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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죽으리나 먹고 마시고 즐기자 (고전15:29-34)

본문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으로 사도 바울이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말씀이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중에 일부로서 교리적인 이론이나 논리를 떠나 실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실례로 들어 부활의 확신을 피력한다.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부르짖는 인간 최대의 쾌락이요 즐거움이다.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 그들이 소망하는 기쁨이요 행복이다.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이렇게 부르짖는 사람은 이사야 시대의 유대 백성이다(사22:13)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 하는 부자이다(눅12:19) 또 오늘 본문의 부활이 없다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진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다.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진 자는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가 아니라, 내일 우리의 부활이 있으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외친다. 내일의 부활이 있기에 오늘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사도 바울의 확신에 찬 신앙고백이다. 이 고백이 우리 성도들 모두의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내일이 없는 자, 부활의 산 소망이 없는 자의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 하는 부르짖음의 의미를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 보고져 한다.
1.범인(凡人)들이 하는 말이다. 본문 32절에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했다. 범인(凡人)이란 평범한 사람, 일반적인 사람, 보통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범인처럼”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대로 하면”이란 뜻이다. 비록 부활의 산 소망이 없더라도 자기 나름대로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도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하지 않는다. 나름대로의 그 소망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소망을 이루어 낸다.
1.순간 주의 범인들 곧 꿈이 없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순간 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한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한 평생을 쏟아 붓는 사람도 있다. 한 평생 모은 재산도, 한 평생 지켜 온 가정도, 한 평생 가꾸어 온 명예도, 한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던져 버린다. 한 순간의 즐거움에 취해 그들이 하는 말이다. “난 참 바보같이 살았네!” “내 한 평생 이런 즐거움을 맛보지 못했노라” “이 순간 내가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다” 모두가 순간 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보통 사람의 가슴 속에는 이런 사고방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한 탕 주의”가 우리 주위에서 난무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내일이 없다. 그래서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한다.
2.대가 없는 일 범인들 곧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가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하면 하는 것만큼 손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을 돕는 이웃 사랑이 식어 간다. 밝은 대낮, 대로에서 치한들에게 낭패를 당해도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이 없는 세상이다. 자기 혼자서 해쳐 나가야 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판을 친다. 개인주의가 판을 친다. 그러나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진 자는 눈에 보이는 대가가 없더라도 내일이 있기에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노라고 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다.
3.현실에 안주 범인들 곧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주어진 현실 속에 안주하려 한다. 위험 부담이 있는 새로운 일을 펼치려 하지 않는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대장부 살림살이가 이만하면 그만이지” 한다. 전혀 내일이 없고, 비전(Vision)이 없는 사람들이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오늘의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며, 순간적인 쾌락만 즐기고, 눈에 보이는 대가만 쫓는 내일에 대한 비전도, 내일에 대한 준비도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외친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고했다.
2.육신의 소욕을 위해 사는 자의 노래 본문 32절에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했다.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이는 내일이 없는 자, 부활의 산 소망이 없는 자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곧 육신을 위해 살며 육신의 소욕을 위해 사는 자들의 노래이다. 우리 인간은 본성적인 욕망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학자들은 이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곧 식욕, 성욕, 명예욕이다.
1.식욕 본문 32절에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했다. 우리 인간의 먹고자 하는 욕망은 대단하다. 그 욕망을 채우는 즐거움도 대단하다. 그래서 이 욕망이 걸림돌이 되어 사탄의 유혹에 인류의 조상 아담이 넘어갔다(창3:5) 식욕은 우리 인생의 기본적인 욕구이다. 그래서 이런 말도 생겼다. “살기 위해서 먹느냐 아니면 먹기 위해서 사느냐” 분명히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인데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바라보면 그렇지 않는 면도 보인다. 더러는 먹기 위해 사는 것 같은 모습도 보게 된다.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 먹고 마시는 것으로 즐기자는 말이다. 식욕을 채우는 즐거움이다. 그래서 “식도락”이란 말이 생겨났고, “미식가”란 말도 생겼다. 참으로 순간을 즐기는 자들의 어리석음이다. 아무리 맛있는 고기 반찬도 매 끼니마다,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먹다 보면 그 고기 맛도 맛이 아니다. 처음 얼마간 지나면 시큰둥해 진다. 불완전한 인간의 느낌(Feeling)에 의한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입이, 혀가, 코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느낌(Feeling)이 표준이 될 수 없다.
2.성욕 우리 인간이 가진 본능적인 욕구이다. 누가 가르친 것도,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닌 본성적으로 알고 느끼는 욕구이다. 이 또한 인간의 느낌(Feeling)에 의한 욕구이기에 완전하지 못하다. 성욕을 채우는 즐거움도 식욕을 채우는 즐거움과 같아서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이 완전하지 못한 순간적인 즐거움에 빠져 숱한 죄악을 저지른다. 거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인류사를 어둡게 물들이고 패망 길로 향하게 한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불태운 죄악이요(창19장) 봄베이 최후의 날을 맞게 한 죄악이다. 또한 우리 인류 역사의 최후의 날을 맞게 할 죄악이다
3.명예욕 제 잘난 맛에 사는 게 인생이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가진 명예, 아니 지킬 명예가 있는 법이다. 다시 말해서 자존심이라 할 수 있겠다. 자존심 상하는 말 한 마디에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한다. 그래서 명예를 얻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부정한 방법도 마다 않고 총 동원한다. 이것 또한 순간의 즐거움이요 완전한 것이 못됨을 역사가 밝히 일러준다. 이처럼 인간의 불완전한 느낌(Feeling)에 표준을 두고, 인간의 소욕을 채우고자 하는 이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온전치 못한 것은 폐하여 지는 법이다(고전13:10) 우리 인간의 육신의 소욕은 채울 수도, 채워지지도 않는다. 다만 끝날 뿐이다. 이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 이 육신이 죽는 그날에 육신의 소욕이 끝나는 것이다.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 채울 수도 채워지지도 않는 육신의 소욕, 완전하지도 영원하지도 못한 육신의 소욕, 그 소욕을 쫓아가는 자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3.죽음을 향해 달리는 자의 절규 본문 32절에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했다.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 부활의 산 소망이 없는 자들은 왜 이런 노래를 부른다는 말인가
1.내일 죽으리니 그 이유를 본문 말씀은 “내일 죽을 터이니”라고 밝힌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내일이 없다. 죽음이 기다릴 뿐이다. 어제를 살았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아야 할 인생인데 내일이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내일은 죽음이다. 그래서 부활의 산 소망이 없는 자들은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이다.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 소망 없는 저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저들의 부르짖는 절규이다.
2.삶의 무의미 내일도 없고, 소망도 없고, 기다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저들 그들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 인생의 삶은 즐기는 것이 아니다. 그 삶 속에 의미를 심는 것이다. 내 삶 속에 심는 의미의 크기만큼 내 삶의 값이 매겨진다. 고후 6:2절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했다. 보라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 했다. 지금이 언제인가 구속사적인 입장도 있겠지만, 지금은 바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이다. 내 육신의 생명이 다하고 나면 구원의 길은 더 이상 없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도록 여호와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것은 “지금” 내 삶 속에 의미를 심으라는 뜻이다. 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삶에 의미를 심지 못한다. 의미를 심지 못한다는 말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다. 구원을 얻지 못함은,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인데, 그 “‘지금”에 의미를 심지 못하고 허비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에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 노래 부르며 육신의 소욕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허비할 시간이 없다. 값지게 사용하자.
3.방종한 생활 죽음을 향해 달리는 자, 소망도 없이 사는 자, 삶의 의미도 없이 살아가는 자, 이들의 삶에 공통적인 것은 방종한 생활이다. 바로 끈 떨어진 연,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생활이다. 방종한 생활, 그것은 윤리도, 도덕도 없다는 말이다. 최소한의 예의도, 규범도 없다. 법도, 질서도 없다. 기본 양심도, 인격도 없는 생활이다. 죽음을 향해 달리는 자. 내일이 없고, 삶의 의미가 없고, 방종한 생활에 빠진 자, 이들에게 소망의 닻이 필요하다(히6:19) 바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본문 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다. 부활의 산 소망이 있는 자, 소망의 닻이 있는 자, “지금”의 삶에 의미를 심는 자, 육신의 소욕이 아닌 성령님의 소욕을 쫓아 달리는 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 이런 사람들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외친다.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삶이 아니다. 날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눅9:23)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를 따르는 자이다. 내일 죽으리니먹 고 마시고 즐기자! 육신의 소욕을 위하여, 순간의 즐거움을 위하여 자신을 버리는 자가 되지 말라. “내일 죽으리니” 죽음을 향하여 달리는 자가 되지 말자. “지금”에, 오늘의 삶에 의미를 심는 자가 되라.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다. “지금” 주께 나아오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다(행16:3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다(롬10:13) 주께 나와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고,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얻어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의 삶을 버리자. 부활의 산 소망이 있기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삶을 살아가자. 죽음도 두렵지 않는 참으로 소망이 넘치는 기쁨과 즐거움의 삶이다.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 삶에 의미 없는 자의 절규요, 소망 없는 자의 부르는 노래이다. 순간의 즐거움에 자신을 맡기는 자의 외침이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씀한다. 본문 33-34절에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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