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란? (엡1:1)
본문
자신의 존재의미를 잃어버린 채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일컬어 우리는 정신병자 또는 미친사람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성경의 여러 부분을 통해 자신치 잃어 버리고 이웃과 그 사회에 많 은 피해를 주고있던 미친 자, 귀신들린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고쳐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늘 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그와같이 자신을 잃 어버린 상태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눅15장에 기록되어 있는 탕자의 이야기가 항상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은 그 탕자 가 다시 자신의 존재됨을 깨닫고 본래 위치로 돌아오는 바로 그 장면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 말씀을 듣측 우리들은 어떠한가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떠한 분인지도 모르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며, 어떠한 삶의 목적과 목표를 지닌 사람이 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떠한가 이번 주일부터 연속 강해 설교될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그와같은 사실, 우리가 안다하나 모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됨, 복음의 본질과 복음의 역할을 이미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기도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 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다시한번 기억나게 하여 깨닫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소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들이 살고 있던 그 사 회, 그 세상 전체에 어떻게 그토록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가 있었을 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알측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된 그들이 그리스도인된 삶을 살았기 때문 이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교회의 정비된 어떤 조직이나 정돈된 교회 의 어떤 프로그램 때문이 아니었다. 초대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 러낸 것은 어디까지나 초대교인들의 그리스도인 다운 성품과 그에 따 른 독특한 삶의 방식 때문이었다. 나는 오늘날에도 우리 가정을, 우리 이웃을, 우리가 속한 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에 영향을 미칠수 있는 길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현재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러할 바로 이것,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측아 살아가는 방법 뿐이라고 말씀 드 리고 싶다. 이것은 이미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강조하 고 있는 신약 성경의 또 다른 측면의 강조점이기도 하다. 이제 본문 1절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를 다음 과 같은 세가지 명칭을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1절 하반절의 말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 노니"
1.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부르고 있다. 바울이 성도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항상 구별되고 정결함을 쟝독 사람들은 뜻한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서두에서 그리스도인 이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동 일하게 구별되어, 그 분의 피로 정결케 된 사람들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여야 하는 것은 이러한 구별이 단순 히 세상 사람들이 가지 않는 교회에 참석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 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때로 단순한 습관의 결과나 주위의 분위기에 의해서도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측꼈 보여 주신 그러한 인격과 성품으로 아직 세상에 머물고 있는 불신자들과 구별되어지고 있느냐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에 의한 세상과의 구별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만약 우리들 주변에 있는 많 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고통과 문제를 안고 우리들에게 나오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자명하다. 그리스도인된 우리들과 자신들이 본질 적으로 다른 사람(구별적 선택)이라는 것을 우리에게서 암시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행19장을 읽어보면, 에베소라고 불리는 큰 도시에 측황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이 도시는 풍요한 도시였다. 그러나 이 도시의 사람들은 그 풍요로움 속에서 아데미라고 불리우는 우상을 숭 배하고 있었다. 바울 사도가 이 도시를 방문 했을 때, 바울이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도시가 불신앙 속에서 하나님을 반대할 뿐 아니라 교만과 허위로 가득차 있는, 복음이라고는 들어갈 틈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다행이 몇 명되지 않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성도 들을 만나볼 수 있었지만 그들 역시 믿음에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처럼 복음의 엄쒼 뿌리워지기에 전혀 부적당한 것처럼 보였던 이 박토의 도시에도 복음의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 졌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가장 절망적인 상태나 환경 그리고 완악 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복음의 옥토로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 복음의 옥토로 변화 싶는 작업이 바로 그리스도인된 우리들의 독특한 생활방식,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인격과 성품, 그리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독특한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구별되어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2. 사도 바울은 성도를 신실한 자들이라고 말한다. 1절에서, 성도를 가리키는 "신실한 자들"란 말을 원어 성경의 뜻에 가 깝게 다시 번역하여 옮긴다면 "믿음을 행하는 자"가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의심많은 제자였던 도마가 마 침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후에 나타난 도마에게 다른 제자들이 부 활하신 주님을 증거하자, 도마는 그들의 증거를 믿지 않고 거절한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다시 도마 앞치 나타나셔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 셨다. 그리고 나서 전에 주님 자신께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셨던 대로 도마가 행할 것을 요구하시면서 아울러 의심했던 도마를 부드럽게 꾸 짖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여 주셨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여 기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믿는자"라고 표현된 요20:27절의 말씀이 오늘 본문 엡1:1절에서는 "신실한 자"로 번역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사실에서 드러나는 진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떠나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행19;1-2절의 말씀을 보면, 그곳에서 바울은 어떤 제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이들의 대답을 들은 바울은 "그 러면 너희는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다시 묻는다. 이때 그들이 "요 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자 사딥 바울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 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고 말했던 내용을 그들에게 말해 주므로써 결국은 그리스도인 이 된다는 것은 세례 요한의 지적대로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뜻하는 것임을 일러 주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이란 단순히 어떤 선한 인격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또한, 교회에 출석하는 단순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잘못 오해되고 있는 사쏭 하 나가 있는데, 선한 성품이나 인격, 또는 남들보다 좀 더 바르고 선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근거해서, 어떤 이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지칭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바른 그리스도인라면 바른 인격과 성품에 의해 바른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사람이 바른 인격과 성품에 의한 바른 삶을 살아 간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일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 하는 그리스도인이란 항상 어떤 특별한 진리를 맡은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진리랄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신 사실"과 그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보 혈이 바로 자신들의 죄와 형벌을 대신하는 죽음이셨음을 믿었다. 뿐 만 아니라 그분은 부활하셔서 가까운 어느날 우리를 맞이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음 가운데서 붙들고, 그 분의 뜻대로 삶을 살아갔던 사람 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놔 아니냐 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저희들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믿고 있었던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분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진리들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에 따라 충성하며, 항상 자신의 믿음에 대한 변호의 준비를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냐는 것만이 중요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 들 중 대부분이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라는 말을 고집하되 "로마 황 제 가이사는 주"라는 고백을 끝까지 거절 하면서 죽어갔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성도치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믿는 이가 누구인지를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 기 때문에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 을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3. 사도 바울은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엡4:15-16절에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치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 으므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 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고 그 분 밖에서 머뭇머뭇하는 사람들(참고:마7:21-23)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을 가르 킨다. 롬5장의 말씀을 보면, 우리들은 본래 아담 안에 있던 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담의 행동이 가져온 죄와 그 죄의 결과들 을 그 첫 사람 아담과 함께 해야 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계치담만 강조하여 말하기를 이전에 우리들이 아담 안에 있었던 것 같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것을 우리가 함께 누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계속되는 롬 6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함께하는 자들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 으심은 곧 나의 죄악의 죽음이요, 그분의 부활하심은 곧 우리들의 부 활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는 영육간의 모 든 축복의 사실들은 바로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서 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기에 요15장에서 "나는 참 포도나무 요 저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 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수 없음이라"고 주 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하는 이 사실 때문에 더 이상 우리들의 연약함이나 무능력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맺는 열매는 우리 자신에 기준되어 맺어지는 열매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기준되어 맺어지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치 해야할 일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믿음의 확인 말이다. 나는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가지 의문점을 가져 보았다. 그 것은 바울 사도가 본문 1절을 기록함에 있어서, 왜 "성도"라는 표현을 "그리스도 안의 신실한 자들"이란 말 뒤에 "성도"라는 말을 기록할 수 도 있지 않았을까 사실, 사도바울은 이 순서가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세상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라는 사실보다는 우리들이 구별되고 성곱소 삶 을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아닌가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정말 세상은 우리들 을 통해 비춰지는 거룩한 주님의 모습에만 관심을 갖지 우리들이 말하는 주님의 모습에는 그리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마5;13-16절에서, 먼저 소금을 말씀하시고 후에 빛을 말씀 하셨 던 것이다. 복음 전도는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먼저 살아 가는 모범된 삶이 있고 나서야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선행된 성결한 삶이 없이 증측 되어진다면, 그것은 복음 전도가 아니 라 오히려 복음을 막는 어리석음이 되고 말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 만, 세상은 거룩하고 성결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지, 입으로만 증거되는 거짓된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결코 세상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충격을 받지 않는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거룩한 삶을 우리가 우리들의 삶을 통해 재현해 나갈 때 비로서 충격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세상 앞에서 곱킹완구 못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우리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들은 과연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구별된 신실한 자들로서 그분의 뜻에 따라 선한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로 연합되어 있는지, 이 시간 우리들 자신을 살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늘 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그와같이 자신을 잃 어버린 상태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눅15장에 기록되어 있는 탕자의 이야기가 항상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은 그 탕자 가 다시 자신의 존재됨을 깨닫고 본래 위치로 돌아오는 바로 그 장면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 말씀을 듣측 우리들은 어떠한가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떠한 분인지도 모르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며, 어떠한 삶의 목적과 목표를 지닌 사람이 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떠한가 이번 주일부터 연속 강해 설교될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그와같은 사실, 우리가 안다하나 모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됨, 복음의 본질과 복음의 역할을 이미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기도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 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다시한번 기억나게 하여 깨닫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소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들이 살고 있던 그 사 회, 그 세상 전체에 어떻게 그토록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가 있었을 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알측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된 그들이 그리스도인된 삶을 살았기 때문 이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교회의 정비된 어떤 조직이나 정돈된 교회 의 어떤 프로그램 때문이 아니었다. 초대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 러낸 것은 어디까지나 초대교인들의 그리스도인 다운 성품과 그에 따 른 독특한 삶의 방식 때문이었다. 나는 오늘날에도 우리 가정을, 우리 이웃을, 우리가 속한 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에 영향을 미칠수 있는 길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현재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러할 바로 이것,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측아 살아가는 방법 뿐이라고 말씀 드 리고 싶다. 이것은 이미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강조하 고 있는 신약 성경의 또 다른 측면의 강조점이기도 하다. 이제 본문 1절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를 다음 과 같은 세가지 명칭을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1절 하반절의 말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 노니"
1.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부르고 있다. 바울이 성도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항상 구별되고 정결함을 쟝독 사람들은 뜻한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서두에서 그리스도인 이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동 일하게 구별되어, 그 분의 피로 정결케 된 사람들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여야 하는 것은 이러한 구별이 단순 히 세상 사람들이 가지 않는 교회에 참석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 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때로 단순한 습관의 결과나 주위의 분위기에 의해서도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측꼈 보여 주신 그러한 인격과 성품으로 아직 세상에 머물고 있는 불신자들과 구별되어지고 있느냐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에 의한 세상과의 구별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만약 우리들 주변에 있는 많 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고통과 문제를 안고 우리들에게 나오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자명하다. 그리스도인된 우리들과 자신들이 본질 적으로 다른 사람(구별적 선택)이라는 것을 우리에게서 암시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행19장을 읽어보면, 에베소라고 불리는 큰 도시에 측황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이 도시는 풍요한 도시였다. 그러나 이 도시의 사람들은 그 풍요로움 속에서 아데미라고 불리우는 우상을 숭 배하고 있었다. 바울 사도가 이 도시를 방문 했을 때, 바울이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도시가 불신앙 속에서 하나님을 반대할 뿐 아니라 교만과 허위로 가득차 있는, 복음이라고는 들어갈 틈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다행이 몇 명되지 않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성도 들을 만나볼 수 있었지만 그들 역시 믿음에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처럼 복음의 엄쒼 뿌리워지기에 전혀 부적당한 것처럼 보였던 이 박토의 도시에도 복음의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 졌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가장 절망적인 상태나 환경 그리고 완악 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복음의 옥토로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 복음의 옥토로 변화 싶는 작업이 바로 그리스도인된 우리들의 독특한 생활방식,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인격과 성품, 그리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독특한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구별되어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2. 사도 바울은 성도를 신실한 자들이라고 말한다. 1절에서, 성도를 가리키는 "신실한 자들"란 말을 원어 성경의 뜻에 가 깝게 다시 번역하여 옮긴다면 "믿음을 행하는 자"가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의심많은 제자였던 도마가 마 침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후에 나타난 도마에게 다른 제자들이 부 활하신 주님을 증거하자, 도마는 그들의 증거를 믿지 않고 거절한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다시 도마 앞치 나타나셔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 셨다. 그리고 나서 전에 주님 자신께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셨던 대로 도마가 행할 것을 요구하시면서 아울러 의심했던 도마를 부드럽게 꾸 짖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여 주셨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여 기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믿는자"라고 표현된 요20:27절의 말씀이 오늘 본문 엡1:1절에서는 "신실한 자"로 번역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사실에서 드러나는 진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떠나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행19;1-2절의 말씀을 보면, 그곳에서 바울은 어떤 제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이들의 대답을 들은 바울은 "그 러면 너희는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다시 묻는다. 이때 그들이 "요 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자 사딥 바울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 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고 말했던 내용을 그들에게 말해 주므로써 결국은 그리스도인 이 된다는 것은 세례 요한의 지적대로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뜻하는 것임을 일러 주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이란 단순히 어떤 선한 인격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또한, 교회에 출석하는 단순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잘못 오해되고 있는 사쏭 하 나가 있는데, 선한 성품이나 인격, 또는 남들보다 좀 더 바르고 선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근거해서, 어떤 이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지칭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바른 그리스도인라면 바른 인격과 성품에 의해 바른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사람이 바른 인격과 성품에 의한 바른 삶을 살아 간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일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 하는 그리스도인이란 항상 어떤 특별한 진리를 맡은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진리랄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신 사실"과 그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보 혈이 바로 자신들의 죄와 형벌을 대신하는 죽음이셨음을 믿었다. 뿐 만 아니라 그분은 부활하셔서 가까운 어느날 우리를 맞이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음 가운데서 붙들고, 그 분의 뜻대로 삶을 살아갔던 사람 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놔 아니냐 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저희들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믿고 있었던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분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진리들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에 따라 충성하며, 항상 자신의 믿음에 대한 변호의 준비를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냐는 것만이 중요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 들 중 대부분이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라는 말을 고집하되 "로마 황 제 가이사는 주"라는 고백을 끝까지 거절 하면서 죽어갔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성도치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믿는 이가 누구인지를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 기 때문에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 을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3. 사도 바울은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엡4:15-16절에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치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 으므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 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고 그 분 밖에서 머뭇머뭇하는 사람들(참고:마7:21-23)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을 가르 킨다. 롬5장의 말씀을 보면, 우리들은 본래 아담 안에 있던 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담의 행동이 가져온 죄와 그 죄의 결과들 을 그 첫 사람 아담과 함께 해야 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계치담만 강조하여 말하기를 이전에 우리들이 아담 안에 있었던 것 같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것을 우리가 함께 누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계속되는 롬 6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함께하는 자들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 으심은 곧 나의 죄악의 죽음이요, 그분의 부활하심은 곧 우리들의 부 활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는 영육간의 모 든 축복의 사실들은 바로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서 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기에 요15장에서 "나는 참 포도나무 요 저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 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수 없음이라"고 주 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하는 이 사실 때문에 더 이상 우리들의 연약함이나 무능력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맺는 열매는 우리 자신에 기준되어 맺어지는 열매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기준되어 맺어지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치 해야할 일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믿음의 확인 말이다. 나는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가지 의문점을 가져 보았다. 그 것은 바울 사도가 본문 1절을 기록함에 있어서, 왜 "성도"라는 표현을 "그리스도 안의 신실한 자들"이란 말 뒤에 "성도"라는 말을 기록할 수 도 있지 않았을까 사실, 사도바울은 이 순서가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세상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라는 사실보다는 우리들이 구별되고 성곱소 삶 을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아닌가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정말 세상은 우리들 을 통해 비춰지는 거룩한 주님의 모습에만 관심을 갖지 우리들이 말하는 주님의 모습에는 그리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마5;13-16절에서, 먼저 소금을 말씀하시고 후에 빛을 말씀 하셨 던 것이다. 복음 전도는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먼저 살아 가는 모범된 삶이 있고 나서야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선행된 성결한 삶이 없이 증측 되어진다면, 그것은 복음 전도가 아니 라 오히려 복음을 막는 어리석음이 되고 말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 만, 세상은 거룩하고 성결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지, 입으로만 증거되는 거짓된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결코 세상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충격을 받지 않는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거룩한 삶을 우리가 우리들의 삶을 통해 재현해 나갈 때 비로서 충격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세상 앞에서 곱킹완구 못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우리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들은 과연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구별된 신실한 자들로서 그분의 뜻에 따라 선한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로 연합되어 있는지, 이 시간 우리들 자신을 살펴야 되지 않겠는가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