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똑똑해서 탈이야 (고전3:18-23)
본문
그리스 로마 신화에 보면 에리식톤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데메테르 여신에게 바쳐진 커다란 참나무를 벤 죄로 배고픔의 벌을 받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팠기 때문에 먹는 것 사느라고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나중에는 딸까지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자기 몸을 뜯어먹고 죽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자신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죽지 않고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음식을 먹는 것은 수단이고 몸은 목적이 됩니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자기 몸을 먹는다는 것은 수단을 위해서 몸을 희생하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수단은 충족되었을지 모르지만 목적은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배가 고파서 자기 몸을 뜯어먹은 에리식톤의 이야기는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고 뒤집혀진 가치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풍자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을 속인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자신을 속인다는 것 역시 자신의 살을 먹는 것과 다름이 없는 행위 아닙니까? 속인다는 것은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려 붙잡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서는 함정을 교묘하게 잘 만들어야겠지요. 허술하게 해가지고는 남을 속일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속이는 기술이 뛰어나다 보니까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함정에 다른 사람이 빠지는 것을 보고 좋아했겠지요. 이번에도 누군가가 빠졌습니다.
그런데 빠진 것을 보니까 바로 자기 자신이에요. 누군가를 속이는 데 성공하기는 했는데, 그 희생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좀 곤란하군요.
바울이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책망하는 대상은 고린도 교회에서 분쟁을 일으킨 주동자들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을 미루어 상황을 짐작해 보면 이 사람들은 꽤나 똑똑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부깨나 했는지 스스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치고 똑똑하지 않은 사람 있던가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정말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세상의 지혜와 능력은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교회를 통해서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어요.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 분열하거나 서로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세상에서 지혜 있고 재주 많다는 사람들이 교회에서도 지혜롭고 능력 있다는 듯이 해 놓은 일이 바로 분열과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해버린 것입니다. 지혜 있다고 하면서 저질러 놓은 것이 결국 자신을 속인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은 거예요. 앞에서도 바울이 누차 강조했지만,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근대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볼테르는 100년 안에 지구상에서 성경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근대는 이성이 눈을 뜨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이성의 눈으로 보니까 종교라는 것은 도무지 불합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이 시대가 도래하면서 비이성적인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세상의 지혜에 있어서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볼테르의 지혜는 하나님의 비밀과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 자만과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하는 데 커다란 방해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말썽을 일으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합당한 사람은 스스로 미련하게 된 사람입니다.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지요. 교회에서도 어쩌다가 목이 뻣뻣하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분들을 보게 되는데, 여러 가지 타이틀은 거창하게 달고 있을지 모르지만, 정말 정이 안 가요.
우리 자신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을 때 교회의 분쟁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 앞에 무릎 꿇기보다 자신의 지혜를 신뢰하고 자신의 의견을 앞장세울 때 교회는 분쟁에 휘말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또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면서,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모두 너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헷갈리기도 하지요?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바울이나 아볼로 같은 지도자들을 내세워서 패가 나뉜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데, 그렇게 바울을 자랑하고 아볼로를 자랑하는 것, 즉 특정인에게 충성을 하는 것이 지나쳐서 분쟁에 이른다는 것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나 아볼로나 베드로나 모두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유익과 믿음을 위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거든요. 목사님에게 실망하고 상처 받아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또 엉뚱한 목사 만나가지고 이단에 빠진다거나 우스꽝스러운 광신도가 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결국 영적 인생을 망쳐버린 경우 아닙니까? 그러니 신실하고 올바른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보세요. 그들은 바울을 목사님으로 받았어요. 그 다음에는 아볼로라는 뛰어난 지도자에게 배웠어요. 베드로가 고린도 교회에 와서 목회한 것은 아니지만,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베드로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스승들을 세 명씩이나 갖게 된 고린도 교회는 얼마나 축복된 교회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넘치는 축복에 빠져가지고 그것이 축복인 줄도 모르고 그 축복을 빌미삼아서 서로 나뉘어 싸우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바울과 아볼로, 그리고 베드로가 서로 의견이 달라서 싸웠다면 추종자들도 서로 싸워야겠지요.
그런데 지도자들은 서로 협력하고 서로를 위해서 희생하고 있는데 추종자들이 싸워야 할 이유가 뭐예요?
그들이 바울과 아볼로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 스승들의 가르침을 제디로 따랐더라면 그렇게 나뉘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더 연합하고 사랑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을 때 분쟁과 시기는 방지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가진 것들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 분열하고 싸우는 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말하기를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계가 왜 우리의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했습니다. 후사라는 말은 상속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 우리의 것이라는 논리이지요.
원래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그것을 인간에게 주지 않으셨습니까?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책임도 주셨지 않아요? 꼭 그것을 지배해야 한다기보다 하나님의 창조를 관리하는 책임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어떤 물질적인 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신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된 영생입니다. 이 생명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약속에 근거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생명이 우리의 것이라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죽음은 또 어떻다는 것입니까? 죽음이 우리 위에 왕노릇 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내려가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우리 역시 죽음을 정복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두 죽음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에게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죽음을 통과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의 기능은 주님께로 가는 관문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주님이 계시는 영원한 곳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했어요. 죽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유익한 것이라고 했어요. 우리가 마지막 심판날까지 살아 있다가 휴거되지 않는 한 죽음을 통과해서 주님께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까지도 우리의 것이라는 말이지요.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 모두 우리의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을 살면서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쁜 일이 있는가 하면 슬픈 일도 있고, 건강한 때와 병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고 믿음으로 성장케 하시는 과정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인생입니다. 또 장래 것은 우리가 이생을 마치고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하늘에서의 축복된 삶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 주어졌고 우리가 똑같이 하나님의 상속자로 살고 있는데, 서로 나뉘어 싸워야 할 이유가 뭐냐는 것이지요. 우리가 교회 안에서 분쟁하고 서로 원수처럼 살다가 천국에 가서 함께 살 때 참 곤란하지 않겠어요?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런 생각을 해서라도 교회 안에서 사람을 자랑하며 분쟁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누구의 소유인가 하는 것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교회 안의 분쟁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의 소유이고, 내 눈에 가시 같은 아무개 집사도 그리스도의 소유란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가 뭔가요?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표식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이 군인의 표식이니까요.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들고 가는 것을 보면 학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표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 교회 안에서 바울파와 아볼로파가 나뉘어 싸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겠지요.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가슴에 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 삼아 거주하시잖아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참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한 마음으로 함께 그리스도의 몸된 이 교회를 이루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자기 몸을 먹는다는 것은 수단을 위해서 몸을 희생하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수단은 충족되었을지 모르지만 목적은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배가 고파서 자기 몸을 뜯어먹은 에리식톤의 이야기는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고 뒤집혀진 가치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풍자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을 속인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자신을 속인다는 것 역시 자신의 살을 먹는 것과 다름이 없는 행위 아닙니까? 속인다는 것은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려 붙잡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서는 함정을 교묘하게 잘 만들어야겠지요. 허술하게 해가지고는 남을 속일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속이는 기술이 뛰어나다 보니까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함정에 다른 사람이 빠지는 것을 보고 좋아했겠지요. 이번에도 누군가가 빠졌습니다.
그런데 빠진 것을 보니까 바로 자기 자신이에요. 누군가를 속이는 데 성공하기는 했는데, 그 희생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좀 곤란하군요.
바울이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책망하는 대상은 고린도 교회에서 분쟁을 일으킨 주동자들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을 미루어 상황을 짐작해 보면 이 사람들은 꽤나 똑똑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부깨나 했는지 스스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치고 똑똑하지 않은 사람 있던가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정말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세상의 지혜와 능력은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교회를 통해서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어요.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 분열하거나 서로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세상에서 지혜 있고 재주 많다는 사람들이 교회에서도 지혜롭고 능력 있다는 듯이 해 놓은 일이 바로 분열과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해버린 것입니다. 지혜 있다고 하면서 저질러 놓은 것이 결국 자신을 속인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은 거예요. 앞에서도 바울이 누차 강조했지만,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근대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볼테르는 100년 안에 지구상에서 성경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근대는 이성이 눈을 뜨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이성의 눈으로 보니까 종교라는 것은 도무지 불합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이 시대가 도래하면서 비이성적인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세상의 지혜에 있어서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볼테르의 지혜는 하나님의 비밀과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 자만과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하는 데 커다란 방해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말썽을 일으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합당한 사람은 스스로 미련하게 된 사람입니다.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지요. 교회에서도 어쩌다가 목이 뻣뻣하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분들을 보게 되는데, 여러 가지 타이틀은 거창하게 달고 있을지 모르지만, 정말 정이 안 가요.
우리 자신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을 때 교회의 분쟁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 앞에 무릎 꿇기보다 자신의 지혜를 신뢰하고 자신의 의견을 앞장세울 때 교회는 분쟁에 휘말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또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면서,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모두 너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헷갈리기도 하지요?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바울이나 아볼로 같은 지도자들을 내세워서 패가 나뉜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데, 그렇게 바울을 자랑하고 아볼로를 자랑하는 것, 즉 특정인에게 충성을 하는 것이 지나쳐서 분쟁에 이른다는 것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나 아볼로나 베드로나 모두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유익과 믿음을 위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거든요. 목사님에게 실망하고 상처 받아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또 엉뚱한 목사 만나가지고 이단에 빠진다거나 우스꽝스러운 광신도가 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결국 영적 인생을 망쳐버린 경우 아닙니까? 그러니 신실하고 올바른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보세요. 그들은 바울을 목사님으로 받았어요. 그 다음에는 아볼로라는 뛰어난 지도자에게 배웠어요. 베드로가 고린도 교회에 와서 목회한 것은 아니지만,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베드로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스승들을 세 명씩이나 갖게 된 고린도 교회는 얼마나 축복된 교회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넘치는 축복에 빠져가지고 그것이 축복인 줄도 모르고 그 축복을 빌미삼아서 서로 나뉘어 싸우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바울과 아볼로, 그리고 베드로가 서로 의견이 달라서 싸웠다면 추종자들도 서로 싸워야겠지요.
그런데 지도자들은 서로 협력하고 서로를 위해서 희생하고 있는데 추종자들이 싸워야 할 이유가 뭐예요?
그들이 바울과 아볼로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 스승들의 가르침을 제디로 따랐더라면 그렇게 나뉘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더 연합하고 사랑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을 때 분쟁과 시기는 방지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가진 것들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 분열하고 싸우는 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말하기를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계가 왜 우리의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했습니다. 후사라는 말은 상속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 우리의 것이라는 논리이지요.
원래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그것을 인간에게 주지 않으셨습니까?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책임도 주셨지 않아요? 꼭 그것을 지배해야 한다기보다 하나님의 창조를 관리하는 책임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어떤 물질적인 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신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된 영생입니다. 이 생명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약속에 근거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생명이 우리의 것이라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죽음은 또 어떻다는 것입니까? 죽음이 우리 위에 왕노릇 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내려가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우리 역시 죽음을 정복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두 죽음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에게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죽음을 통과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의 기능은 주님께로 가는 관문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주님이 계시는 영원한 곳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했어요. 죽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유익한 것이라고 했어요. 우리가 마지막 심판날까지 살아 있다가 휴거되지 않는 한 죽음을 통과해서 주님께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까지도 우리의 것이라는 말이지요.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 모두 우리의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을 살면서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쁜 일이 있는가 하면 슬픈 일도 있고, 건강한 때와 병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고 믿음으로 성장케 하시는 과정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인생입니다. 또 장래 것은 우리가 이생을 마치고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하늘에서의 축복된 삶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 주어졌고 우리가 똑같이 하나님의 상속자로 살고 있는데, 서로 나뉘어 싸워야 할 이유가 뭐냐는 것이지요. 우리가 교회 안에서 분쟁하고 서로 원수처럼 살다가 천국에 가서 함께 살 때 참 곤란하지 않겠어요?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런 생각을 해서라도 교회 안에서 사람을 자랑하며 분쟁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누구의 소유인가 하는 것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교회 안의 분쟁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의 소유이고, 내 눈에 가시 같은 아무개 집사도 그리스도의 소유란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가 뭔가요?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표식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이 군인의 표식이니까요.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들고 가는 것을 보면 학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표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 교회 안에서 바울파와 아볼로파가 나뉘어 싸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겠지요.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가슴에 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 삼아 거주하시잖아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참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한 마음으로 함께 그리스도의 몸된 이 교회를 이루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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