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셨도다 (엡2:1-10)
본문
시커먼 파도가 몰려옵니다. 폭풍이 몰아칩니다. 배의 헨들을 잡고 있는 조타수가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배의 키를 놓고 배 밑창으로 달려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어버립니다. 그러나 파도치는 현실자체를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폭풍과 파도에 배가 휩쓸리도록, 배뿐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방치해 두었습니다. 자기자신을 “파도에 휩쓸리도록 내버려둔 무책임”을 한마디로 “죽음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은 사라지고 오직 파도치는 현실만이 존재합니다. 바울로는 싸늘한 감옥에서 사랑하는 그의 형제자매들에게 간곡하고 애절한 심정으로 글을쓰고 있습니다. 그는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 마치 “파도치는 현실 속에 방치해놓은 배가 만나게될 파선의 상태, 죽음의 상태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변혁되었는지 또한 되어야 하는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자신이 파선이 예고된 배처럼, 파도에 떠맡겨진 배의 운명과도 같은 존재였음을 고백합니다.
이는 시대의 통속에 떠맡겨진 삶을 말합니다. 높고 낮음에 의하여, 많고 적음에 의해 판단하고, 모것을 눈으로 보고 감각하는 것만을 인식하는 지극히 편협하고 현상적인 사고방식, 물질과 자본 만능주의, 감각주의! 여기에 빠져있어서 표면에 나타나 있는 얄팍한 것만을 전부라고 말하며, 그 안에 잠재되었는 진실과 그러한 내면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 이러한 감각주의적 발상과 그러한 불신이 가져오는 결과는 지금까지의 인간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본과 물질이 가치, 권력의 가치를 너무나 숭상한 나머지 정작 인간의 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통속적인 가치를 기웃거리며 당장 자기편한대로 행동하는 것. 자신의 이기적 판단이 기준이 되어 행동하고 여기에 다른 사람은 눈에 두지않는 온갖 행위를 죽음의 상태라고 지적합니다. 숨을 쉬며 살아있다고 하지만, 음식을 먹고 걷기도 하지만 사실은 죽어있는 존재가 아닌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실로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주위를 둘러보면 죽음의 현실을 목격하게 됩니다. 온갖 죽임의 세력이 둘러싸고 있고, 우리안에 이미 죽임의 삶이 자연스럽게 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판단력이 무디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의 현실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점차 그 죽음에 잠식당해버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죽었던 자가, 온갖 죽임의 현실이 되살림의 사건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더이상 통속적인 가치를 기웃거리지 아니하고도 충분하게 삶을 의미있게 가꾸어내고, 즉흥적이고 산만한 이기적인 기준에 기대어 살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는 기쁨이 있는 것은 바로 되살림의 경험을 통해서입니다.
이것은 실로 새로운 경험입니다. “새롭다”는 것, “새로움의 상태”라는 것은 일시적인 경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얼마간 사용하면 쉽사리 낡아지고 흠집나는 것과는 다른 새로움입니다. 바울로는 우리에게 “새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온갖 죽임의 통속과 세상의 통속적인 가치에 잠식당하지 않는 새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새로운 창조”입니다. 부속픔을 갈아넣는 정도의 수리나, 틀린 설계도면을 지우개로 몇군데 수정하는 정도이거나, 겉만 페인트로 칠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격적인 변혁이며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고후5:17)” 새롭게 되었다는 이러한 선언은 이 참담한 시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됩니다. 죽임의 행태가 오히려 자연스럽고, 죽임의 세력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새로움”을 거론하는 것은 어쩌면 위험스러운 싸움입니다. 죽음과 죽임의 세력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죽임의 극복은 외적인 힘의 정도에 의해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레 겁을 먹고 죽음과 죽임의 세력에 굴종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대응할 만한 능력없음을 고민하여 어떠한 시작에 대해서도 접어둘 이유는 더욱 없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움, 새롭게 하는 힘”을 갈망하며 그 속에 우리의 가치를 두기로 결심하기만 한다면 이미 죽임의 세력을 대응하는 힘은 효력을 발합니다. 결국 죽음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썩어버린 지반이 그 스스로를 무너뜨릴 것입니다. 새로움을 갈망하는 것은 썩어버린 밑둥을 치는 칼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새롭게하는 능력안에 살아가는 것”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참담한 시절 속에 걱정만을 하고 한숨이나 내던지며 죽임의 세력속에 매여있다면, 결국 죽임의 자명한 종말과 함께 함께 우리는 스러지고 말것입니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새롭게하는 힘”안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면, 우리가 오히려 죽임의 세력을 넘어뜨리는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새롭다는 사실에 대하여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며, 통속에 잠식당한 삶의 방식이 새로움을 거절하는데 있습니다. 새롭게 하는 힘은 새로움을 갈망하는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가치기준이 되고, 판단의 기반이 될때 새롭게하는 힘은 효력을 발휘 합니다. 죽음과 죽임의 습관은 새로움을 감추어둡니다.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새로움을 발견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을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음에 머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의 나약하고 절망적인 호흡법을 고치셨습니다. 언제나 변함없는 살림의 호흡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더욱 힘차게 익혀야 하고 이로써 이 뒤틀린 땅의 온갖 죽음과 죽임의 공기를 거두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함께 이루어 내야할 몫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생명의 숨소리를 힘있게 내쉬어야할 이유인 것입니다.
이는 시대의 통속에 떠맡겨진 삶을 말합니다. 높고 낮음에 의하여, 많고 적음에 의해 판단하고, 모것을 눈으로 보고 감각하는 것만을 인식하는 지극히 편협하고 현상적인 사고방식, 물질과 자본 만능주의, 감각주의! 여기에 빠져있어서 표면에 나타나 있는 얄팍한 것만을 전부라고 말하며, 그 안에 잠재되었는 진실과 그러한 내면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 이러한 감각주의적 발상과 그러한 불신이 가져오는 결과는 지금까지의 인간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본과 물질이 가치, 권력의 가치를 너무나 숭상한 나머지 정작 인간의 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통속적인 가치를 기웃거리며 당장 자기편한대로 행동하는 것. 자신의 이기적 판단이 기준이 되어 행동하고 여기에 다른 사람은 눈에 두지않는 온갖 행위를 죽음의 상태라고 지적합니다. 숨을 쉬며 살아있다고 하지만, 음식을 먹고 걷기도 하지만 사실은 죽어있는 존재가 아닌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실로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주위를 둘러보면 죽음의 현실을 목격하게 됩니다. 온갖 죽임의 세력이 둘러싸고 있고, 우리안에 이미 죽임의 삶이 자연스럽게 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판단력이 무디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의 현실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점차 그 죽음에 잠식당해버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죽었던 자가, 온갖 죽임의 현실이 되살림의 사건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더이상 통속적인 가치를 기웃거리지 아니하고도 충분하게 삶을 의미있게 가꾸어내고, 즉흥적이고 산만한 이기적인 기준에 기대어 살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는 기쁨이 있는 것은 바로 되살림의 경험을 통해서입니다.
이것은 실로 새로운 경험입니다. “새롭다”는 것, “새로움의 상태”라는 것은 일시적인 경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얼마간 사용하면 쉽사리 낡아지고 흠집나는 것과는 다른 새로움입니다. 바울로는 우리에게 “새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온갖 죽임의 통속과 세상의 통속적인 가치에 잠식당하지 않는 새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새로운 창조”입니다. 부속픔을 갈아넣는 정도의 수리나, 틀린 설계도면을 지우개로 몇군데 수정하는 정도이거나, 겉만 페인트로 칠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격적인 변혁이며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고후5:17)” 새롭게 되었다는 이러한 선언은 이 참담한 시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됩니다. 죽임의 행태가 오히려 자연스럽고, 죽임의 세력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새로움”을 거론하는 것은 어쩌면 위험스러운 싸움입니다. 죽음과 죽임의 세력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죽임의 극복은 외적인 힘의 정도에 의해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레 겁을 먹고 죽음과 죽임의 세력에 굴종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대응할 만한 능력없음을 고민하여 어떠한 시작에 대해서도 접어둘 이유는 더욱 없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움, 새롭게 하는 힘”을 갈망하며 그 속에 우리의 가치를 두기로 결심하기만 한다면 이미 죽임의 세력을 대응하는 힘은 효력을 발합니다. 결국 죽음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썩어버린 지반이 그 스스로를 무너뜨릴 것입니다. 새로움을 갈망하는 것은 썩어버린 밑둥을 치는 칼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새롭게하는 능력안에 살아가는 것”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참담한 시절 속에 걱정만을 하고 한숨이나 내던지며 죽임의 세력속에 매여있다면, 결국 죽임의 자명한 종말과 함께 함께 우리는 스러지고 말것입니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새롭게하는 힘”안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면, 우리가 오히려 죽임의 세력을 넘어뜨리는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새롭다는 사실에 대하여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며, 통속에 잠식당한 삶의 방식이 새로움을 거절하는데 있습니다. 새롭게 하는 힘은 새로움을 갈망하는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가치기준이 되고, 판단의 기반이 될때 새롭게하는 힘은 효력을 발휘 합니다. 죽음과 죽임의 습관은 새로움을 감추어둡니다.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새로움을 발견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을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음에 머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의 나약하고 절망적인 호흡법을 고치셨습니다. 언제나 변함없는 살림의 호흡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더욱 힘차게 익혀야 하고 이로써 이 뒤틀린 땅의 온갖 죽음과 죽임의 공기를 거두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함께 이루어 내야할 몫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생명의 숨소리를 힘있게 내쉬어야할 이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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