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을 덜려면 기도하라 (요1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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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여 년 동안 교회에 나와도 기도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마음 고생을 하는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기도할 장소를 찾지 못해 마당 이 곳, 저 곳을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창문으로 내다보면서 제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수양관을 지으면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사랑의교회 성도들이 와서 마음대로 기도할 수 있는 기도 전용실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여러분이 비디오를 통해 보셨지만, 누구든지 우리 교회 성도면 와서 하루 종일 아니면 밤새도록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옆방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가능한 들리지 않도록 배려한다고 했는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지는 모르겠습니다. 감사하게도 오래 전부터 우리 교회 안에는 기도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중보기도실에서는 중보기도단이 매일매일 시간을 맞추어서 함께 모여 교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예배 드리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중보기도단이 예배 실황을 비디오로 보면서 설교자를 위해, 또 예배를 위해, 여러분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학부, 청년부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이면 의례 뜨거운 기도 소리로 진동하는 것을 저는 자주 목격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안에 기도에 열심을 내는 뜨거운 분위기를 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어느 학자의 지적처럼 지금 우리는 사상 최악의 무신론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하나님을 등지고 멀리 떠나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눈으로 분명히 목도합니다. 사람들은 점점 마귀처럼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악한 시대에 우리 모두가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였던 열두 명의 제자들처럼 기도하는 일에 전혀 힘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사도들처럼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은 시대적인 요청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는 지난 5주간 동안 사랑의교회가 지난 20년 간 하나님이 주신 소명대로 특별히 힘을 쏟아온 사역들을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 드리고 또 하나님 앞에 영광을 드리는 페스티발을 가졌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페스티발로 내년부터 우리가 시작해야 될 두 가지 중요한 사역을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고 또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주말 교회 프로그램과 영성 훈련 프로그램 사역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페스티발을 하는 마당에 말씀을 통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며 기도할 때 어떠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은혜를 받는 것은 매우 시의 적절한 일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근심이 많은 인생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기 바로 몇 시간 전에 제자들을 앉혀 놓고 마지막으로 권면하신 말씀과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떠나시면서 주님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긴 말씀을 하셨을까요
요한복음 14장 1절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것이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모든 내용의 목적이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3년 동안 미친 사람들처럼 예수님만 따라 다녔습니다. 가정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어떻게 보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해방자요, 예수님만이 인류의 구원자다. 지금까지 기다린 메시아다. 이분이 바로 그분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예수님 말고는 눈에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던 사람들이 제자들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눈앞에 벌어진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믿었던 예수가 지금 처형당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풍전등화와 같습니다. 선생이 그렇게 민족 반역자로 몰려서 처형을 당하면 그 선생을 따르던 제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들의 생명을 보장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가히 살인적이라고 할 만한 근심에 눌려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떨치고 나갈 수 없는 근심으로 인해 고문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이와 같은 상황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제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자기 갈 길을 갈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이나마 제자들을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있는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 만들기 위해서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첫 마디에 예수님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 모든 말씀을 통해 제자들의 근심을 덜어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4장 27절과 16장 6절, 20절로 23절 말씀을 통해서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내 말을 듣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말고 근심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근심을 덜어 주고 그들의 믿음을 단단히 붙들어 주기 위해서 여덟 가지 실제적인 권면을 주십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도입니다. 근심을 덜고 싶으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기 원한다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근심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근심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는 두렵고 불안한 마음'으로 정의했습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은 반쪽 의미밖에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내일의 문제를 놓고 염려하는 것도 근심이지만, 이미 눈앞에 터진 일을 가지고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것도 근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앞의 일만 놓고 근심하지 않습니다.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일을 놓고도 근심을 합니다. 이런 점에서 근심에서 면제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낮에는 너무 바빠서 근심할 틈이 없고 저녁에는 너무 피곤해서 근심할 틈이 없는 사람이다." 아주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도 사실은 허점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아무리 바빠도 근심을 잊어버리는 법이 없고, 아무리 피곤하여 잠이 쏟아져도 꿈속에서 마저 근심 때문에 악몽을 꾸기 때문입니다.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인생이 어찌할 없는 팔자입니다.
며칠 전에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10층에서 탔는데 마침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약간 이상한 기질이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혼자 타면 왜 그렇게 좋은 지 모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쉴 수 있을 것 같고, 저 자신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인 것 같아서 좋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분도 금방 끝나고 말았습니다. 엘리베이터가 바로 아래층에 멈추어 서더니 어떤 아주머니 타는 것이었습니다. 이사 온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아서 저하고 안면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인상도 그렇게 곱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부인이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이라는 것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둘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옵니다. 생소한 남자와 생소한 여자가 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것은 현대 문명이 주는 고약한 스트레스입니다. 불과 30초밖에 안 되는 시간임에도 제게는 3분이나 되는 것 같이 길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좋은인상을 주어서 다음에 언젠가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어떤 식으로든 말을 건넵니다. 엘리베이터가 3층쯤 내려왔을 때 제가 그 부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요즘 살기가 괜찮으세요" 그랬더니 그 부인은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이었습니다. "아니에요. 새로운 근심이 또 생겼어요." 그리고는 문이 열리자마자 허둥지둥 뛰어 나가 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그래, 저게 인생이다. 넓은 아파트에 살고, 겉모습은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서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묵은 근심을 가지고 고생하다가 조금 살만해지니까 또 다른 새로운 근심이 들어오고 하는 게 인간이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아마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느낌이 아닌가 합니다. 근심을 될 때 기도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네 번 이상 근심을 덜고 싶으면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14장 13절, 14절과 15장에, 16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나중에 우리가 하나 하나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기도하면 정말 근심이 날라 가는가" 제자들의 형편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쉽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고 해서 당장 근심이 날라 갈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있으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입니다. 그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서 마음놓고 걸어 다닐 수 없게 될 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밤은 점점 더 깊어만 갑니다. 그 시간에 무릎 꿇고 기도한다고 해서 금방 근심이 날라 가겠습니까 우리의 경험을 놓고 보아도 우리가 무슨 근심거리를 안고 고민할 때 기도한다고 해서 금방 근심이 없어져 버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기도가 아스피린이라는 약과 같지 않나 하고 생각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두통이 날 때면 우리는 아스피린이라는 약을 먹습니다. 아스피린 한 알을 먹으면 서너 시간 정도는 머리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금 머리가 지긋지긋 아프기 시작하면 또한 알을 먹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불안하고 근심이 쌓이는 것 같으면 우리는 기도를 합니다. 기도하는 그 순간에는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나면 또다시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마루 밑에 숨어 있던 개가 손님이 방문을 열고 나오면 갑자기 짖으면서 튀어나오듯 근심이 우리에게 확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일시적인 진통효과를 가져다주는 아스피린과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만약 기도가 그런 효과를 주는 데서 끝났다면 기도는 벌써 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이미 폐물 처리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도가 아스피린 같은 것이라면 처음에는 속아서 몇 번 해보겠지만 계속 해 봐야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면 누가 기도하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세상이 악하고 더러울수록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오히려 더욱 새로워졌습니다. 기도에 아스피린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 이상의 효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근심하는 사람에게 효력이 있기 때문에 기도해 본 성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근심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들어주십니다. 성경을 보아도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아요" 기독교 역사로 보나, 우리의 경험으로 보나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 기도가 이처럼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근심이 몰려 올 때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교훈은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입증을 했습니다. 제 경험을 통해서도 저는 주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걱정거리가 생기면 얼마 동안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진짜 정신없는 일을 한번 당해 보세요. 한동안 정신이 없습니다. 그럴 때는 기도도 잘 안됩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 눈을 감기는 감아도 기도가 안됩니다. 김진경 박사는 북한에서 한 40일 억류되어 있을 동안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기도가 안 나오더랍니다. 내일 생명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판에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기도문만 수백 번 계속 외웠다고 합니다. 그는 주기도문의 능력이 그렇게 대단한 줄 미처 몰랐다고 간증했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궁지에 몰리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그러다가도 예수 믿는 사람은 견디다 못해서 마침내 기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골방을 찾게 됩니다. 기도를 하는 동안은 마음이 조금 편안해 집니다. 이내 근심이 밀려와서 불안해지면 또 기도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불안하면 또 기도하고, 낮에 시간이 나면 교회에 와서 기도합니다. 이렇게 자꾸 기도하다 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정말이었구나.'하고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신비한 세계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약간 비약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염려가 되면 모든 간구와 기도로 하나님께 구하라는 말입니다. 염려하지 않다고 기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염려하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약속의 말씀을 따라 기도하기를 힘쓰면 정말 희한한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천국의 평안을 안겨 주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한 다음에 눈을 뜨면 근심거리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염려가 됩니다.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논한다면 나는 여전히 걱정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심하고 있는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평안이라고 하는 햇살이 비쳐 듭니다. 하나님께서 근심이 더 이상 나를 흔들어 놓지 못하도록 그 손으로 내 마음을 굳게 붙들어 주시는 것을 느낍니다. 그 손에 붙들려 기도하다 보면 문제가 하나 하나 해결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도는 금방 울던 사람을 금방 웃게 만드는 무슨 요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근심을 무조건 없애주는 무슨 묘약도 아닙니다. 기도는 근심을 이길 수 있는 신비스러운 저항력을 길러 줍니다. 마음에 평안이 밀려들 때도 근심은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오는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가 그 근심에 짓눌리지 않게 만드는 저항력이 됩니다. 우리는 이 저항력 때문에 근심 가운데서도 계속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태산처럼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그 무시무시하던 문제가 희한한 방법으로 하나하나 해결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근심을 덜고 싶으면 기도하라." 이것은 진리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라 그러면 왜 기도가 이와 같은 엄청난 효과를 우리에게 가져다줄까요 이에 예수님은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는 근심을 이길 수 있는 저항력을 키워주고 나중에는 그 모든 근심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3-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또 15장 16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6장 23-24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 모든 구절이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름이라는 말은 한자로 '명'(名)인데, 저녁 석(夕)자 밑에 입 구(口)자가 붙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글자를 놓고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서(夕) 사람들의 얼굴을 잘 분별하지 못할 때 입으로(口) 소리를 내서 사람을 찾는데 필요한 것이 이름이다." 그럴 듯한 설명이라고 봅니다. 이름은 더 나아가 그것의 주체가 되는 사람의 인격을 의미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세상의 구주이신 그분을 가리킵니다. 그만큼 주님의 이름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시요, 우리는 그의 피조물입니다. 만드신 자와 만들어진 자, 이 두 존재 사이에는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자를 만난다든지 창조자를 찾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는 죄 가운데서 날마다 죄만 짓고 사는 죄인들입니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아무리 헤매어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어느 길로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멀고 먼 관계를 해소하고 서로 교제할 수 있는 부드러운 관계로 만드시고자 중간에 채널을 하나 마련하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갈 수 있는 유일한 채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이름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조건 소리친다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 믿는 사람들처럼 불상 앞에서 천 번을 절한다고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기도는 예수의 이름이붙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중보자이심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예수님이 나의 중보자가 되시어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나의 기도가 어떤 기도이든 간에 내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 되도록 해 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는 줄 믿습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예수라는 이름을 제일 기뻐하십니다. 예수 이름이 붙인 기도는 거절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이름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그 이름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도행전 4장 12절을 보십시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예수의 이름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지, 거짓 선지자들도 이 이름을 가지고 능력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엉터리로 믿는 거짓 선지자들도 예수 이름만 가지고 있으면 희한한 일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중에 심판대 앞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모른다 하십니까" 예수의 이름이 얼마나 대단한 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가 이러한 대단한 이름을 들고 나가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안 들어주시겠습니까 아마 여러분이 많이 들으신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미국이 한참 남북 전쟁에 휘말려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조그마한 농촌에 있는 청년이 징집을 받아서 전선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너무 고통을 견디기가 힘들고 두려워서 그는 탈영을 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잃는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삶의 의욕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아들을 살릴 수 있을까'하고 고민 고민하던 그에게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대통령을 만나서 마지막으로 한번 탄원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링컨 대통령을 만나러 백악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경비들이 이 시골 남자를 들여보내 줄 리 만무했습니다.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그는 길가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한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비탄에 빠져있는 그를 측은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던 소년 하나가 다가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왜 그러세요" 그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소년은 느닷없이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다가 자꾸 재촉하는 바람에 그 소년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그를 수위실로 데리고 가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제가 데리고 들어가는 사람이에요." 그랬더니 모든 수위들이 아무 소리 않고 그를 통과시켜 주었습니다. 그 소년은 그를 대통령이 집무하는 집무실로 데리고 가더니 링컨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내가 데리고 온 사람이에요.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너무 가슴 아파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그 소년이 대통령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대통령이든 누구든 간에 아들은 언제든지 그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 부르면 우리 자신이 마치 예수가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나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절대 가만히 계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라
둘째는,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도는 근심을 없앨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읽은 요한복음 14장 13-14절, 15장 7절,16절, 16장23절을 보면 주님은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티안'(tian)인데, 이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가려서 듣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무슨 기도든지 하나님께서 가리지 않고 다 들이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몰라서 잘못 구하는 기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알고 그 마음에 쏙 드는 완벽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누구든지 "나는 하나님의 뜻에 100 퍼센트 일치하는 기도만 해."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병원으로 가야될 사람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이나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그런 완벽한 기도를 드리지는 못합니다. 로마서 8장 2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우리 기도를 도와주셔야 됩니다. 염려에 막 짓눌려 보십시오. 그 기도가 무슨 조리가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중소기업 사장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 위해서 서류를 들고 가다가 돌아서서 도장은 빠진 데가 없는지, 이름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보고 또 보듯 신경을 곤두세워서 기도하라고 하셨다면 우리 중에 기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이 기도를 과연 들어 주실까 안 들어 주실까'하는 것이 도리어 염려가 되면 혹 떼려다가 혹 붙이는 격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감사하게도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가리지 않고 다 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한번 여러분 자신의 기도목록을 만들어 보십시오. 큰일부터 사소한 일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는 내 마음의 감정에서부터 시작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큰 일까지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다양합니까 우리에게 이 모든 기도를 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제롬 스미스라고 하는 분이 신구약 성경 안에 들어 있는 기도 목록을 정리해 놓은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등장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를 목록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제가 세어 보니까 328가지나 되더라구요. 그 가운데는 날 죽여달라는 기도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한번 보게 해 달라는 기도까지 별의별 기도가 다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안에 이렇게 다양한 기도 제목을 늘어놓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어주시겠다는 실제적인 증거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자가 어떻게 근심 때문에 희생을 당하겠습니까 심지어는 자기를 죽여달라는 기도도 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는데 무엇 때문에 근심에 짓눌려서 병들고 절망하는 인생을 살겠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것이 문제지, 완벽하게 구하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됩니다. 응답이 약속된 기도
셋째는, 기도하면 반드시 받을 것이기 때문에 기도는 근심을 없앨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을 보십시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니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앞부분은 약간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던 3년 동안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신 그분을 직접 모시고 자고, 먹고 매일 다니는데 무엇 때문에 엎드려서 기도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제자들은 기도 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 나라로 올라가시고 나면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과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반드시 응답 받을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기도해서 응답을 받고 기쁨이 넘치게 되면 근심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집니다. 응답은 근심을 삽시간에 날려 버립니다. 금방 받는 응답이든 오랜 기다림 후에 받는 응답이든 간에 응답이 임하면 우리 가슴에 기쁨의 샘이 솟구치고 그 기쁨의 샘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근심을 싹 쓸어 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기도해서 이러한 기쁨을 체험하기만 하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7일부터 일주일 동안 교회 중보기도단, 수양관 중보기도단, 주일날 예배를 위해 특별히 중보 기도하는 중보기도단에 참가한 인원은총 478명입니다. 중보기도단에서 제목을 내 놓고 같이 중보 기도함으로써 응답 받은 내용들을 담당 교역자가 갖다 주어서 본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멋지게 응답을 해주시는지요. 그 기도 내용을 보면 정말 '무엇이든지'입니다. 가지각색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18년 동안 남편이 교회를 피해 다니면서 안 믿고, 최근에 들어와서는 부부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터져서 더 이상 인간의 힘으로는 그 문제 해결할 길이 없어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중보기도단에 내어놓고 기도를 부탁했는데, 기도하는 그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남편이 자기 발로 우리 교회 상담목사를 찾아가서 상담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끝난 것 아닙니까 또 어떤 집사님은 자기 집에 값비싼 예술품이 있는데 요사이 경기가 안 좋으니 팔고 싶어도 안 팔려 고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것 팔아서 특별 헌금도 하고 싶은데요 팔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하다가 잘 안되니까 중보기도단에 그 제목을 내놓았나 봅니다.
그런데 중보기도단에서 그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 물건이 팔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참 희한한 일이 아닙니까 어떤 분은 치매로 고생하는 친정 어머니가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는데 찾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단에 기도를 부탁했는데 그 제목을 두고 기도하는 동안 산에서 어머니를 찾았다고 합니다. 금강산인지 북한산인지 모르지만 산에서 치매 걸린 할머니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하니까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집이 회사담보물로 잡혀서 날라 갈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중보기도단에서 열심히 기도했더니 그것도 좋은 방향으로 해결 됐다고 고백하는 가정도 있었습니다. 전세문제를 가지고 돈을 받지 못해서 어떻게 하나 고민하는데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다고 고백하는 가정도 있었습니다. 자동차 사고를 냈는데 그만 뺑소니차로 고발이 되어서 참 난처한 처지가 됐다고 기도를 부탁했는데, 그것도 하나님께서 기가 막히게 해결해 주셨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뺑소니차가 된 데서부터 시작해서 남편 문제까지 얼마나 가지각색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느 기도도 가리지 않고 때를 따라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면 가슴이 불이 붙게 마련입니다.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근심이 더 이상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 기도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너, 왜 그렇게 공을 좋아하냐"하고 묻는다면 멍청한 질문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진 남녀가 열심히 사랑을 하는데 "너희는 왜 그렇게 사랑 하냐"하고 묻는 것은 멍청한 일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이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반드시 응답해 줄 것이다. 너희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여 모든 근심을 싹 쓸어버릴 것이다."라고 주님이 약속해주셨는데, 그 약속 받고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기도를 매우 부자연스럽게 여기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기도하려고 눈만 감으면 오만 가지가 눈앞에 다 나옵니다. 친구하고 수다 떠는 것은 1시간도 짧게 여기면서 기도하라고 하면 5분을 못 견딥니다. 기도하는 것을 너무 불편해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아직 믿음이 어려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영적으로 잘못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들에게 부탁합니다. 기도가 자연스러워지도록 노력하십시오. 근심이 있을수록 기도는 자연스러워야 됩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내 근심을 해결해 준다는데 왜 내가 근심을 끌어안고 걱정을 합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다 책임져 준다는데 자녀가 방에 앉아서 금식을 하면서 입학금 걱정을 한다고 상상을 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정신 나간 짓입니까 비록 집안이 어렵고 힘들어도 아버지가 책임지고 학교를 보내주신다고 하면 그것을 걱정 끝입니다. 정상적인 아이라면 아버지의 약속을 듣고도 방문을 걸어 잠그고 금식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하신 분입니다. 능력이 너무 많아서 못할 일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예수의 이름만 가지고 나오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근심을 끌어안고는 청승맞게 앉아서 얼굴을 찌푸리고 삽니까 왜 기도하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하시되 기도가 밥을 먹듯이, 잠을 자듯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처음에는 아스피린 먹는 것처럼 기도를 해도 여전히 염려가 남아 있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악순환이 계속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을 붙들고 계속 기도하면 나중에는 희한한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계를 체험해야 신앙의 진수를 알게 됩니다. 내년에 경제위기가 어느 정도 해결 될 지 모르지만 한번 밑바닥을 치는 위기는 올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닥쳐올 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아무 염려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예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요한복음 14장 1절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것이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모든 내용의 목적이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3년 동안 미친 사람들처럼 예수님만 따라 다녔습니다. 가정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어떻게 보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해방자요, 예수님만이 인류의 구원자다. 지금까지 기다린 메시아다. 이분이 바로 그분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예수님 말고는 눈에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던 사람들이 제자들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눈앞에 벌어진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믿었던 예수가 지금 처형당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풍전등화와 같습니다. 선생이 그렇게 민족 반역자로 몰려서 처형을 당하면 그 선생을 따르던 제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들의 생명을 보장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가히 살인적이라고 할 만한 근심에 눌려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떨치고 나갈 수 없는 근심으로 인해 고문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이와 같은 상황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제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자기 갈 길을 갈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이나마 제자들을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있는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 만들기 위해서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첫 마디에 예수님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 모든 말씀을 통해 제자들의 근심을 덜어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4장 27절과 16장 6절, 20절로 23절 말씀을 통해서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내 말을 듣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말고 근심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근심을 덜어 주고 그들의 믿음을 단단히 붙들어 주기 위해서 여덟 가지 실제적인 권면을 주십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도입니다. 근심을 덜고 싶으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기 원한다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근심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근심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는 두렵고 불안한 마음'으로 정의했습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은 반쪽 의미밖에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내일의 문제를 놓고 염려하는 것도 근심이지만, 이미 눈앞에 터진 일을 가지고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것도 근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앞의 일만 놓고 근심하지 않습니다.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일을 놓고도 근심을 합니다. 이런 점에서 근심에서 면제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낮에는 너무 바빠서 근심할 틈이 없고 저녁에는 너무 피곤해서 근심할 틈이 없는 사람이다." 아주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도 사실은 허점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아무리 바빠도 근심을 잊어버리는 법이 없고, 아무리 피곤하여 잠이 쏟아져도 꿈속에서 마저 근심 때문에 악몽을 꾸기 때문입니다.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인생이 어찌할 없는 팔자입니다.
며칠 전에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10층에서 탔는데 마침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약간 이상한 기질이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혼자 타면 왜 그렇게 좋은 지 모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쉴 수 있을 것 같고, 저 자신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인 것 같아서 좋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분도 금방 끝나고 말았습니다. 엘리베이터가 바로 아래층에 멈추어 서더니 어떤 아주머니 타는 것이었습니다. 이사 온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아서 저하고 안면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인상도 그렇게 곱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부인이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이라는 것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둘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옵니다. 생소한 남자와 생소한 여자가 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것은 현대 문명이 주는 고약한 스트레스입니다. 불과 30초밖에 안 되는 시간임에도 제게는 3분이나 되는 것 같이 길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좋은인상을 주어서 다음에 언젠가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어떤 식으로든 말을 건넵니다. 엘리베이터가 3층쯤 내려왔을 때 제가 그 부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요즘 살기가 괜찮으세요" 그랬더니 그 부인은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이었습니다. "아니에요. 새로운 근심이 또 생겼어요." 그리고는 문이 열리자마자 허둥지둥 뛰어 나가 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그래, 저게 인생이다. 넓은 아파트에 살고, 겉모습은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서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묵은 근심을 가지고 고생하다가 조금 살만해지니까 또 다른 새로운 근심이 들어오고 하는 게 인간이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아마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느낌이 아닌가 합니다. 근심을 될 때 기도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네 번 이상 근심을 덜고 싶으면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14장 13절, 14절과 15장에, 16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나중에 우리가 하나 하나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기도하면 정말 근심이 날라 가는가" 제자들의 형편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쉽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고 해서 당장 근심이 날라 갈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있으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입니다. 그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서 마음놓고 걸어 다닐 수 없게 될 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밤은 점점 더 깊어만 갑니다. 그 시간에 무릎 꿇고 기도한다고 해서 금방 근심이 날라 가겠습니까 우리의 경험을 놓고 보아도 우리가 무슨 근심거리를 안고 고민할 때 기도한다고 해서 금방 근심이 없어져 버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기도가 아스피린이라는 약과 같지 않나 하고 생각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두통이 날 때면 우리는 아스피린이라는 약을 먹습니다. 아스피린 한 알을 먹으면 서너 시간 정도는 머리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금 머리가 지긋지긋 아프기 시작하면 또한 알을 먹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불안하고 근심이 쌓이는 것 같으면 우리는 기도를 합니다. 기도하는 그 순간에는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나면 또다시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마루 밑에 숨어 있던 개가 손님이 방문을 열고 나오면 갑자기 짖으면서 튀어나오듯 근심이 우리에게 확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일시적인 진통효과를 가져다주는 아스피린과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만약 기도가 그런 효과를 주는 데서 끝났다면 기도는 벌써 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이미 폐물 처리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도가 아스피린 같은 것이라면 처음에는 속아서 몇 번 해보겠지만 계속 해 봐야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면 누가 기도하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세상이 악하고 더러울수록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오히려 더욱 새로워졌습니다. 기도에 아스피린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 이상의 효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근심하는 사람에게 효력이 있기 때문에 기도해 본 성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근심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들어주십니다. 성경을 보아도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아요" 기독교 역사로 보나, 우리의 경험으로 보나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 기도가 이처럼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근심이 몰려 올 때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교훈은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입증을 했습니다. 제 경험을 통해서도 저는 주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걱정거리가 생기면 얼마 동안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진짜 정신없는 일을 한번 당해 보세요. 한동안 정신이 없습니다. 그럴 때는 기도도 잘 안됩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 눈을 감기는 감아도 기도가 안됩니다. 김진경 박사는 북한에서 한 40일 억류되어 있을 동안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기도가 안 나오더랍니다. 내일 생명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판에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기도문만 수백 번 계속 외웠다고 합니다. 그는 주기도문의 능력이 그렇게 대단한 줄 미처 몰랐다고 간증했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궁지에 몰리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그러다가도 예수 믿는 사람은 견디다 못해서 마침내 기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골방을 찾게 됩니다. 기도를 하는 동안은 마음이 조금 편안해 집니다. 이내 근심이 밀려와서 불안해지면 또 기도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불안하면 또 기도하고, 낮에 시간이 나면 교회에 와서 기도합니다. 이렇게 자꾸 기도하다 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정말이었구나.'하고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신비한 세계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약간 비약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염려가 되면 모든 간구와 기도로 하나님께 구하라는 말입니다. 염려하지 않다고 기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염려하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약속의 말씀을 따라 기도하기를 힘쓰면 정말 희한한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천국의 평안을 안겨 주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한 다음에 눈을 뜨면 근심거리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염려가 됩니다.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논한다면 나는 여전히 걱정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심하고 있는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평안이라고 하는 햇살이 비쳐 듭니다. 하나님께서 근심이 더 이상 나를 흔들어 놓지 못하도록 그 손으로 내 마음을 굳게 붙들어 주시는 것을 느낍니다. 그 손에 붙들려 기도하다 보면 문제가 하나 하나 해결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도는 금방 울던 사람을 금방 웃게 만드는 무슨 요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근심을 무조건 없애주는 무슨 묘약도 아닙니다. 기도는 근심을 이길 수 있는 신비스러운 저항력을 길러 줍니다. 마음에 평안이 밀려들 때도 근심은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오는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가 그 근심에 짓눌리지 않게 만드는 저항력이 됩니다. 우리는 이 저항력 때문에 근심 가운데서도 계속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태산처럼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그 무시무시하던 문제가 희한한 방법으로 하나하나 해결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근심을 덜고 싶으면 기도하라." 이것은 진리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라 그러면 왜 기도가 이와 같은 엄청난 효과를 우리에게 가져다줄까요 이에 예수님은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는 근심을 이길 수 있는 저항력을 키워주고 나중에는 그 모든 근심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3-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또 15장 16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6장 23-24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 모든 구절이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름이라는 말은 한자로 '명'(名)인데, 저녁 석(夕)자 밑에 입 구(口)자가 붙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글자를 놓고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서(夕) 사람들의 얼굴을 잘 분별하지 못할 때 입으로(口) 소리를 내서 사람을 찾는데 필요한 것이 이름이다." 그럴 듯한 설명이라고 봅니다. 이름은 더 나아가 그것의 주체가 되는 사람의 인격을 의미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세상의 구주이신 그분을 가리킵니다. 그만큼 주님의 이름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시요, 우리는 그의 피조물입니다. 만드신 자와 만들어진 자, 이 두 존재 사이에는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자를 만난다든지 창조자를 찾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는 죄 가운데서 날마다 죄만 짓고 사는 죄인들입니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아무리 헤매어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어느 길로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멀고 먼 관계를 해소하고 서로 교제할 수 있는 부드러운 관계로 만드시고자 중간에 채널을 하나 마련하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갈 수 있는 유일한 채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이름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조건 소리친다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 믿는 사람들처럼 불상 앞에서 천 번을 절한다고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기도는 예수의 이름이붙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중보자이심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예수님이 나의 중보자가 되시어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나의 기도가 어떤 기도이든 간에 내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 되도록 해 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는 줄 믿습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예수라는 이름을 제일 기뻐하십니다. 예수 이름이 붙인 기도는 거절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이름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그 이름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도행전 4장 12절을 보십시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예수의 이름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지, 거짓 선지자들도 이 이름을 가지고 능력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엉터리로 믿는 거짓 선지자들도 예수 이름만 가지고 있으면 희한한 일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중에 심판대 앞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모른다 하십니까" 예수의 이름이 얼마나 대단한 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가 이러한 대단한 이름을 들고 나가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안 들어주시겠습니까 아마 여러분이 많이 들으신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미국이 한참 남북 전쟁에 휘말려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조그마한 농촌에 있는 청년이 징집을 받아서 전선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너무 고통을 견디기가 힘들고 두려워서 그는 탈영을 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잃는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삶의 의욕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아들을 살릴 수 있을까'하고 고민 고민하던 그에게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대통령을 만나서 마지막으로 한번 탄원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링컨 대통령을 만나러 백악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경비들이 이 시골 남자를 들여보내 줄 리 만무했습니다.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그는 길가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한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비탄에 빠져있는 그를 측은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던 소년 하나가 다가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왜 그러세요" 그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소년은 느닷없이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다가 자꾸 재촉하는 바람에 그 소년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그를 수위실로 데리고 가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제가 데리고 들어가는 사람이에요." 그랬더니 모든 수위들이 아무 소리 않고 그를 통과시켜 주었습니다. 그 소년은 그를 대통령이 집무하는 집무실로 데리고 가더니 링컨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내가 데리고 온 사람이에요.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너무 가슴 아파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그 소년이 대통령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대통령이든 누구든 간에 아들은 언제든지 그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 부르면 우리 자신이 마치 예수가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나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절대 가만히 계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라
둘째는,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도는 근심을 없앨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읽은 요한복음 14장 13-14절, 15장 7절,16절, 16장23절을 보면 주님은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티안'(tian)인데, 이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가려서 듣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무슨 기도든지 하나님께서 가리지 않고 다 들이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몰라서 잘못 구하는 기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알고 그 마음에 쏙 드는 완벽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누구든지 "나는 하나님의 뜻에 100 퍼센트 일치하는 기도만 해."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병원으로 가야될 사람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이나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그런 완벽한 기도를 드리지는 못합니다. 로마서 8장 2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우리 기도를 도와주셔야 됩니다. 염려에 막 짓눌려 보십시오. 그 기도가 무슨 조리가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중소기업 사장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 위해서 서류를 들고 가다가 돌아서서 도장은 빠진 데가 없는지, 이름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보고 또 보듯 신경을 곤두세워서 기도하라고 하셨다면 우리 중에 기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이 기도를 과연 들어 주실까 안 들어 주실까'하는 것이 도리어 염려가 되면 혹 떼려다가 혹 붙이는 격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감사하게도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가리지 않고 다 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한번 여러분 자신의 기도목록을 만들어 보십시오. 큰일부터 사소한 일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는 내 마음의 감정에서부터 시작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큰 일까지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다양합니까 우리에게 이 모든 기도를 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제롬 스미스라고 하는 분이 신구약 성경 안에 들어 있는 기도 목록을 정리해 놓은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등장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를 목록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제가 세어 보니까 328가지나 되더라구요. 그 가운데는 날 죽여달라는 기도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한번 보게 해 달라는 기도까지 별의별 기도가 다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안에 이렇게 다양한 기도 제목을 늘어놓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어주시겠다는 실제적인 증거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자가 어떻게 근심 때문에 희생을 당하겠습니까 심지어는 자기를 죽여달라는 기도도 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는데 무엇 때문에 근심에 짓눌려서 병들고 절망하는 인생을 살겠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것이 문제지, 완벽하게 구하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됩니다. 응답이 약속된 기도
셋째는, 기도하면 반드시 받을 것이기 때문에 기도는 근심을 없앨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을 보십시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니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앞부분은 약간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던 3년 동안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신 그분을 직접 모시고 자고, 먹고 매일 다니는데 무엇 때문에 엎드려서 기도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제자들은 기도 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 나라로 올라가시고 나면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과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반드시 응답 받을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기도해서 응답을 받고 기쁨이 넘치게 되면 근심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집니다. 응답은 근심을 삽시간에 날려 버립니다. 금방 받는 응답이든 오랜 기다림 후에 받는 응답이든 간에 응답이 임하면 우리 가슴에 기쁨의 샘이 솟구치고 그 기쁨의 샘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근심을 싹 쓸어 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기도해서 이러한 기쁨을 체험하기만 하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7일부터 일주일 동안 교회 중보기도단, 수양관 중보기도단, 주일날 예배를 위해 특별히 중보 기도하는 중보기도단에 참가한 인원은총 478명입니다. 중보기도단에서 제목을 내 놓고 같이 중보 기도함으로써 응답 받은 내용들을 담당 교역자가 갖다 주어서 본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멋지게 응답을 해주시는지요. 그 기도 내용을 보면 정말 '무엇이든지'입니다. 가지각색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18년 동안 남편이 교회를 피해 다니면서 안 믿고, 최근에 들어와서는 부부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터져서 더 이상 인간의 힘으로는 그 문제 해결할 길이 없어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중보기도단에 내어놓고 기도를 부탁했는데, 기도하는 그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남편이 자기 발로 우리 교회 상담목사를 찾아가서 상담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끝난 것 아닙니까 또 어떤 집사님은 자기 집에 값비싼 예술품이 있는데 요사이 경기가 안 좋으니 팔고 싶어도 안 팔려 고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것 팔아서 특별 헌금도 하고 싶은데요 팔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하다가 잘 안되니까 중보기도단에 그 제목을 내놓았나 봅니다.
그런데 중보기도단에서 그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 물건이 팔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참 희한한 일이 아닙니까 어떤 분은 치매로 고생하는 친정 어머니가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는데 찾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단에 기도를 부탁했는데 그 제목을 두고 기도하는 동안 산에서 어머니를 찾았다고 합니다. 금강산인지 북한산인지 모르지만 산에서 치매 걸린 할머니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하니까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집이 회사담보물로 잡혀서 날라 갈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중보기도단에서 열심히 기도했더니 그것도 좋은 방향으로 해결 됐다고 고백하는 가정도 있었습니다. 전세문제를 가지고 돈을 받지 못해서 어떻게 하나 고민하는데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다고 고백하는 가정도 있었습니다. 자동차 사고를 냈는데 그만 뺑소니차로 고발이 되어서 참 난처한 처지가 됐다고 기도를 부탁했는데, 그것도 하나님께서 기가 막히게 해결해 주셨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뺑소니차가 된 데서부터 시작해서 남편 문제까지 얼마나 가지각색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느 기도도 가리지 않고 때를 따라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면 가슴이 불이 붙게 마련입니다.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근심이 더 이상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 기도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너, 왜 그렇게 공을 좋아하냐"하고 묻는다면 멍청한 질문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진 남녀가 열심히 사랑을 하는데 "너희는 왜 그렇게 사랑 하냐"하고 묻는 것은 멍청한 일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이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반드시 응답해 줄 것이다. 너희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여 모든 근심을 싹 쓸어버릴 것이다."라고 주님이 약속해주셨는데, 그 약속 받고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기도를 매우 부자연스럽게 여기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기도하려고 눈만 감으면 오만 가지가 눈앞에 다 나옵니다. 친구하고 수다 떠는 것은 1시간도 짧게 여기면서 기도하라고 하면 5분을 못 견딥니다. 기도하는 것을 너무 불편해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아직 믿음이 어려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영적으로 잘못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들에게 부탁합니다. 기도가 자연스러워지도록 노력하십시오. 근심이 있을수록 기도는 자연스러워야 됩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내 근심을 해결해 준다는데 왜 내가 근심을 끌어안고 걱정을 합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다 책임져 준다는데 자녀가 방에 앉아서 금식을 하면서 입학금 걱정을 한다고 상상을 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정신 나간 짓입니까 비록 집안이 어렵고 힘들어도 아버지가 책임지고 학교를 보내주신다고 하면 그것을 걱정 끝입니다. 정상적인 아이라면 아버지의 약속을 듣고도 방문을 걸어 잠그고 금식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하신 분입니다. 능력이 너무 많아서 못할 일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예수의 이름만 가지고 나오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근심을 끌어안고는 청승맞게 앉아서 얼굴을 찌푸리고 삽니까 왜 기도하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하시되 기도가 밥을 먹듯이, 잠을 자듯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처음에는 아스피린 먹는 것처럼 기도를 해도 여전히 염려가 남아 있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악순환이 계속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을 붙들고 계속 기도하면 나중에는 희한한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계를 체험해야 신앙의 진수를 알게 됩니다. 내년에 경제위기가 어느 정도 해결 될 지 모르지만 한번 밑바닥을 치는 위기는 올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닥쳐올 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아무 염려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예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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