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 (요일2:2-5)
본문
오늘은 2장 2절 입니다.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먼저 2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 . 여기 1장에는 주로 여호와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2장에 와서는 거의가 다 그리스도에 관해서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대명사들로 이 문장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가 누구냐 하면 바로 1절 마지막 부분에 나와 있는 예수 그리스도 의로우신 자가 계시는데가 없어도 되지 만를 넣음으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 만이 하나님이 내신 화목 제물임을 말하 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사에 보면 다 종교들의 제사가 있습니다. 제사가 없는 데도 있지요. 물론! 피 제사가 없는 불교같은 경우도 있지만, 그 때문에 엄격하게는 불교도 종교라고 할 수 있느 냐! 그래서 서양에서 어느 학자가 말하기를 종교적 윤리주의가 불교라 그렇게 말 했습니다. 불교를 좋게 보고 잘 말한 것이지요. 그러나 해탈하겠다는 자들의 생각을 보면 종교적인 윤 리주의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에게 혹은 신에게 경배 대상에게 제물을 드려서 죄를 속죄 받고 화해 받는 일을 하지 않는 종교가 없습니다. 그것이 없으며는 종교가 성립하지 아니하지요. 그러니까 모든 종교가 한결같이 전제하는 것은 그들의 그릇된 종교 대상을 섬기고 그릇되이 예배 행 위를 해도 본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정당한 관계가 파괴되었으므로 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 있어야 될 것을 다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화목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대부분 죄를 속함과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진정시키는, 라전어로 플라카치 오(Placatio) 그게 같은 뜻을 갖는지는 모르지마는, 그러기 위해서 힘씁니다. 그래서 죄를 속할 뿐만 아니라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화목제물은 바로 죄를 제거함과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 키는 일을 겸해서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내신 자기의 화 목제물 입니다. 모든 종교들은 다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러나 성경 의 종교만은 하나님께서 화목의 길을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신 이 화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가 세상과 화목했다는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바로 1절 마지막에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의로 우신 자라, 왜 그가 의로우신 자냐 바로 2절에서 이것을 설명합니다. 그가 그 자신 만이 하나님이 내신 화목제물로 바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그가 의인 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기 위하여 내신 하나님의 화목 제물 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 하여 죽으시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말씀을 하셧는데 바 로 이 문장과 동일한 문맥 입니다. 그 만이 하나님이 내신 우리의 화목 제물 이십니다.
그런데 그가 어떠한 화목 제물 이십니까 우리들의 죄들을 위할 뿐만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들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전 우주의 전 세상의 화목 제물 이라! 여기서 라 그럴 때는 통상적으로 대학에서 를 법질서의 총화 그러니 까 자연의 법칙이 잘 운행되는 저 밖에 객관적으로 있는 자연적인 현상을 라고 했습니다.성경에도 이와 같은 자세는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에서 대부분 라 할 때는 그와 같은 자연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을라 한 것이 아니라 그 성경에서 말하는는 에이온과 같은 뜻 입니다. 이 세대라! 그렇게 이는 인류를 표현합니다. 전 인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그 말은 도대체가 모든 인류를 위해서 다 대속해서 죽으셨느냐 우리는 선택 교 리와 함께 제한적 속죄를 믿는데 어떻게 그렇게 합치할 수 있느냐 또 그렇게 말할 수 있 을 것입니다. 요한일서의 설명이 교의적이고 어떤 면에 있어서는 성경 본문에 어긋난다고 할려는지 모르지마는 성경의 전체 흐름에 비춰서 볼 때에 이 라고 말한 것을 인 류라고 할 때 그 인류는 지금누구든지그런 인류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 생명 에 연결된 새로 지음받은 그 인류가 여기의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칭의를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지금현재 저자와 독자가 함께 라는 것 뿐 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연결된 모든 자들을 위하여서도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셨습니다.
3절에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킨다면 이것으로서 우리가 그를 아는 줄을 아느니라. 여기서 안다고 하는 말이 이 문장 처음에 나왔습니다. 우리가 안다. 우리가 안다고 할 때에 이 저자가 우리의 전통적인 견해로 사도 요한이기 때문에 이 전통적인 우리의 견해를 따라 이 저자가 또 요한복음의 저자 입니다. 우리는 구약 의 어법을 가장 많이 신약 성경에 표현하고 있는 저자가 누구냐고 하면 바로 사도 요한 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이라고 쓸 때에 그가 인지하고 있는 것은내가 알다 (야다) 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이 동사를 취해 왔습니다. 희랍인들에게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내가 안다 라고 할 때 그것은 자연의 사물을 혹은 신의 본성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그리고 직관하므로 알 수 있는 그와 같은 사변적인 지식 혹은 이론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에게 그와 같은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의 개 념은 알지 못 합니다. 최소한내가 알다혹은지식 이라 할 때 그 단어들은 전부 가 다 경험을 통해서, 실제로 경험되어서, 구체적인 역사에서, 사회생활에서, 자기 개인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접촉하므로 아는 그와 같은 앎을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는 것도 실제로 체험해서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져서 아는 것을 말 합니다. 그러니 항상 이 론적으로 자기의 사변에 의해서 아는 거와 같은 그와 같은 지식은 히브리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안다 고 할 때 아는 것도 3절이 나타내고 있는대로 실제로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실제로 그를 안다. 이론적으로 직관으로 신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체험으로 구체적인 생의 중앙에서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를 아는 것을 말 합니다. 그러니 구체적으로 희랍 그리고 히브리인들, 구약의 백성들에게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이 세상에 개입하므로 역사가 성립됩니다. 그러니 항상 경험한다고 할 때 그건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구체적인 실제 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절에 그를 우리가 안다. 이제 처음 아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계명을 지킬 때부터서 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안다는 말을 구체적으로 관계를 갖고서 사랑의 관계에 들어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히브리인들에 게 라고 하는 안다고 하는 말을 쓸 때에 많은 경우에 인간관계에 적용할 때는 남녀 간의 성적인 관계에 라는 말을 썼습니다. 마리아가 천사가 답할 때에도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한다 할 때에 그 알지 못한다는 동사에서 실제로 자기의 구체적인 체험을 통 해서 관계를 맺은 것을 말했습니다. 여기 두번째도 안다는 뜻이지마는, 그와 같은 관계를 통해서 안다는 뜻 이지마는 우리가 그를 안다고 그럴 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와 사랑의 관계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그냥 그렇게 이론적인 지식으로 아는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 님과 관계를 맺을 때 생명의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와의 관계가 사랑의 관 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하는 말을 사람에 게 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여기에 현재완료형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를 처음부터 서 알고 그와 생명의 관계를 맺어서 그와 생명의 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그를 아는 것을 말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와 같은 관계, 그냥 이론적으로 어떤 사람이 세상에 있다. 어떤 사람이 활동을 잘 안다더라. 그래서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주님을 안다 고 할 때 우리가 생명이 연장되어서 생명의 관계가 맺어져서 우리가 그와 우리 사이에서 사랑의 관계가 맺어졌으므로 아는 그런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알 수 있느냐,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했을 때,. 그의 계명들을 우리가 지킨다. 지킨다고 할 때 우리는 항상 계명을 지킨다고 할 때 통상적인 방법에서 벗어나서 힘을 내서 계명들을 좀 특별하게 행하는 것을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그러나 여기서 계명을 지킨다고 할 때,은,그 지킨다고 하는 말은 그 법을 좇아서 그대로 그 실재 대로 살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무슨 특별한 노력으로 지키고 수고해서 하지 못할 것을 선을 넘어가서 하는 그런 류의 지킴이 아니라 그래서 뭐를 한 것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바 로 그의 법도를 생활화 해서 사는 것을 지킴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계명들이 무엇이냐 우리는 율법과 계명을 구분을 합니다. 율법 속에 구체 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 계명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하라는 하지 말라는 구체적인 권면의 형태로 온 법을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지금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계명은 무엇이냐 그의 계명들은 무엇이냐 단수로 쓰지 아니하고 복수로 사용했습니다마는, 여기 의 계명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리스도가 친히 사랑의 계명을 내시고 그가 그 계명을 실천하시고 사랑의 계명의 길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지킬 계명도 그가 시발한, 그러니까 그가 말로 시발한 것이 아니라 그가 친히 그 길로 가신 사랑의 계명을 말합니다. 많은 종교들은 계명을 내고 그리고 그 계율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교수가 서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사랑의 계명을 내신 이가 실제로 사랑을 자기가 사시고 사랑의 길로 자기의 일생을 사셨습니다. 친히 그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그의 생으로 그의 모든 구체적인 생활에서,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냥 엄위로운 명령을 내게만 하므로 우리가 지킬 의무를 받아가진 것이 아니라 그가 친히 우리에게 계명을 내시기 전에 그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 시고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 니 우리가 힘을 내서 애써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계명들을 지키게 합니다. 그러니 실제로 우리가 사랑의 계명으로 살며 우리가 그를 믿는 자들이고 그와 의 사랑의 교제를 가지는 것임을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사랑이 우리들의 생활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에 대한 좋은 해석은 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안에 완성되었다. 우리 생활에서 실제로 사랑이 나타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와의 사랑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풍습의 큰 맹점 중의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바르게 할려고 애써도 이웃과의 관계는 전혀 상관이 없어도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만 바로 서면 이웃 에게는 잘못해도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웃에게 잘못하고 회개하지 않 습니다. 용서를 빌러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고 이웃 사랑에서 완성됩니다. 그러니 구체적으로 여러분들의 생활에 서 사랑을 나타내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바른 관계에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구체적인 생활에서 그 사랑의 계명을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만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에게 관계를 맺어져 있는, 그에게 속해져 있는 자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 그대로 살지 아니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 지킨다고 하는 것은 도수를 넘어가서 애써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지키는 것을 그런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문맥이 전혀 그런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냥 우리의 생활에서 그 법이 우리의 생활의 실재가 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가 우리 계명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들을 지켜야 만 할 것입니다. 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그러니까 4절에,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가진 자 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에서 나타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웃 사랑에서 여러분의 사랑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국 교회가 특별하게 신유의 은사를 체험하지 아니하면, 방언이라고 하는 특별한 은사를 체험하려고, 투시라든지 여러가지 은사들을 체험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참 좋은 일 입니다. 그와 같은 일이 있어서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긍휼이 와서 우리의 신앙 에 도움이 된다면 참으로 좋은 일 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 사는 것 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행함으로 여러분들이 사랑하고 사는 것이 여러분들이 성령님의 은혜를 받은 표 입니다. 그런 초자연적인 역사에서 여러분들이 성령님의 역사와 은혜를 구할려고 하지말고 다 여러분들이 사랑의 계명들을 지키는 데서 여러분들이 지키면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어서 성령님의 인도함 속에 있는 자들이요.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이 사도행전에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많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한 대로는 바울의 글에 그와 같은 강조가 없습니다. 사도 요한의 글에 그와 같은 강조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을 열고 서로 사랑해야지요. 우리 한국 교회는 서로 가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돈 가르고 지방 가르고, 또 옛날에 내가 사당동에서 가르칠 때 보면 지방이 같은 친 구만! 이래 가지고! 마음을 열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와야지요. 그러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많이 부 흥했습니다. 많이 양적으로 팽창했습니다. 누구는 천 명 교회 목사, 누구는 오천 명 교회 목사, 누구는 만 명 교회 목사! 헌금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다리가 부러지도록 노력하는지! 참으로 그럴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많이 모아가지고 돈은 많이 모아도 사랑하는 일은 없다. 구제하는 일은 없다. 그리고 신학교육을 위해서는 투자 안해요. 자기 아성만 쌓을려고 그러지! 그렇게 많은 교인 모으고 내가 얼마만한 교회 목사라고 그 이름 하나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혹사, 희생시키고. 지금 많은 교회가 상당히 많은 교회가 서울 시내 대교회 교인들이 하루에 버스를 다섯 시간씩 탑니다. 멀리서 오는 사람 싣고 한바퀴 빙 돌면 두 시간 내지 세 시간 입니다.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 아니요 대형교회화 해서 교 구가 없어요. 어떻게 하든지 자기의 교회가 크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려고 얼마나 수고하고 노력합니까 복음으로 사람들이 끌려와서 그렇게 모여드는 것이 아닙니다. 다 인간적으로 얽어매 가지고! 35만인가 하는 여의도에 큰 교회가 되니 뭐 온갖 부정과 죄악을 다 지어도 아직도 천사같이 보이기만 합니다. 여러분들이 정신을 차려야지요. 참 교회로 되돌아 가야 지요.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교회로 되돌아 가야지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교회당 옆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교회가 되야지요. 헌금만 많이 모아가지고, 물론 헌금 많아지면 여행도 자주 하고, 공부도 더 하고, 차도 좋은 것 타고, 비행기도 자주 타고, 외국도 드나들기를 그냥 이웃집 드나들 듯이 하고, 그냥 뻔질거리고 잘 다니는지! 나는 언 제 한번 또 가볼 기회가 있을까 나는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럴려고 교회를 그렇게 복음으로 장사를! 이게 큰일 입니다. 이것이 벌 받을 일 아니요 자기의 몫을 행하고 자기의 분수를 지키며 살아야지 그러지 못하고 이렇게 그냥 허영에 들 떠서 이렇게 하니 우리의 교회가 어떻게 한국 사회를 바로 잡으며 어떻게 정의 사회를 세 울 수가 있습니까 대형교회 되니까 수는 많아 돈은 많이 나와서 몇 억 씩, 몇 백억 씩 건 물 펑펑 지어내니 참 그 다 부러운 일이지요. 대형버스가 한 교회 몇 십대씩 서울 시내를 돌고, 서울 시내만 돌아요 저 수원까지, 인천까지! 교회 옮기면 제주도까지 비행기 내가지 고 다 와서 예배하고 한다고! 바벨탑이요, 사탄의 짓이요. 교회가 자기 일을 해야지요.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이 자기 자리에 서야지요. 여러분들이 정말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 계명들을 지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자들이요.
415절이 그렇게 말했어요. 4절, , . 그를 아노라 하고 말하는 자가 그리고 늘 그의 계명 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가 거짓말하는 자라. 주님을 안다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의 계명들 을 지키지 아니하면, 사랑의 계명들을 지키지 아니하면, 그의 법도 대로 살지 아니하면 거 짓말하는 자라. 여러분들이 그의 계명들을 지키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은 예수 안에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안에는. 진리가 있지 아니하다 에 더 강조를 붙였어요. 참으로 그 사람 안에 진리가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지 아니하다. 그러니 믿는 것과 사는 것이 별개가 아니다. 믿는 것과 사는 것이 하나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계명을 지키는 것은 참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거기에 맞출려고 애쓰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계명을 지키는 것, 그러니 그리스도 안의 새 실재가 되었으므로 그를 알아 새로운 실재가 되었으니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자동적인 일 입니다. 5절,
그런데 누구든지 그의 명령을, 말씀을 지키는 자는, 진실로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었다.우리말 번역에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다. 자, 우리가 그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면 참으로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되었다. 완성이 되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어법을 써서 이 문장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 곧 사랑의 계 명을 지키는 자는 진실로 그의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됐다. 온전케 됐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자기 아들 안에 구체화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로 자기의 사랑을 친히 확증하여 나타내 보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자기 속에만 갖 고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그 사랑을 실제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들이 아무리 좋은 문장을 내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생과 그 십자가를 말함이 없이 사랑을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추상이요. 그건 윤리가 되고 보통 사랑이 되고 맙니다. 보조품으로 내려가고 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생과 십자가로 말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에게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아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아들에게 나타낸 그 사랑이 실제로 우리에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희생의 제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본래 그렇게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적용되었는데, 하나님의 삼위 내에 서의 사랑도 그 비슷한 과정을 밟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객관화 한 것이 아들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삼위일체 내의 관계에서 보면 아버지가 아버지가 하나님의 사랑을 객관화 한 것이 아들입니다. 운동이요 운동! 사랑이 일어나지, 운동이 일어나 지요. 어려운 내용을 잘 해석해서 설명이 되고 이해가 가도록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객관화 되고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하나로 묶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객관화 된 사랑이 다시 아버 지에게로 되돌아가면서 그 사랑이 완성되게 하신 이가 성령님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와 아들을 묶는 사랑의 띠가 아버지의 영인 성령님입니다. 아버지에게서 출발한 사랑이 아들에게서 객관 화되고 다시 아버지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 비슷한 예가 여기 지금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버지에게서 그리고 아들 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을 행하면 우리가 그의 말씀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 상응한다. 그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시발되고 하나님께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반영된다. 하나님께로 되돌 아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면에 있어서 삼위일체 내의 사랑의 관계의 역사가,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데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랑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전부 다 나타나면 사랑이 표현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상응 합니다. 그렇게 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상응하므로 그 사랑이 처음 시발한 분에게로 되돌 아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가지신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 고 우리에게 적용되고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로 이 사랑이 실현되면 그 사랑의 원, 사랑의 운 동의 원이 완성되고,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데서 완성에 이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표시되게 늘 나타내고 우리가 그의 계명을 좇아서 사랑하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계명을 지키면 그 말씀 사랑의 말씀을 지키면 진실로 그 안에서 이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고 완전하게 됩니다. 뜻만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하게 되는 것 이 아닙니다. 사랑은 항상 남을 주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앞부분을 조금 더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바로 1절 마지막에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의로 우신 자라, 왜 그가 의로우신 자냐 바로 2절에서 이것을 설명합니다. 그가 그 자신 만이 하나님이 내신 화목제물로 바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그가 의인 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기 위하여 내신 하나님의 화목 제물 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 하여 죽으시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말씀을 하셧는데 바 로 이 문장과 동일한 문맥 입니다. 그 만이 하나님이 내신 우리의 화목 제물 이십니다.
그런데 그가 어떠한 화목 제물 이십니까 우리들의 죄들을 위할 뿐만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들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전 우주의 전 세상의 화목 제물 이라! 여기서 라 그럴 때는 통상적으로 대학에서 를 법질서의 총화 그러니 까 자연의 법칙이 잘 운행되는 저 밖에 객관적으로 있는 자연적인 현상을 라고 했습니다.성경에도 이와 같은 자세는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에서 대부분 라 할 때는 그와 같은 자연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을라 한 것이 아니라 그 성경에서 말하는는 에이온과 같은 뜻 입니다. 이 세대라! 그렇게 이는 인류를 표현합니다. 전 인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그 말은 도대체가 모든 인류를 위해서 다 대속해서 죽으셨느냐 우리는 선택 교 리와 함께 제한적 속죄를 믿는데 어떻게 그렇게 합치할 수 있느냐 또 그렇게 말할 수 있 을 것입니다. 요한일서의 설명이 교의적이고 어떤 면에 있어서는 성경 본문에 어긋난다고 할려는지 모르지마는 성경의 전체 흐름에 비춰서 볼 때에 이 라고 말한 것을 인 류라고 할 때 그 인류는 지금누구든지그런 인류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 생명 에 연결된 새로 지음받은 그 인류가 여기의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칭의를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지금현재 저자와 독자가 함께 라는 것 뿐 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연결된 모든 자들을 위하여서도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셨습니다.
3절에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킨다면 이것으로서 우리가 그를 아는 줄을 아느니라. 여기서 안다고 하는 말이 이 문장 처음에 나왔습니다. 우리가 안다. 우리가 안다고 할 때에 이 저자가 우리의 전통적인 견해로 사도 요한이기 때문에 이 전통적인 우리의 견해를 따라 이 저자가 또 요한복음의 저자 입니다. 우리는 구약 의 어법을 가장 많이 신약 성경에 표현하고 있는 저자가 누구냐고 하면 바로 사도 요한 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이라고 쓸 때에 그가 인지하고 있는 것은내가 알다 (야다) 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이 동사를 취해 왔습니다. 희랍인들에게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내가 안다 라고 할 때 그것은 자연의 사물을 혹은 신의 본성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그리고 직관하므로 알 수 있는 그와 같은 사변적인 지식 혹은 이론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에게 그와 같은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의 개 념은 알지 못 합니다. 최소한내가 알다혹은지식 이라 할 때 그 단어들은 전부 가 다 경험을 통해서, 실제로 경험되어서, 구체적인 역사에서, 사회생활에서, 자기 개인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접촉하므로 아는 그와 같은 앎을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는 것도 실제로 체험해서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져서 아는 것을 말 합니다. 그러니 항상 이 론적으로 자기의 사변에 의해서 아는 거와 같은 그와 같은 지식은 히브리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안다 고 할 때 아는 것도 3절이 나타내고 있는대로 실제로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실제로 그를 안다. 이론적으로 직관으로 신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체험으로 구체적인 생의 중앙에서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를 아는 것을 말 합니다. 그러니 구체적으로 희랍 그리고 히브리인들, 구약의 백성들에게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이 세상에 개입하므로 역사가 성립됩니다. 그러니 항상 경험한다고 할 때 그건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구체적인 실제 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절에 그를 우리가 안다. 이제 처음 아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계명을 지킬 때부터서 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안다는 말을 구체적으로 관계를 갖고서 사랑의 관계에 들어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히브리인들에 게 라고 하는 안다고 하는 말을 쓸 때에 많은 경우에 인간관계에 적용할 때는 남녀 간의 성적인 관계에 라는 말을 썼습니다. 마리아가 천사가 답할 때에도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한다 할 때에 그 알지 못한다는 동사에서 실제로 자기의 구체적인 체험을 통 해서 관계를 맺은 것을 말했습니다. 여기 두번째도 안다는 뜻이지마는, 그와 같은 관계를 통해서 안다는 뜻 이지마는 우리가 그를 안다고 그럴 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와 사랑의 관계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그냥 그렇게 이론적인 지식으로 아는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 님과 관계를 맺을 때 생명의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와의 관계가 사랑의 관 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하는 말을 사람에 게 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여기에 현재완료형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를 처음부터 서 알고 그와 생명의 관계를 맺어서 그와 생명의 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그를 아는 것을 말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와 같은 관계, 그냥 이론적으로 어떤 사람이 세상에 있다. 어떤 사람이 활동을 잘 안다더라. 그래서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주님을 안다 고 할 때 우리가 생명이 연장되어서 생명의 관계가 맺어져서 우리가 그와 우리 사이에서 사랑의 관계가 맺어졌으므로 아는 그런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알 수 있느냐,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했을 때,. 그의 계명들을 우리가 지킨다. 지킨다고 할 때 우리는 항상 계명을 지킨다고 할 때 통상적인 방법에서 벗어나서 힘을 내서 계명들을 좀 특별하게 행하는 것을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그러나 여기서 계명을 지킨다고 할 때,은,그 지킨다고 하는 말은 그 법을 좇아서 그대로 그 실재 대로 살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무슨 특별한 노력으로 지키고 수고해서 하지 못할 것을 선을 넘어가서 하는 그런 류의 지킴이 아니라 그래서 뭐를 한 것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바 로 그의 법도를 생활화 해서 사는 것을 지킴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계명들이 무엇이냐 우리는 율법과 계명을 구분을 합니다. 율법 속에 구체 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 계명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하라는 하지 말라는 구체적인 권면의 형태로 온 법을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지금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계명은 무엇이냐 그의 계명들은 무엇이냐 단수로 쓰지 아니하고 복수로 사용했습니다마는, 여기 의 계명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리스도가 친히 사랑의 계명을 내시고 그가 그 계명을 실천하시고 사랑의 계명의 길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지킬 계명도 그가 시발한, 그러니까 그가 말로 시발한 것이 아니라 그가 친히 그 길로 가신 사랑의 계명을 말합니다. 많은 종교들은 계명을 내고 그리고 그 계율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교수가 서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사랑의 계명을 내신 이가 실제로 사랑을 자기가 사시고 사랑의 길로 자기의 일생을 사셨습니다. 친히 그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그의 생으로 그의 모든 구체적인 생활에서,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냥 엄위로운 명령을 내게만 하므로 우리가 지킬 의무를 받아가진 것이 아니라 그가 친히 우리에게 계명을 내시기 전에 그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 시고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 니 우리가 힘을 내서 애써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계명들을 지키게 합니다. 그러니 실제로 우리가 사랑의 계명으로 살며 우리가 그를 믿는 자들이고 그와 의 사랑의 교제를 가지는 것임을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사랑이 우리들의 생활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에 대한 좋은 해석은 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안에 완성되었다. 우리 생활에서 실제로 사랑이 나타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와의 사랑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풍습의 큰 맹점 중의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바르게 할려고 애써도 이웃과의 관계는 전혀 상관이 없어도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만 바로 서면 이웃 에게는 잘못해도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웃에게 잘못하고 회개하지 않 습니다. 용서를 빌러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고 이웃 사랑에서 완성됩니다. 그러니 구체적으로 여러분들의 생활에 서 사랑을 나타내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바른 관계에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구체적인 생활에서 그 사랑의 계명을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만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에게 관계를 맺어져 있는, 그에게 속해져 있는 자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 그대로 살지 아니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 지킨다고 하는 것은 도수를 넘어가서 애써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지키는 것을 그런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문맥이 전혀 그런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냥 우리의 생활에서 그 법이 우리의 생활의 실재가 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가 우리 계명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들을 지켜야 만 할 것입니다. 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그러니까 4절에,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가진 자 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에서 나타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웃 사랑에서 여러분의 사랑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국 교회가 특별하게 신유의 은사를 체험하지 아니하면, 방언이라고 하는 특별한 은사를 체험하려고, 투시라든지 여러가지 은사들을 체험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참 좋은 일 입니다. 그와 같은 일이 있어서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긍휼이 와서 우리의 신앙 에 도움이 된다면 참으로 좋은 일 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 사는 것 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행함으로 여러분들이 사랑하고 사는 것이 여러분들이 성령님의 은혜를 받은 표 입니다. 그런 초자연적인 역사에서 여러분들이 성령님의 역사와 은혜를 구할려고 하지말고 다 여러분들이 사랑의 계명들을 지키는 데서 여러분들이 지키면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어서 성령님의 인도함 속에 있는 자들이요.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이 사도행전에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많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한 대로는 바울의 글에 그와 같은 강조가 없습니다. 사도 요한의 글에 그와 같은 강조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을 열고 서로 사랑해야지요. 우리 한국 교회는 서로 가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돈 가르고 지방 가르고, 또 옛날에 내가 사당동에서 가르칠 때 보면 지방이 같은 친 구만! 이래 가지고! 마음을 열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와야지요. 그러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많이 부 흥했습니다. 많이 양적으로 팽창했습니다. 누구는 천 명 교회 목사, 누구는 오천 명 교회 목사, 누구는 만 명 교회 목사! 헌금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다리가 부러지도록 노력하는지! 참으로 그럴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많이 모아가지고 돈은 많이 모아도 사랑하는 일은 없다. 구제하는 일은 없다. 그리고 신학교육을 위해서는 투자 안해요. 자기 아성만 쌓을려고 그러지! 그렇게 많은 교인 모으고 내가 얼마만한 교회 목사라고 그 이름 하나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혹사, 희생시키고. 지금 많은 교회가 상당히 많은 교회가 서울 시내 대교회 교인들이 하루에 버스를 다섯 시간씩 탑니다. 멀리서 오는 사람 싣고 한바퀴 빙 돌면 두 시간 내지 세 시간 입니다.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 아니요 대형교회화 해서 교 구가 없어요. 어떻게 하든지 자기의 교회가 크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려고 얼마나 수고하고 노력합니까 복음으로 사람들이 끌려와서 그렇게 모여드는 것이 아닙니다. 다 인간적으로 얽어매 가지고! 35만인가 하는 여의도에 큰 교회가 되니 뭐 온갖 부정과 죄악을 다 지어도 아직도 천사같이 보이기만 합니다. 여러분들이 정신을 차려야지요. 참 교회로 되돌아 가야 지요.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교회로 되돌아 가야지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교회당 옆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교회가 되야지요. 헌금만 많이 모아가지고, 물론 헌금 많아지면 여행도 자주 하고, 공부도 더 하고, 차도 좋은 것 타고, 비행기도 자주 타고, 외국도 드나들기를 그냥 이웃집 드나들 듯이 하고, 그냥 뻔질거리고 잘 다니는지! 나는 언 제 한번 또 가볼 기회가 있을까 나는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럴려고 교회를 그렇게 복음으로 장사를! 이게 큰일 입니다. 이것이 벌 받을 일 아니요 자기의 몫을 행하고 자기의 분수를 지키며 살아야지 그러지 못하고 이렇게 그냥 허영에 들 떠서 이렇게 하니 우리의 교회가 어떻게 한국 사회를 바로 잡으며 어떻게 정의 사회를 세 울 수가 있습니까 대형교회 되니까 수는 많아 돈은 많이 나와서 몇 억 씩, 몇 백억 씩 건 물 펑펑 지어내니 참 그 다 부러운 일이지요. 대형버스가 한 교회 몇 십대씩 서울 시내를 돌고, 서울 시내만 돌아요 저 수원까지, 인천까지! 교회 옮기면 제주도까지 비행기 내가지 고 다 와서 예배하고 한다고! 바벨탑이요, 사탄의 짓이요. 교회가 자기 일을 해야지요.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이 자기 자리에 서야지요. 여러분들이 정말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 계명들을 지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자들이요.
415절이 그렇게 말했어요. 4절, , . 그를 아노라 하고 말하는 자가 그리고 늘 그의 계명 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가 거짓말하는 자라. 주님을 안다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의 계명들 을 지키지 아니하면, 사랑의 계명들을 지키지 아니하면, 그의 법도 대로 살지 아니하면 거 짓말하는 자라. 여러분들이 그의 계명들을 지키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은 예수 안에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안에는. 진리가 있지 아니하다 에 더 강조를 붙였어요. 참으로 그 사람 안에 진리가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지 아니하다. 그러니 믿는 것과 사는 것이 별개가 아니다. 믿는 것과 사는 것이 하나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계명을 지키는 것은 참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거기에 맞출려고 애쓰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계명을 지키는 것, 그러니 그리스도 안의 새 실재가 되었으므로 그를 알아 새로운 실재가 되었으니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자동적인 일 입니다. 5절,
그런데 누구든지 그의 명령을, 말씀을 지키는 자는, 진실로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었다.우리말 번역에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다. 자, 우리가 그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면 참으로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되었다. 완성이 되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어법을 써서 이 문장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 곧 사랑의 계 명을 지키는 자는 진실로 그의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됐다. 온전케 됐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자기 아들 안에 구체화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로 자기의 사랑을 친히 확증하여 나타내 보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자기 속에만 갖 고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그 사랑을 실제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들이 아무리 좋은 문장을 내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생과 그 십자가를 말함이 없이 사랑을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추상이요. 그건 윤리가 되고 보통 사랑이 되고 맙니다. 보조품으로 내려가고 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생과 십자가로 말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에게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아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아들에게 나타낸 그 사랑이 실제로 우리에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희생의 제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본래 그렇게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적용되었는데, 하나님의 삼위 내에 서의 사랑도 그 비슷한 과정을 밟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객관화 한 것이 아들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삼위일체 내의 관계에서 보면 아버지가 아버지가 하나님의 사랑을 객관화 한 것이 아들입니다. 운동이요 운동! 사랑이 일어나지, 운동이 일어나 지요. 어려운 내용을 잘 해석해서 설명이 되고 이해가 가도록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객관화 되고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하나로 묶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객관화 된 사랑이 다시 아버 지에게로 되돌아가면서 그 사랑이 완성되게 하신 이가 성령님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와 아들을 묶는 사랑의 띠가 아버지의 영인 성령님입니다. 아버지에게서 출발한 사랑이 아들에게서 객관 화되고 다시 아버지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 비슷한 예가 여기 지금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버지에게서 그리고 아들 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을 행하면 우리가 그의 말씀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 상응한다. 그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시발되고 하나님께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반영된다. 하나님께로 되돌 아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면에 있어서 삼위일체 내의 사랑의 관계의 역사가,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데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랑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전부 다 나타나면 사랑이 표현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상응 합니다. 그렇게 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상응하므로 그 사랑이 처음 시발한 분에게로 되돌 아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가지신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 고 우리에게 적용되고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로 이 사랑이 실현되면 그 사랑의 원, 사랑의 운 동의 원이 완성되고,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데서 완성에 이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표시되게 늘 나타내고 우리가 그의 계명을 좇아서 사랑하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계명을 지키면 그 말씀 사랑의 말씀을 지키면 진실로 그 안에서 이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고 완전하게 됩니다. 뜻만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하게 되는 것 이 아닙니다. 사랑은 항상 남을 주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앞부분을 조금 더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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