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사람들의 오해 (막6:1-6)
본문
예수님은 30년간을 나사렛에서 살았습니다. 나사렛은 팔레스타인 북부 갈릴리의 고지대인 구릉에 위치한 인구 23,000의 조그만 도시입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30년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나사렛은 무역업을 하는 대상들이 자주 왕래하는 길목에 위치한 동네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외국 문물을 접한 곳입니다. 그래서 엄격한 유대인들은 나사렛은 순수성을 상실한 불순한 도시라고 여겼습니다. 그같은 선입견이 요한복음 1:46을 보면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기 보면 “(요1: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이미 나사렛을 순수성을 상실한 도시로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어려서부터 30년간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에 대해서만큼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자라나는 과정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가정 형편, 그의 형제들, 그리고목수로서 살아가는 그 빈약한 가정 형편을 이 사람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집안의 청년 예수가 어느 날 갑자기 선지자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고향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저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저가 그 가난한 집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하고 들으려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예수를 불신했고,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향에서 더 이상 일을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서 일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를 불신하고 배척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원인을 보면 오늘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하는 것과 아주 흡사합니다.
첫째 이유는 예수님의 육체적인 면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것이 아니고 목수의 아들로만 봅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의 내적인 신성은 보지 않고 외적인 면만을 보고 판단했습니다. 이것이 아주 무서운 편견입니다. 이 같은 편견이 있는 한 상대를 정확히 보고, 정확히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보아도 깊이 감취어진 곳까지는 볼 수가 없습니다. 편견을 가지고 보는 한 그 속에 감취어진 신성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것이 가난했던 목수의 아들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한 것입니다. 오늘도 사람들간에 자꾸만 오해가 생기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보되 겉만 보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해버리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격을 보는 것이 아니고, 출신을 먼저 보고, 직업을 보고, 배경을 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진실한 면은 무시되거나 아예 보이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저게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이 말은 사람을 아주 무시하는 말입니다. 당시 목수의 직업은 아주 비천한 직업이었습니다. 거기다 그 집안이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 가난한 집 아들이 돌아다니며 기적을 일으키고, 가르친다고, 복음을 전한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저게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하고 조롱부터 했습니다. 우리들이 사람이나 사물을 정확히 이해하고 판단하려고 하면 이 같은 선입견이 없어야 합니다. 이 선입견이 있는한 그 시각은 정확할 수가 없습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헌옷을 즐겨 입고, 헌 모자를 눌러 쓰고 다니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고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았고, 가는 곳마다 쫒겨나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무시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제자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헌 모자 속에는 우주의 지혜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라” 사람들은 그 헌 모자만을 보았지 그 속에 들어 있는 그의 지혜는 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의 메리 여왕이 민정 시찰을 하기 위해서 허름한 옷을 입고 농가를 방문했는데 그때 그만 비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우산 좀 하나 빌려 달라고 하니까 그 부인이 다락에서 우산을 가져 오는데 여러 개 중에서 가장 낡은 것 하나를 골라서 빌려 주더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다음 날 왕실 근위대장이 그 우산을 가지고 이 농가를 찾아왔습니다. “어제 이 우산을 빌려 간 분이 메리 여왕님이십니다.” 그때 이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한 말이 있습니다. “팔자 고칠 뻔했는데.” 이 선입견이 무섭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예수를 볼 때 가난했던 것만 보았습니다. 목수의 아들이었던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배척했고, 거부했고, 받아들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느 곳보다도 먼저 복음을 받아야 될 특권을 받았음에도 그 특권을 잃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부지 중에 하나님을 영접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기생 라합도 천사를 영접하여 그와 가정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하고 사람들은 감탄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보니까 가르치는 것이 서기관들보다 나았습니다. 병자들을 고치는 것을 보니까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탄한 나머지 외칩이다. “저가 배운 것이 없는데 어디서 저런 말이 나오고, 지혜가 나오는가. 저가 목수의 아들인데 어디서 저런 권능이 나오는가.”하고 의아해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신성을 보았습니다. 언변도 남 같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병자를 고치는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감탄하고, 그 신비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놀란 것까지는 좋은데 그 신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저 사람이 목수의 아들인데, 저 사람이 배우지 못한 마리아의 아들인데”하고 그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눈이 열리지를 않아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눈이 있으면 무얼 합니까 눈이 있어도 보지를 못하면 그것은 소경입니다. “(요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고 했습니다. 빛이 있으면 무얼 합니까 보지 못하면 그만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방 사람들도 그 빛을 보았습니다. 동방 박사들도 그 빛을 보았습니다. 들의 목자들도 이 빛을 보았습니다. 가나안 여자도, 이방인 백부장도 이 빛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한 동네에서 30년 동안이나 함께 살았던 나사렛 사람들은 그 빛을 못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입견 때문에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 들어 있는 신성도, 권능도, 신비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본다는 것이 고작해서 가난했던 것만을 보았고, 목수의 아들인 사실만을 보고 판단을 했습니다. 이 눈이 어두우면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세계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못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다는 고리가 먹고 사는 이야기만 하게 되고, 육신의 이야기만 하게 되고, 세상의 이야기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가까이 와서 정탐꾼 12명을 선발해서 가나안에 들여 보냅니다. 열두 사람이 가나안 땅에 잠입을 해서 지형 정찰을 합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지역을, 똑같이 정찰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보고하는 것을 보면 그 견해가 극과 극입니다. 열두 사람 중 10명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내립니다. 그 땅은 삭막한 땅이고, 그 곳 사람들은 키가 크고, 힘이 세고, 우리가 상대하기에는 불가능하고, 역부족이라고 보고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불가능한 것만 보였습니다. 여기까지 온 것도 자기들의 힘으로 온 것이 아니고 모두 기적으로 왔고, 홍해도 그렇게 건넜고, 출애굽도 그렇게 한 것인데도 앞으로 가는 길에 그런 기적이 나타나리라는 기대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고는 상대하여야 할 사람들이 키가 큰 것만 보였고, 힘이 세게 생긴 것만을 보고는 그만 기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눈이 어두우면 실족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실족이 자기만의 실족이 아니고 남들도 힘을 잃게 만들과, 남들도 실족하게 만들어서 결국 전진을 가로막습니다. 그 결과 그 보고를 들은 백성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얼마나 낙심을 하고, 탄식을 하고, 울부짖습니까 필사의 노력으로 가나안을 목표 삼고 여기까지 왔는데 더 이상 갈 수가 없다고 하니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눈이 어두우면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가 엄청납니다. 그래서 보고자 10명과 그 보고를 받고 낙심이 되어 울부짖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사막의 땅에서 죽어 장사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12명 중 단 두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들도 똑같은 시간에, 똑 같은 땅을 함께 보고, 함께 살피고, 함께 정찰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보고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 땅이 기름진 땅으로 보였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쯤은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애굽 군대도 무찔렀는데, 그리고 악명 높은 바로도 이기고 여기까지 나왔는데 원주민쯤은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대답이 “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신 땅입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민13:30)”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가나안은 이 두 사람 때문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안인은 깊은 곳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두 깊은 곳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편견을 버리고 보아야 합니다. 또 약속을 전제하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속에 묻혀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보기는 보았습니다. 그에게서 신성도 보았습니다. 권능도 보았과, 신비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은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영적인 소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알긴 알았는데 믿지를 못한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많은 사람이 듣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기적을 보고도 놀랐습니다. 예수께 어떤 남다른 신성이 있다는 것을 보았고, 알았습니다.
그런데 믿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배척을 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지식과 신앙이라는 명제가 나옵니다. 영국의 철학 교수였던 러셀이라는 사람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마태복음 21장을 보면 무화과 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 거기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시장해서 무화과 나무를 찾아가 보니까 열매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무를 저주했더니 그 나무가 곧 말라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러셀은 여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나무가 마땅히 열매를 맺지 않았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마가복음 11:13절을 보년 아직 열매 맺을 때가 아니라고 했다. 때가 아닌데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그 나무의 책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저주해서 나무를 말라 죽게 한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예수의 성격 결함을 극명하게 나타내 주는 것이다. 고로 나는 예수를 소크라테스나 석가와 같이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을 거부한다. 오히려 나는 그를 한 단계 낮은 자리에 놓고 싶다.”
그런데 이 일은 흥분할 일이 아닙니다. 지식으로 앞뒤를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성경을 풀어 가다 보면 이렇게 벽에 부딪치기 쉽습니다.
성경이 내 지식으로, 내 의지로 풀이가 가능하다고 하면 이 책은 철학책이지 성경책은 아닙니다. 러셀은 그래서 올무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러셀은 여기서 “때”라는 말을 계절(season)이라는 말로 풀이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때는 “카이로스라”는 하나님의 때를 말하는 것이지 계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가 말라 죽어서 그 기능이 상실된 것같이 이제 무화과 나무로 상징되는 예루살렘 성전도 그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눈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 이 비유를 쓰신 것입니다. 여기에 흥분할 일도 없고, 오해할 일도, 더구나 따질 일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들이 가끔 좀 안다는 것 때문에 신앙 생활하는 데 얼마나 손해를 많이 보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모두 알기는 아는데 이론으로만 알고 믿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 결과 예수를 알기는 아는데 구세주로 믿지를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 결과 예수를 알기는 아는데 구세주로 믿지를 못하고, 심판주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앙이 변화가 없고, 고백이 없고, 어딘가 모르게 힘이 없고, 용기가 없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복음을 받는 데 최우선 순위로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던 사람들인데도 결과적으로는 버림받은 고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를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사순절도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고난받는 예수를 미리로만 믿지 말고 마음으로 부딪쳐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첫째 이유는 예수님의 육체적인 면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것이 아니고 목수의 아들로만 봅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의 내적인 신성은 보지 않고 외적인 면만을 보고 판단했습니다. 이것이 아주 무서운 편견입니다. 이 같은 편견이 있는 한 상대를 정확히 보고, 정확히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보아도 깊이 감취어진 곳까지는 볼 수가 없습니다. 편견을 가지고 보는 한 그 속에 감취어진 신성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것이 가난했던 목수의 아들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한 것입니다. 오늘도 사람들간에 자꾸만 오해가 생기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보되 겉만 보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해버리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격을 보는 것이 아니고, 출신을 먼저 보고, 직업을 보고, 배경을 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진실한 면은 무시되거나 아예 보이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저게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이 말은 사람을 아주 무시하는 말입니다. 당시 목수의 직업은 아주 비천한 직업이었습니다. 거기다 그 집안이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 가난한 집 아들이 돌아다니며 기적을 일으키고, 가르친다고, 복음을 전한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저게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하고 조롱부터 했습니다. 우리들이 사람이나 사물을 정확히 이해하고 판단하려고 하면 이 같은 선입견이 없어야 합니다. 이 선입견이 있는한 그 시각은 정확할 수가 없습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헌옷을 즐겨 입고, 헌 모자를 눌러 쓰고 다니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고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았고, 가는 곳마다 쫒겨나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무시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제자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헌 모자 속에는 우주의 지혜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라” 사람들은 그 헌 모자만을 보았지 그 속에 들어 있는 그의 지혜는 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의 메리 여왕이 민정 시찰을 하기 위해서 허름한 옷을 입고 농가를 방문했는데 그때 그만 비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우산 좀 하나 빌려 달라고 하니까 그 부인이 다락에서 우산을 가져 오는데 여러 개 중에서 가장 낡은 것 하나를 골라서 빌려 주더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다음 날 왕실 근위대장이 그 우산을 가지고 이 농가를 찾아왔습니다. “어제 이 우산을 빌려 간 분이 메리 여왕님이십니다.” 그때 이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한 말이 있습니다. “팔자 고칠 뻔했는데.” 이 선입견이 무섭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예수를 볼 때 가난했던 것만 보았습니다. 목수의 아들이었던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배척했고, 거부했고, 받아들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느 곳보다도 먼저 복음을 받아야 될 특권을 받았음에도 그 특권을 잃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부지 중에 하나님을 영접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기생 라합도 천사를 영접하여 그와 가정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하고 사람들은 감탄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보니까 가르치는 것이 서기관들보다 나았습니다. 병자들을 고치는 것을 보니까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탄한 나머지 외칩이다. “저가 배운 것이 없는데 어디서 저런 말이 나오고, 지혜가 나오는가. 저가 목수의 아들인데 어디서 저런 권능이 나오는가.”하고 의아해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신성을 보았습니다. 언변도 남 같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병자를 고치는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감탄하고, 그 신비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놀란 것까지는 좋은데 그 신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저 사람이 목수의 아들인데, 저 사람이 배우지 못한 마리아의 아들인데”하고 그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눈이 열리지를 않아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눈이 있으면 무얼 합니까 눈이 있어도 보지를 못하면 그것은 소경입니다. “(요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고 했습니다. 빛이 있으면 무얼 합니까 보지 못하면 그만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방 사람들도 그 빛을 보았습니다. 동방 박사들도 그 빛을 보았습니다. 들의 목자들도 이 빛을 보았습니다. 가나안 여자도, 이방인 백부장도 이 빛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한 동네에서 30년 동안이나 함께 살았던 나사렛 사람들은 그 빛을 못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입견 때문에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 들어 있는 신성도, 권능도, 신비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본다는 것이 고작해서 가난했던 것만을 보았고, 목수의 아들인 사실만을 보고 판단을 했습니다. 이 눈이 어두우면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세계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못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다는 고리가 먹고 사는 이야기만 하게 되고, 육신의 이야기만 하게 되고, 세상의 이야기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가까이 와서 정탐꾼 12명을 선발해서 가나안에 들여 보냅니다. 열두 사람이 가나안 땅에 잠입을 해서 지형 정찰을 합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지역을, 똑같이 정찰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보고하는 것을 보면 그 견해가 극과 극입니다. 열두 사람 중 10명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내립니다. 그 땅은 삭막한 땅이고, 그 곳 사람들은 키가 크고, 힘이 세고, 우리가 상대하기에는 불가능하고, 역부족이라고 보고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불가능한 것만 보였습니다. 여기까지 온 것도 자기들의 힘으로 온 것이 아니고 모두 기적으로 왔고, 홍해도 그렇게 건넜고, 출애굽도 그렇게 한 것인데도 앞으로 가는 길에 그런 기적이 나타나리라는 기대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고는 상대하여야 할 사람들이 키가 큰 것만 보였고, 힘이 세게 생긴 것만을 보고는 그만 기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눈이 어두우면 실족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실족이 자기만의 실족이 아니고 남들도 힘을 잃게 만들과, 남들도 실족하게 만들어서 결국 전진을 가로막습니다. 그 결과 그 보고를 들은 백성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얼마나 낙심을 하고, 탄식을 하고, 울부짖습니까 필사의 노력으로 가나안을 목표 삼고 여기까지 왔는데 더 이상 갈 수가 없다고 하니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눈이 어두우면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가 엄청납니다. 그래서 보고자 10명과 그 보고를 받고 낙심이 되어 울부짖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사막의 땅에서 죽어 장사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12명 중 단 두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들도 똑같은 시간에, 똑 같은 땅을 함께 보고, 함께 살피고, 함께 정찰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보고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 땅이 기름진 땅으로 보였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쯤은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애굽 군대도 무찔렀는데, 그리고 악명 높은 바로도 이기고 여기까지 나왔는데 원주민쯤은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대답이 “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신 땅입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민13:30)”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가나안은 이 두 사람 때문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안인은 깊은 곳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두 깊은 곳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편견을 버리고 보아야 합니다. 또 약속을 전제하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속에 묻혀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보기는 보았습니다. 그에게서 신성도 보았습니다. 권능도 보았과, 신비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은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영적인 소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알긴 알았는데 믿지를 못한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많은 사람이 듣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기적을 보고도 놀랐습니다. 예수께 어떤 남다른 신성이 있다는 것을 보았고, 알았습니다.
그런데 믿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배척을 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지식과 신앙이라는 명제가 나옵니다. 영국의 철학 교수였던 러셀이라는 사람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마태복음 21장을 보면 무화과 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 거기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시장해서 무화과 나무를 찾아가 보니까 열매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무를 저주했더니 그 나무가 곧 말라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러셀은 여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나무가 마땅히 열매를 맺지 않았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마가복음 11:13절을 보년 아직 열매 맺을 때가 아니라고 했다. 때가 아닌데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그 나무의 책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저주해서 나무를 말라 죽게 한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예수의 성격 결함을 극명하게 나타내 주는 것이다. 고로 나는 예수를 소크라테스나 석가와 같이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을 거부한다. 오히려 나는 그를 한 단계 낮은 자리에 놓고 싶다.”
그런데 이 일은 흥분할 일이 아닙니다. 지식으로 앞뒤를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성경을 풀어 가다 보면 이렇게 벽에 부딪치기 쉽습니다.
성경이 내 지식으로, 내 의지로 풀이가 가능하다고 하면 이 책은 철학책이지 성경책은 아닙니다. 러셀은 그래서 올무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러셀은 여기서 “때”라는 말을 계절(season)이라는 말로 풀이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때는 “카이로스라”는 하나님의 때를 말하는 것이지 계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가 말라 죽어서 그 기능이 상실된 것같이 이제 무화과 나무로 상징되는 예루살렘 성전도 그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눈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 이 비유를 쓰신 것입니다. 여기에 흥분할 일도 없고, 오해할 일도, 더구나 따질 일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들이 가끔 좀 안다는 것 때문에 신앙 생활하는 데 얼마나 손해를 많이 보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모두 알기는 아는데 이론으로만 알고 믿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 결과 예수를 알기는 아는데 구세주로 믿지를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 결과 예수를 알기는 아는데 구세주로 믿지를 못하고, 심판주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앙이 변화가 없고, 고백이 없고, 어딘가 모르게 힘이 없고, 용기가 없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복음을 받는 데 최우선 순위로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던 사람들인데도 결과적으로는 버림받은 고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를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사순절도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고난받는 예수를 미리로만 믿지 말고 마음으로 부딪쳐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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