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누구라 하느냐 (막8:27-31)
본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43세가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이태리의 밀란에 살던 루더빈코라는 공작에게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3년간의 작업 끝에 그는 이 그림의 초벌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그림의 모습을 친구에게 보여주면서 소감을 물었습니다. 이 때 다빈치의 친구는 예수님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그 잔을 가르키면서 이 잔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사실적이다. 마치 살아있는 컵 같다는 코멘트를 했습니다. 그 때 다빈치는 갑자기 붓을 들어 그 컵을 지워 버렸다고 합니다. 친구가 당황해하면서 깜짝 놀라 왜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다빈치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아무 것도 이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네." 이것이 다빈치의 대답이었다고 합니다. 해마다 이 크리스마스의 시즌이 되면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여러 가지를 만나게 됩니다. 크리스마스 트리, 크리스마스 캐롤, 산타 크로스, 동방박사, 목자들, 마리아. 이런 이야기들이 이 계절의 낭만을 돋구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계절의 낭만을 즐거워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에는 확실히 이런 낭만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운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이 계절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계절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이 12월을 좋아했습니다. 커 가면서는 이 12월이 여러 가지로 힘든 느낌을 갖는데 어릴 때는 12월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12월에 크리스마스가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제 생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4살인지 5살인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제 생일날이었습니다. 사실은 비밀이지만, 제 생일이 무척 가까이 왔습니다. 음력이라 해마다 왔다 갔다 합니다. 4살인지 5살인지 분명하지는 않은데 한번은 제 생일날 저희 아버님이 많은 손님들을 초청해서 저희 집안에 아주 시끌벅끌하게 마치 장터처럼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습니다.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아주 약주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막걸리 파티가 한 쪽에서 벌어지고 노래소리, 고함소리,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뒷방에서 혼자 있으면서 제가 조숙했는지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나요. 오늘 내 생일인데 왜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한 일이 있습니다. 혹시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에 예수님이 그런 생각을 하시지 않을까 이런 느낌을 갖습니다. 이 시즌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구별되는 그 독특성 가운데 하나는 다른 종교는 그 교주의 가르침만 가지고 성립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가르침보다도 예수님이 더 중요해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생입니다.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이 멸망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물을 수 있는 질문 가운데 이보다 더 심각하고 이보다 더 중요하고 이보다 더 본질적인 질문이 없는데 그 질문은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 생애의 목표를 향해서 걸어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끼셨을 때 어느 날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던지십니다. 헬몬산으로 가는 도상이었을 것입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의 타운에 도달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이켜 보시면서 이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두 번째 질문으로는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첫째 질문은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것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를 예수께서 물어 보신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 가지로 주님을 향한 답변을 올렸습니다. 첫째로는 사람들이 선생님을 침례 요한이라고 부릅디다. 아마도 이 대답의 배경속에는 요한이라는 사람이 그 당시에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습니다.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사람들은 광야까지 몰려왔습니다.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죄를 회개하며 요단강에 가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 위대한 영향력이 있었던 스승, 설교자 요한, 예수님을 그 요한의 재탕쯤 되는 분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 그는 위대한 지성, 그는 위대한 스승, 그는 위대한 정신으로 사람들에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해서 나쁜 사고는 아니지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정답은 결코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소개했습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능력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에 보면 엘리야가 한 번 기도하니까 하늘문이 열려요, 하늘은 비를 쏟기도 하고 비를 쏟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능력의 사람 엘리야를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한 번 기도하니까 소경이 눈의 열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타치하니까 귀머거리가 듣기 시작합니다. 아, 엘리야가 다시 살아났는가 엘리야의 재판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특별한 능력을 가진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수퍼스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요즈음 한국 TV에는 기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예수님은 특별한 기를 받아서 어떤 특별한 기적을 행하는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예수님을 외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뉴에이지에서 선포하는 예수가 그런 이미지를 갖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것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합디다. 이것은 두 가지 견해보다는 훨씬 더 정답에 가까운 것입니다. 선지자-하나님이 보내신 자, 그리고 하나님이 특별히 쓰시고 있는 사람, 이것은 확실히 정답에 근접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또한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소개하는 충분한 대답은 아직도 아닙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4장에 보시면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 대화를 하고 계십니다. 이 사마리아 여자는 처음에 예수님을 이해할 때 그 예수님이 나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당신은 가만히 보니까 유대인이고 나는 사마리아 사람인데 어째서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 유대인 남자,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나하고는 관계없는 당신, 이렇게 생각했던 여자가 예수님과 대화가 진행되다가 점차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생각이 바뀌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아, 예수님을 통해서 뭔가를 얻을 수가 있다. 내 목마름도 채워질 수가 있다. "선생님, 나에게 물을 주십시오." 이렇게 요구할 만큼 예수님이 무엇을 줄 수가 있는 분으로 생각이 발전해 갔습니다. 그러다가 얘기가 더 진행되던 대화속에서 예수님이 이 여인의 과거까지 들추어 내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충격적인 자기의 과거를 지적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놀라운 영적인 통찰력을 지닌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분명히 선지자이신군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고도 대화를 거기서 마무리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아직도 충분한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입술에서 고백되는 마지막 정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제자들의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견해를 들으신 다음에 이번에는 질문의 대상, 대답해야 될 대상을 바꾸어서 물으십니다. 자,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자, 교회 바깥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스승, 위대한 휴메니테리안, 존경할 만한 스승, 그리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과거속에 있었던 위대한 스승!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제자들의 사람들에 대한 예수에 대한 견해를 들으신 다음에 이번에는 질문의 대상, 대답해야할 대상을 바꾸어서 물으십니다. 자,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자 교회 바깥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스승, 위대한 휴메니테리안, 존경할 만한 스승, 그리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과거 속에 있었던 위대한 스승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것은 사람들의 견해고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여기서 강조된 말은 '너희는'이라는 이 단어가 강조가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제 2년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피부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어 왔습니다. 지나간 2년간 피부를 맞대고 나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지켜 보았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오병이어의 기적, 칠병이어의 기적 이 기적을 베풀 때 그 현장에 있었던 너희들, 갈릴리의 풍랑을 잠잠케 할 때 그 현장에서 그 능력을 지켜보았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지나간 여러 세월 교회당 안에서 찬송을 듣고 기도를 하면서 예수님의 단어에 익숙해 왔던 여러분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이해하고 계십니까 이것이 오늘 예수님의 질문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 앞에 본문에서 보는대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수제자인 베드로가 제일 먼저 나와서 단순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은 직설적인 대답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정답이었습니다. '주는 곧 그리스도시니이다.' 다 같이 '주는 곧 그리스도시니이다.' 사실 우리말 성경에 그렇게 번역된 단어 앞에 중요하게 강조된 정관사 하나가 빠져있기는 합니다. 주는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이 바로 그 그리스도, 우리가 기다려왔던 바로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독교의 모든 메시지가 사실은 이 고백 안에 들어 있어요.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뜻은 메시아라는 말하고 같은 뜻입니다. 그것은 본래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다. 이런 뜻입니다. 'the Anointed one'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 구약 성경에 보면 선지자가 될 때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말고 그 직위에 취임하기 위해서 기름부음을 받아야 할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제사장이고, 또 하나는 왕이었습니다. 제사장과 왕, 제사장이 되려면 반드시 양 뿔에 기름을 채워 놓고 기름부음을 머리에 받고 그 다음에 제사장의 자리에 취임합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제사장은 매우 중요한 역할은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된 제사장을 기다려 왔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기름을 부어주셔서 완전한 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어떤 분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것이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이예요. 제사장의 책임은 물론 제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제사입니다.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 앞에 그대로 접근 할 수가 없습니다. 죄를 해결해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속죄의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드리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 갈 수 있는 길을 예비하던 자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 당신이 그 그리스도 바로 그 제사장이십니다. 이 제사장이라는 말을 오늘 우리가 익숙한 다른 단어로 바꾸어 보면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구주이십니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분, 그래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할 수 있는 분, 바로 구주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이 그리스도라는 고백 속에는 또 하나의 다른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왕이십니다. 믿습니까 예수는 왕이십니다.
왕의 기능은 통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일뿐만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인간이 죄를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예비하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는 왕이십니다. 예수는 나를 다스리고 나를 통치하고 내 운명을 주장하고 날마다의 삶을 인도할 수가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는 왕이라는 말을 우리가 익숙한 다른 단어로 바꾼다면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이런 말입니다. 주님이십니다. 나의 주인, 내 삶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나의 주인, 예수님은 구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고백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발견한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사람, 우리는 이런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교회 나왔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예요. 집사의 타이틀을 갖고 있다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예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발견한 사람,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 중요한 고백. 예수님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 자, 이 고백을 받자 예수님은 비로소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던 놀라운 비밀 하나를 제자들에게 밝혀주십니다. 그 비밀의 내용이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31절 같이 읽겠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가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여기서 참 중요한 단어는 비로소라는 단어예요. 31절 하반부에 보시면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셨다. 비로서 뭘 가르치셨다고요 예수님이 얼마 안 있으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해야 할 것을 비로소 가르치셨다. 그 전에 제자들에게 이것을 공개한 적이 없습니다. 베드로에게서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받으시고 나서 이제 제자들이 이 위대한 진리를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다고 판단하신 주님은 이때에 비로소 기독교의 엄청난 진리의 극점,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제자들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제 내가 죽어야 한다. 그리고 사흘만에 살아야한다. 왜 이것을 이때 밝히셨을 까요 자,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말 속에는 두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다고 그랬어요.첫째는 예수는 구주이시고, 둘째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는 제사장이시고 예수는 왕이십니다. 첫 째로 예수님이 참된 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는 그는 반드시 죽으셔야 하십니다. 제사장의 중요한 책임은 제물을 준비하는 것이예요. 속죄의 제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제사장으로서 그가 준비한 속죄의 제물은 뭘까요 자신의 몸입니다. 그는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아야 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그가 대신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채찍을 맞게 위해서 주님이 자신의 몸을 십자가의 제물로 드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시고 거룩한 피를 뿌리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제사장이 되기 위하여 그 분은 십자가에 가서 죽으셔야만 했었습니다. 그는 구주가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제사장일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이제 우리의 삶을 통치하시고 다스리기 위해서 그는 살아나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어있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살아계십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살아계시지 못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드라마는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살아계십니다. 믿으십니까 살아계시기 때문에 내 기도를 들으세요. 내 인생 속에 간섭하세요. 나를 다스리세요. 나와 함께 하세요. 나를 인도하세요.
그분은 바로 우리의 왕이 되시고, 나의 주님이 되기 위해서 부활의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그리스도세요. 이 고백을 받자마자 예수님은 지금까지 감추어 두었던 아니 제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웠던 기독교의 진리의 극점, 이 위대한 진리를 계시하십니다. 나는 이제 죽어야 한다. 그리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그는 구주가 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고 그는 우리의 왕, 나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 그는 부활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 믿으십니까 예수는 그리스도십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 고백을 받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던지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선생님, 당신은 나의 그리스도. 주님은 당신은 나의 구주, 그리고 주님이 되십니다. 오늘 주님은 이 고백을 이 계절에 받기를 기뻐하십니다. 주님은 나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 하나가 있어요.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을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내가 예수님을 정말 그리스도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본문의 기사를 마태복음과 비교해 보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베드로가 고백을 했을 때 주님이 칭찬하신 대목이 마태복음에는 밝혀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시면 주님이 이 고백을 들으시고 너무 기뻐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것은 네 혈육이 아니야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인간적으로, 이성적으로 이 진리를 깨달아 안 것이 아니야. 하나님 아버지가 네게 알게 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발견하게 된 것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을 수가 있었던 것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도와주신 것이다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며 칭찬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러분,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성경 공부 안에서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이 똑같은 성경 공부 안에서 똑같은 교사에게 성경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새생명반에 들어가서 말씀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정한 과정이 끝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발견하고 믿고 삶이 바뀌는 사람이 있어요. 근데 성경 공부하고 바뀌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공부하는 자세가 진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깨달음을 얻지 못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 우리 주변의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가 성경 공부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가 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것은 여러 세월 동안 목회자인 저를 괴롭혀 왔던 질문입니다. 왜 어떤 사람은 교회 생활 십년, 이십년이 지나도 이 단순한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못할까 거기에는 플러스 알파가 있어요. 이성적인 추구가 빈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지 않고는 이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제 마지막 결론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 플러스 알파가 있어요. 기독교는 인간의 이성을 결코 없신 여기거나, 혹은 이성의 불필요성을 강조하는 반 이성적인 종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또한 이성에만 매달리고, 이성에게 모든 해석을 의탁하는 이성주의적 종교도 아닙니다. 때로 기독교는 이성을 넘어섭니다.
이성으로 깨달아 알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신 더하기 알파가 있어요. 이 부분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 부분에 하나님의 계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를 계시종교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이 깨우쳐 주셔야 깨달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진리 가운데 하나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진리예요. 저는 이 성탄의 계절에 아직도 신앙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교회 주변에서 맴도는 분이 있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깨달아 아는 성령님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이 깨달음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부탁을 드리고 싶어요.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계절 좀 조용한 시간을 내서 진지하게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제목을 드립니다. 그 기도제목은 이런 것이예요. 이 제목을 붙들고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 저에게 예수님을 깨달아 알게 도와주세요. 이것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기도보다도 그 기도하세요. 제일 중요한 기도예요. 이것은 자식을 위한 기도보다도 더 중요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깨닫지 못하면 여러분은 멸망인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도 멸망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예수님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예수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도와주세요.'
그런데 어떤 분이 그러더라구요. '목사님, 제가 그 기도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깨달아 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기도 제목을 한가지 더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 제가 죄인됨을 깨달아 알게 해주세요.' 자신의 죄인됨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동시에 함께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함께 기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신데 그는 어디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십니까 죄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잉태되었을 때 천사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즉 예수가 백성을 어디에서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랬어요. 죄에서 구원할 자, 죄로부터 구원할 자. 이 죄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구원을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깨닫지 못하고는 구원을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내 죄에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는 이 죄를 위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냈다는 이 사실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내 죄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한 것입니다. 나의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스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의 최선도, 나의 윤리적 결단도 죄 문제를 해결하기에 여전히 부족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시고 그가 나의 죄, 우리의 죄,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그 피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놀라운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깨달아 지지 않고, 구원이 깨달아 지지 않거든 주 앞에 엎드려 이렇게 이 계절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나의 죄인됨을 깨달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내 죄의 심각성 앞에 벌벌 떨리거든, 바로 이 죄 문제를 위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이것이 Good News고,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인 것이 여러분에게 밝혀질 줄로 믿습니다.
수년 전에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이 12월 달에 구 소련에 속해 있던 아르메니아에서 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무려 5만 5천명이 죽었어요. 굉장한 참사였어요. 그때 9층짜리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철근과 콘크리트 밑에 한 모녀가, 한 엄마와 딸이 가까스로 삼각형 틈새 속에서 목숨을 구출하고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삼풍사건을 경험했던 우리에게는 낯선 광경은 아닐 것입니다. 그때 스쟌나라는 어머니는 네살먹은 딸 가이아니이라는 딸과 함께 그 틈새 속에서 살아 있는 그들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시간이 흘러갑니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흘러갑니다. 네살먹은 딸 가아아니는 그 엄마 옆에 누워서 비명을 지르며 한 가지 음성을 계속 토해 놓습니다. 그것은 뭔가하면 '엄마, 목말라. 엄마, 목말라' 그러나 가까스로 몸을 눕힌 채 운신할 수 없었던 어머니에게는 딸을 도와 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이 스쟌나 엄마의 머리 속에 테레비에서 보았던 어떤 광경 하나가 생각 났데요. 조난당한 사람들이 먹을 것, 마실 것 없었을 때에 피를 나누어 마시던 광경이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엄마는 손을 더듬었습니다. 더듬다가 갑자기 깨어진 유리 하나가 손에 붙잡혔습니다. 지체없이 엄마는 그 유리 조각을 들어서 그 엄마의 팔둑을 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아아니 딸 더 옆으로 와 옆으로. 그리고 자기의 그 팔뚝에서 흐르는 피를 자기가 사랑하는 딸 가이아니의 입술에 떨구어 주었습니다. '엄마, 나 목말라요' 이 목소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엄마는 유리 조각으로 더 힘껏, 더 힘껏 그어서 피를 사랑하는 딸에게 목에 흘려 넣었습니다. 그렇게 두 주일이 지났습니다. 그들은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이 딸 가이아니는 엄마의 희생, 그리고 엄마의 피흘림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가이아니 딸에게 있어서 엄마의 피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유일한 대답이었습니다. 2천년 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달리는 살길이 없고, 달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었던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거룩한 피를 뿌렸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 그것이 저와 여러분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예수를 구주로 믿고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그리고 성탄절은 이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이유를 생각해야 할 계절입니다. 단순한 탄생만을 기뻐하지 마십시오. 이 탄생은 죽음의 사건을 통해서만 그가 왜 이 땅에 오셨는지가 이해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상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 단 한번도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라는 말이 없어요. 그렇다고 성탄 축하하는 것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라든지 축하하라는 말이 없어요. 그대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내가 너희를 위해 죽은 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피 흘린 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십자가 사건을 떠나서는 이해 될 수가 없는 사건이예요. 그는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의 말구유, 우리는 구유 저 건너편에서 십자가를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베들레헴 땅이 아니라 우리는 베들레헴 저 위에 있는 갈보리의 언덕을 바라 볼 때에 주께서 2천년 전 베들레헴의 아기로 오신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는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는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피 흘림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 그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양심을 죄에서 해방하고 용서함을 베풀고,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 부르면서 내가 부를수 있는 새 노래, 내가 걸어 갈 수 있는 새 인생을 준비하신 사건,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메시지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성탄의 계절, 단순한 낭만의 계절 이상의 의미가 필요합니다. 이 날 주께서 오신 것,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오신 사건. 엄마의 피로 살아난 가이아니는 평생을 두고 엄마의 피를 잊어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엄마, 엄마가 피 흘려서 내가 살았지.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피 그 피로 죄 사함 받고 다시 산 나. 이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내 일생을 드려 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내 삶의 중심, 내 삶의 전부, 내 삶의 이유가 되셔야 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따르겠습니다. 주님, 붙들고 살겠습니다. 주님, 나의 사랑, 나의 경배 받아 주시옵소서.
저는 어려서부터 이 12월을 좋아했습니다. 커 가면서는 이 12월이 여러 가지로 힘든 느낌을 갖는데 어릴 때는 12월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12월에 크리스마스가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제 생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4살인지 5살인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제 생일날이었습니다. 사실은 비밀이지만, 제 생일이 무척 가까이 왔습니다. 음력이라 해마다 왔다 갔다 합니다. 4살인지 5살인지 분명하지는 않은데 한번은 제 생일날 저희 아버님이 많은 손님들을 초청해서 저희 집안에 아주 시끌벅끌하게 마치 장터처럼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습니다.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아주 약주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막걸리 파티가 한 쪽에서 벌어지고 노래소리, 고함소리,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뒷방에서 혼자 있으면서 제가 조숙했는지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나요. 오늘 내 생일인데 왜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한 일이 있습니다. 혹시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에 예수님이 그런 생각을 하시지 않을까 이런 느낌을 갖습니다. 이 시즌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구별되는 그 독특성 가운데 하나는 다른 종교는 그 교주의 가르침만 가지고 성립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가르침보다도 예수님이 더 중요해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생입니다.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이 멸망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물을 수 있는 질문 가운데 이보다 더 심각하고 이보다 더 중요하고 이보다 더 본질적인 질문이 없는데 그 질문은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 생애의 목표를 향해서 걸어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끼셨을 때 어느 날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던지십니다. 헬몬산으로 가는 도상이었을 것입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의 타운에 도달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이켜 보시면서 이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두 번째 질문으로는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첫째 질문은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것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를 예수께서 물어 보신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 가지로 주님을 향한 답변을 올렸습니다. 첫째로는 사람들이 선생님을 침례 요한이라고 부릅디다. 아마도 이 대답의 배경속에는 요한이라는 사람이 그 당시에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습니다.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사람들은 광야까지 몰려왔습니다.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죄를 회개하며 요단강에 가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 위대한 영향력이 있었던 스승, 설교자 요한, 예수님을 그 요한의 재탕쯤 되는 분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 그는 위대한 지성, 그는 위대한 스승, 그는 위대한 정신으로 사람들에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해서 나쁜 사고는 아니지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정답은 결코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소개했습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능력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에 보면 엘리야가 한 번 기도하니까 하늘문이 열려요, 하늘은 비를 쏟기도 하고 비를 쏟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능력의 사람 엘리야를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한 번 기도하니까 소경이 눈의 열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타치하니까 귀머거리가 듣기 시작합니다. 아, 엘리야가 다시 살아났는가 엘리야의 재판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특별한 능력을 가진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수퍼스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요즈음 한국 TV에는 기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예수님은 특별한 기를 받아서 어떤 특별한 기적을 행하는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예수님을 외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뉴에이지에서 선포하는 예수가 그런 이미지를 갖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것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합디다. 이것은 두 가지 견해보다는 훨씬 더 정답에 가까운 것입니다. 선지자-하나님이 보내신 자, 그리고 하나님이 특별히 쓰시고 있는 사람, 이것은 확실히 정답에 근접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또한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소개하는 충분한 대답은 아직도 아닙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4장에 보시면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 대화를 하고 계십니다. 이 사마리아 여자는 처음에 예수님을 이해할 때 그 예수님이 나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당신은 가만히 보니까 유대인이고 나는 사마리아 사람인데 어째서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 유대인 남자,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나하고는 관계없는 당신, 이렇게 생각했던 여자가 예수님과 대화가 진행되다가 점차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생각이 바뀌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아, 예수님을 통해서 뭔가를 얻을 수가 있다. 내 목마름도 채워질 수가 있다. "선생님, 나에게 물을 주십시오." 이렇게 요구할 만큼 예수님이 무엇을 줄 수가 있는 분으로 생각이 발전해 갔습니다. 그러다가 얘기가 더 진행되던 대화속에서 예수님이 이 여인의 과거까지 들추어 내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충격적인 자기의 과거를 지적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놀라운 영적인 통찰력을 지닌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분명히 선지자이신군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고도 대화를 거기서 마무리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아직도 충분한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입술에서 고백되는 마지막 정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제자들의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견해를 들으신 다음에 이번에는 질문의 대상, 대답해야 될 대상을 바꾸어서 물으십니다. 자,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자, 교회 바깥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스승, 위대한 휴메니테리안, 존경할 만한 스승, 그리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과거속에 있었던 위대한 스승!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제자들의 사람들에 대한 예수에 대한 견해를 들으신 다음에 이번에는 질문의 대상, 대답해야할 대상을 바꾸어서 물으십니다. 자,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자 교회 바깥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스승, 위대한 휴메니테리안, 존경할 만한 스승, 그리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과거 속에 있었던 위대한 스승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것은 사람들의 견해고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여기서 강조된 말은 '너희는'이라는 이 단어가 강조가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제 2년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피부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어 왔습니다. 지나간 2년간 피부를 맞대고 나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지켜 보았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오병이어의 기적, 칠병이어의 기적 이 기적을 베풀 때 그 현장에 있었던 너희들, 갈릴리의 풍랑을 잠잠케 할 때 그 현장에서 그 능력을 지켜보았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지나간 여러 세월 교회당 안에서 찬송을 듣고 기도를 하면서 예수님의 단어에 익숙해 왔던 여러분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이해하고 계십니까 이것이 오늘 예수님의 질문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 앞에 본문에서 보는대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수제자인 베드로가 제일 먼저 나와서 단순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은 직설적인 대답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정답이었습니다. '주는 곧 그리스도시니이다.' 다 같이 '주는 곧 그리스도시니이다.' 사실 우리말 성경에 그렇게 번역된 단어 앞에 중요하게 강조된 정관사 하나가 빠져있기는 합니다. 주는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이 바로 그 그리스도, 우리가 기다려왔던 바로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독교의 모든 메시지가 사실은 이 고백 안에 들어 있어요.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뜻은 메시아라는 말하고 같은 뜻입니다. 그것은 본래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다. 이런 뜻입니다. 'the Anointed one'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 구약 성경에 보면 선지자가 될 때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말고 그 직위에 취임하기 위해서 기름부음을 받아야 할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제사장이고, 또 하나는 왕이었습니다. 제사장과 왕, 제사장이 되려면 반드시 양 뿔에 기름을 채워 놓고 기름부음을 머리에 받고 그 다음에 제사장의 자리에 취임합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제사장은 매우 중요한 역할은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된 제사장을 기다려 왔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기름을 부어주셔서 완전한 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어떤 분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것이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이예요. 제사장의 책임은 물론 제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제사입니다.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 앞에 그대로 접근 할 수가 없습니다. 죄를 해결해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속죄의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드리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 갈 수 있는 길을 예비하던 자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 당신이 그 그리스도 바로 그 제사장이십니다. 이 제사장이라는 말을 오늘 우리가 익숙한 다른 단어로 바꾸어 보면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구주이십니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분, 그래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할 수 있는 분, 바로 구주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이 그리스도라는 고백 속에는 또 하나의 다른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왕이십니다. 믿습니까 예수는 왕이십니다.
왕의 기능은 통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일뿐만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인간이 죄를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예비하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는 왕이십니다. 예수는 나를 다스리고 나를 통치하고 내 운명을 주장하고 날마다의 삶을 인도할 수가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는 왕이라는 말을 우리가 익숙한 다른 단어로 바꾼다면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이런 말입니다. 주님이십니다. 나의 주인, 내 삶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나의 주인, 예수님은 구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고백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발견한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사람, 우리는 이런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교회 나왔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예요. 집사의 타이틀을 갖고 있다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예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발견한 사람,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 중요한 고백. 예수님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 자, 이 고백을 받자 예수님은 비로소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던 놀라운 비밀 하나를 제자들에게 밝혀주십니다. 그 비밀의 내용이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31절 같이 읽겠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가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여기서 참 중요한 단어는 비로소라는 단어예요. 31절 하반부에 보시면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셨다. 비로서 뭘 가르치셨다고요 예수님이 얼마 안 있으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해야 할 것을 비로소 가르치셨다. 그 전에 제자들에게 이것을 공개한 적이 없습니다. 베드로에게서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받으시고 나서 이제 제자들이 이 위대한 진리를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다고 판단하신 주님은 이때에 비로소 기독교의 엄청난 진리의 극점,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제자들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제 내가 죽어야 한다. 그리고 사흘만에 살아야한다. 왜 이것을 이때 밝히셨을 까요 자,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말 속에는 두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다고 그랬어요.첫째는 예수는 구주이시고, 둘째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는 제사장이시고 예수는 왕이십니다. 첫 째로 예수님이 참된 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는 그는 반드시 죽으셔야 하십니다. 제사장의 중요한 책임은 제물을 준비하는 것이예요. 속죄의 제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제사장으로서 그가 준비한 속죄의 제물은 뭘까요 자신의 몸입니다. 그는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아야 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그가 대신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채찍을 맞게 위해서 주님이 자신의 몸을 십자가의 제물로 드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시고 거룩한 피를 뿌리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제사장이 되기 위하여 그 분은 십자가에 가서 죽으셔야만 했었습니다. 그는 구주가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제사장일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이제 우리의 삶을 통치하시고 다스리기 위해서 그는 살아나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어있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살아계십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살아계시지 못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드라마는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살아계십니다. 믿으십니까 살아계시기 때문에 내 기도를 들으세요. 내 인생 속에 간섭하세요. 나를 다스리세요. 나와 함께 하세요. 나를 인도하세요.
그분은 바로 우리의 왕이 되시고, 나의 주님이 되기 위해서 부활의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그리스도세요. 이 고백을 받자마자 예수님은 지금까지 감추어 두었던 아니 제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웠던 기독교의 진리의 극점, 이 위대한 진리를 계시하십니다. 나는 이제 죽어야 한다. 그리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그는 구주가 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고 그는 우리의 왕, 나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 그는 부활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 믿으십니까 예수는 그리스도십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 고백을 받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던지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선생님, 당신은 나의 그리스도. 주님은 당신은 나의 구주, 그리고 주님이 되십니다. 오늘 주님은 이 고백을 이 계절에 받기를 기뻐하십니다. 주님은 나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 하나가 있어요.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을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내가 예수님을 정말 그리스도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본문의 기사를 마태복음과 비교해 보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베드로가 고백을 했을 때 주님이 칭찬하신 대목이 마태복음에는 밝혀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시면 주님이 이 고백을 들으시고 너무 기뻐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것은 네 혈육이 아니야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인간적으로, 이성적으로 이 진리를 깨달아 안 것이 아니야. 하나님 아버지가 네게 알게 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발견하게 된 것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을 수가 있었던 것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도와주신 것이다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며 칭찬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러분,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성경 공부 안에서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이 똑같은 성경 공부 안에서 똑같은 교사에게 성경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새생명반에 들어가서 말씀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정한 과정이 끝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발견하고 믿고 삶이 바뀌는 사람이 있어요. 근데 성경 공부하고 바뀌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공부하는 자세가 진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깨달음을 얻지 못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 우리 주변의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가 성경 공부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가 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것은 여러 세월 동안 목회자인 저를 괴롭혀 왔던 질문입니다. 왜 어떤 사람은 교회 생활 십년, 이십년이 지나도 이 단순한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못할까 거기에는 플러스 알파가 있어요. 이성적인 추구가 빈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지 않고는 이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제 마지막 결론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 플러스 알파가 있어요. 기독교는 인간의 이성을 결코 없신 여기거나, 혹은 이성의 불필요성을 강조하는 반 이성적인 종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또한 이성에만 매달리고, 이성에게 모든 해석을 의탁하는 이성주의적 종교도 아닙니다. 때로 기독교는 이성을 넘어섭니다.
이성으로 깨달아 알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신 더하기 알파가 있어요. 이 부분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 부분에 하나님의 계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를 계시종교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이 깨우쳐 주셔야 깨달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진리 가운데 하나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진리예요. 저는 이 성탄의 계절에 아직도 신앙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교회 주변에서 맴도는 분이 있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깨달아 아는 성령님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이 깨달음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부탁을 드리고 싶어요.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계절 좀 조용한 시간을 내서 진지하게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제목을 드립니다. 그 기도제목은 이런 것이예요. 이 제목을 붙들고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 저에게 예수님을 깨달아 알게 도와주세요. 이것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기도보다도 그 기도하세요. 제일 중요한 기도예요. 이것은 자식을 위한 기도보다도 더 중요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깨닫지 못하면 여러분은 멸망인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도 멸망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예수님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예수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도와주세요.'
그런데 어떤 분이 그러더라구요. '목사님, 제가 그 기도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깨달아 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기도 제목을 한가지 더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 제가 죄인됨을 깨달아 알게 해주세요.' 자신의 죄인됨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동시에 함께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함께 기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신데 그는 어디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십니까 죄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잉태되었을 때 천사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즉 예수가 백성을 어디에서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랬어요. 죄에서 구원할 자, 죄로부터 구원할 자. 이 죄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구원을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깨닫지 못하고는 구원을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내 죄에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는 이 죄를 위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냈다는 이 사실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내 죄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한 것입니다. 나의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스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의 최선도, 나의 윤리적 결단도 죄 문제를 해결하기에 여전히 부족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시고 그가 나의 죄, 우리의 죄,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그 피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놀라운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깨달아 지지 않고, 구원이 깨달아 지지 않거든 주 앞에 엎드려 이렇게 이 계절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나의 죄인됨을 깨달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내 죄의 심각성 앞에 벌벌 떨리거든, 바로 이 죄 문제를 위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이것이 Good News고,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인 것이 여러분에게 밝혀질 줄로 믿습니다.
수년 전에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이 12월 달에 구 소련에 속해 있던 아르메니아에서 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무려 5만 5천명이 죽었어요. 굉장한 참사였어요. 그때 9층짜리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철근과 콘크리트 밑에 한 모녀가, 한 엄마와 딸이 가까스로 삼각형 틈새 속에서 목숨을 구출하고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삼풍사건을 경험했던 우리에게는 낯선 광경은 아닐 것입니다. 그때 스쟌나라는 어머니는 네살먹은 딸 가이아니이라는 딸과 함께 그 틈새 속에서 살아 있는 그들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시간이 흘러갑니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흘러갑니다. 네살먹은 딸 가아아니는 그 엄마 옆에 누워서 비명을 지르며 한 가지 음성을 계속 토해 놓습니다. 그것은 뭔가하면 '엄마, 목말라. 엄마, 목말라' 그러나 가까스로 몸을 눕힌 채 운신할 수 없었던 어머니에게는 딸을 도와 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이 스쟌나 엄마의 머리 속에 테레비에서 보았던 어떤 광경 하나가 생각 났데요. 조난당한 사람들이 먹을 것, 마실 것 없었을 때에 피를 나누어 마시던 광경이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엄마는 손을 더듬었습니다. 더듬다가 갑자기 깨어진 유리 하나가 손에 붙잡혔습니다. 지체없이 엄마는 그 유리 조각을 들어서 그 엄마의 팔둑을 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아아니 딸 더 옆으로 와 옆으로. 그리고 자기의 그 팔뚝에서 흐르는 피를 자기가 사랑하는 딸 가이아니의 입술에 떨구어 주었습니다. '엄마, 나 목말라요' 이 목소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엄마는 유리 조각으로 더 힘껏, 더 힘껏 그어서 피를 사랑하는 딸에게 목에 흘려 넣었습니다. 그렇게 두 주일이 지났습니다. 그들은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이 딸 가이아니는 엄마의 희생, 그리고 엄마의 피흘림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가이아니 딸에게 있어서 엄마의 피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유일한 대답이었습니다. 2천년 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달리는 살길이 없고, 달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었던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거룩한 피를 뿌렸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 그것이 저와 여러분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예수를 구주로 믿고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그리고 성탄절은 이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이유를 생각해야 할 계절입니다. 단순한 탄생만을 기뻐하지 마십시오. 이 탄생은 죽음의 사건을 통해서만 그가 왜 이 땅에 오셨는지가 이해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상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 단 한번도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라는 말이 없어요. 그렇다고 성탄 축하하는 것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라든지 축하하라는 말이 없어요. 그대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내가 너희를 위해 죽은 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피 흘린 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십자가 사건을 떠나서는 이해 될 수가 없는 사건이예요. 그는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의 말구유, 우리는 구유 저 건너편에서 십자가를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베들레헴 땅이 아니라 우리는 베들레헴 저 위에 있는 갈보리의 언덕을 바라 볼 때에 주께서 2천년 전 베들레헴의 아기로 오신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는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는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피 흘림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 그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양심을 죄에서 해방하고 용서함을 베풀고,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 부르면서 내가 부를수 있는 새 노래, 내가 걸어 갈 수 있는 새 인생을 준비하신 사건,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메시지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성탄의 계절, 단순한 낭만의 계절 이상의 의미가 필요합니다. 이 날 주께서 오신 것,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오신 사건. 엄마의 피로 살아난 가이아니는 평생을 두고 엄마의 피를 잊어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엄마, 엄마가 피 흘려서 내가 살았지.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피 그 피로 죄 사함 받고 다시 산 나. 이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내 일생을 드려 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내 삶의 중심, 내 삶의 전부, 내 삶의 이유가 되셔야 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따르겠습니다. 주님, 붙들고 살겠습니다. 주님, 나의 사랑, 나의 경배 받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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