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구원받아행복할까? (롬9:1-5)
본문
우리 나라 속담에 보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우리 한국 사람들이 좋아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의미는 우리 가 잘 아는 바와같이 다른 사람보다는 자기 가족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다른 나라 보다는 내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아끼게 된다는 것을 실감있게 표현한 말입니다.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를 읽어 보면, 사도바울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하는 상식을 뛰어 넘지 못하는 사람임을 금방 알수 있습니다. 그는 원래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을 때에는 자기 동족이 아닌 이방 사람들에게 복을 전하도록 특별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도 항상 그의 마음에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바울의 동족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항상 잊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유대민족 전체가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고,거부하며,핍박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는자의 수가 늘어 나면 늘어 날수록,바울은 자 기 동족을 생각하며 마음이 편치를 않았습니다. 이런 바울의 심정을 1절에서 솔직하게 털어 놓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님 안에서 나로 더불 어 증거하노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의 큰 근심과 마음의 고통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볼 때, 바울의 가슴 속에 응어리 져 있는 이 고통이 얼마나 아프고 오 래가는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중적으로 강조하는 의미에서 말을 바꾸어 가 면서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있으면, 이스라엘-자기의 동족이 어떻게 될까 하는 근 심이 쌓이고,쌓이다 보니까 이것이 나중에는 엄청난 고통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 바울이 당하는 고통은 단순히 자기의 동족이 예수를 안 믿으니까 오는 고통 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고통은 조금 복잡합니다. 일종의 울분이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원통함이 그 속에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원통한가 그 이유를 4-5절에서 설명합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만이 가진 기득권,특권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희에게는 8가지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양자됨-신명기 14:1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선택해서 자기의 자녀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영광-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찾아 오셔서 그들과 만나시고, 그들 가운데 계신 것을 말합니다. 세계 어떤 민족이 이스라엘 처럼 하나님을 직접 모시고 그 영광을 본 민족이 없습니다. 시내산 광경을 출애굽기를 통해서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나팔소리로, 음성으로 들리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내렸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언약들-하나님은 세계 민족 가운데서 오직 이스라엘 백성과 상대해서 약속하 신 것들이 있습니다.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1) 아브라함과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표로 할례를 받도록 했습다.
2) 시내산에서 모세를 대표로 세워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때 그 언약의 표로 주신 것이 십계명이었습니다.
3)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 하신 것이있습니다.-이것을 새 언약이라고 함-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보내시겠다고 하는 약속이었습니다. 세계 어느 민족치고 하나님이 직접 찾아 오셔서 이와같은 장엄한 약속을 주신 예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영광이지요. 율법-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허락하셔서 다른 민족과 달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배우고 알게 하셨습니다. 예배-하나님 앞에 나가서 경배 할수 있는 특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 모든 민족에게 이 특권을 주시지 않았습니다.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지 정된 장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약속-하나님의 자녀요,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축복에 대한 약속이 있어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나가도 복을 받고, 너희들이 내 명령을 순종하면 땅 에서 장수할 것이요,네 자손이 이 땅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조상들이 저희 것이요-자랑스러운 조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삭,야곱이 있습니다. 이 조상들을 통해서 형성된 역사가 있고, 전통이 있습니다. 이것을 그들 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남입니다-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저들의 혈통 을 통해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8가지의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기득권을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습니다.이런 의미에서 세상 사람들이 다 구원 받지 못하고 놓치는 한이 있어도 이스라 엘 백성 만은 반드시 구원을 받을 만한 기회를 갖고,특혜를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관한한 이스라엘은 머리가 될 자들이지, 절대로 꼬리가 될 사람들이 아 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십자가에 못 박는 기막힌 비극을 연출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뿐입니까. 복음을 거부합니다.교회를 핍박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만 구원 받도록한 하나님의 의를 부인하고,스스로 지혜로 운체 하다가 나중에는 꺽이운 가지가 되어 버린 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구원을 제일 먼저 받아야 할 동족이 복음에 원수가 되고, 제일 꼬리가 된 것을 볼 때마다 바울은 가슴이 아파 견딜수 없고,울분을 참을수 없고, 답답하고 원통해 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 지금의 바울의 심정입니다. 이렇게 동족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다 보니, 바울의 마음에 연민의 정이 생겼 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하다가, 그들이 너무도 불쌍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어디까지 바울의 마음이 갔느냐= 3절에서 볼수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기서 끊어진다는 말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삽입을 한 말입니다. 원래대로 말 한다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저주를 받을 필요가 있다면 저주를 달게 받겠다.
내가 내 동족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 내가 예수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는 것도,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아나테마]하는 헬라어 말인데-구약(특히 여호수아) 를 보면 여리고를 정복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제시한 원칙이 있는 데, 여리고에 있는 사람,짐승,물건을 하나도 손대지 말고, 고스란히 불태워서 완 전히 없애 버려라! 그럼으로서 그 성을 하나님이 제물로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이 때 하나도 손대지 말고 깨끗이 소멸시켜라가 바로 [아나테마,즉 저주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자기를 여리고에서 불에 태워지고,칼에 죽어가는 사람이나 동물 처럼 완전히 저주를 받아도 동족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 사랑의 극치지요. 보 통사람이 할수 없는 말이지요. 사실 바울이 이런 심정을 가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잘아는 바와 같이 피해를 끼치고 괴롭힌 사람은 자기 동족이었습니다. 돌로 친사람도 자기 동 족이요, 옥에 가둔 사람도 자기 동족이요,태장을 친 사람도 자기 동족이요,자기를 죽이려고 온갖 음모를 꾸민 사람들도 자기 동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갈면서 미워할수 밖에 없는 원수였지만, 바울은 그들의 죄를 미워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영혼을 미워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면 할수록,자기가 고통을 받을수록 자기 동족이 더 불쌍하고 더 마음이 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그치지 않는 고통의 의밉니다. 이런 마음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이스라엘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했고, 하나님께 눈을 감 을 때마다 자기 동족을 버리지 말라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10장1절을 잠간 보세요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구하는 바,그것은 이스라엘을 위하는 것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함이라]
그렇다면 이 말씀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있습니까 우리는 유대인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 민족이 유대민족처럼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민족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바울이고, 유대인은 유대인이고, 우리는 우리가 아니냐 9장,10장,11장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록된 말씀이라면 건너 뛰어서 곧바로 12 장으로 들어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도 될까요 안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9장의 바울의 심정을 통해서 도전을 받고,깨달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 구원의 확신과 기쁨에는 반드시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8장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에 차서 큰소리로 외 칩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는가 아무도 그리스도의 손에 빼앗아 갈 자가 없다. 나는 구원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기쁘다. 감격스럽다하는 모습을 우리는 8장에서 봅니다.
그런데 갑자기 9장으로 넘어 가면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8장을 읽고 바로 9장을 이어서 읽는 사람이면 당혹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어 떻게 그렇게 갑자기 변할수가 있을까 그래서 바울이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만 하지 않습니까 바로 바울에게서 보는 이 양면성, 모순이 저에게는 대단한 충격과 도전과 자책 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구원은 값없이 받는 선물입니다.그리고 구원을 받고 안받고는 세상에서 보면 별 차이가 없습니다.그러나 내세에서는 그 구원이 영원토록 한 사람의 운명을 행복과 불행으로, 축복과 저주로, 생명과 죽음 으로 갈라 놓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감사하게도 나는 하나님 앞에 구원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나를 정죄할 사람이 없습니다.하나님의 손에서 끊어 놓을 사람도 없고, 하나님 의 사랑에서 빼앗을 자도 없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저도 바울처럼 기뻐합니다.좋아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묻습니다. 너 그것으로 족하니 너 혼자 구원 받았다고 감격하고,기뻐하는 것으로 행복하냐고 하나님은 묻습니다. 저는 [예!!] 하는 대답이 쉽게 나오질 않습니다. 바울을 보니까 그렇지 않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바울을 보라고 합니다. 바울만큼 세상에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 있느냐 바울처럼 구원의 기쁨을 간직한 사람이 있느냐 그러나 바울은 지금 마음에 큰 고통을 안고 있다고 하지 않느냐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과 기쁨이 큰 사람일수록, 구원 받지 못한 형제 때문에 오는 큰 고통과 괴로움을 마음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만약에 나는 구원 받고, 기쁘고 감사한데, 다른 형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 다면,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심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혼자 구원 받은 것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주님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너 구원의 확신이 있니] '예' [너의 마음에 기쁨이 있지]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너 혼자 행복하니까 좋으냐] 고 물으실 때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네 가정에, 네 이웃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놓고 네 마음에 고통이 없느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 마음에 끊임없이 찌르는 고통이 있어요 정말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반드시 이 고통을 함께 가지 고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구원의 확신-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구원의 기쁨-이것도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믿지 않는 형제 때문에 당하는 이 고통도 누가 주시는 것이냐 본능입니까 자연인의 감정이냐 아닙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2절을 보세요. [내 마음에 끝이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성령님 안에서 증거한다] 이 고통이 있어야 정상입니다. 이 고통이 없으면 문젭니다. 확신은 있는데 고통이 없습니까 기쁨은 있는데 고통이 없습니까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요, 어떤 면에서는 나의 기쁨과 확신도 성령님이 주신 것이 아닌 엉터린지도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칫 잘못하면 교회 안의 사람에게 신경을 쓰다가 교회 밖에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을 잊어버리고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원 받아야 할 사람 들을 보아도 안타까운 마음도 별로 없고, 안일한 생각에 푹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인의 병입니다. 더 큰 병이 있습니다. 전도합시다. 선교해야 합니다. 고 하면 [교회가 그렇게 많은데 자꾸만 교회를 세우면 어떻게 해] [우리 교회 안에도 다른 문제가 많은데, 그 것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무슨 전도 를 해] [우리 나라도 아직 안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다른 나라에 무슨 전도를 해]하는 비판의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특별히 젊은이-청년들에게 이런 비판의식이 높습니다. 때로는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면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비판의식이 자리 잡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큰 병입이다. 우리끼리 구원 받아서 행복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마음의 고통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은혜 주시기 를 간구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배워야 하는 교훈이 또 하나 있습니다. 전도는 내 형제, 내 동족부터 한다. 내가 가까이 접촉할수 있는 사람에게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바울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왜 그런고하면,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회사든지,가정이든지,이웃이든지 소위 가청 영역에 속한 사람들입니다.예수님에 대해서 쉽게 전해 들을수 있는 사람들이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에 비유하면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는 가정에 한 부인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다른 가족은 예수를 모 르지만, 남편이 부인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고, 예수 의 복음에 대해서 듣고,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머니를 통해서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가정영역-가시권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쉽게 예수를 듣고,보고,만날 수 있는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로부터 전도하는 것이 순서라는 것을 오늘 바울 이 말한 [내 형제,내 골육]이라는 말에서 배워야 합니다. 제가 몇 년전에 작은 할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고향의 후배들을 수십년 만 에 만났습니다. 그 중에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둘째 동생 친구가 나에 대해 서 상세히 알고 있으면서 관심을 갖고 물어 왔습니다. 나는 참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별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 도 별로 없었고,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서울로 올라 왔기 때문에 고향에서 계속 남아 있는 사람들과는 접촉이 없었는데 어떻게 이 친구가 나에게 관심이 이렇게 많은가 했는데. [우리가 고등학교 1차 입학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한달인가를 공부를 가르쳐 주 어서 안양공고라는 괜찮은 학교에 들어 갈수 있었다]고 하면서 [교회로 한번 꼭 찾아 뵙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 때 공부를 가르쳐준 기억이 전혀 나지를 않아요. 잠간의 만남 이었지만 그런 만남을 통해서 그의 마음 속에 수십년 동안이나, 교회에 대한 관심, 언젠가는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고 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시권-가청권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희집은 아버님이 19살에 예수를 믿기 시작해서 40-50년이 지난 지금은 온 집 안이 예수를 믿습니다. 장로가 2명,권사가 5-6명,집사는 알지도 못합니다. 이 시간 주님은 우리에게 두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너에게 끝이지 않는 고통이 있는가 너의 형제,너의 동족을 위한 눈물이 있는가 이 주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이 시간에 안 믿는 나의 형제, 직장의 동료를 보면서도 얼음장처럼 굳어 져서 고통이 없고, 눈물이 없는 내 마음을 녹여 주세요!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볼 때, 바울의 가슴 속에 응어리 져 있는 이 고통이 얼마나 아프고 오 래가는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중적으로 강조하는 의미에서 말을 바꾸어 가 면서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있으면, 이스라엘-자기의 동족이 어떻게 될까 하는 근 심이 쌓이고,쌓이다 보니까 이것이 나중에는 엄청난 고통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 바울이 당하는 고통은 단순히 자기의 동족이 예수를 안 믿으니까 오는 고통 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고통은 조금 복잡합니다. 일종의 울분이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원통함이 그 속에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원통한가 그 이유를 4-5절에서 설명합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만이 가진 기득권,특권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희에게는 8가지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양자됨-신명기 14:1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선택해서 자기의 자녀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영광-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찾아 오셔서 그들과 만나시고, 그들 가운데 계신 것을 말합니다. 세계 어떤 민족이 이스라엘 처럼 하나님을 직접 모시고 그 영광을 본 민족이 없습니다. 시내산 광경을 출애굽기를 통해서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나팔소리로, 음성으로 들리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내렸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언약들-하나님은 세계 민족 가운데서 오직 이스라엘 백성과 상대해서 약속하 신 것들이 있습니다.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1) 아브라함과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표로 할례를 받도록 했습다.
2) 시내산에서 모세를 대표로 세워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때 그 언약의 표로 주신 것이 십계명이었습니다.
3)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 하신 것이있습니다.-이것을 새 언약이라고 함-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보내시겠다고 하는 약속이었습니다. 세계 어느 민족치고 하나님이 직접 찾아 오셔서 이와같은 장엄한 약속을 주신 예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영광이지요. 율법-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허락하셔서 다른 민족과 달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배우고 알게 하셨습니다. 예배-하나님 앞에 나가서 경배 할수 있는 특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 모든 민족에게 이 특권을 주시지 않았습니다.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지 정된 장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약속-하나님의 자녀요,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축복에 대한 약속이 있어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나가도 복을 받고, 너희들이 내 명령을 순종하면 땅 에서 장수할 것이요,네 자손이 이 땅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조상들이 저희 것이요-자랑스러운 조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삭,야곱이 있습니다. 이 조상들을 통해서 형성된 역사가 있고, 전통이 있습니다. 이것을 그들 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남입니다-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저들의 혈통 을 통해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8가지의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기득권을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습니다.이런 의미에서 세상 사람들이 다 구원 받지 못하고 놓치는 한이 있어도 이스라 엘 백성 만은 반드시 구원을 받을 만한 기회를 갖고,특혜를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관한한 이스라엘은 머리가 될 자들이지, 절대로 꼬리가 될 사람들이 아 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십자가에 못 박는 기막힌 비극을 연출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뿐입니까. 복음을 거부합니다.교회를 핍박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만 구원 받도록한 하나님의 의를 부인하고,스스로 지혜로 운체 하다가 나중에는 꺽이운 가지가 되어 버린 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구원을 제일 먼저 받아야 할 동족이 복음에 원수가 되고, 제일 꼬리가 된 것을 볼 때마다 바울은 가슴이 아파 견딜수 없고,울분을 참을수 없고, 답답하고 원통해 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 지금의 바울의 심정입니다. 이렇게 동족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다 보니, 바울의 마음에 연민의 정이 생겼 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하다가, 그들이 너무도 불쌍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어디까지 바울의 마음이 갔느냐= 3절에서 볼수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기서 끊어진다는 말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삽입을 한 말입니다. 원래대로 말 한다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저주를 받을 필요가 있다면 저주를 달게 받겠다.
내가 내 동족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 내가 예수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는 것도,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아나테마]하는 헬라어 말인데-구약(특히 여호수아) 를 보면 여리고를 정복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제시한 원칙이 있는 데, 여리고에 있는 사람,짐승,물건을 하나도 손대지 말고, 고스란히 불태워서 완 전히 없애 버려라! 그럼으로서 그 성을 하나님이 제물로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이 때 하나도 손대지 말고 깨끗이 소멸시켜라가 바로 [아나테마,즉 저주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자기를 여리고에서 불에 태워지고,칼에 죽어가는 사람이나 동물 처럼 완전히 저주를 받아도 동족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 사랑의 극치지요. 보 통사람이 할수 없는 말이지요. 사실 바울이 이런 심정을 가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잘아는 바와 같이 피해를 끼치고 괴롭힌 사람은 자기 동족이었습니다. 돌로 친사람도 자기 동 족이요, 옥에 가둔 사람도 자기 동족이요,태장을 친 사람도 자기 동족이요,자기를 죽이려고 온갖 음모를 꾸민 사람들도 자기 동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갈면서 미워할수 밖에 없는 원수였지만, 바울은 그들의 죄를 미워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영혼을 미워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면 할수록,자기가 고통을 받을수록 자기 동족이 더 불쌍하고 더 마음이 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그치지 않는 고통의 의밉니다. 이런 마음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이스라엘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했고, 하나님께 눈을 감 을 때마다 자기 동족을 버리지 말라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10장1절을 잠간 보세요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구하는 바,그것은 이스라엘을 위하는 것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함이라]
그렇다면 이 말씀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있습니까 우리는 유대인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 민족이 유대민족처럼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민족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바울이고, 유대인은 유대인이고, 우리는 우리가 아니냐 9장,10장,11장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록된 말씀이라면 건너 뛰어서 곧바로 12 장으로 들어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도 될까요 안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9장의 바울의 심정을 통해서 도전을 받고,깨달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 구원의 확신과 기쁨에는 반드시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8장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에 차서 큰소리로 외 칩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는가 아무도 그리스도의 손에 빼앗아 갈 자가 없다. 나는 구원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기쁘다. 감격스럽다하는 모습을 우리는 8장에서 봅니다.
그런데 갑자기 9장으로 넘어 가면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8장을 읽고 바로 9장을 이어서 읽는 사람이면 당혹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어 떻게 그렇게 갑자기 변할수가 있을까 그래서 바울이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만 하지 않습니까 바로 바울에게서 보는 이 양면성, 모순이 저에게는 대단한 충격과 도전과 자책 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구원은 값없이 받는 선물입니다.그리고 구원을 받고 안받고는 세상에서 보면 별 차이가 없습니다.그러나 내세에서는 그 구원이 영원토록 한 사람의 운명을 행복과 불행으로, 축복과 저주로, 생명과 죽음 으로 갈라 놓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감사하게도 나는 하나님 앞에 구원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나를 정죄할 사람이 없습니다.하나님의 손에서 끊어 놓을 사람도 없고, 하나님 의 사랑에서 빼앗을 자도 없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저도 바울처럼 기뻐합니다.좋아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묻습니다. 너 그것으로 족하니 너 혼자 구원 받았다고 감격하고,기뻐하는 것으로 행복하냐고 하나님은 묻습니다. 저는 [예!!] 하는 대답이 쉽게 나오질 않습니다. 바울을 보니까 그렇지 않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바울을 보라고 합니다. 바울만큼 세상에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 있느냐 바울처럼 구원의 기쁨을 간직한 사람이 있느냐 그러나 바울은 지금 마음에 큰 고통을 안고 있다고 하지 않느냐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과 기쁨이 큰 사람일수록, 구원 받지 못한 형제 때문에 오는 큰 고통과 괴로움을 마음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만약에 나는 구원 받고, 기쁘고 감사한데, 다른 형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 다면,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심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혼자 구원 받은 것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주님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너 구원의 확신이 있니] '예' [너의 마음에 기쁨이 있지]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너 혼자 행복하니까 좋으냐] 고 물으실 때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네 가정에, 네 이웃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놓고 네 마음에 고통이 없느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 마음에 끊임없이 찌르는 고통이 있어요 정말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반드시 이 고통을 함께 가지 고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구원의 확신-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구원의 기쁨-이것도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믿지 않는 형제 때문에 당하는 이 고통도 누가 주시는 것이냐 본능입니까 자연인의 감정이냐 아닙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2절을 보세요. [내 마음에 끝이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성령님 안에서 증거한다] 이 고통이 있어야 정상입니다. 이 고통이 없으면 문젭니다. 확신은 있는데 고통이 없습니까 기쁨은 있는데 고통이 없습니까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요, 어떤 면에서는 나의 기쁨과 확신도 성령님이 주신 것이 아닌 엉터린지도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칫 잘못하면 교회 안의 사람에게 신경을 쓰다가 교회 밖에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을 잊어버리고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원 받아야 할 사람 들을 보아도 안타까운 마음도 별로 없고, 안일한 생각에 푹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인의 병입니다. 더 큰 병이 있습니다. 전도합시다. 선교해야 합니다. 고 하면 [교회가 그렇게 많은데 자꾸만 교회를 세우면 어떻게 해] [우리 교회 안에도 다른 문제가 많은데, 그 것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무슨 전도 를 해] [우리 나라도 아직 안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다른 나라에 무슨 전도를 해]하는 비판의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특별히 젊은이-청년들에게 이런 비판의식이 높습니다. 때로는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면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비판의식이 자리 잡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큰 병입이다. 우리끼리 구원 받아서 행복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마음의 고통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은혜 주시기 를 간구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배워야 하는 교훈이 또 하나 있습니다. 전도는 내 형제, 내 동족부터 한다. 내가 가까이 접촉할수 있는 사람에게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바울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왜 그런고하면,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회사든지,가정이든지,이웃이든지 소위 가청 영역에 속한 사람들입니다.예수님에 대해서 쉽게 전해 들을수 있는 사람들이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에 비유하면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는 가정에 한 부인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다른 가족은 예수를 모 르지만, 남편이 부인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고, 예수 의 복음에 대해서 듣고,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머니를 통해서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가정영역-가시권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쉽게 예수를 듣고,보고,만날 수 있는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로부터 전도하는 것이 순서라는 것을 오늘 바울 이 말한 [내 형제,내 골육]이라는 말에서 배워야 합니다. 제가 몇 년전에 작은 할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고향의 후배들을 수십년 만 에 만났습니다. 그 중에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둘째 동생 친구가 나에 대해 서 상세히 알고 있으면서 관심을 갖고 물어 왔습니다. 나는 참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별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 도 별로 없었고,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서울로 올라 왔기 때문에 고향에서 계속 남아 있는 사람들과는 접촉이 없었는데 어떻게 이 친구가 나에게 관심이 이렇게 많은가 했는데. [우리가 고등학교 1차 입학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한달인가를 공부를 가르쳐 주 어서 안양공고라는 괜찮은 학교에 들어 갈수 있었다]고 하면서 [교회로 한번 꼭 찾아 뵙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 때 공부를 가르쳐준 기억이 전혀 나지를 않아요. 잠간의 만남 이었지만 그런 만남을 통해서 그의 마음 속에 수십년 동안이나, 교회에 대한 관심, 언젠가는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고 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시권-가청권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희집은 아버님이 19살에 예수를 믿기 시작해서 40-50년이 지난 지금은 온 집 안이 예수를 믿습니다. 장로가 2명,권사가 5-6명,집사는 알지도 못합니다. 이 시간 주님은 우리에게 두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너에게 끝이지 않는 고통이 있는가 너의 형제,너의 동족을 위한 눈물이 있는가 이 주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이 시간에 안 믿는 나의 형제, 직장의 동료를 보면서도 얼음장처럼 굳어 져서 고통이 없고, 눈물이 없는 내 마음을 녹여 주세요!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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