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실인 삼손 (삿13:1)
본문
사사기 13장에서 16장까지는 삼손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넉장에 걸쳐 기록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삼손이 대단히 위대했던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삼손이 위대한 영웅이거나 신앙적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멧세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많은 비중을 두고 그를 다루고 있습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를 잉태하였을 때 부모에게 천사가 나타나 ‘너희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다. 그 머리를 깎지 말라’ 명령했습니다. 또 그 태어날 아이 뿐 아니라 그 어머니에게도 ‘독주와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포도 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을 다 지킬 것이니라(삿 13:13)” 나실인이 아닌 그의 어머니에게 이렇듯 강력하게 말씀했다면 본인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강조되는 것입니까 구약에 나실인은 오늘 신약시대에 와서는 누구를 가르칩니까 나실인은 하나님의 일에 쓰시기 위해서 특별히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거룩한 삶이 요구되었습니다. 오늘에는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심을 입은 구원함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들이 다 영적인 의미에서 나실인 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깨달은 중요한 깨달음이 만인 제사장입니다. 이 이론은 어떤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되었으니 우리 모두에게 맡기신 사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나실인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성도라 부릅니다. 구약에는 성직자들이 다 있지만, 오늘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 거룩한 왕 같은 제사장이요, 선지자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구별함을 받은 성도입니다. 우리는 나실인입니다.
오늘 나실인된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를 본문 말씀을 통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여러 명의 나실인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특별히 삼손, 사무엘, 세례요한 들입니다. 이들은 다른 나실인들과 달리 평생을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입니다. 사무엘이 어머니 한나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라면 삼손과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허락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에게는 무엇을 요구합니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삿 13:5)”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삿 13:7)” 나실인에게는 다음의 한 가지를 기억해야합니다. 또 세 가지가 금지되었습니다. 먼저 기억해야할 것은 나실인은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구별된 자들입니다. 이들을 구별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특별히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구별하시고 그 가운데서 또 구별하여 나실인을 세웠지만,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 내어 구별된 삶을 살게하십니다. 삼손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구별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을 정복해야할 사사 삼손이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 졌으며 함께 죄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악한 사단의 역사로 심히 혼탁해진 세상에서 나와라 하십니다. 다음으로 준수해야할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적으로 보면 지켜 살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구별된 삶을 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합니다. 그런 다음에 준수할 것을 순종할 수 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정한 것을 먹지 말 것. 머리를 깎지 말 것을 말씀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면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 하는데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지켜도 율법주의가 되고, 그 율법주의는 나중에는 방탕주의가 되고맙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요구를 하셨는지 살펴봅시다.
첫째, 왜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습니까 성경에서 술은 영적인 의미를 가리키지만, 독주, 그 자체를 말씀하기도 합니다. 믿는 성도로서 술 마시는 것을 금하신 것은 우리들로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성경에 술을 언급하지 않았다해도 성도의 삶에 술이 있으면 방탕으로 돌아가기 쉬웠을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바울은 왜 성령님충만과 술 취하는 것을 대비시키셨습니까 이는 정반대이면서 동시에 비슷한 일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모두 충만입니다. 무엇으로 충만입니까 무엇으로 흘러 넘칩니까 이것은 그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이야기는 ‘너는 이미 주인이 있는 몸이니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누구의 소유인가를 밝히기 위해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신 것이다. 술 취하는 것은 세상의 문화에 젖어서 하나님도 진리도 잊어비리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제사법을 통해 하나님을 부정한 것과 엄격하게 구별되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통 주검은 부정한 것으로 인식되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무엇이 부정한 것입니까 시체를 만지는 것이 부정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부정한 것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마 15:1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 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우리들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머리를 깍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킴으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인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그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2-14)” 남자가 머리를 깎고 여자가 머리를 기르는 가장 큰 이유는 남녀관계에서 남자가 질서상 ‘대표’라는 것입니다. 남자가 머리를 길게하지 않게 되어 있었고, 여자는 머리를 짧게 깎지 않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면 안됩니다. 자기가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실인은 머리를 자르지 말도록 했습니다. 곧 머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나실인이란 전부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 누구 수하에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는 머리가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성도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해야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거룩한 삶입니다. 그런 자기 신분임을 밝히기 위해 나실인 제도를 내었습니다. 금하신 것을 지키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께 구별된 자라는 증거가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속에 빠지지 않고, 죄악을 행치 않고, 또 하나님께 철저한 순종의 생활을 보일 때에 구별된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본인이 금지된 일을 하지않고 남에게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삼손이란 이름의 뜻은 ‘강한 자’입니다.
사사기 14장에서 삼손은 블레셋에 내려가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스라엘이나 블레셋의 잔치에 술이 빠지지 않습니다. 삼손은 술을 입에 댄 것이 아니라 퍼 마신 것입니다. 또 삼손은 14장에서 사자를 죽이고 그 몸에서 꿀을 꺼내어 마셨습니다. 이것은 시체를 먹는 부정한 것을 만지고 먹은 것입니다. 삼손 그는 나실인으로 금해야 할 일을 모두 다 해버린 셈이다. 그러나 16을 보면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16:17)” 이 말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금한 일을 모두 다 해 놓고 ‘머리만 자르지 않으면 나는 나실인이다’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실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인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이방여인과 결혼은 금기사항이었습니다. 처음이라면 이해가 어느 정도 되겠으나 들릴라는 벌써 두 번째 이방여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최소한 머리는 안 잘랐기 때문에 나실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외식하는 주일 신자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모든 죄를 다 지으면서 최소한 나는 이것을 하기 때문에 신자라 생각합니다. 주일에 교회는 나가니까, 십일조는 했으니까 하는 식입니다. 다행입니까 그가 신자라고 인식하는 것이 고맙기도 하지는 그의 신앙생활이 끝내 변하지 않는다면 삼손과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삼손이 등장해서 하는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지금 사사 시대에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삼손’이라는 것입니다. 삼손은 그 이름의 뜻이 “찬란한 태양”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신앙 행태를 살펴보면 삼손을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삼손과 같은 이름과 신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내 생애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삼손과 같을 것입니다.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집이 다 내려가서 그 시체를 취하여 가지고 올라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 아비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년을 지내었더라(16:31)”
이 말씀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말씀은 그가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년을 지내었다는 말입니다. 그의 사사로서의 삶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차이를 보입니다. 보통 사사의 등장과 그의 죽음을 마무리 할 때 사사기가 쓰는 일반적인 평가는 ‘그가 사사로 몇 년을 지내었고 그가 사사로 있는 몇년 동안 이스라엘이 태평하였더라’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가 사사로 이십년을 지내었을 뿐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적은 없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결코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삼손은 개인적으로 싸우지 이스라엘로 싸우지 않는다. 수수께끼로 삼십명을 죽이는 일도, 여우 꼬리에 불을 붙여 블레셋의 농작물을 망치는 것도 여인 때문에, 개인적 원한 때문에 저지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삼손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쓰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본문에서 알게됩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 16:28)” 그러나 삼손의 최후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의 생애 가운데 기도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단지 그가 이제 최후를 하나님께 맡기면서 기도했습니다. 그 때에 놀라운 역사로서 블레셋을 치게하십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나실인으로 살아야합니다.
오늘 나실인된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를 본문 말씀을 통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여러 명의 나실인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특별히 삼손, 사무엘, 세례요한 들입니다. 이들은 다른 나실인들과 달리 평생을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입니다. 사무엘이 어머니 한나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라면 삼손과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허락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에게는 무엇을 요구합니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삿 13:5)”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삿 13:7)” 나실인에게는 다음의 한 가지를 기억해야합니다. 또 세 가지가 금지되었습니다. 먼저 기억해야할 것은 나실인은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구별된 자들입니다. 이들을 구별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특별히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구별하시고 그 가운데서 또 구별하여 나실인을 세웠지만,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 내어 구별된 삶을 살게하십니다. 삼손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구별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을 정복해야할 사사 삼손이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 졌으며 함께 죄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악한 사단의 역사로 심히 혼탁해진 세상에서 나와라 하십니다. 다음으로 준수해야할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적으로 보면 지켜 살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구별된 삶을 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합니다. 그런 다음에 준수할 것을 순종할 수 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정한 것을 먹지 말 것. 머리를 깎지 말 것을 말씀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면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 하는데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지켜도 율법주의가 되고, 그 율법주의는 나중에는 방탕주의가 되고맙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요구를 하셨는지 살펴봅시다.
첫째, 왜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습니까 성경에서 술은 영적인 의미를 가리키지만, 독주, 그 자체를 말씀하기도 합니다. 믿는 성도로서 술 마시는 것을 금하신 것은 우리들로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성경에 술을 언급하지 않았다해도 성도의 삶에 술이 있으면 방탕으로 돌아가기 쉬웠을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바울은 왜 성령님충만과 술 취하는 것을 대비시키셨습니까 이는 정반대이면서 동시에 비슷한 일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모두 충만입니다. 무엇으로 충만입니까 무엇으로 흘러 넘칩니까 이것은 그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이야기는 ‘너는 이미 주인이 있는 몸이니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누구의 소유인가를 밝히기 위해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신 것이다. 술 취하는 것은 세상의 문화에 젖어서 하나님도 진리도 잊어비리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제사법을 통해 하나님을 부정한 것과 엄격하게 구별되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통 주검은 부정한 것으로 인식되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무엇이 부정한 것입니까 시체를 만지는 것이 부정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부정한 것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마 15:1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 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우리들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머리를 깍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킴으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인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그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2-14)” 남자가 머리를 깎고 여자가 머리를 기르는 가장 큰 이유는 남녀관계에서 남자가 질서상 ‘대표’라는 것입니다. 남자가 머리를 길게하지 않게 되어 있었고, 여자는 머리를 짧게 깎지 않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면 안됩니다. 자기가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실인은 머리를 자르지 말도록 했습니다. 곧 머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나실인이란 전부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 누구 수하에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는 머리가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성도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해야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거룩한 삶입니다. 그런 자기 신분임을 밝히기 위해 나실인 제도를 내었습니다. 금하신 것을 지키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께 구별된 자라는 증거가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속에 빠지지 않고, 죄악을 행치 않고, 또 하나님께 철저한 순종의 생활을 보일 때에 구별된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본인이 금지된 일을 하지않고 남에게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삼손이란 이름의 뜻은 ‘강한 자’입니다.
사사기 14장에서 삼손은 블레셋에 내려가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스라엘이나 블레셋의 잔치에 술이 빠지지 않습니다. 삼손은 술을 입에 댄 것이 아니라 퍼 마신 것입니다. 또 삼손은 14장에서 사자를 죽이고 그 몸에서 꿀을 꺼내어 마셨습니다. 이것은 시체를 먹는 부정한 것을 만지고 먹은 것입니다. 삼손 그는 나실인으로 금해야 할 일을 모두 다 해버린 셈이다. 그러나 16을 보면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16:17)” 이 말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금한 일을 모두 다 해 놓고 ‘머리만 자르지 않으면 나는 나실인이다’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실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인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이방여인과 결혼은 금기사항이었습니다. 처음이라면 이해가 어느 정도 되겠으나 들릴라는 벌써 두 번째 이방여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최소한 머리는 안 잘랐기 때문에 나실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외식하는 주일 신자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모든 죄를 다 지으면서 최소한 나는 이것을 하기 때문에 신자라 생각합니다. 주일에 교회는 나가니까, 십일조는 했으니까 하는 식입니다. 다행입니까 그가 신자라고 인식하는 것이 고맙기도 하지는 그의 신앙생활이 끝내 변하지 않는다면 삼손과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삼손이 등장해서 하는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지금 사사 시대에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삼손’이라는 것입니다. 삼손은 그 이름의 뜻이 “찬란한 태양”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신앙 행태를 살펴보면 삼손을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삼손과 같은 이름과 신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내 생애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삼손과 같을 것입니다.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집이 다 내려가서 그 시체를 취하여 가지고 올라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 아비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년을 지내었더라(16:31)”
이 말씀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말씀은 그가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년을 지내었다는 말입니다. 그의 사사로서의 삶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차이를 보입니다. 보통 사사의 등장과 그의 죽음을 마무리 할 때 사사기가 쓰는 일반적인 평가는 ‘그가 사사로 몇 년을 지내었고 그가 사사로 있는 몇년 동안 이스라엘이 태평하였더라’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가 사사로 이십년을 지내었을 뿐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적은 없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결코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삼손은 개인적으로 싸우지 이스라엘로 싸우지 않는다. 수수께끼로 삼십명을 죽이는 일도, 여우 꼬리에 불을 붙여 블레셋의 농작물을 망치는 것도 여인 때문에, 개인적 원한 때문에 저지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삼손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쓰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본문에서 알게됩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 16:28)” 그러나 삼손의 최후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의 생애 가운데 기도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단지 그가 이제 최후를 하나님께 맡기면서 기도했습니다. 그 때에 놀라운 역사로서 블레셋을 치게하십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나실인으로 살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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