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뉘우치는 제자 (눅22:54-62)
본문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여호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아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세익스피어는 “인간은 얼마나 위대한 걸작인가 이성은 고귀하고, 능력은 무한하고, 행동은 천사 같고, 이해는 신과 같다. 세계의 미요, 만물의 영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어도 인간은 어떻게 교육을 받느냐, 어떻게 훈련을 받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보석도 수없이 깎고 다듬어야 아름다운 빛을 내듯이 우리 인간도 훈련을 통해 다듬어질 때 그 삶이 가치가 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흙덩어리를 물레에 올려 놓고 계속 돌리면서 다듬어 나갈 때에 좋은 도자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깎아내야 할 부분이 참 많습니다. 목수의 손으로 다듬어야 좋은 제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용광로에도 넣었다가 꺼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그냥 두면 가치가 없습니다. 다듬어야 합니다. 태어난 그 자체를 인간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잘못하면 오히려 짐승보다 더 못한 가치 없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농부의 손에서 매일매일 가꾸어지는 포도나무 가지처럼 우리 인간도 여러 손길을 통해서 다듬어져야 되고 간섭을 받아야 되고 양육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제멋대로 크면 안됩니다. 웃자라지 않도록 가지치기를 해주어야 열매가 잘 열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끊을 것을 끊어내면서 양육할 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인구 조사를 할 때, 태어났다고 해서 무조건 사람 숫자로 치지 않습니다. 이 인구 조사법은 우리가 배울 것이 많습니다. 20세 이상 되어야 사람으로 치는 것입니다. 20세 이하는 사람으로 치지도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할 때에도 30세 이상 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사람이 30년은 양육을 받고 교육을 받아야 하나님 앞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30세부터 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3세에 돌아가셨는데 30세부터 일하셨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짐승들이 새끼 낳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일어나서 걷습니다. 참 신비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떤 동물이든지 한두 달 이내에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강아지는 한 달만 지나면 시장에 내다 팝니다. 남의 집에 가서도 잘 삽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2개월 된 애를 어디 내놓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죽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극히 약하고 불완전하게 태어납니다. 그러나 양육을 받고 교육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사명을 크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육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첫째, 가정 교육입니다. 부모가 어려서부터 올바른 자세로 윤리와 도덕을 가르쳐주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이웃과 어른 앞에서 좋은 성품과 인격을 갖추도록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보다 더 좋은 스승은 없습니다. 잘못된 것은 꾸짖고 잘한 것은 칭찬하면서 가정의 품안에서 잘 가르칠 때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볼 때에 세 가지를 봅니다. 첫 번째, 어떤 부모 아래서 자라났는지 살펴봅니다. 사람에게는 부모라는 그늘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바로 알려면 그의 부모를 보라는 말도 있습니다. 두 번째, 지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봅니다. 부모에게서 인격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어도 학교 교육은 받을 수 있습니다. 학교 교육을 잘 받으면 실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영적 교육을 잘 받았느냐를 봅니다. 어떤 교회를 다녔느냐 하는 것은 가정 교육처럼 차이가 많이 납니다. 어느 교회를 다녀서 얼마나 영적 교육을 잘 받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철저하게 가르칠 것을 말합니다. 잠언 “(잠23:13)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잠23:14)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고 했습니다. 자녀들이 잘못할 때에는 때리라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아이들을 때리는 것을 아주 나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나라일수록 청소년 문제가 많습니다. 이런 사회분위기는 자녀 교육을 힘들게 합니다. 약은 입에는 쓰지만 몸에 좋은 것처럼 잠깐 아픈 것이 일생의 고통을 막아낼 수가 있습니다. 채찍으로 때리면 영혼을 음부에서, 지옥문에서 구원한다고 했습니다. 잠깐 눈물을 흘림으로써 지옥에 들어가지 않게 된다고 했습니다.
어느 가정에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서당에 보냈는데 하루는 책을 훔쳐 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사랑으로 좋게 타이르고 웃어넘겼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또 이웃집의 옷을 훔쳐 왔습니다.
그런데도 몇마디 꾸짖고 그냥 넘겼습니다. 나중에 이 아들은 큰 도둑이 되었고 살인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도둑질과 살인은 사촌간입니다. 아주 가깝습니다. 처음에는 남의 집에 도둑질하러 들러갔지만 들키든지 붙잡히게 되면 살아나오려고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둑질과 살인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이 아들이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뒤따라오면서 웁니다. 그때 포승줄에 묶인 아들이 따라오는 어머니에게 가까이 옆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가까이 오니까 귀에 대고 무슨 이야기를 할 듯하다가 어머니 귀를 물어뜯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나는 너 때문에 평생을 이렇게 한숨과 눈물로 살았는데 마지막에 내 귀까지 물어뜯느냐”고 속상해하니까 이 아들이 말했습니다. “어머니 내 귀에다 대고 왜 아픈 말을 해주지 않으셨어요” 왜 가르쳐야 될 것을 올바로 가르쳐주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옳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자녀들을 분명하게 가르쳐야 됩니다. 자녀들이 다 큰 다음에는 교육이 안됩니다. 어떤 교육이든지 나이가 들어버리면 어렵습니다. 기술도 나이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배워야 합니다. 교육은 어려서부터 해야 됩니다. 할렐루야. 자녀는 일찍부터 가르쳐야 됩니다. 나중에 타일러서 가르치려고 하면 자녀가 한마디도 듣지 않습니다. 엄격하지 않은 부모는 효도를 못 받습니다. 나중에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바로 가르쳐야 할 일들이 참 많습니다. 주일을 지켜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라. 말씀대로 살아라. 예수를 믿는 부모뿐만 아니라 모든 부모에게는 매일매일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교육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좋은 성품과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기르기보다는 그저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공부만 잘하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100점만 받아오면 그까짓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심방을 갔는데, 아이가 아빠를 때리는데도 허허 웃기만 합니다.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제가 화를 냈습니다. 버릇없이 키운 자식에게는 덕을 보지도 못합니다. 무슨 효도를 받겠습니까 그런 아이는 성경대로 때려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를 음부에서 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학교 교육입니다. 요사이 학교에서 전인 교육을 한다고 하지만 역시 지식 전달이 주목적입니다. 학문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초에서부터 전문적인 지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목을 가르쳐서 지식의 눈을 뜨게 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인으로서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도록 하는 데 학교 교육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제 제 딸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여 식장에 다녀왔습니다. 딸아이가 6년 개근을 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공부는 좀 못해서 우등상은 못탔지만 6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늘 변함없이 학교생활에 최선을 다해준 딸아이가 그저 고맙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 교육입니다. 영적인 교육입니다.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이 안되어도 교회 교육만 잘 받으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링컨도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교회 교육만 받았지만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 교육만 잘 받으면 설령 다른 교육이 부족해도 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 교육의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교회 교육은 인간의 원래 주소를 찾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내 영혼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뿌리부터 먼저 찾게 합니다. 교회 교육은 다른 교육과 다릅니다. 디모데전서 “(딤전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학교 교육이나 가정 교육은 땅에서 좋습니다. 도덕이나 지식은 땅에서 좋습니다. 그러나 교회 교육은 땅과 하늘, 이 세상과 저 세상, 영과 육, 내 모든 범사에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훈련인 줄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 교육을 통하여 내 영혼이 잘되고 내 모든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랍비십니다. 선생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만 기르셨습니다. 그 가운데 베드로가 가장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언제나 잘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엉뚱하고 실수 많고 꾸중도 많이 들어서 제일 안될 것 같았지만 가장 훌륭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에 실수를 많이 저지른 제자입니다. 지옥과 천국을 왔다갔다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기독교 2천 년 역사에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됩니다. 그래서 로마에 가면 세계에서 제일 큰 성당 이름이 베드로 성당입니다. 또 로마 카톨릭에서는 교황을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또 양을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양을 모두 맡아서 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 하실 정도로 베드로는 기독교 역사에서 최고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실수를 반복합니다. 늘 넘어집니다.
그런데 넘어지면 일어나지를 못하고 일어나더라도 그 자리에 또 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 끊임없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도 존경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 번 넘어지면 열 가지를 배웁니다. 한 번 더러워지면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태어납니다. 한 번 퇴보하면 엄청나게 발전합니다. 주님을 떠났다가도 믿음으로 다시 일어납니다. 주님을 배반했다가도 뜨거운 사랑으로 회복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했다가도 회개하며 주님 앞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사단이 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성령님 충만한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어떠한 면으로도 완전하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자라나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넘어지면서도 걸음마를 배우고 점점 장성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자전거를 배우려면 많이 넘어집니다. 그러나 넘어지면서 넘어지지 않는 법을 배웁니다. 나중에는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잘 타게 됩니다. 자동차 운전도 처음에 한두 번은 가벼운 사고가 일어납니다. 전혀 사고가 없는 것도 위험합니다. “나는 무사고다, 나는 문제없다.”하고 우쭐대는 사람이 사고를 내면 큰 사고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인이 훌륭한 교인입니까 완전한 교인이 훌륭한 교인은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넘어질 수 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 회개하여 다시 일어서는 교인이 훌륭한 교인입니다. 할렐루야. “(롬9: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야곱을 사랑하셨습니까 야곱은 잘 넘어진 사람입니다. 야곱의 형 에서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에서보다 잘 넘어진 야곱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주시면서 얼마나 야곱을 사랑하셨습니까 유대 인의 나라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보십시오. 어떤 자녀는 문제없이 살아가고 훌륭하게 쭉쭉 뻗어나갑니다. 그러나 부모와 교제는 없습니다. 그냥 놔둬도 부모의 도움 없이 자기대로 잘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잘 아프고, 잘 넘어지고, 돈도 잘 없애는 자녀에게 정이 깊어집니다. 부족한 자녀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모를 찾고 의지하고 대화할 때 사랑이 오가는 것입니다. 누가 은혜를 받습니까 어떤 교인이 가장 좋은 교인입니까 어떤 교인이 크게 될 수 있습니까 실수해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교인이 죽죽 커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골에서 모내기를 해보면 옮겨 심은 볏모가 며칠 동안은 시들합니다. 그러나 뿌리만 내리면 쑥쑥 올라갑니다. 모판에 가만히 놔둬 보십시오. 아무 문제 없이 자랄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옮겨 심을 때는 아픔이 오고 어려움이 오지만 벼는 그 과정을 거쳐야만 제대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쑥쑥 자라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늘 깨달아야 합니다. 회개해야 됩니다. 뉘우쳐야 됩니다. 베드로는 일생 동안 뉘우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들으면서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회개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가정이나 자녀나 자신에게 환난이 있다면 베드로와 같이 빨리 하나님 앞에 울며 회개해야 됩니다.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은혜를 못 받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높이 올라갈수록 그대로 두시지 않습니다. 낮은 곳에 있으면 불쌍히 여기시지만 복을 받을수록 여러분을 지켜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매를 쳐도 유대 인을 먼저 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했기 때문에 심판이 먼저 오는 것입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됩니다. 늘 뉘우치는 사람이 성장합니다. 자라납니다. 어떤 목사님이 비판을 잘했습니다. 그저 앉으면 남을 비판하고 모든 설교가 비판의 대상입니다.
이 목사님은 모든 잘못은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의 잘못은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안됩니다. 그것도 자기에게 문제가 있어서 어려운 것이 아니고, 질적인 것은 무시하고 양적으로 부흥하는 교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보면 잘 압니다. 뾰족한 마음으로 늘 남을 비판하니까 이 목사님 별명을 촉새라고 지었습니다. 하루는 한 친구가 “야, 너는 말부터 고쳐야 된다. 항상 남을 욕하고 그렇게 쏘아대면 되겠느냐 모두 나쁜 놈이라고 하기 전에 너부터 고쳐야 된다”고 충고했습니다. 그제야 이 목사님이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자세입니다. 알려줄 때 깨닫는 것, 이것이 참 어렵습니다. 이것이 훌륭한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도 꾸중을 해보면 잘못을 깨닫는 아이가 참 드뭅니다. 빨리 뉘우치는 분이 훌륭하게 됩니다. 완전한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완전한 척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문제는 언제나 내 안에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는 조직을 고치고, 제도를 고치고, 법을 고치고, 정부 조직을 고치고, 세계를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런 것은 하나도 고치지 않으셨습니다. 고쳐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너의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상의 낙원이 아니라 너희 안에 낙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찬송가 208 장). 어떤 분은 길 가다가 넘어지면 어느 놈이 도로를 이렇게 닦았느냐고 화를 냅니다.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문제가 있든지 반드시 상대방에게서 원인을 찾아냅니다. 어떤 분은 자기 부인하고 싸우다가도 장모를 물고늘어지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왜 친정부모를 탓하고 원망합니까 곱게 길러서 보내주신 장모에게 고마워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다릅니다. 우리의 축복은 언제나 잘못이 내게 있다고 내 탓으로 돌릴 때 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면 죄인입니다. 회개할 일이 내게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찾아서 하나님 앞에 빨리 뉘우치고 회개하면 그 민족이나 가정이나 개인이나 교회나 아무 문제가 없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예수 믿으면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는 항상 옛사람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올바로 예수 믿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엄청난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뉘우치지 아니하는 뻣뻣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다윗이 회개할 때, 바울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빨리 회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같이 많이 실수한 사람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2-23절을 보면,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오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가다가 바람을 보고 의심하여 물에 빠지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즉시 주님을 붙잡았습니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수없이 왔다갔다했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주님 앞에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까지 얻고도,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고 할 때에 “선생님, 십자가를 지시면 어떻게 합니까 지지 마세요”라고 하다가 예수님께 “사단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에서 일순간에 사단으로 떨어졌습니다.
마태복음 17장 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니까 베드로가 그 광경을 보고 “주여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구름 속에서,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리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1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대로 가만히 있는데 베드로만 펄쩍 뛰면서 내가 선생님의 발을 씻겨야지 선생님이 어떻게 내 발을 씻기시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꼐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너의 죄를 위하여, 이 발보다 몇만 배 더러운 죄를 씻기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주옵소서”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하나도 맞는 게 없습니까 엉뚱합니다. 우리의 발보다 더 더러운 죄를 씻기려 주님은 오셨습니다. 주님 앞에 발을 내 놓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6장 31-3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것을 말씀하시니까 베드로는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기는 죽어도 주님을 안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11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하속들, 군인들이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왔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앞으로 나서서 칼을 빼더니 예수님을 붙잡는 사람의 귀를 탁 쳐서 땅에 떨어뜨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검을 집에 꽃으라” 하시면서 나무라십니다. 베드로는 한 가지도 예수님의 마음에 맞는 게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또 상상도 못할 일을 저지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받고 계신 그 순간에 베드로는 밖에서 구경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말이 안됩니다. “(마26:35)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베드로가 구경만 한 것입니다. 그때 한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고 합니다. 베드로는 “얘가 미쳤나, 사람 잡지 마라”하고 자리를 옮겨 다른 곳으로 피합니다. 베드로는 그 밤에 자리를 옮겨가며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때 닭이 “꼬꼬”하고 웁니다. 베드로는 “내가 또 넘어졌구나, 아버지, 용서해 주십시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하면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변변치 못하던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사도행전에서는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언제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전혀 새로운 베드로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잘못했을지라도 뉘우치는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반성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날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서로 내 잘못이라고 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렵던 가정에도 행복이 찾아옵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있더라도 여러분이 먼저 뉘우쳐 보십시오. 다 풀립니다. 안 풀리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잘했다. 잘났다” “그래 니 똥 굵어” 하고 뻣뻣하게 서로 맞설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나온 여러분, 우리가 부족한 것은 하나님께서 너무 잘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면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므로 늘 뉘우치며 나와야 됩니다. 지난주에 잘못한 것을 뉘우치고 나와야 됩니다. 회개하고 나와야 합니다. 회개를 미루지 아니하고 곧 깨닫고 돌아올 때 여러분의 환난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오래오래 메마르지 않습니다. 메마른 땅에 단비를 부어주시듯이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영원히 임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2개월 된 애를 어디 내놓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죽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극히 약하고 불완전하게 태어납니다. 그러나 양육을 받고 교육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사명을 크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육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첫째, 가정 교육입니다. 부모가 어려서부터 올바른 자세로 윤리와 도덕을 가르쳐주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이웃과 어른 앞에서 좋은 성품과 인격을 갖추도록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보다 더 좋은 스승은 없습니다. 잘못된 것은 꾸짖고 잘한 것은 칭찬하면서 가정의 품안에서 잘 가르칠 때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볼 때에 세 가지를 봅니다. 첫 번째, 어떤 부모 아래서 자라났는지 살펴봅니다. 사람에게는 부모라는 그늘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바로 알려면 그의 부모를 보라는 말도 있습니다. 두 번째, 지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봅니다. 부모에게서 인격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어도 학교 교육은 받을 수 있습니다. 학교 교육을 잘 받으면 실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영적 교육을 잘 받았느냐를 봅니다. 어떤 교회를 다녔느냐 하는 것은 가정 교육처럼 차이가 많이 납니다. 어느 교회를 다녀서 얼마나 영적 교육을 잘 받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철저하게 가르칠 것을 말합니다. 잠언 “(잠23:13)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잠23:14)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고 했습니다. 자녀들이 잘못할 때에는 때리라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아이들을 때리는 것을 아주 나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나라일수록 청소년 문제가 많습니다. 이런 사회분위기는 자녀 교육을 힘들게 합니다. 약은 입에는 쓰지만 몸에 좋은 것처럼 잠깐 아픈 것이 일생의 고통을 막아낼 수가 있습니다. 채찍으로 때리면 영혼을 음부에서, 지옥문에서 구원한다고 했습니다. 잠깐 눈물을 흘림으로써 지옥에 들어가지 않게 된다고 했습니다.
어느 가정에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서당에 보냈는데 하루는 책을 훔쳐 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사랑으로 좋게 타이르고 웃어넘겼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또 이웃집의 옷을 훔쳐 왔습니다.
그런데도 몇마디 꾸짖고 그냥 넘겼습니다. 나중에 이 아들은 큰 도둑이 되었고 살인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도둑질과 살인은 사촌간입니다. 아주 가깝습니다. 처음에는 남의 집에 도둑질하러 들러갔지만 들키든지 붙잡히게 되면 살아나오려고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둑질과 살인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이 아들이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뒤따라오면서 웁니다. 그때 포승줄에 묶인 아들이 따라오는 어머니에게 가까이 옆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가까이 오니까 귀에 대고 무슨 이야기를 할 듯하다가 어머니 귀를 물어뜯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나는 너 때문에 평생을 이렇게 한숨과 눈물로 살았는데 마지막에 내 귀까지 물어뜯느냐”고 속상해하니까 이 아들이 말했습니다. “어머니 내 귀에다 대고 왜 아픈 말을 해주지 않으셨어요” 왜 가르쳐야 될 것을 올바로 가르쳐주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옳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자녀들을 분명하게 가르쳐야 됩니다. 자녀들이 다 큰 다음에는 교육이 안됩니다. 어떤 교육이든지 나이가 들어버리면 어렵습니다. 기술도 나이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배워야 합니다. 교육은 어려서부터 해야 됩니다. 할렐루야. 자녀는 일찍부터 가르쳐야 됩니다. 나중에 타일러서 가르치려고 하면 자녀가 한마디도 듣지 않습니다. 엄격하지 않은 부모는 효도를 못 받습니다. 나중에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바로 가르쳐야 할 일들이 참 많습니다. 주일을 지켜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라. 말씀대로 살아라. 예수를 믿는 부모뿐만 아니라 모든 부모에게는 매일매일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교육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좋은 성품과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기르기보다는 그저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공부만 잘하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100점만 받아오면 그까짓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심방을 갔는데, 아이가 아빠를 때리는데도 허허 웃기만 합니다.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제가 화를 냈습니다. 버릇없이 키운 자식에게는 덕을 보지도 못합니다. 무슨 효도를 받겠습니까 그런 아이는 성경대로 때려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를 음부에서 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학교 교육입니다. 요사이 학교에서 전인 교육을 한다고 하지만 역시 지식 전달이 주목적입니다. 학문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초에서부터 전문적인 지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목을 가르쳐서 지식의 눈을 뜨게 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인으로서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도록 하는 데 학교 교육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제 제 딸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여 식장에 다녀왔습니다. 딸아이가 6년 개근을 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공부는 좀 못해서 우등상은 못탔지만 6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늘 변함없이 학교생활에 최선을 다해준 딸아이가 그저 고맙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 교육입니다. 영적인 교육입니다.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이 안되어도 교회 교육만 잘 받으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링컨도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교회 교육만 받았지만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 교육만 잘 받으면 설령 다른 교육이 부족해도 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 교육의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교회 교육은 인간의 원래 주소를 찾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내 영혼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뿌리부터 먼저 찾게 합니다. 교회 교육은 다른 교육과 다릅니다. 디모데전서 “(딤전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학교 교육이나 가정 교육은 땅에서 좋습니다. 도덕이나 지식은 땅에서 좋습니다. 그러나 교회 교육은 땅과 하늘, 이 세상과 저 세상, 영과 육, 내 모든 범사에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훈련인 줄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 교육을 통하여 내 영혼이 잘되고 내 모든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랍비십니다. 선생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만 기르셨습니다. 그 가운데 베드로가 가장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언제나 잘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엉뚱하고 실수 많고 꾸중도 많이 들어서 제일 안될 것 같았지만 가장 훌륭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에 실수를 많이 저지른 제자입니다. 지옥과 천국을 왔다갔다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기독교 2천 년 역사에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됩니다. 그래서 로마에 가면 세계에서 제일 큰 성당 이름이 베드로 성당입니다. 또 로마 카톨릭에서는 교황을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또 양을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양을 모두 맡아서 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 하실 정도로 베드로는 기독교 역사에서 최고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실수를 반복합니다. 늘 넘어집니다.
그런데 넘어지면 일어나지를 못하고 일어나더라도 그 자리에 또 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 끊임없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도 존경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 번 넘어지면 열 가지를 배웁니다. 한 번 더러워지면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태어납니다. 한 번 퇴보하면 엄청나게 발전합니다. 주님을 떠났다가도 믿음으로 다시 일어납니다. 주님을 배반했다가도 뜨거운 사랑으로 회복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했다가도 회개하며 주님 앞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사단이 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성령님 충만한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어떠한 면으로도 완전하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자라나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넘어지면서도 걸음마를 배우고 점점 장성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자전거를 배우려면 많이 넘어집니다. 그러나 넘어지면서 넘어지지 않는 법을 배웁니다. 나중에는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잘 타게 됩니다. 자동차 운전도 처음에 한두 번은 가벼운 사고가 일어납니다. 전혀 사고가 없는 것도 위험합니다. “나는 무사고다, 나는 문제없다.”하고 우쭐대는 사람이 사고를 내면 큰 사고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인이 훌륭한 교인입니까 완전한 교인이 훌륭한 교인은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넘어질 수 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 회개하여 다시 일어서는 교인이 훌륭한 교인입니다. 할렐루야. “(롬9: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야곱을 사랑하셨습니까 야곱은 잘 넘어진 사람입니다. 야곱의 형 에서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에서보다 잘 넘어진 야곱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주시면서 얼마나 야곱을 사랑하셨습니까 유대 인의 나라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보십시오. 어떤 자녀는 문제없이 살아가고 훌륭하게 쭉쭉 뻗어나갑니다. 그러나 부모와 교제는 없습니다. 그냥 놔둬도 부모의 도움 없이 자기대로 잘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잘 아프고, 잘 넘어지고, 돈도 잘 없애는 자녀에게 정이 깊어집니다. 부족한 자녀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모를 찾고 의지하고 대화할 때 사랑이 오가는 것입니다. 누가 은혜를 받습니까 어떤 교인이 가장 좋은 교인입니까 어떤 교인이 크게 될 수 있습니까 실수해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교인이 죽죽 커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골에서 모내기를 해보면 옮겨 심은 볏모가 며칠 동안은 시들합니다. 그러나 뿌리만 내리면 쑥쑥 올라갑니다. 모판에 가만히 놔둬 보십시오. 아무 문제 없이 자랄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옮겨 심을 때는 아픔이 오고 어려움이 오지만 벼는 그 과정을 거쳐야만 제대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쑥쑥 자라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늘 깨달아야 합니다. 회개해야 됩니다. 뉘우쳐야 됩니다. 베드로는 일생 동안 뉘우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들으면서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회개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가정이나 자녀나 자신에게 환난이 있다면 베드로와 같이 빨리 하나님 앞에 울며 회개해야 됩니다.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은혜를 못 받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높이 올라갈수록 그대로 두시지 않습니다. 낮은 곳에 있으면 불쌍히 여기시지만 복을 받을수록 여러분을 지켜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매를 쳐도 유대 인을 먼저 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했기 때문에 심판이 먼저 오는 것입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됩니다. 늘 뉘우치는 사람이 성장합니다. 자라납니다. 어떤 목사님이 비판을 잘했습니다. 그저 앉으면 남을 비판하고 모든 설교가 비판의 대상입니다.
이 목사님은 모든 잘못은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의 잘못은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안됩니다. 그것도 자기에게 문제가 있어서 어려운 것이 아니고, 질적인 것은 무시하고 양적으로 부흥하는 교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보면 잘 압니다. 뾰족한 마음으로 늘 남을 비판하니까 이 목사님 별명을 촉새라고 지었습니다. 하루는 한 친구가 “야, 너는 말부터 고쳐야 된다. 항상 남을 욕하고 그렇게 쏘아대면 되겠느냐 모두 나쁜 놈이라고 하기 전에 너부터 고쳐야 된다”고 충고했습니다. 그제야 이 목사님이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자세입니다. 알려줄 때 깨닫는 것, 이것이 참 어렵습니다. 이것이 훌륭한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도 꾸중을 해보면 잘못을 깨닫는 아이가 참 드뭅니다. 빨리 뉘우치는 분이 훌륭하게 됩니다. 완전한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완전한 척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문제는 언제나 내 안에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는 조직을 고치고, 제도를 고치고, 법을 고치고, 정부 조직을 고치고, 세계를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런 것은 하나도 고치지 않으셨습니다. 고쳐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너의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상의 낙원이 아니라 너희 안에 낙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찬송가 208 장). 어떤 분은 길 가다가 넘어지면 어느 놈이 도로를 이렇게 닦았느냐고 화를 냅니다.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문제가 있든지 반드시 상대방에게서 원인을 찾아냅니다. 어떤 분은 자기 부인하고 싸우다가도 장모를 물고늘어지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왜 친정부모를 탓하고 원망합니까 곱게 길러서 보내주신 장모에게 고마워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다릅니다. 우리의 축복은 언제나 잘못이 내게 있다고 내 탓으로 돌릴 때 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면 죄인입니다. 회개할 일이 내게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찾아서 하나님 앞에 빨리 뉘우치고 회개하면 그 민족이나 가정이나 개인이나 교회나 아무 문제가 없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예수 믿으면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는 항상 옛사람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올바로 예수 믿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엄청난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뉘우치지 아니하는 뻣뻣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다윗이 회개할 때, 바울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빨리 회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같이 많이 실수한 사람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2-23절을 보면,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오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가다가 바람을 보고 의심하여 물에 빠지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즉시 주님을 붙잡았습니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수없이 왔다갔다했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주님 앞에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까지 얻고도,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고 할 때에 “선생님, 십자가를 지시면 어떻게 합니까 지지 마세요”라고 하다가 예수님께 “사단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에서 일순간에 사단으로 떨어졌습니다.
마태복음 17장 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니까 베드로가 그 광경을 보고 “주여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구름 속에서,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리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1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대로 가만히 있는데 베드로만 펄쩍 뛰면서 내가 선생님의 발을 씻겨야지 선생님이 어떻게 내 발을 씻기시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꼐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너의 죄를 위하여, 이 발보다 몇만 배 더러운 죄를 씻기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주옵소서”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하나도 맞는 게 없습니까 엉뚱합니다. 우리의 발보다 더 더러운 죄를 씻기려 주님은 오셨습니다. 주님 앞에 발을 내 놓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6장 31-3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것을 말씀하시니까 베드로는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기는 죽어도 주님을 안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11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하속들, 군인들이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왔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앞으로 나서서 칼을 빼더니 예수님을 붙잡는 사람의 귀를 탁 쳐서 땅에 떨어뜨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검을 집에 꽃으라” 하시면서 나무라십니다. 베드로는 한 가지도 예수님의 마음에 맞는 게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또 상상도 못할 일을 저지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받고 계신 그 순간에 베드로는 밖에서 구경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말이 안됩니다. “(마26:35)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베드로가 구경만 한 것입니다. 그때 한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고 합니다. 베드로는 “얘가 미쳤나, 사람 잡지 마라”하고 자리를 옮겨 다른 곳으로 피합니다. 베드로는 그 밤에 자리를 옮겨가며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때 닭이 “꼬꼬”하고 웁니다. 베드로는 “내가 또 넘어졌구나, 아버지, 용서해 주십시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하면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변변치 못하던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사도행전에서는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언제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전혀 새로운 베드로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잘못했을지라도 뉘우치는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반성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날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서로 내 잘못이라고 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렵던 가정에도 행복이 찾아옵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있더라도 여러분이 먼저 뉘우쳐 보십시오. 다 풀립니다. 안 풀리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잘했다. 잘났다” “그래 니 똥 굵어” 하고 뻣뻣하게 서로 맞설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나온 여러분, 우리가 부족한 것은 하나님께서 너무 잘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면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므로 늘 뉘우치며 나와야 됩니다. 지난주에 잘못한 것을 뉘우치고 나와야 됩니다. 회개하고 나와야 합니다. 회개를 미루지 아니하고 곧 깨닫고 돌아올 때 여러분의 환난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오래오래 메마르지 않습니다. 메마른 땅에 단비를 부어주시듯이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영원히 임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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