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하는 자여, 천국을 생각하라 (요14:1-11)
본문
벌써 올해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어느 해든지 마지막 주일에 드리는 예배는 여러 가지 면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한 해와의 영원한 작별은 곧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기간이 그만큼 단축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천국이 그만큼 더 가까워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예비해 두신 천국에 관한 말씀을 우리가 함께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4장 말씀을 읽었습니만 13장에 보면 가룟 유다는 이미 예수님의 원수인 대제사장들과 한패가 되어 주님을 넘길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이 길을 꼭 가야 된다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홀로 그 길을 가시겠다는 비장한 말씀에 마음이 아팠던지 베드로는 자기의 충성을 이렇게 맹세했습니다. "주여, 내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냉정하게 그의 고백을 물리치셨습니다. "너는 오늘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마음을 짓누르던 근심은 마침내 주체할 수 없는 공포로 돌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혼돈 속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여기서 '근심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타라소'(tarasso)인데, 영어로 말하면 'trouble'에 해당하는 굉장히 강한 말입니다. 막연히 조금 걱정스럽다, 염려가 된다는 그 정도 말이 아닙니다. 아예 우리 마음을 휙 뒤집어 놓을 정도로 고통을 느끼게 하는 아주 괴로운 상황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심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런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너희들 마음속에 있는 그 고통과 번민, 이제는 그만 둬라.
왜냐하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더 큰 고통에 시달리는 편은 제자들보다는 오히려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조금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심경을 이렇게 실토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26:38)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참 가슴이 저며옴을 느낍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심경은 감추신 채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 말씀을 통해 근심과 공포, 불안으로 떨고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고 권면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권면의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서 우리가 정리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구약 성도들이 이미 들어가 살고 있는 천국이 준비되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새삼스럽게 천국을 준비하러 가신다고 할까요 그러나 천국을 준비하신다는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좁게 닫혀 있던 천국 문을 전세계의 모든 사람을 위해 활짝 열어 놓기 위해 정해진 길을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천국 문을 활짝 여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그 죄 값을 대속하여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천국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먼저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부활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영광의 주요, 모든 인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권세 있는 구원자가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반드시 부활하셔야 합니다. 부활하기 위해서 지금 십자가로 가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에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입니다. 승천하심으로 주님은 한번 열어 놓은 천국 문을 아무도 닫을 수 없게 만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믿고 부르기만 하면 그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씀은 이와 같이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고, 승천하심으로 천국 문을 열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처소를 준비하는 일이 끝나면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서 '다시 온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저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부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천국 들어가는 길을 활짝 열어놓으신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이 만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성령님이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면 우리는 육신으로 그를 보지 못합니다. 주님은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와 동행해주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시 온다는 말씀은 곧 성령님이 오신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셋째는, 재림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금 오시면 우리를 주님 나라로 인도하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볼 때 3절의 '다시 와서'라는 말은 이 세 가지 모두를 의미한다고 봐도 별 무리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의 의미는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가 지금 처소를 예비하러 가지 않느냐 예비하면 다시 오마.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믿냐 나를 믿으라. 그러면 너희 마음에 근심이 떠날 것이다." 천국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신 후에는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므로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이야기 사실 저는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조금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답답한 일을 만나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저 세상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장 눈앞에 떨어져 있는 불을 꺼야 되는 판국에 저 세상 이야기가 무슨 감동이 되었겠습니까 저 세상 이야기를 듣고 근심이 사라진다는 것이 도대체 가능했겠느냐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60이나 70세쯤 된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지도 모릅니다. 살만큼 산 사람들이니 '이제 천국이 내 앞에 가까웠구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제자들은 기껏해야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천국 이야기가 무슨 감동이나 위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은 주님은 근심하지 말라는 첫 권면으로 저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실직을 당해서 한 1년은 그 동안 모아 두었던 것을 가지고 그럭저럭 버티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살까'하는 생각만 하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가장이 있다고 합시다. 그에게 "아이고, 뭐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천국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근심하지 마세요."라고 말한다면, 그 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요 우리가 보기에 현실 문제를 내세 문제와 연관시키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현실 문제는 현실 문제로 해결해야 된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기독교는 현실의 고통을 잊도록 하기 위해서 천국이라는 환각제를 주사하는 도피주의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근심에 떠는 제자들에게 저 세상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봅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서는 들을 수 있는 이야기 가운데 천국 이야기만큼 좋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 이야기만큼 우리를 흥분시키고,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근심을 싹 잊어버리게 만들만한 이야기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그와 같은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문제지, 사실은 천국 이야기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우리의 구원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구원받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구원받기를 원합니다."하고 말할 때 우리는 천국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나는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집은 우리가 들어갈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우리가 세상에서 가슴에 안고 씨름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답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세상에서 입고 있는 손해라든가, 원통함이라든가, 분한 것이라든가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완전하고 충족한 보상입니다. 그 나라에 가면 우리의 마음에 있는 응어리들이 다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엄청난 것으로 보상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바라고 꿈꾸는 모든 행복의 최고급 행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에 가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던 모든 고통의 원인이 완전히 제거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을 보면 천국에는 다시는 사망이 없고 죽음이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천국을 생각하면 기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정상이 아니라고 봅니다. 다시는 죽음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왜 기뻐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자가 죽어서 가슴을 치고 울어 본 일이 있습니까 밤잠을 설쳐 가며 통증을 가지고 씨름해 본 일이 있습니까 팔자 좋게 70, 80년을 살아도 한번 아파 본 일이 없는 분들이 계시다면 참 행복하고 복이 많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슬픔이나 고통을 맛본 분이라면 천국에 죽음이나 고통이 다시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잘 알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를 괴롭게 하는 모든 원인이 완전히 제거 된 곳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면 우리의 영광이 극치를 이룹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찬란한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천상의 영광을 덧입게 된 우리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 때는 키가 작다고 고민할 필요도 없고, 못 생겼다고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잘났다고 거드름 피울 것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흠과 티가 전혀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천국 이야기보다 더 좋은 이야기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더욱이 천국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면서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오늘도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그 주님을 이제는 영원토록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천국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황금으로 만든 집이나 열두 진주 문, 생명 나무 과실과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천국을 천국으로 못 느낄 것입니다. 천국은 물건으로 만족하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니 크로스비는 이런 찬송을 했습니다.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 밝고 밝은 그 아침을 당할 때/ 요단강을 건너가서 주의 손을 붙잡고/ 기쁨으로 주의 얼굴 뵈오리/ 나의 주를 나의 주를/ 내가 그의 곁에 서서 뵈오며/ 나의 주를 나의 주를/ 손에 못자국을 보아 알겠네." 예수님이 계시는 그 곳이 천국이라고 하면, 천국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기쁘고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은 우리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버지 집이면 그의 자녀 된 우리는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성령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아버지 집은 곧 내 집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천국 이야기만큼 중요한 것이 없고, 신나는 것이 없습니다. '먹고살기 바쁜 세상인데 무슨 천국 이야기냐'하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아직 천국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면 천국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마음이 그리로 달려갈 것입니다. 길을 잃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누군가 다가가서 "얘야, 울지마. 내가 너희 집에 데려다 줄게."하고 말하면 금새 울음소리가 그칩니다. 아직 집에 간 것도 아닌데 그 아이의 마음은 벌써 집에 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안아주고 엄마가 안아주고 뽀뽀해 주는 것을 그는 연상합니다. 침대가 놓여 있고 조용한 방에 인형이 여기저기 걸려 있고 그림이 걸려 있는 아늑한 자기 방을 벌써 마음으로 그리워합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의 심정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근심으로 짓눌리고 어떤 때는 두려움이 엄습해서 안절부절 할 때라도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영의 눈을 열어 그 나라를 바라보면 벌써 우리 마음이 그리로 달려갑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를 마음에 두고 묵상하는 자는 누구든지 울음을 그칠 수 있고 근심을 털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두려움과 맞서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아직 세상에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말만 하나님 나라를 떠들지 실상은 땅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자의 눈에는 현실 문제가 작아 보입니다. 마음을 천국에 두고 있는 자에게는 근심이 힘을 잃어버립니다. 로마서 8장 18절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현재의 고난이란 우리가 안고 씨름하는 근심을 말합니다. 실직이나 배고픔, 육신의 아픔, 이별의 슬픔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게되는 수많은 고통을 말합니다. 우리 중에서 이 악하고 험한 세상에서 이와 같은 현재의 고난을 완전히 회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누구나 역경과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광을 내다보는 사람에게는 현재의 고난이나 마음을 짓누르는 근심이 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짐이 무거워도 내가 돌아갈 집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그 짐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쉴 집으로 가는 동안 잠깐 당하는 고통이라고 생각하면 그 고통을 짊어질 수 있는 힘이 훨씬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동안을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마침내 70년이 차서 본토로 귀환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번 그려보십시오. 부모세대는 다 세상을 떠났고 이제는 그 자손들이 본토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몇 달을 여행해서 가야하는 길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벌써 고향 땅에 가 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면 내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흥분에 젖어 있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향 땅을 향해 감격의 발걸음을 내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꿈꾸는 자로 묘사했습니다.
시편 126편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의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이 세상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마음도 꿈꾸는 자 같았다면 짧은 한 세상을 살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황홀감에 젖어들겠습니까 꿈꾸는 자에게는 세상 근심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천국을 바라보고 꿈꾸는 자의 마음에는 고통이 힘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 한 가지소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건강해서 오래 살기를 소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는 일마다 형통해서 우리가 세상에서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많이 쌓아 놓고 마음껏 누리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남의 나라요, 남의 땅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거할 집이 아닙니다. 남의 집에서 행복하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오래 산다고 그게 얼마나 대단한 복이 되겠습니까 주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남의 집입니다. 으리으리한 큰집에 놀다가 "얘야, 집에 돌아가자."는 부모의 말에 "나는 여기가 좋아요. 안 갈래."하고 떼를 쓰는 철없는 어린아이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부모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못난 자식아, 멍청한 자식아, 남의 집에서 행복하면 얼마나 행복하겠다고, 안가겠다고 그러냐"하고 야단을 칩니다. 우리 주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여기서 '내게 주신 자'는 일차적으로는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좀더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 역시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품고 계신 간절한 소원은 우리를 예수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와 함께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누리는 그 영광을 우리가 보고 찬송하고 즐거워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에게 최고의 만족을 줄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근심이 가벼워 져야 합니다. 천국만 생각하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천국을 이야기 할 때면 연인이 자기의 사랑을 이야기하듯이 시간 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푹 빠질 수 있는 그런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겉으로는 천국 간다 하면서 속은 완전히 세상에 몰입해서는 천국 이야기만 하면 자기와 상관없는 딴 세상 이야기처럼 시큰둥하게 받아들이는 그런 믿음 가지고 세상을 살 바에는 차라리 신앙생활을 그만 두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천국의 유일한 권위자
둘째로는, 예수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천국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2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주님은 땅에서 난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입니다. 천국에 계시다가 이 땅에 오셨기에 천국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요, 천국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유일한 진리요, 천국에서 살게 하는 유일한 생명입니다. 예수님 말고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구원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이와 같은 절대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까 본문 9절 이하를 보십시오.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소서."하고 말하자 주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왜 나 보고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네가 이렇게 오래 나와 같이 있었는데 하나님을 아직도 못 보았다고 하니 무슨 소리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이미 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면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보았으면 하나님을 본 것이다.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말라. 만약 그 사실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 내가 지금까지 무슨 일을 했느냐 죽은 자를 살렸노라. 내가 무슨 일을 했느냐 떡 다섯 덩이로 오 천 명을 먹였노라. 내가 무슨 일을 했느냐 문둥이를 고쳤노라. 바다를 잔잔케 했노라.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지 않느냐 나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믿어지지 않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라도 믿으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그분만이 천국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시면서 자신 있게 제자들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천국에 가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을 이야기할 만한 자격자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부터 한 250년 전에 스웨덴 복이라고 하는 사람 있었습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천국과 지옥>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천사와 마주 앉아서 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천국이 어떤 곳인지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천국은 물질 세계에서 우리가 느끼던 감각적 즐거움이 그대로 계속 되는 곳이다. 남녀가 세상에서 사랑을 하는 것은 천국에서도 남녀가 사랑할 수 있고, 천국에 가서도 가족들은 여전히 식구가 되어서 서로 의지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천국은 영적인 곳이라기보다는 물질적인 요소도 굉장히 많은 곳이다." 좋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우리는 그의 말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천국 이야기를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유명한 사람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분은 요한복음 14장 6절을 이렇게 은혜스러운 말로 풀어서 표현했습니다. "나를 따르라 나는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니라 길이 없이 가는 것이 없고, 진리가 없이 아는 것이 없고, 생명이 없이 사는 것이 없느니라 나는 너희가 반드시 따라야 할 길이다 반드시 믿어야 할 진리다 반드시 소망해야 할 생명이다 나는 신성한 길이다 나는 무오한 진리다 나는 다함이 없는 생명이다 나는 가장 빠른 길이요, 주권적 진리요, 참 생명, 복된 생명, 창조되지 아니한 생명이니라."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을 간다는 사실도 아직도 의심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종교들은 저마다 "이리 가면 천국에 들어간다. 저리 가면 하늘나라로 간다."하고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합니다. 그러나 그 종교들의 창시자들 가운데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모든 길이 가는 곳은 똑같다." 불교 믿는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는 정말 포용력이 있는 종교야. 기독교는 너무 독선적이다." 왜 독선이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자기로 말미암지 않고는, 자기를 안 믿으면 천국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독선적인 말씀을 하십니까 자신만이 권위자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들이 저마다 다른 소리를 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만큼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어느 종교나 믿어도 된다는 말이 매력적으로 들린다면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값없이 오직 은혜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니 우리가 천국을 생각하면 절로 힘이 솟아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연소득 25만불 이상 되는 사람은 전체 국민의 1 퍼센트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연 25만 불이면 한 달에 2만 불 이상 버는 셈이므로 상당한 고소득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대상으로 앙케트 조사를 한 일이 있나 봅니다. 그 내용이 퍽 재미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천국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를 투자 할 수 있습니까"하는 질문에 최고액을 써낸 사람이 64만 불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기록을 보면서 가소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 웃기고들 있네. 64만 불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못 들어갈 사람 몇이나 되겠냐' 얼마나 멍청한 대답입니까 천국은 돈 가지고 들어가는 곳이 아닌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라는 사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천국은 은혜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곳이다. 만일 천국이 무슨 값을 따지고 들어가는 곳이라면, 그곳에 들어갈 자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강아지일 것이다." 무슨 소리인지 얼른 와 닿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 놓고 사는 사람이라도 일단 천국에 들어가려면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죽고 나면 한 푼도 못 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64만 불이 아니라 64센트도 못 들고 갑니다.
그러므로 죽은 시체를 놓고 따지면 사람보다는 강아지가 더 값이 나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돈으로 따진다면 강아지가 들어가야 마땅하다.는 말은 백번 옳다고 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천국 가는 길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외치는 수많은 종교들에 빠지지 않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났습니다. 언젠가 저는 TV에서 캐나다에 이민을 가고 싶어서 안달하다가 사기꾼에게 걸려서 재산을 다 날리고 캐나다에서 추방당한 사람들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 아닙니까 만일 여러분이 천국에 가게 해주겠다는 종교들에 속아 그와 같은 꼴이 되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오늘날 잘못된 종교와 잘못된 진리에 현혹되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해 천국을 놓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감사하게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천국 들어갈 수 있는 팔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비록 마음에 근심이 있어도 근심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뜨겁게 헌신합니다. 절대 미지근할 수 없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이런 재미있는 내용이 하나 나옵니다. 단테가 안내자의 인도를 받아서 천국도 구경하고 지옥도 구경하는 가상적인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안내자를 따라서 어느 곳을 갔더니 죽을상을 하고서 초조하게 서성거리는 일단의 사람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서 거절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동시에 지옥에서도 거절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만큼 성인도 못되고 지옥에 처넣을 만큼 악인도 못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 안내인이 단테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도 좋아하시지 않고, 사탄도 좋아하지 아니하는 영원히 버려진 인간들입니다. 만나 볼 가치도 없으니까 그냥 지나갑시다." 지어낸 이야기이긴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제대로 살려면 하나님이 덥석 안고 자기 나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뜨겁게 신앙생활 하든지, 아니면 지옥에 있는 사탄이 반길 만큼 그저 그렇게 살든지 고 가든지 해야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사람이 되어 가지고 살다가는 천국에서도 퇴짜맞고 지옥에 가서도 퇴짜맞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동안 마음이 하늘에도 가 있고, 땅에도 가 있으면, 천국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도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오만가지 걱정 다 끌어안고 불안과 두려움에 떨다가 끝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미지근하게 신앙생활 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근심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 이야기만큼 좋은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천국 이야기를 하실 수 있는 유일한 권위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입술에서 천국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의 마음은 아버지 집으로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그의 말씀을 담고 있으면 하늘의 영광이 우리 가슴을 가득 채우기 때문에 근심이 있어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영광 앞에 근심은 작아 보이고,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어느 쪽에 있습니까 천국을 생각하면 울다가도 웃을 만큼, 잠을 못 이루며 근심하다가도 벌떡 일어나 춤을 출 수 있을 만큼 가슴이 뜨거워집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천국 이야기를 해도 현실의 문제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문제가 있습니다. 70년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꿈꾸는 것처럼 천국을 바라보고 삽시다. 머리를 하늘을 향해 듭시다. 우리는 이 세상 끝 날까지 근심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근심과 고통을 이기며 살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영광을 소망하면서 살 때 이 세상의 고통이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은 것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그 나라를 소망하며 이 세상에서 근심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예비해 두신 천국에 관한 말씀을 우리가 함께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4장 말씀을 읽었습니만 13장에 보면 가룟 유다는 이미 예수님의 원수인 대제사장들과 한패가 되어 주님을 넘길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이 길을 꼭 가야 된다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홀로 그 길을 가시겠다는 비장한 말씀에 마음이 아팠던지 베드로는 자기의 충성을 이렇게 맹세했습니다. "주여, 내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냉정하게 그의 고백을 물리치셨습니다. "너는 오늘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마음을 짓누르던 근심은 마침내 주체할 수 없는 공포로 돌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혼돈 속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여기서 '근심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타라소'(tarasso)인데, 영어로 말하면 'trouble'에 해당하는 굉장히 강한 말입니다. 막연히 조금 걱정스럽다, 염려가 된다는 그 정도 말이 아닙니다. 아예 우리 마음을 휙 뒤집어 놓을 정도로 고통을 느끼게 하는 아주 괴로운 상황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심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런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너희들 마음속에 있는 그 고통과 번민, 이제는 그만 둬라.
왜냐하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더 큰 고통에 시달리는 편은 제자들보다는 오히려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조금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심경을 이렇게 실토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26:38)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참 가슴이 저며옴을 느낍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심경은 감추신 채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 말씀을 통해 근심과 공포, 불안으로 떨고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고 권면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권면의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서 우리가 정리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구약 성도들이 이미 들어가 살고 있는 천국이 준비되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새삼스럽게 천국을 준비하러 가신다고 할까요 그러나 천국을 준비하신다는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좁게 닫혀 있던 천국 문을 전세계의 모든 사람을 위해 활짝 열어 놓기 위해 정해진 길을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천국 문을 활짝 여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그 죄 값을 대속하여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천국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먼저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부활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영광의 주요, 모든 인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권세 있는 구원자가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반드시 부활하셔야 합니다. 부활하기 위해서 지금 십자가로 가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에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입니다. 승천하심으로 주님은 한번 열어 놓은 천국 문을 아무도 닫을 수 없게 만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믿고 부르기만 하면 그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씀은 이와 같이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고, 승천하심으로 천국 문을 열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처소를 준비하는 일이 끝나면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서 '다시 온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저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부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천국 들어가는 길을 활짝 열어놓으신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이 만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성령님이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면 우리는 육신으로 그를 보지 못합니다. 주님은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와 동행해주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시 온다는 말씀은 곧 성령님이 오신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셋째는, 재림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금 오시면 우리를 주님 나라로 인도하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볼 때 3절의 '다시 와서'라는 말은 이 세 가지 모두를 의미한다고 봐도 별 무리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의 의미는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가 지금 처소를 예비하러 가지 않느냐 예비하면 다시 오마.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믿냐 나를 믿으라. 그러면 너희 마음에 근심이 떠날 것이다." 천국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신 후에는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므로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이야기 사실 저는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조금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답답한 일을 만나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저 세상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장 눈앞에 떨어져 있는 불을 꺼야 되는 판국에 저 세상 이야기가 무슨 감동이 되었겠습니까 저 세상 이야기를 듣고 근심이 사라진다는 것이 도대체 가능했겠느냐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60이나 70세쯤 된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지도 모릅니다. 살만큼 산 사람들이니 '이제 천국이 내 앞에 가까웠구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제자들은 기껏해야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천국 이야기가 무슨 감동이나 위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은 주님은 근심하지 말라는 첫 권면으로 저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실직을 당해서 한 1년은 그 동안 모아 두었던 것을 가지고 그럭저럭 버티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살까'하는 생각만 하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가장이 있다고 합시다. 그에게 "아이고, 뭐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천국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근심하지 마세요."라고 말한다면, 그 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요 우리가 보기에 현실 문제를 내세 문제와 연관시키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현실 문제는 현실 문제로 해결해야 된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기독교는 현실의 고통을 잊도록 하기 위해서 천국이라는 환각제를 주사하는 도피주의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근심에 떠는 제자들에게 저 세상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봅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서는 들을 수 있는 이야기 가운데 천국 이야기만큼 좋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 이야기만큼 우리를 흥분시키고,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근심을 싹 잊어버리게 만들만한 이야기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그와 같은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문제지, 사실은 천국 이야기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우리의 구원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구원받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구원받기를 원합니다."하고 말할 때 우리는 천국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나는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집은 우리가 들어갈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우리가 세상에서 가슴에 안고 씨름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답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세상에서 입고 있는 손해라든가, 원통함이라든가, 분한 것이라든가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완전하고 충족한 보상입니다. 그 나라에 가면 우리의 마음에 있는 응어리들이 다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엄청난 것으로 보상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바라고 꿈꾸는 모든 행복의 최고급 행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에 가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던 모든 고통의 원인이 완전히 제거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을 보면 천국에는 다시는 사망이 없고 죽음이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천국을 생각하면 기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정상이 아니라고 봅니다. 다시는 죽음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왜 기뻐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자가 죽어서 가슴을 치고 울어 본 일이 있습니까 밤잠을 설쳐 가며 통증을 가지고 씨름해 본 일이 있습니까 팔자 좋게 70, 80년을 살아도 한번 아파 본 일이 없는 분들이 계시다면 참 행복하고 복이 많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슬픔이나 고통을 맛본 분이라면 천국에 죽음이나 고통이 다시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잘 알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를 괴롭게 하는 모든 원인이 완전히 제거 된 곳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면 우리의 영광이 극치를 이룹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찬란한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천상의 영광을 덧입게 된 우리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 때는 키가 작다고 고민할 필요도 없고, 못 생겼다고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잘났다고 거드름 피울 것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흠과 티가 전혀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천국 이야기보다 더 좋은 이야기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더욱이 천국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면서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오늘도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그 주님을 이제는 영원토록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천국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황금으로 만든 집이나 열두 진주 문, 생명 나무 과실과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천국을 천국으로 못 느낄 것입니다. 천국은 물건으로 만족하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니 크로스비는 이런 찬송을 했습니다.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 밝고 밝은 그 아침을 당할 때/ 요단강을 건너가서 주의 손을 붙잡고/ 기쁨으로 주의 얼굴 뵈오리/ 나의 주를 나의 주를/ 내가 그의 곁에 서서 뵈오며/ 나의 주를 나의 주를/ 손에 못자국을 보아 알겠네." 예수님이 계시는 그 곳이 천국이라고 하면, 천국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기쁘고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은 우리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버지 집이면 그의 자녀 된 우리는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성령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아버지 집은 곧 내 집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천국 이야기만큼 중요한 것이 없고, 신나는 것이 없습니다. '먹고살기 바쁜 세상인데 무슨 천국 이야기냐'하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아직 천국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면 천국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마음이 그리로 달려갈 것입니다. 길을 잃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누군가 다가가서 "얘야, 울지마. 내가 너희 집에 데려다 줄게."하고 말하면 금새 울음소리가 그칩니다. 아직 집에 간 것도 아닌데 그 아이의 마음은 벌써 집에 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안아주고 엄마가 안아주고 뽀뽀해 주는 것을 그는 연상합니다. 침대가 놓여 있고 조용한 방에 인형이 여기저기 걸려 있고 그림이 걸려 있는 아늑한 자기 방을 벌써 마음으로 그리워합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의 심정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근심으로 짓눌리고 어떤 때는 두려움이 엄습해서 안절부절 할 때라도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영의 눈을 열어 그 나라를 바라보면 벌써 우리 마음이 그리로 달려갑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를 마음에 두고 묵상하는 자는 누구든지 울음을 그칠 수 있고 근심을 털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두려움과 맞서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아직 세상에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말만 하나님 나라를 떠들지 실상은 땅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자의 눈에는 현실 문제가 작아 보입니다. 마음을 천국에 두고 있는 자에게는 근심이 힘을 잃어버립니다. 로마서 8장 18절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현재의 고난이란 우리가 안고 씨름하는 근심을 말합니다. 실직이나 배고픔, 육신의 아픔, 이별의 슬픔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게되는 수많은 고통을 말합니다. 우리 중에서 이 악하고 험한 세상에서 이와 같은 현재의 고난을 완전히 회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누구나 역경과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광을 내다보는 사람에게는 현재의 고난이나 마음을 짓누르는 근심이 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짐이 무거워도 내가 돌아갈 집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그 짐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쉴 집으로 가는 동안 잠깐 당하는 고통이라고 생각하면 그 고통을 짊어질 수 있는 힘이 훨씬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동안을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마침내 70년이 차서 본토로 귀환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번 그려보십시오. 부모세대는 다 세상을 떠났고 이제는 그 자손들이 본토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몇 달을 여행해서 가야하는 길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벌써 고향 땅에 가 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면 내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흥분에 젖어 있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향 땅을 향해 감격의 발걸음을 내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꿈꾸는 자로 묘사했습니다.
시편 126편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의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이 세상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마음도 꿈꾸는 자 같았다면 짧은 한 세상을 살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황홀감에 젖어들겠습니까 꿈꾸는 자에게는 세상 근심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천국을 바라보고 꿈꾸는 자의 마음에는 고통이 힘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 한 가지소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건강해서 오래 살기를 소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는 일마다 형통해서 우리가 세상에서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많이 쌓아 놓고 마음껏 누리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남의 나라요, 남의 땅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거할 집이 아닙니다. 남의 집에서 행복하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오래 산다고 그게 얼마나 대단한 복이 되겠습니까 주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남의 집입니다. 으리으리한 큰집에 놀다가 "얘야, 집에 돌아가자."는 부모의 말에 "나는 여기가 좋아요. 안 갈래."하고 떼를 쓰는 철없는 어린아이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부모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못난 자식아, 멍청한 자식아, 남의 집에서 행복하면 얼마나 행복하겠다고, 안가겠다고 그러냐"하고 야단을 칩니다. 우리 주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여기서 '내게 주신 자'는 일차적으로는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좀더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 역시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품고 계신 간절한 소원은 우리를 예수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와 함께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누리는 그 영광을 우리가 보고 찬송하고 즐거워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에게 최고의 만족을 줄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근심이 가벼워 져야 합니다. 천국만 생각하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천국을 이야기 할 때면 연인이 자기의 사랑을 이야기하듯이 시간 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푹 빠질 수 있는 그런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겉으로는 천국 간다 하면서 속은 완전히 세상에 몰입해서는 천국 이야기만 하면 자기와 상관없는 딴 세상 이야기처럼 시큰둥하게 받아들이는 그런 믿음 가지고 세상을 살 바에는 차라리 신앙생활을 그만 두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천국의 유일한 권위자
둘째로는, 예수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천국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2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주님은 땅에서 난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입니다. 천국에 계시다가 이 땅에 오셨기에 천국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요, 천국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유일한 진리요, 천국에서 살게 하는 유일한 생명입니다. 예수님 말고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구원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이와 같은 절대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까 본문 9절 이하를 보십시오.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소서."하고 말하자 주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왜 나 보고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네가 이렇게 오래 나와 같이 있었는데 하나님을 아직도 못 보았다고 하니 무슨 소리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이미 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면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보았으면 하나님을 본 것이다.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말라. 만약 그 사실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 내가 지금까지 무슨 일을 했느냐 죽은 자를 살렸노라. 내가 무슨 일을 했느냐 떡 다섯 덩이로 오 천 명을 먹였노라. 내가 무슨 일을 했느냐 문둥이를 고쳤노라. 바다를 잔잔케 했노라.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지 않느냐 나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믿어지지 않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라도 믿으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그분만이 천국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시면서 자신 있게 제자들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천국에 가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을 이야기할 만한 자격자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부터 한 250년 전에 스웨덴 복이라고 하는 사람 있었습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천국과 지옥>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천사와 마주 앉아서 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천국이 어떤 곳인지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천국은 물질 세계에서 우리가 느끼던 감각적 즐거움이 그대로 계속 되는 곳이다. 남녀가 세상에서 사랑을 하는 것은 천국에서도 남녀가 사랑할 수 있고, 천국에 가서도 가족들은 여전히 식구가 되어서 서로 의지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천국은 영적인 곳이라기보다는 물질적인 요소도 굉장히 많은 곳이다." 좋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우리는 그의 말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천국 이야기를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유명한 사람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분은 요한복음 14장 6절을 이렇게 은혜스러운 말로 풀어서 표현했습니다. "나를 따르라 나는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니라 길이 없이 가는 것이 없고, 진리가 없이 아는 것이 없고, 생명이 없이 사는 것이 없느니라 나는 너희가 반드시 따라야 할 길이다 반드시 믿어야 할 진리다 반드시 소망해야 할 생명이다 나는 신성한 길이다 나는 무오한 진리다 나는 다함이 없는 생명이다 나는 가장 빠른 길이요, 주권적 진리요, 참 생명, 복된 생명, 창조되지 아니한 생명이니라."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을 간다는 사실도 아직도 의심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종교들은 저마다 "이리 가면 천국에 들어간다. 저리 가면 하늘나라로 간다."하고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합니다. 그러나 그 종교들의 창시자들 가운데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모든 길이 가는 곳은 똑같다." 불교 믿는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는 정말 포용력이 있는 종교야. 기독교는 너무 독선적이다." 왜 독선이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자기로 말미암지 않고는, 자기를 안 믿으면 천국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독선적인 말씀을 하십니까 자신만이 권위자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들이 저마다 다른 소리를 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만큼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어느 종교나 믿어도 된다는 말이 매력적으로 들린다면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값없이 오직 은혜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니 우리가 천국을 생각하면 절로 힘이 솟아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연소득 25만불 이상 되는 사람은 전체 국민의 1 퍼센트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연 25만 불이면 한 달에 2만 불 이상 버는 셈이므로 상당한 고소득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대상으로 앙케트 조사를 한 일이 있나 봅니다. 그 내용이 퍽 재미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천국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를 투자 할 수 있습니까"하는 질문에 최고액을 써낸 사람이 64만 불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기록을 보면서 가소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 웃기고들 있네. 64만 불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못 들어갈 사람 몇이나 되겠냐' 얼마나 멍청한 대답입니까 천국은 돈 가지고 들어가는 곳이 아닌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라는 사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천국은 은혜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곳이다. 만일 천국이 무슨 값을 따지고 들어가는 곳이라면, 그곳에 들어갈 자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강아지일 것이다." 무슨 소리인지 얼른 와 닿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 놓고 사는 사람이라도 일단 천국에 들어가려면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죽고 나면 한 푼도 못 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64만 불이 아니라 64센트도 못 들고 갑니다.
그러므로 죽은 시체를 놓고 따지면 사람보다는 강아지가 더 값이 나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돈으로 따진다면 강아지가 들어가야 마땅하다.는 말은 백번 옳다고 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천국 가는 길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외치는 수많은 종교들에 빠지지 않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났습니다. 언젠가 저는 TV에서 캐나다에 이민을 가고 싶어서 안달하다가 사기꾼에게 걸려서 재산을 다 날리고 캐나다에서 추방당한 사람들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 아닙니까 만일 여러분이 천국에 가게 해주겠다는 종교들에 속아 그와 같은 꼴이 되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오늘날 잘못된 종교와 잘못된 진리에 현혹되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해 천국을 놓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감사하게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천국 들어갈 수 있는 팔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비록 마음에 근심이 있어도 근심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뜨겁게 헌신합니다. 절대 미지근할 수 없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이런 재미있는 내용이 하나 나옵니다. 단테가 안내자의 인도를 받아서 천국도 구경하고 지옥도 구경하는 가상적인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안내자를 따라서 어느 곳을 갔더니 죽을상을 하고서 초조하게 서성거리는 일단의 사람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서 거절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동시에 지옥에서도 거절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만큼 성인도 못되고 지옥에 처넣을 만큼 악인도 못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 안내인이 단테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도 좋아하시지 않고, 사탄도 좋아하지 아니하는 영원히 버려진 인간들입니다. 만나 볼 가치도 없으니까 그냥 지나갑시다." 지어낸 이야기이긴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제대로 살려면 하나님이 덥석 안고 자기 나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뜨겁게 신앙생활 하든지, 아니면 지옥에 있는 사탄이 반길 만큼 그저 그렇게 살든지 고 가든지 해야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사람이 되어 가지고 살다가는 천국에서도 퇴짜맞고 지옥에 가서도 퇴짜맞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동안 마음이 하늘에도 가 있고, 땅에도 가 있으면, 천국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도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오만가지 걱정 다 끌어안고 불안과 두려움에 떨다가 끝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미지근하게 신앙생활 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근심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 이야기만큼 좋은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천국 이야기를 하실 수 있는 유일한 권위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입술에서 천국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의 마음은 아버지 집으로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그의 말씀을 담고 있으면 하늘의 영광이 우리 가슴을 가득 채우기 때문에 근심이 있어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영광 앞에 근심은 작아 보이고,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어느 쪽에 있습니까 천국을 생각하면 울다가도 웃을 만큼, 잠을 못 이루며 근심하다가도 벌떡 일어나 춤을 출 수 있을 만큼 가슴이 뜨거워집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천국 이야기를 해도 현실의 문제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문제가 있습니다. 70년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꿈꾸는 것처럼 천국을 바라보고 삽시다. 머리를 하늘을 향해 듭시다. 우리는 이 세상 끝 날까지 근심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근심과 고통을 이기며 살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영광을 소망하면서 살 때 이 세상의 고통이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은 것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그 나라를 소망하며 이 세상에서 근심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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