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본 받는 자 되라 (고전4:14-17)
본문
운동 선수가 운동을 잘 하려면 하는 그런 글을 읽어보니까요, 운동 선수가 운동을 잘 하려고 할 때에는 우선 목적이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돈 벌려는 생각, 출세하려는 생각, 혹은 어떤 잡스러운 생각이 목적이 되고 나면 그 운동은 제대로 될 수가 없답니다. 그러니까 고상한 목적, 불변하는 높은 목적을 가지고 운동도 해야된다 하는 그런 얘기고요. 또한가지는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합니다. 총력을 기울이는데 심지어는 꿈을 꾸어도 운동하는 꿈을 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오로지 운동 하나만을 열심히 생각하고 총력, 집중해야 됩니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 하는 것이고요. 그 다음에 하나는 절제와 인내입니다. 운동하는 그것만이 아니고 그 생활 전체가 운동을 위한 것이 되어서 먹는 것, 자는 것, 생활하는 것, 시간 지키는 것, 마음가지는 것까지도 다 여기에 집중하면서 인내해야 한다고, 오랜 훈련, 뭐 하루아침에 무슨 기적이 나타나리라고 그건 상상도 못 합니다. 많은 시간 동안 훈련을 쌓아서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럽니다. 자
그런데 그래가지고도 안되는 수가 있어요. 그리고도 안 된다면 이것은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것은 모델이 잘못됐다는 겁니다. 맨 처음에 어떻게 기초부터 배웠느냐 그것이 중요하대요. 가끔 외국사람이 한국말을 잘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근데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사투리를 써요. 그래 아니 우리야 고향이 따로 있으니까 사투리를 쓰지만 당신은 어디 고향이기에 사투리를 쓰느냐 이거예요. 이거는 맨 처음에 한국말을 배울 때 자기가 배운 사람이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래요. 그로부터 배우면 40년 동안을 못 고치더라구요. 그런 만큼 맨 처음에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교육이 이루어집니다. 그런고로 무엇을 배웠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서 배우느냐가 중요합니다. 운동도 마찬가지요, 학문도 마찬가지요, 누구에게서 배웠느냐 그것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배움이라고 하는 것은 말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또 말로 가르치고. 이것은 논리적 교육입니다. 이성에 호소하면서 이치에 맞도록 합리적으로 이해를 도와 가면서 가르치는 그런 교육이 있고, 또 하나는 가슴으로 가르칩니다. 말이 없어도 소위 정서 교육이라는 거지요. 교육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감정에 호소합니다.
그래서 가슴과 가슴에서 교육이 이루어집니다. 또 하나는 본을 받는 겁니다. 이 본받는다는 것은 존경과 신뢰가 있어야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가 고민하는 겁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존경할 사람이 없답니다. 도대체 존경할 사람에 없어요. 그런가 하면 신뢰할 사람이 없어요. 그래 뭘 배우겠습니까 어디서 배우란 말입니까 존경과 신뢰를 통해서 교육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교육, 어쩌면 무서운 교육이 바로 지식 이전에 있는 교육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배우는 것, 저절로 배워지는 것, 무의식중에 가르치고 무의식중에 배우는 것, 이게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가슴 깊이, 깊이 깊이 뿌리 박아서 한평생의 운명을 좌우하게 됩니다. 인류 역사상에 가장 끔찍한, 최악의 사건중의 하나로 기억하고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사람 육백만을 죽였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겁니다. 전쟁 상황 중에 서로 죽이고 죽이고 하면서 이루어진 사건이라면 뭐 육백만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조용한, 평안하게 사는 유대사람을 하나씩 둘씩 끌어다가 개스실에 넣어서 죽였단 말입니다. 저항도 못하는 유대사람들. 육백만이 얼마냐 서울 인구가 지금 통 털어서 천이백만이라고 하는데 이 절반 되는 숫자! 상상해 보세요. 그 박물관에 가보면 깜짝 놀랍니다. 금이빨을 뽑아서 놓아둔, 머리카락을 잘라서 놓아둔, 그 시계들 막 풀어 놓은 거,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걸 봅니다. '원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이런 끔찍한 일이 어떻게 인류 역사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 히틀러가 누구냐 이겁니다. 그의 아버지는 본래 행상인이었답니다. 물건을 해다가 돌아다니면서 팝니다. 이거 다 팔 때까지 집에 못 돌아옵니다. 한 달도 걸리고 두 달도 걸리고 그리고 집에 돌아옵니다. 그래 집을 늘 비웠습니다. 그 어머니가 고독해서 외로움을 참지 못해서 이웃남자들하고 불륜 관계를 맺습니다.
그런 중에도 돈 많고 세력이 있는 유대사람, 전형적인 돈 많은 유대사람 남자와 어머니가 불륜의 관계를 맺는 것을 그는 보고 자랍니다. 그러지 말라고 눈물로 하소연하고 매달리고 말렸지만은 어머님은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랐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두 사람을 미워합니다. 하나는 유대사람이고 하나는 여자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그는 결과적으로 육백만을 죽이는 그런 사람이 됐고 유대사람을 죽였고 또 하나는 평생 결혼을 못 합니다. 주변에 수없이 여자가 많지만은 여자들을 미워하고, 끝까지 미워하고 독신으로 살다가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납니다. 이제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무서운 것이 교육인가. 여러분 사랑하고 배웁니다. 존경하면서 닮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에요, 미워하면서 닮습니다 그게 무서운 거예요. 그런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누굴 미워하죠 열심히 미워하면 고거 닮는 아이를 낳는데요. 여러분 아시겠어요 제가 어느 책에서 심리학적으로 써 놓은 걸보고 혼자 웃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자녀들 있지요 맏아들, 둘째아들, 셋째아들 있는데 대게 맏아들은요 남편을 닮아요, 아버지를 닮았어요. 둘째아들은 어머니 닮았어요. 셋째아들은 모를 사람 닮았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첫째아들 때는 열심히 연애를 했기 때문에 남편을 사랑했으니까. 둘째아들 낳을 때쯤은 별로였어요. 여러분 누굴 미워하십니까 나도 모르게 미운 사람을 배우고 있어요. 미운 사람을 내가 닮고 있어요. 미운 사람에게 내 마음과 생활이 끌려가고 있어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얘기입니까 모델라이징(modelizing)이란 것은 참 중요한 겁니다. 표본을 닮아 간다는 것, 이건 학습 효과가 있습니다. 많은 세월동안 경험을 쌓아서 거기에 도달한 어떠한 패러다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그 일생을 배우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엄청난 많은 지식과 경험을 우리는 본받음으로 해서 쉽게 배우는 것이지요. 또한가지는 학습 촉진 효과가 있습니다. 배우는 사람하고 같이 앉아 있고, 그저 편안하게 배울 수 있으니까요. 또 뛰는 사람하고 같이 뛰는 것은 쉽지 않습니까 그래서 행동학습 촉진 효과가 있고요, 또 하나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렇게 배워서 어떻게 되나 그거 모릅니다. 됐잖아요 이렇게 해서 됐다는 결과를 알고 공부하기 때문에 이것은 아주 쉬운 겁니다. 그뿐 아니라 모방이라는 것은 결과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입니다. 이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생각지 못하고 따라갑니다. 또한 무비판적일 때가 많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니까. 사랑하니까. 무비판적으로 본받거든요.
그리고 어떤 때는 미워하면서 그것도 생각하는 거니까. 사랑도 생각이고 미움도 생각이요. 집착하고 있다 보니까 닮아가고 배우게 되더란 말이에요. 자 이제 이 본받는다는 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전인적 교육이요, 가장 효과적 교육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모방이나 혹은 이 본받는다는 것은 그것은 하나의 만남의 관계를 말합니다. 인격과 인격의 만남의 관계입니다. 이상적으로 만나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뭐 비판할 것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이 전적으로 믿고 위탁하고 그대로 본받으려고 한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만은 그렇지 못 할 때가 많거든요. 본받을만한 자가 없고 본받아서는 안 될 그러한 여건에서 살아가고 있단 말이에요. 어쨌든 이 만남이라는 거 참 중요하지요 맨 먼저는 부모를 만나지요, 그 다음에 친구를 만나지요, 선생님들을 만나지요. 이 만남의 관계 속에서 알거나 모르거나 원커나 원치 않거나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공부하고 있어요. 내가 닮아 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고로 만남의 관계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사람과 함께 하고, 안심하고 본받고, 가능하면 더 본받고 싶고, 닮고 싶고, 그런 분이 옆에 있으면서 여러분이 한평생을 산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상적 모델을 앞에 두고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말합니다, "나를 본받으라" 나를 본받으라. 어떤 분은 생각해요 '좀 지나친 얘기가 아닌가 어떻게 감히 나를 본받으라 할 수 있느냐' 그러나 여러분 그 말이야 하던 안 하던 그렇게, 그렇게 운명지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본받는다고 하는 상황, 이 서로 만남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이건 운명적 상황입니다. 때로는 은총적 상황이요, 어떤 때는 악연적 상황입니다. 안 만나야 될 사람을 만나지요. 여기서 내 운명이 잘못되죠. 생각해야 합니다. 자 이것이 은총적 관계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의 할아버지가 제게 늘 얘기 해 주던 얘기 중예요. 제가 나기도 전 얘기입니다 만은, 장사하러 다니다가 송천 소래라고 하는 곳에 갔다가 장날 선교사를 만납니다.
선교사를 한 번 만난 그 사건으로 해서 상투를 자르고 예수를 믿고 결국은 교회를 봉사하는 장로님으로 살아가는데요. 자 그 장날 그 선교사를 만난 그 사건 하나가 할아버지의 운명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생각해 보세요. 그 일로 인해서 내가 여기에 있는 거 아닙니까 이걸 은총적 만남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서로 만난다고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제가 우리 학생들 가운데 유학 간다고 하는 학생들이 찾아와서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하면 뭐 여러 가지 기도 제목이 있겠지만은 제가 꼭 기도하는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이 학생이 앞으로 가서 공부할 때 좋은 교수님 만나게 해주세요. 좋은 친구 만나게 해주세요. 좋은 학설을 만나게 해 주세요." 꼭 그렇게 그렇게 기도하고 싶어요. 교수님 한번 잘못 만나면 운명이 바뀝니다. 제가 아는 분들 가운데, 친구들 가운데서도 참 어찌 생각하면 불행하게 한평생을 살았어요. 마지막에도 많이 잘못되었어요. 그런 얘기합니다. "내가 유학시절에 첫번 만난 아무개 교수, 내가 그분을 만난 것이 내 운명을 이렇게 만들었다" 이겁니다. 확실히 잘못 살았다고 그래요. 잘못 만났지요. 왜요 여기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본받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 말합니다.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다. 그런고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그럽니다. 본받은 자 되라. '너희와 나와 만난 것은 은총적 관계다' 이겁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되고 나는 너희의 자랑이 되리라그런고로 나를 본받으라. 나와 함께 하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담대하게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이 본받는다고 하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 이전에 생각할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본받으라 할 때는 그 뒤에 자기 만족이라고 하는 기본이 있습니다. 기본적 신앙 고백 기본적 철학이 있는 거예요. 자기가 만족할 때만 이것이 가능한 것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스스로 만족하십니까 내 생활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라면 여러분도 행복하고 주변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거예요. 내가 만일에 불행하고 신세타령을 하고 팔자타령을 하고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이러고 사는 사람하고 살면 그 옆에 있는 사람까지 다 운명이 삐뚤어지는 거예요. 그걸 있지 말아야 되요. 뭐 본받으라 말라 할 것 없이 우선 내가 만족한 행복을 느끼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말이 나오는 것이지요. 나는 행복하다. 너희들도 나와 함께 나를 본받아 행복하라. 그런 말씀 아니겠습니까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생사는 가늠하는 재판을 받습니다. 그 재판정에서 말합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내가 남을 부러워 할 것이 없어요. 다른 사람은 나를 부러워해요. 나는 나로서 만족해요. 행복해요. 그것이 먼저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이올시다. 그리고야 모든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자기 만족이 없으면 한 마디로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사는 거예요.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사는 거예요. 그걸 잊지 말아야 되요. 나의 목적이 선했습니다. 목적에 만족합니다. 내 선택에 만족합니다. 어떤 분들 자녀들에게 "내가 잘한 일 가운데 최고로 잘한 것은 네 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어때요 괜찮죠 그 정도의 가정이면 행복한 가정이에요. "내 일생 가장 큰 실수는 너희 엄마를 선택한 것이다." 이러면 운명이 어디로 갈 거예요 곤두박질할거지. 내 목적, 내 선택, 내 과거, 내 현재, 내 미래, 내 운명, 하늘나라의 약속까지 다 확실히 잘했다. 확실히 나는 만족하다. 잘 살았고, 나는 행복하다. 내 직업 만족하다. 내 노력, 내 수고, 유감이 없다. 자 어떻습니까 제가 아는 외과 의사가 있어요. 늘 피를 만집니다. 그래서 이 피를 많이 만지고 이렇게 하니까 수술 다 끝난 다음에 이 울먹울먹하거든요.
그래서 그는 집에 바로 돌아가질 않고, 가만히 보니까 자기가 돈을 내가면서 친구를 불러 가지고 탁구도 치고, 당구도 치고 뭐 그러더라고요 보니까. 자기 말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럴 때 술 많이 마신데요. 그러나 자기는 술 생각은 없고 이런 걸 이제 한참 놀다가 밤 11시, 12시 돼서 집에 돌아가요. 그러니까 부인은 또 쨍쨍되고, 맨날 장로라는 사람이 당구장으로만 다니고, 아주 집에 안 들어온다고 그래요. 그러나 본인 얘기는 그게 아니더라구요. "내가 이렇게 지금 마음이 이러기 때문에 집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그런다." 그래요. 이렇게 살다보니까 그 부인 얘기가 자기 아들 둘이 있는데 "너희들은 절대 의사 되지 마라."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냥 "너는 절대 의사 되지 마라.나는 의사하고 결혼한 것을 이렇게 후회하고 있다. 절대 의사 되지 마라."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왠일이에요 아들 둘이 다 의사가 됐어요. 왜요 그 아버지는 의사 된 것을 행복하게 여기고 있었거든요. 가장 큰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나는 의사로 만족한다." 그랬기 때문에 의사가 된 겁니다. 그게 중요한 거죠. 제가 일본에 갔을 때, 우리 김봉학 장로님하고 같이 저녁식사를 하게 되는데, 그 일본의 재벌이거든요. 모처럼 초대받았는데 내가 싼 거 먹겠어요 아 그래서 제일 오래오래 기억할만한 맛있는 음식을 사 내라고 그랬죠. 그랬더니 "갑시다" 그래서 차를 타고 갔는데, 납작하게 지은, 조그마한, 허름한 집에 들어갔어요. "이 집이 5대째 쓰시를 하는 집인데, 유명한 집입니다. 여기에 장관들도 많이 오고, 며칠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여긴 못 들어옵니다. 전 단골이라서 제가 이렇게 예약을 할 수 있었는데, 참 이 집에 와서 먹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주 들어가자마자 환영을 하더라고요.
거기서 제가 제일 감격스러웠던 것은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 "저 사람이 첫째 아들이요, 둘째 아들이고, 요거이 손자고…." 그러더라구요. 5대째 쓰시를 하는 거요. 맛이야 어쨌든 간에 저는 거기서 큰 감격을 얻었어요. 그분은 내가 쓰시를 만들면서 가장 좋은 쓰시를 만들면서, 스스로 행복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줄줄이 이어가며 5대를 거쳐서….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본받았지요. 본을 끼쳤지요. 자 이제 내가 이렇게 행복하면서 다시 자녀들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나와 같기를 바란다."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기도가 있습니다.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너희도 원하고, 내가 즐기는 대로 너희도 즐기고, 내가 행복한 대로 너희도 행복하고, 내가 목적 삼고 있는 대로 같은 목적에서 살아주기를 바란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너희도 사랑하고, 내가 소망하는 것을 너희도 소망하고, 내가 의지하는 것을 너희도 의지하고, 내가 감사하는 일을 너희도 감사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보다 더 웅변적이고 강한, 능력 있는 교육이 어디에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1장 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본받은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다른 면에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이미테이트(immitate)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애쓰는 그것. 그의 고난에 동참하고, 십자가를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는 그의 마음. 이것을 본받으라." 말합니다. 그 본받음의 대표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디모데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디모데 이름을 부릅니다. "내 아들 디모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들입니다 만은 그는 철저하게 사도 바울을 본받습니다.
빌립보 2장 19절에서 보면은 "그 만이 내 뜻을 알고, 그 만이 진실하고, 그 만이 내 생각을 다 이해하고 있다." 고 말합니다. 참, 참 아들이오. 본받은 자 된 모범적 샘플입니다. 현대인에게 문제되는 건 이겁니다. "부모는 표본이 아니요, 참고서일 뿐이다." 이렇게들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의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통령이 되어서 연설을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나됨은,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은 다 나의 천사 같은 어머니 덕택입니다." 그 어머니는 계모입니다. 천사 같은 어머니, 그를 본받아 오늘 내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같은 은총적 관계, 은총적 만남, 은총적 표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벌써 그 누구에게 본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건 실제 상황입니다. 배우고 또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의 나됨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책임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나 하나만의 세계가 아닙니다. 나 하나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함께 나를 본받으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제가 한 때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은퇴하는 자리에 참가해 봤습니다. 교단에서 40년을 산 분인데 은퇴 인사를 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왜요 학생들에게 "나를 본받으라"하는 말을 한 번도 못 해보고 교단을 물러선다고. "나를 본받으라!" 이 말을 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성공적인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래가지고도 안되는 수가 있어요. 그리고도 안 된다면 이것은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것은 모델이 잘못됐다는 겁니다. 맨 처음에 어떻게 기초부터 배웠느냐 그것이 중요하대요. 가끔 외국사람이 한국말을 잘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근데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사투리를 써요. 그래 아니 우리야 고향이 따로 있으니까 사투리를 쓰지만 당신은 어디 고향이기에 사투리를 쓰느냐 이거예요. 이거는 맨 처음에 한국말을 배울 때 자기가 배운 사람이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래요. 그로부터 배우면 40년 동안을 못 고치더라구요. 그런 만큼 맨 처음에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교육이 이루어집니다. 그런고로 무엇을 배웠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서 배우느냐가 중요합니다. 운동도 마찬가지요, 학문도 마찬가지요, 누구에게서 배웠느냐 그것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배움이라고 하는 것은 말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또 말로 가르치고. 이것은 논리적 교육입니다. 이성에 호소하면서 이치에 맞도록 합리적으로 이해를 도와 가면서 가르치는 그런 교육이 있고, 또 하나는 가슴으로 가르칩니다. 말이 없어도 소위 정서 교육이라는 거지요. 교육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감정에 호소합니다.
그래서 가슴과 가슴에서 교육이 이루어집니다. 또 하나는 본을 받는 겁니다. 이 본받는다는 것은 존경과 신뢰가 있어야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가 고민하는 겁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존경할 사람이 없답니다. 도대체 존경할 사람에 없어요. 그런가 하면 신뢰할 사람이 없어요. 그래 뭘 배우겠습니까 어디서 배우란 말입니까 존경과 신뢰를 통해서 교육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교육, 어쩌면 무서운 교육이 바로 지식 이전에 있는 교육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배우는 것, 저절로 배워지는 것, 무의식중에 가르치고 무의식중에 배우는 것, 이게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가슴 깊이, 깊이 깊이 뿌리 박아서 한평생의 운명을 좌우하게 됩니다. 인류 역사상에 가장 끔찍한, 최악의 사건중의 하나로 기억하고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사람 육백만을 죽였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겁니다. 전쟁 상황 중에 서로 죽이고 죽이고 하면서 이루어진 사건이라면 뭐 육백만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조용한, 평안하게 사는 유대사람을 하나씩 둘씩 끌어다가 개스실에 넣어서 죽였단 말입니다. 저항도 못하는 유대사람들. 육백만이 얼마냐 서울 인구가 지금 통 털어서 천이백만이라고 하는데 이 절반 되는 숫자! 상상해 보세요. 그 박물관에 가보면 깜짝 놀랍니다. 금이빨을 뽑아서 놓아둔, 머리카락을 잘라서 놓아둔, 그 시계들 막 풀어 놓은 거,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걸 봅니다. '원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이런 끔찍한 일이 어떻게 인류 역사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 히틀러가 누구냐 이겁니다. 그의 아버지는 본래 행상인이었답니다. 물건을 해다가 돌아다니면서 팝니다. 이거 다 팔 때까지 집에 못 돌아옵니다. 한 달도 걸리고 두 달도 걸리고 그리고 집에 돌아옵니다. 그래 집을 늘 비웠습니다. 그 어머니가 고독해서 외로움을 참지 못해서 이웃남자들하고 불륜 관계를 맺습니다.
그런 중에도 돈 많고 세력이 있는 유대사람, 전형적인 돈 많은 유대사람 남자와 어머니가 불륜의 관계를 맺는 것을 그는 보고 자랍니다. 그러지 말라고 눈물로 하소연하고 매달리고 말렸지만은 어머님은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랐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두 사람을 미워합니다. 하나는 유대사람이고 하나는 여자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그는 결과적으로 육백만을 죽이는 그런 사람이 됐고 유대사람을 죽였고 또 하나는 평생 결혼을 못 합니다. 주변에 수없이 여자가 많지만은 여자들을 미워하고, 끝까지 미워하고 독신으로 살다가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납니다. 이제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무서운 것이 교육인가. 여러분 사랑하고 배웁니다. 존경하면서 닮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에요, 미워하면서 닮습니다 그게 무서운 거예요. 그런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누굴 미워하죠 열심히 미워하면 고거 닮는 아이를 낳는데요. 여러분 아시겠어요 제가 어느 책에서 심리학적으로 써 놓은 걸보고 혼자 웃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자녀들 있지요 맏아들, 둘째아들, 셋째아들 있는데 대게 맏아들은요 남편을 닮아요, 아버지를 닮았어요. 둘째아들은 어머니 닮았어요. 셋째아들은 모를 사람 닮았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첫째아들 때는 열심히 연애를 했기 때문에 남편을 사랑했으니까. 둘째아들 낳을 때쯤은 별로였어요. 여러분 누굴 미워하십니까 나도 모르게 미운 사람을 배우고 있어요. 미운 사람을 내가 닮고 있어요. 미운 사람에게 내 마음과 생활이 끌려가고 있어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얘기입니까 모델라이징(modelizing)이란 것은 참 중요한 겁니다. 표본을 닮아 간다는 것, 이건 학습 효과가 있습니다. 많은 세월동안 경험을 쌓아서 거기에 도달한 어떠한 패러다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그 일생을 배우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엄청난 많은 지식과 경험을 우리는 본받음으로 해서 쉽게 배우는 것이지요. 또한가지는 학습 촉진 효과가 있습니다. 배우는 사람하고 같이 앉아 있고, 그저 편안하게 배울 수 있으니까요. 또 뛰는 사람하고 같이 뛰는 것은 쉽지 않습니까 그래서 행동학습 촉진 효과가 있고요, 또 하나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렇게 배워서 어떻게 되나 그거 모릅니다. 됐잖아요 이렇게 해서 됐다는 결과를 알고 공부하기 때문에 이것은 아주 쉬운 겁니다. 그뿐 아니라 모방이라는 것은 결과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입니다. 이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생각지 못하고 따라갑니다. 또한 무비판적일 때가 많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니까. 사랑하니까. 무비판적으로 본받거든요.
그리고 어떤 때는 미워하면서 그것도 생각하는 거니까. 사랑도 생각이고 미움도 생각이요. 집착하고 있다 보니까 닮아가고 배우게 되더란 말이에요. 자 이제 이 본받는다는 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전인적 교육이요, 가장 효과적 교육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모방이나 혹은 이 본받는다는 것은 그것은 하나의 만남의 관계를 말합니다. 인격과 인격의 만남의 관계입니다. 이상적으로 만나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뭐 비판할 것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이 전적으로 믿고 위탁하고 그대로 본받으려고 한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만은 그렇지 못 할 때가 많거든요. 본받을만한 자가 없고 본받아서는 안 될 그러한 여건에서 살아가고 있단 말이에요. 어쨌든 이 만남이라는 거 참 중요하지요 맨 먼저는 부모를 만나지요, 그 다음에 친구를 만나지요, 선생님들을 만나지요. 이 만남의 관계 속에서 알거나 모르거나 원커나 원치 않거나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공부하고 있어요. 내가 닮아 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고로 만남의 관계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사람과 함께 하고, 안심하고 본받고, 가능하면 더 본받고 싶고, 닮고 싶고, 그런 분이 옆에 있으면서 여러분이 한평생을 산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상적 모델을 앞에 두고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말합니다, "나를 본받으라" 나를 본받으라. 어떤 분은 생각해요 '좀 지나친 얘기가 아닌가 어떻게 감히 나를 본받으라 할 수 있느냐' 그러나 여러분 그 말이야 하던 안 하던 그렇게, 그렇게 운명지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본받는다고 하는 상황, 이 서로 만남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이건 운명적 상황입니다. 때로는 은총적 상황이요, 어떤 때는 악연적 상황입니다. 안 만나야 될 사람을 만나지요. 여기서 내 운명이 잘못되죠. 생각해야 합니다. 자 이것이 은총적 관계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의 할아버지가 제게 늘 얘기 해 주던 얘기 중예요. 제가 나기도 전 얘기입니다 만은, 장사하러 다니다가 송천 소래라고 하는 곳에 갔다가 장날 선교사를 만납니다.
선교사를 한 번 만난 그 사건으로 해서 상투를 자르고 예수를 믿고 결국은 교회를 봉사하는 장로님으로 살아가는데요. 자 그 장날 그 선교사를 만난 그 사건 하나가 할아버지의 운명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생각해 보세요. 그 일로 인해서 내가 여기에 있는 거 아닙니까 이걸 은총적 만남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서로 만난다고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제가 우리 학생들 가운데 유학 간다고 하는 학생들이 찾아와서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하면 뭐 여러 가지 기도 제목이 있겠지만은 제가 꼭 기도하는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이 학생이 앞으로 가서 공부할 때 좋은 교수님 만나게 해주세요. 좋은 친구 만나게 해주세요. 좋은 학설을 만나게 해 주세요." 꼭 그렇게 그렇게 기도하고 싶어요. 교수님 한번 잘못 만나면 운명이 바뀝니다. 제가 아는 분들 가운데, 친구들 가운데서도 참 어찌 생각하면 불행하게 한평생을 살았어요. 마지막에도 많이 잘못되었어요. 그런 얘기합니다. "내가 유학시절에 첫번 만난 아무개 교수, 내가 그분을 만난 것이 내 운명을 이렇게 만들었다" 이겁니다. 확실히 잘못 살았다고 그래요. 잘못 만났지요. 왜요 여기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본받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 말합니다.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다. 그런고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그럽니다. 본받은 자 되라. '너희와 나와 만난 것은 은총적 관계다' 이겁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되고 나는 너희의 자랑이 되리라그런고로 나를 본받으라. 나와 함께 하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담대하게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이 본받는다고 하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 이전에 생각할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본받으라 할 때는 그 뒤에 자기 만족이라고 하는 기본이 있습니다. 기본적 신앙 고백 기본적 철학이 있는 거예요. 자기가 만족할 때만 이것이 가능한 것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스스로 만족하십니까 내 생활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라면 여러분도 행복하고 주변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거예요. 내가 만일에 불행하고 신세타령을 하고 팔자타령을 하고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이러고 사는 사람하고 살면 그 옆에 있는 사람까지 다 운명이 삐뚤어지는 거예요. 그걸 있지 말아야 되요. 뭐 본받으라 말라 할 것 없이 우선 내가 만족한 행복을 느끼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말이 나오는 것이지요. 나는 행복하다. 너희들도 나와 함께 나를 본받아 행복하라. 그런 말씀 아니겠습니까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생사는 가늠하는 재판을 받습니다. 그 재판정에서 말합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내가 남을 부러워 할 것이 없어요. 다른 사람은 나를 부러워해요. 나는 나로서 만족해요. 행복해요. 그것이 먼저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이올시다. 그리고야 모든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자기 만족이 없으면 한 마디로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사는 거예요.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사는 거예요. 그걸 잊지 말아야 되요. 나의 목적이 선했습니다. 목적에 만족합니다. 내 선택에 만족합니다. 어떤 분들 자녀들에게 "내가 잘한 일 가운데 최고로 잘한 것은 네 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어때요 괜찮죠 그 정도의 가정이면 행복한 가정이에요. "내 일생 가장 큰 실수는 너희 엄마를 선택한 것이다." 이러면 운명이 어디로 갈 거예요 곤두박질할거지. 내 목적, 내 선택, 내 과거, 내 현재, 내 미래, 내 운명, 하늘나라의 약속까지 다 확실히 잘했다. 확실히 나는 만족하다. 잘 살았고, 나는 행복하다. 내 직업 만족하다. 내 노력, 내 수고, 유감이 없다. 자 어떻습니까 제가 아는 외과 의사가 있어요. 늘 피를 만집니다. 그래서 이 피를 많이 만지고 이렇게 하니까 수술 다 끝난 다음에 이 울먹울먹하거든요.
그래서 그는 집에 바로 돌아가질 않고, 가만히 보니까 자기가 돈을 내가면서 친구를 불러 가지고 탁구도 치고, 당구도 치고 뭐 그러더라고요 보니까. 자기 말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럴 때 술 많이 마신데요. 그러나 자기는 술 생각은 없고 이런 걸 이제 한참 놀다가 밤 11시, 12시 돼서 집에 돌아가요. 그러니까 부인은 또 쨍쨍되고, 맨날 장로라는 사람이 당구장으로만 다니고, 아주 집에 안 들어온다고 그래요. 그러나 본인 얘기는 그게 아니더라구요. "내가 이렇게 지금 마음이 이러기 때문에 집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그런다." 그래요. 이렇게 살다보니까 그 부인 얘기가 자기 아들 둘이 있는데 "너희들은 절대 의사 되지 마라."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냥 "너는 절대 의사 되지 마라.나는 의사하고 결혼한 것을 이렇게 후회하고 있다. 절대 의사 되지 마라."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왠일이에요 아들 둘이 다 의사가 됐어요. 왜요 그 아버지는 의사 된 것을 행복하게 여기고 있었거든요. 가장 큰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나는 의사로 만족한다." 그랬기 때문에 의사가 된 겁니다. 그게 중요한 거죠. 제가 일본에 갔을 때, 우리 김봉학 장로님하고 같이 저녁식사를 하게 되는데, 그 일본의 재벌이거든요. 모처럼 초대받았는데 내가 싼 거 먹겠어요 아 그래서 제일 오래오래 기억할만한 맛있는 음식을 사 내라고 그랬죠. 그랬더니 "갑시다" 그래서 차를 타고 갔는데, 납작하게 지은, 조그마한, 허름한 집에 들어갔어요. "이 집이 5대째 쓰시를 하는 집인데, 유명한 집입니다. 여기에 장관들도 많이 오고, 며칠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여긴 못 들어옵니다. 전 단골이라서 제가 이렇게 예약을 할 수 있었는데, 참 이 집에 와서 먹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주 들어가자마자 환영을 하더라고요.
거기서 제가 제일 감격스러웠던 것은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 "저 사람이 첫째 아들이요, 둘째 아들이고, 요거이 손자고…." 그러더라구요. 5대째 쓰시를 하는 거요. 맛이야 어쨌든 간에 저는 거기서 큰 감격을 얻었어요. 그분은 내가 쓰시를 만들면서 가장 좋은 쓰시를 만들면서, 스스로 행복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줄줄이 이어가며 5대를 거쳐서….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본받았지요. 본을 끼쳤지요. 자 이제 내가 이렇게 행복하면서 다시 자녀들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나와 같기를 바란다."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기도가 있습니다.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너희도 원하고, 내가 즐기는 대로 너희도 즐기고, 내가 행복한 대로 너희도 행복하고, 내가 목적 삼고 있는 대로 같은 목적에서 살아주기를 바란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너희도 사랑하고, 내가 소망하는 것을 너희도 소망하고, 내가 의지하는 것을 너희도 의지하고, 내가 감사하는 일을 너희도 감사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보다 더 웅변적이고 강한, 능력 있는 교육이 어디에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1장 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본받은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다른 면에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이미테이트(immitate)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애쓰는 그것. 그의 고난에 동참하고, 십자가를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는 그의 마음. 이것을 본받으라." 말합니다. 그 본받음의 대표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디모데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디모데 이름을 부릅니다. "내 아들 디모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들입니다 만은 그는 철저하게 사도 바울을 본받습니다.
빌립보 2장 19절에서 보면은 "그 만이 내 뜻을 알고, 그 만이 진실하고, 그 만이 내 생각을 다 이해하고 있다." 고 말합니다. 참, 참 아들이오. 본받은 자 된 모범적 샘플입니다. 현대인에게 문제되는 건 이겁니다. "부모는 표본이 아니요, 참고서일 뿐이다." 이렇게들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의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통령이 되어서 연설을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나됨은,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은 다 나의 천사 같은 어머니 덕택입니다." 그 어머니는 계모입니다. 천사 같은 어머니, 그를 본받아 오늘 내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같은 은총적 관계, 은총적 만남, 은총적 표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벌써 그 누구에게 본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건 실제 상황입니다. 배우고 또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의 나됨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책임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나 하나만의 세계가 아닙니다. 나 하나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함께 나를 본받으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제가 한 때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은퇴하는 자리에 참가해 봤습니다. 교단에서 40년을 산 분인데 은퇴 인사를 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왜요 학생들에게 "나를 본받으라"하는 말을 한 번도 못 해보고 교단을 물러선다고. "나를 본받으라!" 이 말을 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성공적인 삶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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