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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봇의 포도원 (왕상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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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유업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즉 기업을 무르거나 지킨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유업이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한백성에게 주신 좋은것인데 보통 하늘나라를 의미하기도하고 가계 즉 집안의 대통이 되기도 하고 어느때는 토지가 되기도 합니다. (계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 리라” 고 하셨는데 이것이란 6절에 보면 이것은 “생명수 샘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유업은 생명수 샘물이라는 말씀입니다 벧전3:7 에는 유업이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고 갈3:18 에는 신앙적 전통이 유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교회도 좋은 신앙적 전통을 기업으로 받았고 보수적진리와 함께 .하나님중심,성경중심, 교회중심의 생활신학을 물려 받은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좋은 신앙전통을 버리고 있습니다. 새상과 타협하고 새로운 새상풍물이 교회에 솓아져 들어와 교계를 혼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나봇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노선을 한번 점검해보아야 할것입니다. 아합왕의 권새가 대단하던 시절에 이스르엘에 나봇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나봇이라는 사람의 기록은 성경 다른곳에는 없고 오늘의 본문에만 기록되어 있는 평범하고 나약한 한 소시민 이었습니다 이사람은 아합왕의 궁옆에 포도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포도원이 궁옆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요즘말로 요지에 속한 땅이었으리라 생각이 되어 집니다. 그레서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에 눈독을 드리게 됩니다. 그는 나봇을 불러 대령을 시키고는 “네 포도원을 내게달라 내가 더 기름지고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것이요 둘이서 합의만 되면 돈으로 쳐서 줄수도 있다” “내 포도원을 어덯게 쓸려고 그러시요” “아-! 그것-뭐-나물이나 심어 먹으려고 그러지! 탐이나서 그러는건 아냐!”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에 나물이나 심어 먹겠다고 하지만 실상은 저 포도원에 그림같은 집을 짖고 한쪽엔 귀한 수석 같다 놓고 한쪽에는 기화요초 심어놓고 가운데 풀장만들어 수영하는 별장으로 십상이라고 생각 했을것입니다.
그런데 나봇이 웬만한 사람같으면 “혹 이쪽에 도시개발계획이 새로 새워진것이 아닐까”하며 땅바람으로 졸지에 부자가 될 졸부의 꿈을 한번 꾸어 볼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 시골사람들 논 밭 가지고 있다가 아파트가 들어오고 빌딩이 들어서고 도시로 변하면서 논밭팔아 부자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나봇은 고지식하고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레서 아합의 제안을 보기좋게 거절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의 논리는 단순했습니다. “열조의 유업을 남에게 팔아 버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셨다”는것입니다. 이것은 평범한 복덕방의 중게도 아니오 땅“부로커”의 제안도 아니었습니다. 이는 민중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왕의 명령입니다. 웬만하면 왕의 이 지엄한 명령앞에 다 내어놓고 벌 벌 떨며 물러날 일입니다. 혹은 어느 눈치빠른 공직자 같으면 이틈에 부동산을 상납하고 군수자리 하나 욕심을 내볼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나봇은 미련스러울 정도로 원리에 집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일이다.” 이 땅이 기가막힌 요지이기 때문에 도 아니요, 기름진 옥토이기 때문에도 아니라 “하나님이 금하신 일이다.” 일산이나 분당에서 땅 내놓지 않겠다고 시위하고 투쟁하는것도 사실은 더많이 받아 내려는 “줄다리기” 가 많습니다.
그런데 나봇은 권력앞에서도, 돈 앞에서도, 더 좋은 땅을 주겠다는 유혹앞에서도 굴하지않고 타협을 거절 하였습니다 “열조의 유업을 남에게 팔아 버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기업이기 때문에 나는 내 포도원을 지킬것입니다. 그렛더니 아합왕이 근심하고 마음이 답답하여 침상에 누어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나라의 치리자인 그가 저 한갖 농부일뿐인 나봇을 꺽지 못함으로 인한 자존심의 상처였습니다. 고민하고 있는 아합에게 악하기로는 한술 더 뜨는 이세벨이라는 왕비가 있었습니다. “왕이여! 그렇게 약해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다스리려 하십니까. 염려 놓으십시요 내가 그땅을 같다가 바칠데니 식사나 하십시요“ 하고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도시의 장로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성의 장로들과 의논하여 가짜증인이 만들어지고 왕과 하나님을 저주했다는 누명이 쒸어진 나봇은 성문밖으로 끌려나가 돌로 맞아 죽게됩니다. 장로들이나 가짜증인 모두가 나봇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왕비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기위해 한 억울한 동족을 죽게 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에게 가서 말합니다. “이제 포도원은 당신것이요 나봇은 죽었습니다” 이렇게해서 나봇의 포도원은 아합의 것이 됙고 맙니다. 그의 유업을 지키려든 나봇은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유업을 지키려던 나봇은 패배한 것일까요. 먼저 우리는 참다운 승리가 무엇인지를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주께서 계시록에 말씀 하시기를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면 승리한다는 신앙적 원리들을 성경에 소개하시면서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의 죽음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의로운 모습으로 목이 잘려 죽는 새례요한의 모습속에서 참다운 승리가 무엇인지 교훈 하시다가 자신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께서 승리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세례요한이 승리했습니다. 그렇게 스데반이 승리했습니다. 그렇게 나봇이 승리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서 저는 나봇의 죽음을 생각 해봅니다. 교회의 순결을 지키고 보수주의의 참된 진리를 파수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멸시를 당했으며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시대의 조류를 따라 변질되어 갔습니까 교회가 국가권력의 시녀가 되기도 하고, 목사가 외국 구경하고 싶어 통일교의 돈을 받기도합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제대로 믿으려고 하면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수의 제자가 되려 하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바울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밖혀야 한다고 했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 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다시말해 예수 똑 똑 하게 믿으려면 십자가를 지기도 하고 또 십자가에 못밖혀 죽는 고통도 격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예수잘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직장때문에, 사업때문에,가정때문에,환경때문에 그 믿음이 뿌리채 흔들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생명을 걸고 믿음지켜야 된다고 성경은 말하지만 오늘 이 시대에 믿음때문에 생명건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예수님 때문에 한번 왕창 망해보는 것도 축복이려니와 누가 이 시대에 예수 잘믿어 보려다 망해버린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기의 포도원을 팔아버리고 나봇의 순결함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
창세기25장에 보면 애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애서는 산을 뛰어 다니다가 돌아와보니 야곱이 문간에서 팟죽을 끓이고 있습니다. “예! 팟죽한그릇 다오 ” “안돼 형! 이건 부모님 먼저 드릴거야” “예! 나좀 먼저먹자 ” “않된다니까” “좀 먹자” “정-
그렇다면 형의 장자권을 나에게 줘!” “내가 배고파 죽을지경인데 장자명분이 내게 무슨소용이 있으리오” 수염이 대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는데  그는 팟죽 한그릇에 장자명분을 팔아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그는 저주를 받아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다시말해 구원과 상관없는 족속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상배부름이 그렇게 중요해서 구원도 안중에 없는 “바보,병신,애서”같은 교인이 오늘에도 많다는 말입니다. 돈 몇푼에 신앙을 팔아버린 현대판 애서들이 오늘날에도 많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업이란 저 천국의 영광만 주신것이 아니라 그 유업중에는 이 땅의 고난도 함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려 하는자는 반듯이 십자가도 함께 유업으로 받았음을 잊어선 않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지는 생활없이는 하늘의 영광도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지만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어렵고 고단한 삶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 가실때 그 힘들고 고단한 여정을 생각해 보십시요 . 성화에는 예수님을 운동선수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그려 놓았지만 예수님은 그림처럼 그렇게 건강한 분이 아니올시다.
이사야서 53장에 보면 “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시면서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쓰러진곳마다 핏자국 얼룩지고 .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가야할 인생의 골고다길도 만만한 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수 없이 좌절 낙담하면서도 끝내는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우리앞에 있는데 어떤이는 그것을 피하다가 새상으로 내려가고 어떤이는 십자가가 힘겨워 곁길로 갑니다. 오늘날 교회는 자기 이익과 관계되는 일이 있다면 교회직분도, 주님과의 관계도 저버리고 몸을 돌려 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룻기에보면 나오미의 가정이 모압에서 돌아와 그의 며느리 “룻”이 홀몸이 되었을때 그 가정의 기업을 위해 기업 무를자를 택하여야 하는데 대상자가 두명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우선권을 가진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생각하기를 이방여인과 결혼해서 그들의 기업무를자가 된다는것이 자기에게 손해가 될가하여 장로들이 모여 있는곳에 가서 신발을 벗어 던졌습니다. 당시 풍습은 기업을 이어 받게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신발을 벗어 던지면 그자격을 포기 하겠다는 표시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메시아의 계보가 되는 그 엄청난 축복을 잃어 버린것입니다. 오늘날도 십자가 지는것이 싫어 유업을 포기하는사람이 많습니다. 예수 믿는일이, 봉사 하는일이, 헌금하는 일이 내게 손해가 될가 하여 이미 신발을 벗어 던진 사람이 많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나봇처럼 생명걸고 자기신앙을 지키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불의하고 부정한 물질에 자신의 신앙을 팔고, 헛된 명예때문에 새상길로 가고, 세상권세앞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연약한 믿음가진 우리들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도 나봇처럼 하나님의 유업을 지켜봅시다. 나봇의 무덤가에 가서 나봇의 신앙을 배웁시다. “하나님이 금하신 일을 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하여“ 나봇처럼 생명을 걸어 봅시다. 그리고 훗날 천국에서 나봇을 만나 할말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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