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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본 받으라 (빌3: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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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動物중에 흉내를 가장 잘 내는 動物이 있습니다.원숭입니다. 원숭이가 어떻게 흉내를 잘 내는지는 모를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南方에서는 원숭이 사냥이 성하다고 합니다. 나무를 잘 타는 원숭이를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원숭이 사냥을 아주 쉽게하는 方法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일까요. 원숭이들이 서식하는 나무 그늘아래 원숭이 사냥꾼들이 모입니다. 둘러 앉아 술을 나누어 먹습니다. 권커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 그렇게 재미스러울 수가 없어 보입니다. 나무의 잎새사이에서 몸을 숨기고 열심히 이 모양을 훔쳐 봅니다. 원숭이들입니다. 사람들은 일부러 취한척 비틀거리며 흩어집니다. 원숭이들은 이런 모습이 그렇게 재미스러울 수가 없나 봅니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술좌석으로 우르르 모여 듭니다. 방금 전에 본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합니다. 권커니 작커니 영락없는 흉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함정입니다. 독한 술을 의좋게 나누어 먹은 원숭이 들은 단번에 대취해 버리고 맙니다. 손발에 힘이 풀리고 기운을 쓸수가 없습니다. 그때 여기 저기 숨어서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원숭이 사냥꾼들이 나타납니다. 무서운 사냥꾼들을 보고 나뭇가지를 타고 달아나고 싶으나 할수가 없습니다. 손아귀의 힘이 풀리고 다리가 후들 후들 떨립니다.
그 날랜 원숭이들도 꼼짝 못하고 고스란히 사로 잡힙니다. 사람들은 얼씨구나 좋구나 콧노래를 부르며 생포합니다. 이것이 원숭이 사냥입니다. 원숭이 사냥은 그렇게 짭짤하고 신나는 사냥이라고 합니다. 본 론 사탄이 여호와 하나님의 성도들을 죄악으로 유혹하여 타락시킬 때에도 이와 유사한 方法이 동원 됩니다. 그러나 오늘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말씀은 사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動物 중에는 원숭이보다 훨씬 흉내를 잘 내는 고등動物이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사람은 흉내를 내는데는 천재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모방이라고 말합니다. 인류문화의 조류가 급속하게 발전하게 된것은 그 모방성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전인류는 공통적으로 모방성이 농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위대한 모방성을 갖고 있지만 그 모방성이 모두 자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모방하느냐에 따라서 자랑스럽기도 하고 해악이 되기도 합니다. 그 위대한 모방성으로 아담을 모방한다면 아담과 같은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따르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그 훌륭한 모방성을 십분 발휘하여 그리스도를 모방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될것입니다. 무엇을 모방하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 모방성에 대하여 깊은 통찰력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 성도들이 이 모방성을 최대한 이용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 천재적인 기득권을 활용하는 것은 성도들의 지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먼저 이 잇점을 활용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 무궁한 약속의 보장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모방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잘 따른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가장 훌륭하게 모방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흉내 내어야 하겠습니다. 누구보다도 가장 훌륭하게 그리스도를 모방해야 하겠습니다.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늘의 하나님을 땅에 나타내신 모형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잘 모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모세가 장막을 만들 때에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을 따라 지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솜씨 좋은 장인들을 활용하여 하늘의 모형을 가장 훌륭하게 모방한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잘 깨달은 사람이 바울사도인것 같습니다. 바울 자신은 모방의 천재성을 발휘한 자랑을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나를 본 받으라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전에 인간바울을 먼저 따르도록 종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를 잘 모방 하였으니 또 자신을 모방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잘 따랐기 때문에 모방의 훌륭한 모범이 될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적이요 세속적인 명예를 버린 사람입니다. 학벌과 문벌 그리고 자기 것에 대한 모든 애착을 버린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분토와 같이 여긴 사람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이런 세속적인 것들을 버리는데 모범이 된 자신을 본 받으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인간적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달음질하고있는 자신을 본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모든 성도들의 믿음이 아직 여리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 실제의 행동지침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초대교회 시절에만 필요한 권면이겠습니까 영적인 신앙으로 말하면 오늘날도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의 지침이 됩니다. 바울사도의 이와 같은 말씀을 생각하면서 18절을 보십시요. 이 말씀은 바울이 자신을 본 받으라고하신 그 말씀에 의거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인간의 쾌락주의 또는 향락주의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고난의 십자가에 동참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향락만 추구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유대교인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무시합니다. 율법의 규범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허물, 실수와 죄악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셋째로 모든 인간적인 종교까지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편협하고 타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이라고 해서 옹졸 하다느니, 유아독존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비난을 받더라도 타종교인들과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인간의 도덕률을 강조하고 인간의 의를 나타내려고 몸부림치는 종교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십자가의 원수 들입니다. 19절을 보십시요. 이런 사람들의 결말이 적라라하게 나옵니다. 십자가의 원수들은 멸망의 길에 처한 자들입니다. 멸망이라는 말은 구원의 반대개념입니다.이런 자들은 자신의 배를 신으로 삼고 있습니다. 배를 불리려 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무엇이나 채우려 하는 것은 비우려는 것에 반비례하는 행위입니다. 우리 주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체시나 동등되이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온전히 자기를 비웠습니다. 채찍으로 갈갈이 찢긴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아니한 빈몸으로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 몸의 피를 남김없이 다 쏟으셨습니다. 로마의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쏟아졌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의 몸에 피한방울 남김없이 모두 비우셨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의 무덤까지도 비우셨습니다. 안식후 첫날 여자들이 무덤을 채아 갔을때 주님은 부활하셨고 무덤은 텅텅 비워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비움의 도입니다. 맺는 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권면을 받은 성도들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리십시요. 땅속까지 낮아지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은 부활하사 하나님의 손에 들림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사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께서도 당신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고 영원한 영광의 보좌 앞으로 나아 가려면 바울사도가 주님을 본 받은것 같이 우리도 주님을 본 받아야할 것입니다. 주님을본 받는 것은 주님의 말씀들이 기록된 성경대로 실천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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