방식에 찌들 어 있는 부대에 새 포도주가 들어가 보라. 그 무질서와 파괴와 아수라장은 차 라리 법의 몽둥이로 다스리는 것만 못하게 되는 무정부 상태가 될 것이다. 새 부대, 새 포도주라 함은 육신적 예수 체계가 내 속에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지음 받은 새로운 그릇을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능히 새 포도주를 담고 둘 다 온전히 보전할 수 있는 부대.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다는 데 에 있다. 사람들은 본래 오래 된 포도주를 좋아한다. 질 좋은 포도주일수록 오래된 것이다. 오래 된 것일수록 그만큼 값도 비싸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 이 입맛에 맞는다. 그래서인가. 금식도 묵은 금식, 오래 된 금식만을 즐겨하 고 있다.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그러므로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없으며
그러므로 금식하는 자는 많으나 참으 로 금식을 경험하는 자도, 신랑을 빼앗긴 슬픔으로 애통해 하는 자도 지극히 적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6)
그러므로 육에 속한 자들에게는 여전히 오늘 본문의 말씀도 몇 겹으로 덮혀져서 감추어져 있는 비밀의 말씀일 뿐이다. 우선 여기서 금식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위해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금식 과 관련된 대화를 몇 군데 살펴보자.
마 9장 14절 이하의 기사를 보면, 요한의 제자: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 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 되느니라. 누가복음의 표현을 보면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눅 5:33). 예수님의 대답하시는 말씀 중에서 39절을 보면 "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 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위의 대화는 공관복음서 모두가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당시 종교인들의 종교 행위 중에서 금식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어떠한지 능 히 짐작할 수 있고 또한 예수님의 간결한 대답 속에서 무엇이 금식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금식이란 신랑을 빼앗겼을 때 겪는 슬픔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간결하 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다. 신랑을 빼앗겼을 때 당연히 나타나는(되어지는) 고통스러움이요 애통함인 것이다. 신랑을 빼 앗겼을 때 생기는 슬픔은 당연지사요 어떻게 그것을 종교적인, 그야말로 요한 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처럼 자주하는 행위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도 외식이 개입 된다는 것이다. 여전히 신랑이 살아 있으면서 빼앗긴 양 억지로 슬퍼하고 얼굴을 흉하게 하는 그리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러한 거룩한짓을 하는 외식(uJpokrithv",휴포크리테스, 배우) 하는 연기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외식은 육신적인 금식, 소위 바리새인이나 요한의 제자들이 했던 금식을 하면서 하는 외식 정도를(물론 그같은 금식 자체도 외식이지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은 이 글이 진행되면서 밝혀질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 때는 왜 슬픔의 표현이 금식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유로 말씀하신 낡은 부대와 새 부대,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도대체 ` 묵은 포도 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라`는 말씀은 금식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선 금식(nhsteiva,금식)에 대해서 살펴보자. 금식이란 말 그대로 음식을 금 하는 것이다. 음식이란 먹고 섭취하면 신진대사 작용을 통해 각 지체가 활동 케 하는 생명적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음식이요,양식이다. 그런데 우리 육체에 있어서도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있는가 하면 먹지 못할 양식 이 있다. 또 인간이 먹지 못하는 양식이라 해서 반드시 다른 생물도 먹지 못 하란 법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도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있는 반면에 먹을 수 없는 양식이 있다. 먹을 수 없는 양식이란 먹으면 죽는 양식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 먹을 수 없는 양식을 먹고 사는(죽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멸망의 양식, 죽음의 양식이며 그들을 가리켜 죽은 자들 혹은 사망에 속한 자들이라고 한다. 그들의 신진대사의 요소는 바로 멸망의 양식 바로 그 것이다. 곧 어두움을 빛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 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며 이 떡을 먹는 자는 영 원히 살리라" (요 6:55-58)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6장은 바로 두 양식을 잘 대조해서 말씀해 주고 있다. 당신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말씀하심과 동시에 그것은 조상들이 먹고 죽은 그 떡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떡, 양식! 무슨 말인가 전기했듯이 먹고서 신진대사를 일으켜 각 지체로 활 동케 하는 것이다. 광야의 양식! 그것은 곧 모세를 통해서 주는 것이요, 영생의 양식! 그것은 " 모세가 너희에게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 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6:32), "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는 것" (요 6:27)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즉 율법을 양식으로 삼고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가 양식이 되어서 사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법을 양식으로 삼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 삶의 모든 행동요인을 주장하는 것이 법이라는 것이다. 행복도 법에 의 해서, 절망도 법 때문에, 목표도, 꿈도, 이상도, 그리고 천국도, 여호와 하나님도, 예수도, 그리스도도, 모두 법적개념으로 작용하여 그를 통치하며, 그는 그러 한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행동 유발요인이 법 때문이며, 행동할 수 있는 에너지원원은 바로 법이다. 그것이 아니면 그에게 있어서 나 타나는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즐거움이며 더불어 절망이며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컬어 양식이라 한다. 즉 뼛속 깊이까 지 스며들어 신진대사 작용을 하여 죽음으로 살게하는 양식이다. 그래서 이것 이 그들의 세계에서는 철두철미한 질서요 법칙 체계며 이것이 무너지면 그들 에게 있어서는 큰 혼란으로 치닫게 된다. 아담의 후예인 모든 인류의 양식은 이러한 것이었다.
우리 조상 아담 앞에도 그것이 놓여 있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두 가지의 양식, 곧 생명나무와 선악 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였다. 먹고서 죽는 열매(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죽음 으로 산다는 말)를 아담은 먹었으며 오늘날 모든 인간도 동일하게 그 열매 를 양식으로 하여 살고 있다. 금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칸트는 이것을 표현해서 "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내 마음 속에는 도덕률이 반짝인다" 고 말하면서 이 도덕률을 가지 고 신의 존재증명을 시도하고 있으니 칸트가 이 도덕률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갈파했더라면 그러한 아이러니칼한 시도는 아예 그만두었을 것이다. 칸트의 마음속에서 반짝였던 그 별이 바로 멸망의 양식(그들의 세계에서는 체제 수 호를 위한 당위개념이지만)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한 멸망의 양식을 가지 고 신의 존재증명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게 증명된 신은 과연 어떤 신이겠는 가.비록 논리성을 어느 정도 갖추었고 당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어느 정도 수 긍했다 하더라도 그 신은 성경에서 말하는 다른 신에 불과한 것이다. 뿐만 아 니라 칸트 당시 뉴톤 물리학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야기되는 신 존재에 대한 회의론과 무신론의 문제가 그의 존재증명으로 극복되었다 해도 또한 그의 형 이상학이 해결된다해도 참 신과는 거리가 멀다. 모세의 법은 성문화 된 양식이요, 칸트의 도덕률은 불문률의 양식이다. 문제는 이것이 그들을 죽음으로 살게하는 양식인 반면에, 중요한 것은 이것이 그들의 남편이요 신랑이라는 사실이다. 남편 혹은 신랑이라는 말은 성경의 개념으로는 머리를 의미한다. 모든 지체는 머리에 붙어 있고 그 머리의 지시 에 의해서 각기 움직인다. 바로 중앙통제소가 머리이다. 이 남편(머리)과 한 몸을 이루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산다.
바로 양식이며 머리요, 신랑이다.(롬 7:1-참조) 예수는 " 혼인집의 아들들(원문은 손님이 아니라 uiJoi;로 되어 있음)이 그들 과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요한, 그리고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을 구분할 수가 있다 . 요한과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오늘날 금식기도원에서 행해지는 차원의 금식 개념이었고 제자들이 하게 될 금식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 제자로 부름받아 예수를(신랑) 따르 고 있는 제자들도 여전히 자기 스승 예수에 대하여는 모세 차원(법적)에서 떠 나지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베드로의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 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 정도 밖에는 엿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신랑은 여전히 모세적 예수일 따름이다. 이 때의 제자들에게도 역시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은 한꺼풀 덮여서 법의 양식으로 전달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철두철미하게 믿고 따르는 그 예수는 하루속히 죽어야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예수께서는 계속 말씀하시지만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하던 베드로 조차도 예수를 ejpitimavw (에피티마오 ,꾸짖으면서)하면서 `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 리이다(마 16:22)` 고 하고 있으니, 그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그야말로 혈육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알게 된 고백을 하였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개 념 정리가 안 된 신앙의 상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뿐이다. 앞 장에서 이 미 말했듯이 그의 그리스도관은 육신적 그리스도관이었다. 바로 그러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는 것이요, 그 예수 신랑이 죽게되면 그 로부터 받아먹던 양식이 자연히 중단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육체대 로의(고후 5:16) 그리스도 개념이 제자들에게서 죽어버리는 것이니 이는 지금 까지의 모든 의미, 즉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기로 한 최고선(summum bonum)의 가치 체계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기나 잡 으러 디베랴 바다로 다시 향하기도 하지만 이 때가 바로 신랑을 빼앗겨 버리는 때요, 그 허무와 고통과 절망, 그리고 빼앗기는 순간까지의 갈등은 무엇으 로 표현할 것인가
그러므로 이 때는 자기 안에서 자기 남편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양식이 주 어지지 않는 금식의 상태로 자연스럽게 진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죽 었던 그 남편이 다시 살아올 때의 감격을 마태복음 5:4절은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하고 있다. 즉, 예수가 죽고 죽었던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로 다시 부활하여 살아 돌아오는 순간이다 . 이 긴 죽음의 터널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금식(법의 개념, 선악차 원으로부터 벗어나오는 과정)이다. 더이상 선악의 양식을 먹을 수 없게 되고 ,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닌 상태.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6-17).
뿐만 아니라 이런 이 후에도 옛날 그 남편의 목소리가 순간 순간 들려오기도 하고 또한 그리워지기도 하고 있으니 그것을 성경은 시험이라고 말하고 있으 며 그러한 때 여전히 우리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지혜가 바로 금 식이다. 때문에 참된 금식은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시험에 들게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다. 여기에 개입되는 외식을 가리켜 이사야 58장 3절 이하에서는,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어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이것이 어 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사 58:3-). 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도 실제로는 괴롭지 않으면서 괴로운 척하므로 금식하는 외식의 하구성 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보이기 위한, 그래서 " 이르기를 우리가 금 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사 58:3)하고 항의하고 있다 . 그러한 금식 속에는 이미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여 슬픈 기색과 얼굴을 흉하게 하는 외식으로 자기 상을 이미 받고 있다.
그렇다면 외식 금식이 아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을 이사야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보이기 위한 금식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금식이라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것임을 말해 준다. 금식의 결과는 흉악의 결박이 풀리는 것이다. 압제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모든 멍에를 꺾는다. 그리고 마침내는 주 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 줄 수 있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으로 영접할 수 있고 , 벗은 자를 입혀 줄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능력과 권세가 주어지는 것, 그것 이 금식이다.
그러므로 금식이란 안 먹는 것이 금식이 아니라 무엇을 안 먹는 것이 금식이 며, 금식 후에는 새로운 양식을 먹고 먹여 주는 자가 된다. 왜 이렇게 신랑을 빼앗기는 경험과 금식을 겪게 되는가 그것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하 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 에 넣어야 둘 다 보전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율법적 그릇과 사고방식에 찌들 어 있는 부대에 새 포도주가 들어가 보라. 그 무질서와 파괴와 아수라장은 차 라리 법의 몽둥이로 다스리는 것만 못하게 되는 무정부 상태가 될 것이다. 새 부대, 새 포도주라 함은 육신적 예수 체계가 내 속에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지음 받은 새로운 그릇을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능히 새 포도주를 담고 둘 다 온전히 보전할 수 있는 부대.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다는 데 에 있다. 사람들은 본래 오래 된 포도주를 좋아한다. 질 좋은 포도주일수록 오래된 것이다. 오래 된 것일수록 그만큼 값도 비싸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 이 입맛에 맞는다. 그래서인가. 금식도 묵은 금식, 오래 된 금식만을 즐겨하 고 있다.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그러므로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없으며
그러므로 금식하는 자는 많으나 참으 로 금식을 경험하는 자도, 신랑을 빼앗긴 슬픔으로 애통해 하는 자도 지극히 적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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