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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새끼 타신 왕 (슥9:9-10,눅19:28-40)

본문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 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든 군중들로부터 환호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3번에 걸쳐서 있었습니다. 첫 번째 입성은 안식일에 있었는데 그날 주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셔 서 곧장 성전으로 가시고 거기서 벌어지고 있던 모든 일을 보시고는 한 마디 말씀도 없이 그냥 성전을 떠나셨습니다. 이 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아마 장사하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첫 번째 입성은 그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의 삶의 중심이었던 성전을 왕으로서 입성하셔서 성전의 모든 것을 둘러 보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 입성은 안식일 다음날로 오늘의 주일인데 이 날 예수님은 예 루살렘이 잘 보이는 감람산의 한 장소에 가셔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 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환전상들 을 쫓아내시고 그들의 탁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예배를 위해서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거룩한 대제사장의 모습을 보여주 신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입성은 오늘날 월요일로써 이날에는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이 벌임으로 선지자로서 입장에서 입성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나귀는 동방에서는 왕이 타던 짐승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왕들 은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탔습니다.
예수님의 왕으로서의 입성을 성경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 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왕되심을 상징하는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귀타신 모습이 로마 귀족들이 볼 때는 비천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보였을지라도 이는 분명히 영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아 닐 수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 인들은 이 스가랴서의 예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귀타시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환호성을 듣고 심상치않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교권을 장악한 무리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던 것입니다. "(요12: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 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눅19: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 지 못하였더라.(마21: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마21: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셨다는 것이 겸손한 모습이 아니라 주님이 겸손 하시지만 왕으로서 나귀를 타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그런데 교권을 장악한 무리들(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 장로들)을 화나 게 했던 것은 군중들의 환호성이었습니다. "(눅19:37)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눅19: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눅19:39) 무 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군중들의 이 환호성대로라면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 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이는 로마 제국에 대한 반역에 가까운 것이 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권을 장악한 무리들이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 을 책망하소서라고 하면서 예수에게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은 이렇게 거절하셨습니다. "(눅19: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 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기치창검(旗幟槍劍)의 군대를 거느린 무력의 왕으로서가 아 니라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화평을 선포하는' 평강의 왕 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나귀새끼를 타신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통해 이 시대에 흐트러진 우리 기독교 사명의 참된 모습을 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사명의 목표는 성공(success)가 아니라 신실한 증인(gaithful witness)이 되는 것이요, 능력, 권력(power)가 아니라 선포(proclamation) 요, 기술(technique)이 아니라 진리(Truth)요, 방법(method)이 아니라 메 시지(message)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의 가장 강력한 행동은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핍박을 초래할지라도 진리를 사수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선 포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아테네의 주종 을 이루었던 우상제조업자들에 대해 보이콧운동을 벌일 수도 있었습니다 (행 17장). 그러나 그는 그보다 강력한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 거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정치적 경제적 압력단체를 조직하는 것은 복음의 궁극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장로교 목사인 피터 리이다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교회를 정치력 신장을 꾀하는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간 주한다. 그것은 분명 총체적인 왜곡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준다. 그것은 곧 세상이 가지고 있는 착각뿐만 아니라, 교회가 세상 에 보여 주고 있는 "얼굴"에 대해서도 중요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옛날의 비난은 이교도들이 교회에 관해 그 무엇을 알 고 있다면 그것은 곧 교회가 모여서 구세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으며 평안의 키스로 서로 인사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세상은 교회를 하나의 예배의식 공동체로 인식했지, 정치적 공동체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예배가 교회의 우선적 임무로 세상에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교회의 사명은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지 이익단체나 세상 권세에 대한 압력단체가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독교는 타 종교 와 종교단체를 형성하여 정부와 사회에 대하여 한 목소리를 내자는 압력 단체를 결성하고 있습니다.
중세 기독교가 결성한 십자가군은 약 200년 에 걸쳐 8번이나 형성되었지만 여지없이 실패하여 멸망당하고 교회의 위 신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군이 실패한 자 리에 지금 이방 종교 터키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을 간 과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교회가 받은 권력(능력)은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아니라 복음을 증 거하는 복음전파의 능력(권력)입니다. 복음 전파의 영적인 능력은 세상에 서 말하는 권세나 권력과는 무관한 권력, 능력을 말합니다. 마태 복음 28 장 18절에서 예수께서 "약속하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복음 전파를 위한 영적인 권세를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나 예수님께 던진 제자들의 질문은 "(행1:6)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였습니다. 제자들은 회복된 나라에서 얼마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그런 나라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왕국을 회복하여 권위와 지위 를 가지고 로마인들에게 권력이 무엇인지를 보여 줄 수 있는 때가 지금 입니까" 그러나 그런 나라에 관한 것은 알 바가 아니고 대신에 그는 능 력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 전파의 영적인 능력 이었습니다. "(행1: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행1:8)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 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나라가 없는 권세를, 지위가 없는 권력을 사랑하는 제자들에 게 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다른 사도들에게 주어진 권 위는 인간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어서, 아무런 학위도 없었으며 저명 한 직함도 없었고 인간적인 권세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우지 못한 보통 사람들이 외치는 "힘찬" 선언을 볼 수 있습니다. "(행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세상적인 권력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무학력", "무능력"의 제자들이 당시 교권을 장악한 종교지도자들과 공권력을 장악한 관리들과 대결하여 거듭 승리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승리는 바로 위로부터 내리는 영적인 능력이 역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위 "우리 종교"를 가진 신자가 정권을 잡았으니 이 판에 선교도 하 고 교세를 확장할 뿐만 아니라 우리 종교를 크게 떨치는 절호의 기회로 삼고자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록 있음직한 일이긴 해도 종교다운 발상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답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종교를 종교 가 되지 않게 해버리기 때문에 현실적인 효용의 측면에서 보아도 결코 득이 되는 일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정치인이 자기네 신자라고 희희락락한다거나 어떤 정치 인이 자기네 신자도 아닌데 자기네 종교를 찾아왔다고 해서 즐거워한다 거나, 고위층 인사나 국회의원 등 권력층이 자기네 교회에 많다고 긍지 를 가지거나, 자기네 종교 신자인 정치인이 다른 종교에 찾아가 축복을 받으러 왔다고 해서 토라진다거나 하는 것은 한결같이 종교가 참으로 비 굴할 정도로 정치 세력 앞에서 맥을 못 추는 추잡한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정.종유착(政.宗癒着)의 부패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부패한 정치 세력에 대해 크게 비판적이어야지, 그 힘의 그늘 에서 어떻게 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라면 그것은 이미 종 교가 아니라 종교라는 이름의 또 다른 정치 집단일뿐입니다. 인류의 종 교 역사는 종교가 그 시대의 아픔과 고난에 동참했을 때는 그 존재 의미 가 확연했지만, 세력과 돈 주머니를 잔뜩 거머 쥐고 이른바 그 영화로움 을 누리게 되면 이미 그 존재 의미가 탈색되고, 마침내 얼마 가지 못해 서 사실상 소멸될 수밖에 없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랑곳없 이 오늘의 종교들은 그 아픔과 고난의 주체가 되기를 바란다면서도 권력 과 금력의 그늘 아래서 오히려 영화로움을 누리려는 듯한 종교 타락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크리스챤이 권력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권력 의 검을 정부기관에 허락하셨기 때문에 크리스챤도 얼마든지 선한 양심 을 가지고 그 검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그 권 력(검)사용 동기와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바는 영적 무 장하라는 것이지 총칼로 무장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26: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 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 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 루어지리요 하시더라." 기독교인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법과 질서를 위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지켜 나아가는 데 권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주 어진 권력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알고 겸손하게 권력을 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 그 모델입니다. 모세는 200만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서 엄청난 권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성경은 그를 가리켜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온유함"은 다른 성경에서 "겸비함"으로 번역하여 모세가 섬기는 지도자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결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권리로서의 권력을 행 사해서는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어진 권력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하고 자 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은 지금까지 세상 권력에 편승해서 전파되어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복음은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세상에 전파되어지고 있습니다. 혹자는 나라 민족을 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정부를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언뜻 보면 이 방법이 한 국 가와 백성의 도덕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지름길같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순진무구하고도 위험천만한 승리지상주의의 발로(發露)입니다.
기독교인들을 고위 공직에 세우면 모든 사회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생각은 주제넘은 생각일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있으며 진실 되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예수 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일찌감치 로마 원로원을 점 령했을 것입니다. 권력이란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부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렇기 때문에 정치와 종교는 분명한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 종교적인 주 장은 선지자의 몫이지 정치지도자의 몫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첫 번째 자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떠들어 대는 소리는 종교와 정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無知蒙 昧) 것입니다. 다른 전문분야와 마찬가지로, 정치인들도 자신들의 품성뿐 만 아니라 각자의 자질과 능력을 근거로 선출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 스라엘의 신정정치에서조차 볼 수 있었던 사실입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 로는 모세를 권하여 "(출18:21)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 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이 스라엘 민족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도록 했습니다. 루터는 무능한 크리 스챤보다 유능한 터키 사람에게 통치받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권력의 매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의지가 강한 크리스 챤이라도 한번 권력의 맛을 보면 섬김의 도리에서 쉽게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랫 사람의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도 바로 권력에 대한 미혹 그 자체였습니다. 하와는 선악과 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고 하나님께 속한 권력(power)을 획득할 수 있다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에덴 동산의 죄는 권력 (power)의 죄"라고 말했습니다. 권력은 처음부터 사탄의 강력한 무기 중 의 하나가 되어 왔습니다. 예수께서 사탄으로부터 받은 시험도 바로 그 권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마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4: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밀턴은 그가 쓴 <실락원>에서 루시퍼에 대해 말하기를 "다스리는 일 은 지옥에서라도 해 볼 만한 것이다. 천국에서 섬기는 것보다는 지옥에 서 다스리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인류 구속의 사역을 하시면서 권력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철저하게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마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 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마20: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 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 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20:23) 가라사대 너희 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 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20: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마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 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마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 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 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눅22: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막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언행이 일치하셨습니다. 그는 몸소 섬기는 종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13: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 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요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 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요13: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요13: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요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 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 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 라 (요1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요13:17) 너희가 이 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계급의식이 강했던 당시 문화 속에서는 혁명 적인 메시지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회당의 특별석에 앉고, 주인들 은 노예를 지배하고, 남자는 여자 위에 군림함으로써 신분과 특권이 엄 격하게 분리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권력과 돈, 명성과 영향력이 다양한 형태로 우상화되고 있는 오늘날 동서양의 계급의식 문화 속에서 도 거의 혁명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계급 파괴', '신분 파괴', '권력 파괴'의 폭탄 선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 말했습니다.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힘없는 자들에 대해서 특별한 사랑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력한 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 루시고 연약한 자들, 힘없고 무지한 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가장 강력한 사역을 이루심으로써 세상의 권력과 지혜를 혼란케 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 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 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 라."
그러므로 권위와 권력의 원천은 겸손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진정한 리더쉽의 원천은 겸손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에덴 동산 에서 저질러졌던 교만죄, 권력의 죄는 모든 관계를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꿈꾸었던 권력은 결국 인간 관계와 더불어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도 파괴시키고 말았습니다.
권력은 우리의 대인관계 와 사회적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선악간에 이보다도 더 우리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권력은 파괴를 가져올 수도 있으며, 창조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파 괴하는 권력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삶을 위한 필요한 모든 것이 풍요롭고 완벽한 에덴 동산, 그야말로 낙원에 살았지만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 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여 금단의 열매를 먹어치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권력의 죄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땅한 것 이상의 존재가 되려 했 고, 그 이상을 갖고자 했으며, 알려고 했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 피조물 임을 알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았어야 했던 것입니다. 종교는 종교 이상의 것을 차지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복음 전파이외의 다른 사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능력, 성령님 이상의 것을 차지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 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이 권력의 죄는 먼저 하나님과 관계에 단절을 가져왔으며, 더 나아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소원(疏遠)함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나와 그것과의 관계' 즉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환 경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 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 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또 하나의 다른 예를 들어보면, 사울왕의 경우입니다. 사울왕은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쳐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낸 일로 백성들의 다윗에 대한 사랑과 존경, 인기가 상승하자 질투와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모든 권 력을 총동원하여 다윗을 살해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그 아들 요나단 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비참한 죽음을 맞는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 처럼 권력은 그것이 파괴적으로 작용할 때, 모든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지위 다툼과 반목으로 제자들의 조화를 저 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마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 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마20: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 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 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20:23) 가라사대 너희 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 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20: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드린 기도에서 무엇보다 제자들이 하나되기를 위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파괴하는 권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권능을 돈으로 사려 고 했던 시몬의 죄는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축재의 수단으로 사 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행8: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님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행8: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님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여기서 보면 종교적인 권력은 어떤 면에서 다른 어떤 권력보다도 더욱 파괴적일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권력은 타락하게 마련이고, 절대 권 력은 절대 타락하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에 있어서 특히나 그렇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자기가 율법인 양 마음대로 행세하면서도 경건의 옷을 입 은 자들은 특히 타락하기 쉬운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주신 엄청난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자만심으로 가득 찼으며, 심지어 자만을 넘어 거만으로 가득 찼 습니다. 삼손은 대적들 앞에서 자랑하기를, "(삿15:16).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라 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만과 자존심, 그리고 권력이라는 이 불경 스러운 것들이 어우러져 삼손의 멸망을 초래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허영의 시대에 빠져 대중매체에 열광적으로 미치고 있습니다. TV에 출연하는 것을 영예롭게 생각하고 TV를 비롯하여 대중매체 에 출연 여부가 그 사람의 지명도와 능력에 대한 평가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기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머거리지는 <그리스도와 대중매체>에서 만일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셨던 시험을 오늘날 당하게 되었다면 사탄 은 네 번째의 시험, 즉 국영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것을 제의했으리라고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재물(Mammon)이 또 하나의 권세로 그 위력을 떨 치고 있습니다. 폴 트르니에는 "GNP가 현대의 금송아지"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Sex), 종교적 율법주의, 기술문명, 자기도취, 군국주의, 절대 적 회의주의 등도 이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권세들입니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는 이들 권세들을 어떻게 멸망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골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 셨느니라."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일만 천군천사를 불러 세상 정사와 권세를 멸망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 분은 힘의 논리를 사용하기를 거절하 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이 세상 정사와 권세들을 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야만 그 권세들을 깨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엡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 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엡6: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엡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엡6:17) 구원의 투 구와 성령님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성령님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강력한 무기인 것입니다. "(고후10: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참으로 십자가는 모든 관계를 치료하는 창조적인 권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은 먼저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었으며, 다음으로 인간과 인간과의 파괴된 관계가 회복되었으며, 더 나아가 나와 그것, 즉 자연과의 관계도 회복된 것입니다.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 목제물로 세우셨으니."
그러므로 진정한 권력은 십자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세상을 점령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권력에 대해 맞불작전으로 세상 권력을 동원하지 말고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리석어 보여도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참된 권력은 십자가에 보여준 종의 형체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참된 권력은 십자가 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겸손에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권력에는 파괴하는 권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창조하는 권 력도 존재합니다. 창조하는 권력은 생명과 기쁨 그리고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창조하는 권력은 관계를 소생시켜 주며 참된 자유와 변화를 가 져옵니다. 창조하는 권력은 영적인 능력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 입니다. 예를 들면 요셉의 경우입니다. 노예로 팔려 가서 소망도 없이 감옥 생활을 했던 요셉은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므로 당대 최강의 나라에서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지닌 총리의 권좌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 권좌 에 있을 때 나라에 기근으로 인한 재난이 닥쳐왔습니다. 그 때 그는 영 적인 분별력을 발휘하여 나라에 몰아닥친 기근의 재난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겼던 바로 그 형들이 기근을 당해 식량 구호를 받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요셉이 지닌 권력은 커다란 시험대 위에 놓이게 되었고 그것은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것은 그의 권력을 가지고 화해의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창45: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방 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창45:3) 요셉 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 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창45:4) 요셉 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창45:5) 당신들 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창45: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 라 (창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창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 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45: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 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창45: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 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 서 (창45: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 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 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창45:12) 당신들은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창45:13) 당신들은 나 의 애굽에서의 영화와 당신들의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고하고 속 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창45:14)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 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창45: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 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하니라." 이 장면은 창조적인 권력이 깨졌던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또한 창조하는 권력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줍니다. 모세의 경우가 그 렇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그 권력으로부터 도망칠 것을 강요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광야에서 그는 새 로운 경험을 했는데 곧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애 굽에 돌아와 바로의 권세에 대항하여 호령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는 이미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손에 들려진 것은 양을 치는 지팡이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옛날의 교만은 간데 없고 그 자리에는 온유함과 겸손 그리고 확신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내 백성을 내어 보내라."는 힘찬 그의 명령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하의 바로 조차도 무릎을 꿇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창조하는 권력은 이처럼 참된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창조하는 권력은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회에 모였던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사도와 장로들)이 바로 그 예입니다(행 15 장).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느냐하는 문제를 놓고 초대교회가 분열되는 모습을 보였으나 초대교회 사도들과 장로들은 성령님의 하나되게 하시는 능력 가운데 그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하여 교회 의 일치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행15: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행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 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적인 권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파괴적인 권력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바로 이 창조적인 권력인 것 입니다. 이 창조적인 권력이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 전도의 능력(권능)인 것입니다.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된 모든 인간관계, 신음하는 자연과의 관계 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창조적이고 복음적이며 영적인 능력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성도의 무기가 있다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진 정한 능력(권력)은 십자가의 희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능력(권력)은 십자가의 겸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능력(권력)은 십자가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끝까지 지고 가야할 것 이 있다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 나라 민족을 위해 끝까지 지고 가야 할 것이 있다면 십자가입니다. 이 나라 통일을 위해 끝까지 지고 가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이 나라 민족을 구원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고전 1;23)가 믿지 않는 자에게는 미련하게 보여도 구원얻는 우리에 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나 사명자는 십자가를 구하여야 합니다. 사명자는 십자가만 을, 그리스도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만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충청도 어느 군수는 군청 직원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군민을 예수 믿게 만들었습니다. 군수라고 하는 권력을 이용하여 강제로 동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군수이면서 군청 직원들에게나 군민들에게 십자가의 겸손과 사랑, 희생 정신으로 섬기고 봉사하다보니 예수 믿으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도 복음으로 군 전체를 점령했던 것입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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