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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보았다 (고전15:3-8)

본문

세상에서 제일 겁나는 사람이 있다면 '너 죽고 나 죽자'고 덤벼드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너도 죽고 나도 죽으면 그만이니까 해 볼 테면 해보자는 식입니다. 대단한 협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끝나는 줄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너무 고달프고 힘겨워서 자살을 생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헤어나올 길 없고 해결할 길 없다고 판단이 돼서, 마지막으로 자살을 선택합니다. 왜요 죽으면 이 모든 고통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이 삶의 질고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바둑을 두던 사람이 '졌다'고 돌을 던지면 골치 아픈 그 대국을 끝내고 다시 바둑을 두면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죽으면 그만이 아닙니다. 죽음으로 삶의 고통이 다 덮어지고, 괴롭고 복잡한 문제들이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입니다. 죽은 뒤에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엄청난 일들이 벌어집니다. 성경은 죽음의 세계가 시작된다고 가르쳐줍니다.
고전 15:55-58에 보면 사망 권세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멸망당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고전 15:55를 보면 우리가 죽은 뒤에 당하게 될 일을 크게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하나는 사망에게 지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사망 권세가 우리를 지배하는데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그 사망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말합니다. 지옥 형벌의 가장 무서운 점은 절망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이제 다시는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가 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참고 견뎌도 그 형벌이 끝이 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루마니아의 신부 게오르규가 쓴 25시라는 소설은 인간의 절망을 그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자신의 조국 루마니아의 현실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나치의 혹독한 지배와 박해가 견디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고, 아무리 둘러봐도 자기들 안에 나치를 이길 힘이 없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생겨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게오르규를 절망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그는 25시라 표현했습니다. 24시가 지나면 새 날이 와서 차수가 고쳐지고 새로 1시, 2시가 돼야 할 텐데, 24시가 지났는데도 25시라는 것입니다. 날짜가 바뀌지 않고 그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5시는 바로 절망을 뜻합니다. 지옥의 형벌은 바로 25시입니다. 그래도 이 땅에서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지만 그곳에서는 전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영원한 절망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망에게 쏘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56절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죄의 대가로 쏘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쏜다는 것은 헬라어로 켄트론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날카로운 쇠붙이가 박힌 가죽 채찍으로 잔인하게 때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채찍에 맞으면 날카로운 쇠붙이가 살에 박혀서 찢어져 상처가 나고, 채찍을 잡아채면 살점이 뜯어져 피가 흘러내리게 됩니다. 죽기 전에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영원히 그 켄트론으로 매를 맞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끔찍하고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래서 아무런 대책 없이 죽으면 안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멸망으로 빠지게 됩니다. 사망 권세 손아귀에 스스로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토록 무서운 사망의 권세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끝나게 됐습니다. 패배를 모르던 사망이 처음 패배를 맛보게 됐습니다. 휘두르던 그 무서운 켄트론도 이제 솜뭉치보다도 무기력해 졌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믿는 우리도 이런 부활의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전 15:20-22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예수의 부활을 믿는 우리도 이런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사망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고,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부활의 능력이 우리가 죽은 뒤 사망 권세와 싸워 이기게 해 줄 뿐 아니라 살아 생전에도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준다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 변화의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체험했습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너무도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 광야로 가서 3년을 지내게 됩니다. 그는 이 때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습니다. 그 받은 계시의 결론을 본문에 적어놓았습니다. 3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러니까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왜 부활하셨는지 부활의 의미를 주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철저한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부활 신앙이 바울을 새롭게 변화시킨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새사람이 됐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변화된 바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겸손해 졌습니다. 원래 바울은 세상적으로 모두가 부러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혈통적으로 볼 때 철저한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학벌로 볼 때 당시 최고 학자라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지위로 볼 때 모두가 가지고 싶어하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그야말로 당시 상류사회의 촉망받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베드로, 야고보, 다른 사도들, 심지어 먼저 믿는 오백여 성도들을 한껏 높이고 자기 철저히 낮추었습니다. 8절에 자기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도들이나 먼저 믿는 사람들은 다 제대로 태어난 사람들인데 비해 자기는 조산아요 미숙아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부족한 사람을 조산으로 태어난 여덟 달 반이니, 칠삭둥이니 놀리지 않습니까 이것은 실제로 그렇다기 보다는 겸손한 자기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자기하고 비교가 되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뒤에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무시하고 깔보던 사람들을 높여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여 집사님 남편은 그 옛날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신 뒤에 지금까지 실업자로 하는 일없이 한 평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그 집사님이 근근히 일해서 생계를 꾸려갑니다. 그 집사님의 말씀이 자기 남편은 교만해서 일생을 망쳤다고 한숨입니다. 어디 취직을 하려면 같이 일하는 사람이 일류대학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사람하고 수준이 맞지 않아 일 못한다고 뛰쳐나온답니다. 같은 서울대 출신들이 근무하는데 들어가면 학교 다닐 때 자기보다 실력도 없던 사람들이 너무 목에 힘준다고 못 견디고 뛰쳐나온답니다. TV를 보다가 자기 동기나 후배가 경제 부총리가 됐느니, 무슨 부서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됐다면 학교 다닐 때 자기보다 실력도 없던 놈들이 출세했다고 아니꼬워서 TV를 꺼버린답니다. 평생 그 학벌 자만에 사로잡혀 안타까운 인생을 망치고 있었습니다. 바울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부활의 능력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됐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 학벌, 재산, 외모, 가문이라는 눈으로 자기를 보지 않게 됐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됐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됐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남들을 보지 않게 됐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눈으로 남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됐습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그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을 떨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겸손은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의 산물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원래 바울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자들을 축복하시고, 그 율법을 범하는 자들은 저주하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자기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율법의 열심으로 볼 때 그 누구보다도 철저했다고 자부했습니다. 매사 철저했고, 최선의 노력을 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는 하나님 앞에 큰 자요, 장차 하나님께 크게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치고 다녔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내 공로 된 것이다." 오늘 자기가 이렇게 출세한 것은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기 때문이고, 오늘 자기가 이렇게 율법의 공로를 쌓은 것은 자기가 철저하게 율법에 헌신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뒤에 새로운 것을 깨달았습니다. 9절에 보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자로라"고 말씀했습니다. 자기는 앞장서서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고, 이미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여 곤욕을 치르게 했고, 심지어 스데반의 순교에도 연루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시거나 잘못한 것을 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사도로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자기가 사도가 되는데 자기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는 사도가 될 수 없는 일, 사도가 돼서는 않되는 일만 하고 다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사도가 됐습니다. 그래서 그는 10절 말씀처럼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부활의 능력은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를 바로 깨닫게 해 줍니다. 그리고 어떻게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어린 자녀들을 가르칠 때 가끔 창가로 데리고 가서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보게 한답니다. 하늘의 영롱한 별들, 달과 흘러가는 유성들을 보여줍니다. 넓고 광대한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 이 우주를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해 줍니다. 그리고는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거울 앞에 세운답니다. 거울 속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 속에 자기 자신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 묻는답니다. 같은 유리를 통해서 보는데 어느 것은 우주를 볼 수 있는데 어느 것은 자기밖에 볼 수 없는가 아이들은 거울에는 유리 뒤에 수은이 칠해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유리 뒤에 아집과 이기심으로 칠해진 거울로 세상을 봅니다. 그 안에 자기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입니다. 뭐하나 공을 세우면 자랑하고 그것에 도취되어있습니다. 자기의 이름을 내세우고 싶어하고, 자기의 업적을 나타내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유리 뒤에 칠해진 아집과 이기심의 껍질 벗겨낼 힘이 없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이를 벗겨내 줍니다. 이것이 벗겨져야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뒤에 이 껍질을 벗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셋째로 바울은 주를 위해 일할 수 있게 됐습니다. 원래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졌습니다. 행 9:20을 보면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뒤에 눈이 멀게 됐고, 다메섹에 들어가 아나니아의 도움을 받아 겨우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됐고, 세례를 받은 후에 음식을 먹으며 건강을 다시 찾게 됐습니다. 그러자 바로 예수를 전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갔습니다.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너무도 얼떨떨했습니다. 분명히 자기들을 돕기 위해, 다메섹의 기독교인들을 박멸하기 위해 온 바울이 오히려 예수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 9:23을 보면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이 밤에 광주리에 바울을 담아 성밖으로 탈출시켰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습니까 행 9:22에 바울이 힘을 더 얻었다고 했습니다. 자기 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더 얻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의 능력을 힘입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바울은 다른 사도들보다 늦게 사도가 됐지만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고 땀을 흘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받으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할 지라도 부활의 능력을 힘입으면 할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만나서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나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시름에 잠겨 계십니까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부활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이고, 여러분에게 부활의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변화된 뒤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보았다." 부활하신 예수를 나도 보았다. 오늘 우리도 함께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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