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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해사는 삶 (빌1:21-26)

본문

1,육채안에 거하는 인생
2,너희 믿음의 진보를 위하여
3,너희 자랑이 풍성해지기 위하여 21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이하다"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같여 있는 신세이다. 언제 어떤 일이 발생할런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몸으로 사형선고를 받을지 석방을 받을 것인지 알 수 없는 형편에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대하여 바울은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저 살든지 죽든지 기쁨으로 충만했던 것이다. 왜 사는 것이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 주변에는 죽음을 유익한 것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 공포에 쌓여 떨면서, 슬퍼하면서, 통곡하면서 무서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D.L. Moody는 임종시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세상이 멀어져 가는 것이 보인다.하늘이 열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고 했다. Edie 라는 분은 빌1;21절을 읽고 이런 글을 썼다.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내 생의 생이시요, 그리스도의 사랑은 내 생의 능력이시요, 그리스도의 뜻은 내 생의 법칙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은 나의 종말입니다" Damlen 은 임종시에 이렇게 말했다. "나 보다 더 멋 있게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을까" 라고 했다.
1,육체 안에 거하는 인생 "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일에나 또 아무에게나 부그럽지 않게 살기를 원했다. 또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기를 원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22-24절에서 바울은 고민을 하고 있다. 23절에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여기에서 두 사이라는 것은 크게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이다.
첫째는 두사이라함은 죽는 것과 사는 것, 생과 사 이 두 사이를 말한다.
둘째는 두사이라함은 그리스도와 너희들 사이에 자신이 끼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만이 이런 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이 두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두사이에서 더 관심이 있는 것은 23절의 말씀과 같이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라고 말한 것을 보아서 이 땅에 머물러 있는 것 보다는 차라리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고 했다. 죽어서 천국에 빨리 가고 싶은 것이 사도 바울의 소원이었다. 이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심정을 우리들이 어찌 다 알 수가 있겠나만은 조금이나마 짐작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으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사도 바울의 육신적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복음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 걸핏하면 잡혀가서 개 패듯 몽둥이 찜질을 당하기가 얼마였나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니고 하면서 죽을 고비를 밥먹듯 했던 사울의 생애가 아니가 그리고 바울은 그의 고백처럼 "나의 달려갈 길을 다 가고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믿음을 지켰으니" 라고함 같이 주님을 위하여 일도 할만큼 한 사람이다. 그러니 여기에 더 머물러 있는 것 보다는 당장에라도 주님 계시는 천국에 가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떠나서"라는 말은
첫째 쳐 놓았던 텐트의 로프를 풀고 말둑을 뽑아 다음의 장소로 떠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육신의 장막 집을 떠나서 저 천국을 향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항구에 정박했던 배가 로프를 풀고 다음 기항지로 출항을 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 문제를 푼다는 뜻도 있는 말이다. 죽음의 문제 ! 이 말들은 사도 바울이 이 세상을 더나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굳건한 소망이 있기에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런데 고민이 생기기 시작을 한 것이다. 23절 끝에 ".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 좋으나좋다"라고 못을 박지 않고 더 좋으나 하면서 말 꼬리를 달고 있다. 더 좋은 것이 있지만 . 말 꼬리를 끊지 못함이 고민이다. 더 좋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에 자신이 끼어 있다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이 있지만 더 좋은 것을 선듯 택하지 못하는 고민이 사도 바울에게 있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을 알면서도 선듯 선택을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었인가 24절이다.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더 좋은 것을 알면서도 선택하지 못했던 이유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 라 전적으로 "너희를"위해서 였던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게서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주었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너희를 "위해서 살기를 더 원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너희 때문에 나를 포기한 사람이다.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삶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한 기회다'라고 했다.
2,너희 믿음의 진보를 위하여 " 25절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물론 사도 바울이 죽음을 당치 않고 살아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빌립보 성도들은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제라도 주님의 부르심에 응할 준비가 다 되어 있는 사람이다. 죽을 준비는 물론 그의 표현대로 누구에게나 부그럽지 않게 살아 왔엇다. 그래서 주님께로 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인 줄 알지만 너희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 때문에 이 육신에 거할 것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결정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그 결심 하에서 살아 왔던 것을 다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너희 믿음의 진보를 위해서 너희 믿음의 기쁨을 위해서
3,너희 자랑이 풍성하기 위해서 " 26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으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나를 인하여 너희 자랑이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는 이 고백이야말로 사도 바울이 육신에 거하는 최고의 목적인 것이다. 자기 자신의 그 어떤 자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자랑거리를 만들어 주기 위하여 살았던 바울이다. 이것이 참다운 크리찬의 생활인 것이다. 이것이 에수 그리스도의 기뻐하시는 뜻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여러분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육신에 거하고 있는가 여러분들의 욕망, 계획, 소망은 과연 무었인가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나를 위한 삶의 자세에서 너를 위한 삶의 자리로 바구어야 한다. 사도 바울처럼 주님처럼 형제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이 더하도록 그리고 형제의 자랑거리가 나를 인하여 생겨질 수 있기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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